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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속으로] 백제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원
강종원 충남역사문화연 연구위원
유네스코는 인류문명과 자연유산 가운데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산에 대해서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여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문화유산 10건, 인류무형유산 15건, 세계기록유산 9건이 등록되어 있다.

현재 충남과 전북을 중심으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고대 삼국문화 가운데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바 있고, 백제만이 아직 등록되지 못하였다.

이에 2014년 등재를 목표로 현재 추진단이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학계와 시민단체, 그리고 지역민을 중심으로 각각의 분야에서 관심과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백제시대의 문화유산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백제문화의 우수성은 많은 문화재와 연구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백제는 주변국가(고구려, 신라, 가야, 중국, 일본)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백제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성립시켰다. 이는 백제가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거점으로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백제문화가 지닌 국제성(國際性)과 교류성(交流性)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문화유산의 진정한 가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문화유산 속에 감춰진 무형의 가치, 역사적 진실을 찾아내려는 노력, 그리고 그 문화유산 속에서 살고 있는 지역민들이 얼마나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보존과 계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문화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계승되고 끊임없이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비록 백제가 역사상에서 사라진 고대왕조로 그 문화가 왕조의 멸망과 함께 단절되었지만 1300년 전의 문화는 오늘날 공주·부여·익산의 백제문화유산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아울러 백제문화제를 비롯한 각종 축제와 문화콘텐츠를 통해 새롭게 재창조되고 있다.

한편,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백제문화유산이 보존되고 가치가 상승하고, 등재되지 못하면 유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전통문화의 가치는 객관적 검증을 통해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그 문화를 생성시킨 국가, 또는 지역민의 사상과 행위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제문화가 소중하고 인류사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를 세계인들과 공유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세계유산에 등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문화적 가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점을 유념하면서 2013년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백제문화유산이 우리들만의 유산이 아닌 세계인이 공유하는 유산이 될 수 있도록 열망을 모아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빌어 본다.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조선족무형문화재, 부(富) 창조하는 문화콘텐츠"한국외대 문화콘텐츠 콜로키움… 장경률 전 연변일보 신문연구소장

고영민 기자  |  goyo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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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1.15  14: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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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퇴임한 장경률(사진) 전 연변일보 신문연구소장은 "우리민족 고유의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것은 정말 축하할 일이다"며, "다만, 문화란 '국경'을 넘어 인류 모두가 향유해야 할 자산이란 것을 인식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장경률 전 소장은 한국외대 글로벌문화콘텐츠연구센터(센터장 임영상)가 지난 14일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개최한 문화콘텐츠 콜로키움에서 '무형문화재, 중국 조선족의 가장 큰 정신적 재부'란 주제의 강연을 진행하며 "날이 갈수록 조선족무형문화재의 경제적·물질적 가치가 부각되면서, 조선족들에게 큰 부를 창조하는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족무형문화재 형성은 우리 민족이 두만강, 혹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이라는 대륙에 발을 들여놓고 정착한 그 날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1860년대 조선에 대기근이 들면서 두만강을 넘어 몰래 농사짓고 수확하는 이른바 '일귀경작'(日歸耕作, 밤에 강을 건너와 씨앗을 심은 후 새벽에 돌아감), '춘경추귀'(春耕秋歸, 봄에 건너와 산속에 숨어 일년간 농사를 지은 후 가을에 수확)가 나타나면서 본격화 됐다.

이후 청나라의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우리 민족이 연변지역을 포함해 중국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났는데, 그 유형으로는 △가난을 이기지 못해 가족 혹은 가문 전체가 이동 △독립투사들이 가족을 이끌고 정착 △일제에 의한 강박이주 등이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한민족 특유의 문화도 가지고 건너왔으며, 그 형태도 지방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그 실례로 경상도마을(안도현 장흥향 새마을)의 '농악'이 있으며, 배초구 '상모춤', 팔도구 '농악무', 명월구 '학춤' 및 '접시춤' 등이 있다.

중국조선족무형문화재는 이미 성급무형문화재로 76개, 전승인 30명, 국가급무형문화재로 16개가 등재돼 있다. 특히 연변의 '농악무'가 세계비물질문화유산의 영예를 안았고, '아리랑'이 중국의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 제5회 중국 무형문화재의 날을 맞아 연변지역 축제에서 경상도마을의 농악무가 펼쳐지고 있다.

그는 '조선족무형문화재가 한국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반문할 수 있고, 동북공정과도 연계해 의구심을 표할 수 있다'는 질문에 "중국조선족무형문화재의 모태는 조선반도 역시 한반도이고, 여기서 유래된 것만은 사실이다"며 "하지만 150여년 전 중국땅을 밟고 그 땅에 정착하면서 나름대로 특색있는 문화를 창출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요컨대, 조선족들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는 흑룡강성, 요녕성 등의 지역은 특유의 지리적, 기후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가지고 온 문화에 구애받지 않고 나름대로 계승 및 발전시켜 왔다는 설명이다. 단일형태의 문화만을 고집하는 순결주의 보다는 '문화공존'이라는 보다 열린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인 듯하다.

   
▲ 우수한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자 하는 연변조선족들의 숙원으로 개관된 '중국 조선족민속원'은 조선족들의 풍속과 음식문화, 거주문화의 정수를 한자리에 모았다.

특히, '아리랑'이 중국에서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과 관련해 "이제부터는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소실되지 않고 보존·발전시킬수 있도록 명분이 마련된 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다"며 "한국인들도 동족인 조선족이 민족의 전통문화예술을 지켜가고 있는데 대해 거부할 이유는 없으며, 지금 우리 세대가 보존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을 맞이해 지난 9월 '중국조선족민속원'이 개관됐다"며, "조선족 문화유산 중 값진 것들을 더 많이 발굴하고 선발해 전시하고 영구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이라고 덧붙였다.

< 저작권자 © 재외동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문화 콘텐츠 개발 및 활용’ 교육 개최

뉴스와이어 | 입력 2011.04.25 09:18

(대전=뉴스와이어)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학교(총장 김봉건)는 오는 4월 27일부터 4월 29일까지 전문교육과정의 일환으로 '문화유산으로 보는 전통문화 콘텐츠'라는 주제로 국가·지자체 공무원 및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전통문화 콘텐츠 개발 및 활용'교육과정을 개최한다.

이 교육과정은 문화유산 활용 사례를 통해 전통문화 콘텐츠 개발의 개념을 이해하고 우리 문화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 배양하는데 목적이 있다. '전통문화 콘텐츠의 흐름', '근대문화재의 등록과 활용', '디지털과 문화유산' 등 관련분야 전문가의 강의를 비롯해, 근대문화유산과 역사인물 탐방을 결합한 현장학습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전통문화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 내고, 문화유산을 보다 친숙하고 흥미로운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문화연수원은 문화재 담당공무원 및 관련분야 종사자 등 전문인력, 일반인, 외국인 등을 대상으로 전문성 강화 및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와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전통문화 연수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연수과정에 대한 구체적 일정은 전통문화연수원 홈페이지(http://tctc.nuch.ac.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보도자료 통신사 뉴스와이어(www.newswire.co.kr) 배포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한국국학진흥원 6년간의 긴 인고 끝에
유교문화권 역사체험 콘텐츠 구축완료



한국국학진흥원이 경상북도 북부 11개 시 군의 유교 유적을 사이버 세계에서 다양한 정보와 가상에서의 일차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유교문화권 역사체험의 콘텐츠 구축을 완료하고 19일(금) 오후 1시 30분 한국국학진흥원 대강당에서 최종 완료 보고회를 개최했다.

 

 

2005년부터 행정안전부 산하 한국정보화진흥원(원장 김성태)의 지원을 받아 6년간의 긴 인고 끝에 탄생한 유교문화 콘텐츠는 경상북도 북부 11개 시 군의 유교유적 가운데 중요한 유적 800여 곳과 유적과 관련된 인물 379명을 DB로 구축해 상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 인사

▲ 김성태 한국정보화진흥원장 축사

 

이번 유교문화 콘텐츠의 DB구축은 어렵고 고리타분한 유교 유적들에 대해 과감하게 시선을 전환시켜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반의 콘텐츠로 제작, 제공함으로써, 일반인들이 쉽게 재미있게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구현했다. 

 

 

복잡한 현실로부터 유교 문화의 정신가치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이제 먼저 사이버 세계에서 구현된 ‘유교문화권’의 문을 두드려 그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와 가상에서의 일차 체험을 통해 더욱 의미 있는 체험여행이 될 수 있도록 유교문화권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맡기는 것이 어떨까.

권기일 기자(ij5833@naver.com)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걸그룹의 신한류열풍, 이유가 있었네
한국 풍류의 원형, 보길도를 찾아가다
10.11.16 14:20 ㅣ최종 업데이트 10.11.16 14:20 박태상 (tspark21)

요즈음 걸그룹에 의한 '신 한류열풍'이 심상치 않다. 소녀시대가 연속해서 일본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다는 뉴스도 현해탄을 건너 전해진다. 8년 전 <겨울연가>가 후려친 회오리 바람 못지않은
강풍이다. 특히 8년 전의 강풍이 일본 중년 여성층의 감수성을 자극했다면, 소녀시대와 카라는
10대와 20대의 미적 감각을 흔들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이러한 예술적 후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한 마디로 조상 대대로 내려온
풍류정신과 예술적 감수성이 토대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흔히 유럽 사람들이 한국인을
'극동의 라틴민족'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부터 400년 전 고산 윤선도는 우연히 닿게 된 '보길도'
에서 나름대로 풍류를 즐겼다. 고산의 풍류정신을 찾아 떠나보기로 한다.
 
  
▲ 해남 땅끝 마을의 무인도 - 우리나라에는 3200여 개의 섬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대다수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다.
ⓒ 박태상
보길도문화탐방

 

보길도의 '윤선도 명승지'는 행정 구역 상 전남 완도군 보길면에 속한다. 보길도는 주변에 병풍

모양으로 노화도, 소안도, 당사도, 예작도, 횡간도 등으로 빙 둘러싸여 있다. 보길도 가는 길은 해남군

땅끝 마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30분 정도 달려가 노화도 산양진항에 도착하게 된다. 산양진항에서

차를 타고 보길대교를 건너면 바로 보길도로 접어들게 된다.

 

보길도의 윤선도 문화유적과 천연기념물은 도처에 흩어져 있다. 가장 중요한 윤선도 명승지인

세연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남쪽으로 격자봉 아래에 곡수당과 낙석재가 자리 잡고 있고 왼편으로

동천석실, 오른 편으로 예송리 상록수림과 갯돌해변이 놓여 있다. 보길도의 오른 쪽 끝 백도리

바닷가에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글씐 바위'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세연정 - ‘洗然’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이름이다. 고산은 세연정에서 악공의 연주를, 동대와 서대에서 무희들의 춤을 즐겼고 자신은 다른 바위 위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 박태상
보길도문화탐방

11월의 주말을 활용하여 전남지역 문화탐방단 40여 명과 함께 남도의 섬들을 찾아 나섰다. 작년부터

 외부 강연에서 집중하고 있는 '느림의 미학 - 슬로 시티를 찾아서'를 탐방하여 공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 중 첫날은 보길도를 찾았다. 물론 보길도는 슬로시티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슬로워킹하기에 가장 좋은 곳임에 틀림이 없고 지역의 특산물도 풍부한 곳이다.

 

보길도는 행정안전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08 휴양하기 좋은 섬 베스트 30>에 포함됨으로써

엄청난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있다. 먼저 고산이 '부용동'이라고 명했던 세연정부터 찾았다. 

고산은 자신의 생애에서 총 7차례 13년간 보길도에서 머무르며 '어부사시사'와 32편의 한시를

창작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등 풍류를 즐겼다.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는 50세 때인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급하게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등 왕자와 빈궁 및 궁중의 비빈 나인들을 강화도로 피신시킨 후 임금도 그 뒤를 따

르려 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영․호남 방면의 수군을 모아 수백의 의병을 모집하고는 배를 타고

서해를 거쳐 강화도로 향했다. 

 

1월 29일 강화도 근처에 이르렀으나 이미 그곳이 청나라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할 수 없이

통곡하며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또 왕이 남한산성의 적의 포위망을 뚫고 영남에 몽진(蒙塵)

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만약 왕께서 불행이 있으면 서산(西山)의 미(薇), 상산(商山)의 지(芝),

관영(管寧)의 탑(榻), 기자(箕子)의 금(琴)의 종적을 따르고자 하는 비장한 각오를 갖고 2월에 겨우

해남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637년(인조 15년)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오지 않을 마음을 굳게 먹고 아예 탐라(제주도)에서 살 생각으로 남쪽으로

향하다가 보길도의 절승에 감복하여 "천석(泉石)이 절승하니 참으로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요,

선경(仙境)"이라 말하고 이곳에 머물기로 작정한다.

 

현재 보길도에는 황원포(潢原浦)라 하여 고산이 제주도로 향하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나 처음으로

보길도에 배를 정박했던 곳으로 어떤 바람이 불어도 맞지 않는 팔풍지석(八風之席)의 공간이 남아 있다.

 

  
▲ 동대를 중심으로 바라본 고산 윤선도 원림 - 삼전도의 굴욕소식을 들은 고산은 탐라(제주도)에서 살 생각으로 남쪽으로 향하다가 보길도의 절승에 감복하여 “ 천석(泉石)이 절승하니 참으로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요, 선경(仙境)이라 ”고 말하고 이곳에 머물기로 작정한다.
ⓒ 박태상
보길도문화탐방

고산은 자신의 산중 은거생활의 이유를 몇 가지 자료에서 달리 말하고 있다. 고산이 처음 보길도에

들어갔을 때 황익(黃瀷)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산은 자신의 보길도 도피 이유를 자기를 배척하는

세인의 악랄한 훼방에 견디지 못하여 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앞서 영상인 강석기로부터 배척을

받아 성산현감으로 좌천된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든 고산은 추잡한 당쟁에서

벗어나 허위가 없는 자연을 벗삼아 일생을 은둔할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명명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짓고 낙서재라고 편액을 걸어

주자학을 연구하는 등 자연에 심취하여 여생을 보낼 것을 결심한다. 독서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은둔하려는 고산의 철학이 배어 있는 곳으로 현재는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을 뿐이고

소은병(小隱屛)이라는 바위만 남아 있다. 이 일대에 고산은 낭음계(朗吟溪), 오운대(五雲臺),

독등대(獨登臺), 상춘대(償春臺), 언선대(偃仙臺) 등 바위에 이름을 붙여 자연과 대화하는 공간을

마련하여 은둔의 삶을 만끽하게 된다.

 

고산이 은둔 도피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여러 자료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홍우원(洪宇遠)이 찬한 익장(謚狀)에서 고산은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천석고황(泉石膏肓)의

병이 깊음을 밝히고 있다.

 

고산은 "병자호란 이후 세속에 뜻이 없어 사람들과의 만남도 단절하고 산과 바다를 찾아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살기로 작정하였다. 물을 끌어 나무를 심고 산수의 즐거움에 우거하면서

거문고를 뜯으면서 가무를 즐기고 희귀한 음률 악조의 완만함과 끊어짐을 익히려고 한다. 때때로

완상하면서 음조를 듣고 그것에 의탁하여 감회에 젖어 심중의 울적함을 떨쳐버리려고 한다"고

자신의 심정을 밝히고 있다.

 

  
▲ ‘옥소대’에 오른 전남 문화탐방단 40 여명 - 고산은 세연정 주변에 사투암을 비롯한 칠암을 두고, 자연의 풍광을 즐겼는데, 그 중에서 사투암에서 산 정상에 있는 ‘옥소대’ 쪽 과녁을 향해 활을 쏘았다고 전한다.
ⓒ 박태상
보길도문화탐방

사실 고산 윤선도는 지금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에 해당되는 연화방(蓮花坊)이란 곳에서 부친

윤유심의 선언(善言), 선도(善道), 선계(善繼)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26세에 진사시험에

장원으로 합격을 하였지만, 그 다음해 12월 모친에 이어 자신의 생부마저 잃어 불행이 겹치게 된다. 

 

상복을 벗은 해인 30세 때 그는 당대의 권신인 이이첨, 유희분 등의 권력남용을 비판하는

병진상소(丙辰上疏)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를 갔다. 이후 남인에 속하였던 고산은 끊임없이

당대 집권세력인 서인과 정치 투쟁을 펼치면서 역경과 고난의 삶을 살게 된다. 

 

인조반정 이후 8년 동안의 긴 유배생활에서 풀려났다. 고산은 42세 때인 1628년(인조 6년)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였는데 그 때 시관인 장유(張維)가 그의 답안지를 보고 '동국의 제일책(第一策)'

이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고산은 이조판서 장유의 추천으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師傅)가 된다.

 

43세부터 고산의 관직운은 트여 공조좌랑, 형조정랑, 호조정랑, 46세엔 사복시검정, 한성부서윤 등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가르쳤던 효종이 등극한 후 간곡한 부탁으로 벼슬길에 나섰으나 두터운

 서인세력의 장벽에 갇혀 자신의 정치철학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죽기 직전인 80대 중반까지

노구를 이끌고 낙향과 출사를 반복하게 된다.

 

해남의 땅끝 선착장에서 <해광2호>를 타고 30분 정도 여행한 후 노화도의 선양선착장에 도착했다.

다시 싣고 온 버스로 갈아타고 노화도 이목리에서 보길대교를 건너 부황리에 있는 세연정으로 향했다.

보길대교가 있는 청별리에서 세연정까지는 약 1.5km 거리로 1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땅끝 선착장에서는 '땅끝'이라는 표석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파시처럼 바다에서 잡아온 고기들을

 파는 할머니가 생선을 사라고 손짓을 했다. 배에 오르자 맨 먼저 왼편의 무인도 섬이 관광객들을

즐겁게 맞아주었다. 배가 떠나기 전에 그 섬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촬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해의 바다 빛은 동해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동해가 푸르른 바다로 구성된 파스텔톤이라면, 남해의

 바다 빛은 초록색이 감도는 에머랄드 빛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간혹 제주도 바다처럼 검은 용암이

바닥에 깔려있어서 검붉은 빛을 지니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에머랄드 빛을 유지하고 있어 보다

 평화롭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일행 모두는 남도 바다에 놓여있는 작은 섬들을 방문한다는 기쁨에

 다들 들떠있었다.

 

  
▲ <해광2호> 갑판 위에서 성우 양지운님과 함께 - 성우 양지운은 배한성 ? 박일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성우로서 지난 9월 KBS 홀에서 열린 제37회 한국방송대상에서 성우생활 42년을 성공적으로 보낸 공로로 <성우상>을 수상했다.
ⓒ 박태상
보길도문화탐방

 

갑자기 선창이 소란스러워졌다. 전남문화탐방단 중 한 명인 제자가 다가와서 선창 반대편에 유명한

성우 양지운씨가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왔다고 전해주며, 가서 인사나 하라고 권유한다. 모두들

우루루 양지운씨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몰려갔다. 역시 연예인이나 공인은 자유롭게 여행하기가

어려운가 보다. 성우 양지운씨는 주말 영화 속의 로맨틱 가이의 목소리답게 포근하고 자상하게

일행을 맞아주었고, 즐거운 담소를 나눈 후 사진촬영에도 응해주었다.

 

세연정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에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적어 걸었다고 하나, 지금은 중앙에 세연정이란 현판만 걸려있다.

 

세연정 주변의 잘 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 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 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 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일행 40명과

함께 산중턱에 위치한 옥소대에 오르니 세연정 주변이 탁트인 광활한 공간에서 중심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 곡수당(曲水堂) - 고산의 휴식공간으로써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초당, 석정, 석가산, 평대, 연지, 화계 등이 좌우로 조성되어 있다.
ⓒ 박태상
보길도문화탐방

윤선도 원림을 떠나 고산이 1670년 사망할 때까지 5년간 기거하며 책을 읽었다는 격자봉 아래에

위치한 낙서재와 곡수당을 찾았다. 곡수당은 고산의 휴식공간으로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초당, 석정,

석가산, 평대, 연지, 화계, 월하단 등이 좌우로 조성되어 있다. 그 옆 서재에는 고산의 아들과 제자들이

기거하였다.

 

'학문을 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낙서재는 고산이 1670년 죽기 직전까지

5년간 살았던 집으로 경내에는 낙석재 이외에도 조상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는

 무민당, 동서쪽에 위치하여 잠깐 휴식을 취하기 위한 조그마한 움집인 동와, 서와가 있었으며,

소은병이라는 바위가 뒷 정원에 있어 그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고 한다.

 

15년 전에 낙서재를 찾았을 때는 동사무소 직원으로부터 360억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윤선도유적지에

대한 대형 공사가 진행중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사이 원형에 가깝게 윤선도 유적지가 조성되어

앞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들이닥칠 것으로 생각되었다.

 

  
▲ 동천석실 - 부용동에서 제일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세운 한칸짜리 정자로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박태상
보길도문화탐방

일행을 가장 긴장시킨 곳은 바로 동천석실이다. 낙석재에서 바라다보면 산중턱에 있어 매우 높은

곳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막상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성인걸음으로 불과 10분 정도면 동천석실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실제 고산 윤선도 원림을 찾아온 관광객 중에서 동천석실을 등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강진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와 비교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산 유배지는 오르는데 30분 이상이 소요된다. 하지만 동천석실은 불과 10분 거리에 있어 오르지

않으면 손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동천석실에서는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 유적지 모든 곳이

 한 눈에 들어온다. 태산에 올라서 맹자가 호연지기를 느꼈듯이, 고산은 동천석실에 올라 정치적

권력투쟁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으로 판단된다.

 

  
▲ 우암 송시열 ‘암각시문’ - 우암은 장희빈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83세의 고령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나 풍랑 때문에 잠시 보길도로 피하게 되어, 이곳 백도리 해안에 있는 바위 위에 자신의 참담한 심정과 임금에 대한 원망을 담은 한시를 바위에 새겼다.
ⓒ 박태상
보길도문화탐방

고산 유적지 동천석실을 내려와 통리와 중리를 지나 백도리로 향했다. 사실 통리해수욕장과

중리해수욕장은 한여름에는 관광객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해변이다. 또 중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도치미전망대'도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멋진 곳이다.

 

백도리 해안에는 조선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우암 송시열이 쓴 암각시문이 있어 눈길을 끈다.

우암은 장희빈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83세의 고령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나 풍랑 때문에 잠시 보길도로 피하게

되었다. 우암은 이곳 백도리 해안에 있는 바위 위에 자신의 참담한 심정과 임금에 대한 원망을 담은

한시를 바위에 새겼다.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

  대궐에 계신 님 속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수밖에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우암은 국문을 받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당시 장희빈이 원자를 생산하자 그녀를 엄호하던 남인세력들이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물론 장희빈

중심의 남인세력들이 권력을 휘두르던 권력남용도 불과 6년에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오빠 장희재가

사형을 받고 곧 이어 장희빈도 자결명령을 받음으로써 남인집권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 예송리 갯돌해수욕장 - 보길면 예송리 해변에는 갯돌바위로 유명한 갯돌해수욕장이 있는데, 이곳은 ‘백령도의 몽돌해수욕장’, ‘거제도의 학동 몽돌해수욕장’과 더불어 ‘한국의 3대 몽돌해수욕장’에 속한다.
ⓒ 박태상
보길도문화탐방

  
▲ 백도리에서의 낙조 - 보길도의 백도리와 예송리 바닷가에서 맞은 낙조는 동해의 정동진 등에서 맞이한 일몰과 달리 센치한 우아미의 아름다움을 찡하게 안겨주었다.
ⓒ 박태상
보길도문화탐방

 

어느덧 늦가을의 해는 바다에 걸려 붉은 해무리만 남기게 되었다. 일행을 재촉하여 마지막 일정인

예송리 상록수림과 갯돌 해변을 방문했다. 역시 예송리 갯돌해수욕장의 일몰의 아름다움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낙조가 주는 아련한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보길도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보길도 예송리에는 천연기념물 제 40호인  상록수림으로 둘러싸인 예송리 해수욕장과 천연기념물

 338호인 감탕나무가 있다. 특히 예송리 해변은 갯돌바위로 유명한 갯돌해수욕장이 있는데, 이곳은

백령도의 몽돌해수욕장, 거제도의 학동 몽돌 해수욕장과 더불어 '한국의 3대 몽돌해수욕장'에 속한다.

다음 날 가게 될 김환기의 고향인 신안군 안좌도로 향하는 들뜬 마음을 안고 해남 땅끝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 슬로시티운동의 일환으로 남도의 섬을 탐방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에는 3200여 개의

섬이 있지만, 세계적인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가지고 있고 특산물도 많지만 특화되지 않고

홍보부족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아 안타깝다. 남도 섬의 아름다움과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싶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국립중앙박물관,삼성전자와 문화유산콘텐츠 활용협약

2010-10-04 10:35

헤럴드경제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살아있는 고려한지 숨결' 대승한지마을 개관
    기사등록 일시 [2010-09-15 14:26:19]

【완주=뉴시스】권철암 기자 = 고려한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한지마을이 문을 열었다.

전북 완주군은 15일 박종문 전북도 정무부지사, 임정엽 군수, 박종관 군의회 의장 등 기관단체장과 학계, 사업 관계자, 지역 주민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소양 대승한지마을 개관식을 가졌다.

2007년 행정안전부의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공모사업에 전통한지를 테마로 응모,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대승한지마을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한지마을을 재현했다.

이 마을은 국비 23억 원, 도비 2억 원, 군비 10억 원 등 총 35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됐으며, 한지 특화마을 육성을 목표로 조성이 추진돼왔다.

마을에는 한지를 전시하고 홍보하는 승지관(379.14㎡), 한지 제작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제조·체험관(261.36㎡), 닥나무 야외 가공작업장(79.82㎡), 1940년대 한지조합으로 쓰였던 고건축(60.48㎡, 소양면에서 이전), 당시 한지 종사자들이 기거했던 줄방(54.0㎡) 등이 설치돼 있다.

특히 고건축 및 줄방 등은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이 세미나 및 숙박을 할 수 있게 실용적으로 조성됐다.

또 향후 3년간 30억 원의 투자로 한지 생산기술 개발, 공예공방 신축, 마테팅 구축 등도 추진된다.

이 마을에서는 다음주부터 본격적인 전통한지 생산이 진행되며, 전국 유치원생 및 초·중등 학생의 정규 현장학습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체험 프로그램 개발도 실시된다.

임 군수는 축사에서 "전통 문화자원인 한지의 복원을 통해 전통한지 제조기술과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면서 "앞으로 한지를 활용한 전통문화 콘텐츠의 현대화를 통해 한지의 세계화에 앞장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cheol@newsis.com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조선불교통사 첫 한글 완역
법산스님 등 10명 작업

한국 불교 최고의 명저로 꼽히는 ‘조선불교통사’가 92년 만에 한글로 완역됐다.

‘조선불교통사’는 순도(順道)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이후 1916년까지 1544년에 이르는 한국불교사를 총집결한 역사의 보고이자 불교의 진수를 담고 있는 교리서이며, 한국 전통사찰의 내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학술사의 역작이다. ‘조선불교통사’는 한문으로 쓰여 있어 한글 세대가 충분히 활용하기에 어려움이 많아 그동안 부분적으로만 번역되거나 발췌 인용되는 데 그쳤다.

최근 펴낸 ‘역주 조선불교통사’(동국대 출판부)는 상편 2권, 중편 1권, 하편 3권과 원문교감본 개정판 1권, 색인집 1권 등 모두 8권으로 이뤄졌다. 동국대 선학과 교수인 법산 스님을 연구책임자로 한 역주편찬위원회는 김진무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교수, 조계종 문화부장 효탄 스님 등 10명의 연구자들로 구성해 난해한 금석문과 방대한 불교문헌자료를 번역하고 주석, 해제 연구를 기울여 8년만에 결실을 이뤘다.

법산 스님은 “‘조선불교통사’는 한국불교 최초의 종합역사서이자 불교 백과전서라고 볼 수 있으며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까지의 불교역사를 통사적으로 아우르는 유일한 책”이라면서 ”이제야 완역된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불교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도 소중하게 활용될 원자료가 될 것”이라고 완역의 의의를 설명했다.

특히 완역본은 원문의 전거가 확실한 경우 사서와 문집·사적기·행장·발문·금석문 등 출전과 대조했고, 원저자 이능화가 책을 낼 당시 인쇄 제작과정에서 발생한 오탈자를 1000곳 이상 바로잡아 원문개정판 교감본을 만들었다. 이것 역시 학술적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 하편에 있는 ‘이백품제’는 문화콘텐츠의 보물창고로 활용될 수 있을 전망이다. 불교의 사상, 문화, 예술, 인물, 사적 등 203개 항목에 대해 재미난 소설처럼 읽을 수 있도록 기록돼 있다. 포항 오어사에 얽힌 이야기며, 이제마의 사상의학에 대한 뒷얘기 등 민간에 전래되거나 사서에 언급된 사찰들의 연기 설화, 승려와 관련된 기담(奇談), 각종 민속과 풍습, 제도 등이 다양하게 수록돼 있어 영화, 드라마, 소설, 연극 등 문화콘텐츠의 풍성한 1차 자료로서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동국대 출판부 측은 불교계와 학계를 위한 전집이 나온 만큼 조만간 일반인들을 위해 ‘한권으로 보는 조선불교통사’(가칭)를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집 40만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최보식이 만난 사람]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특별전… 36년전 발굴했던 김정기翁

입력 : 2010.09.13 03:10 / 수정 : 2010.09.13 07:43

"고분 열리자 하늘은 벌게졌고, 유물 꺼낼땐 천둥이 쳤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발굴 지시, 이 山만 한 걸 어떻게… 그때 진짜 파기 싫었죠
고분 주인은 화 내실까? 아니면 후세 알려줬다고 기뻐하실까 모르겠네요

"경주 98호분(황남대총을 지칭)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발굴한 것인데…. 그전 우리네 술자리에서 '황남대총을 한번 파봐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미쳤다고 이 산만 한 걸 파느냐'고 막았지요. 그랬다가 결국 내가 미친놈이 된 셈이지요. 발굴 지시가 떨어졌을 때 사실 나는 파기 싫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특별전이 열리고 있지만, 이를 발굴한 것은 36년 전의 일이다. 발굴단장은 김정기 당시 문화재연구소장이었다. 그때는 사십대 중반, 이제 팔순노인이 됐다.

김정기옹은“산에 오르는 사람은 산이 있어 오른다고 하지만, 유적은 있다고 해서 발굴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그는 떨어진 청력으로 오른쪽 귀에 손을 대고 듣는 것 말고는 두 시간가량의 인터뷰 동안 결코 지치지 않았다. 기억과 인용도 바로 어제 일처럼 정확했다. 심지어 "나는 서울에서 보고할 일이 많아 발굴 현장에는 반쯤 있었으니 내가 팠다면 좀 지나칠지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

―큰 고분을 발굴하는 것은 학자라면 당연히 욕심을 낼 일이지, 파기 싫었다니요?

"황남대총은 한반도에서 제일 큰 고분일 겁니다. 경주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었지요. 산에 오르는 사람은 '산이 있어 오른다'고 하지만, 유적은 있다고 해서 발굴하는 게 아닙니다. 학술적으로 꼭 필요해서 이걸 발굴하면 어떤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하는 겁니다. 특히 하나밖에 없거나, 제일 크거나, 가장 오래됐다는 유적은 될 수 있으면 안 파는 게 좋습니다."

―그런 유적이야말로 더 궁금한데, 안 파는 게 좋다니 무슨 영문입니까?

"아껴야 돼요. 발굴과 분석 기술은 갈수록 발전합니다. 뒷날에 맡기는 것이 좋을 수도 있어요. 또 발굴을 해야 하는 경우와 안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유적인데 그 속을 전혀 모르겠다면 파는 게 옳지요. 뭔지 모르면 그건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속을 대강 짐작할 수 있으면 그냥 놔두는 게 좋아요. 98호의 경우 '적석목곽분'(목제 관곽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올린 무덤)일 거라고 당시 학계에서는 짐작하고 있었어요."

황남대총의 북쪽 무덤에서 나온 금관.

―혹시 전문가의 소신을 내세워 처음에는 황남대총 발굴 지시를 거부했나요?

"대통령의 지시인데 대놓고 반대하면…."

노인은 소년처럼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껄껄 웃었다.

"꾀를 부린 것이 '98호는 그 속에 조그만 무덤군(群)이 모여 큰 산처럼 됐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 그럴 경우 나오는 유물도 없고, 시민들이 숭배해온 고분의 권위만 떨어뜨릴 수 있다. 근처의 다른 작은 고분부터 파보자'고 했지요. 그래서 1973년 '천마총'을 먼저 파게 된 겁니다. 천마총 발굴 성과가 시시하면 그걸로 98호를 안 파는 근거로 삼으려 했던 것이죠."

―그 방편으로 발굴한 천마총에서 가장 큰 금관과 '천마도'가 나온 것이군요.

"매스컴에서 난리가 났지요. 그러나 나는 마음의 부담이 있었어요. 위에서는 '더 큰 황남대총을 파면 더 좋은 게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학계 일부에서는 '황남대총의 유물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파지 말고 그대로 보존하자'고 반대했어요. 나로서는 이미 말한 게 있어 안 팔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반대하는 선생님들에게 미움을 샀어요."

―황남대총 발굴을 후회합니까?

"막상 98호를 발굴하고 나니 학계의 비난은 없었어요. 같은 적석목곽분이었지만, 천마총과는 전혀 다른 구조와 형식이었으니까요. 황남대총은 관곽 위에 돌을 쌓아 올린 게 아니라, 나무로 거푸집을 짜서 먼저 돌을 채워놓은 뒤 안쪽 빈 곳에 목곽을 넣었어요. 적석목곽본의 형식 변화를 알 수 있었지요."

―무엇보다 5만8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으니 발굴 성과는 좋은 것이지요?

"일반 사람들은 좋은 유물을 찾아내는 게 발굴이라고 여깁니다. 좋은 유물이 나오면 '발굴을 잘했다' 아무것도 안 나오면 '못했다' 합니다. 하지만 발굴자는 정확하고 실수없이 하느냐에 신경 쓸 뿐입니다. 구조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쌓아올려졌느냐도 문화(文化)입니다. 그 속에 유물이 있으면 나오고 없으면 안 나오는 것이지요. 유물의 존재 여부는 발굴자와 관계가 없는 겁니다. 솔직히 유물이 많이 나오면 발굴자들은 '아이고 골치야' 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 보존 처리가 얼마나 까다로워요. 하나하나 도면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어떤 것들은 즉석에서 약품 처리를 해야 합니다."

―가장 오래 보존되는 유물은 어떤 것인가요?

"쇠나 청동은 녹이 슬고 삭지요. 금과 돌이 오래갑니다."

―인간의 시신은요?

"그건 유기물이잖아요."

―황남대총에는 남자 두개골 일부가 남아있었지요?

"통상 그 세월이면 벌써 없어지지요. 돌무더기와 관이 내려앉아 산소가 안 들어가서 그만큼 남은 것입니다."

그는 일본 메이지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도쿄대 공학부 건축사연구실의 조교를 하면서 발굴 작업과 연을 맺었다. 처음 오사카의 사천왕사(四天王寺)터 발굴에서 '초짜'인 그가 땅속에 묻힌 축대를 찾아냈다. 그때까지 일본 발굴단원들이 세 번이나 실패했던 것이다. 그 소문으로 일본 유적발굴이 있을 때면 불러갔고 그는 체계적인 발굴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1959년 귀국해 그는 감은사·안압지·월성해자·황룡사·익산미륵사지를 비롯해, 주거지·패총·지석묘 등 200여곳을 발굴했다. 당시 유적발굴을 맡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를 1969~87년까지 18년간 이끌었다. 그는 "내 삶을 돌아보면 고고학자도 아니고 건축학자도 못 됐고, 그저 땅 파는 발굴기술자로 살아왔다"고 했다.

―그 삶은 단조로운 것입니까?

"일본서 처음 발굴에 참여했을 때 저녁마다 조사원 1인당 정종 1홉씩 나왔어요. '정부 돈으로 왜 술을 먹이냐' 생각했지요. 그때 고참이 '사람이 긴장한 상태로 땅을 파기 시작해 일주일이 되면 머리가 돈다. 술을 마시면 그런 기한을 연기시켜줄 수 있다'고 설명했어요. 정말 그 증세는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제가 발굴단장을 할 때도 현장에서 일을 마치면 저녁마다 술을 먹였어요. 비록 단조롭지만, 저는 사람들과 만나 섞여 있는 것보다 땅을 파는 게 더 좋았습니다. 파는 과정에서 흙이 빠진 구멍이나 망가진 돌만 나와도 금세 흥미를 느끼지요."

―발굴하면서 최고로 흥분한 적은 언제였습니까?

"천마도가 발견됐을 때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어요.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붙여서 그림을 그린 것 아닙니까. 목곽이 무너지고 그 위를 돌이 눌러 공기가 밀폐돼 그 형태로 남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건 유기물이지요. 1500년 전에 땅속에 묻혔던 것이 무사할 수는 없지요. 속은 다 삭았을 것이고, 들어내려고 손을 대는 순간 가루가 될지 모르지요. 그걸 보는 순간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 나왔다, 잘못 하면 내가 죽는다'고 느꼈어요. 정강이의 힘이 다 빠졌습니다. 가루가 될지도 모를 그 천마도를 내가 무덤 바깥으로 들어냈습니다. 책임져야 할 어려운 일은 직접 하는 게 지휘자의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후세 사람은 살아서 발굴하지만, 죽어서 묻힌 자의 입장에서는 설마 이렇게 발굴될 줄은 몰랐겠지요?

"발굴하는 동안 큰소리로 말하지 말고, 웃지 말고, 콧노래도 부르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향(香)도 피워놓지요. 부득이한 학술적 필요에 의해 그 위대한 분의 무덤을 발굴하는데 그분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권위를 느껴야 하는 것이지요. 무덤의 주인께서 자신의 집을 파헤쳤다고 화를 내실지, 아니면 세상에 다시 자신을 알도록 내놓아서 좋아하실지, 그건 모르겠어요. 나는 무덤 발굴을 안 좋아했지만 안 할 수도 없었어요. 사실 고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는 말이 많지요.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하늘이 벌겋게 변한다든지…, 그건 사실입니다."

―무엇이 사실이라고요?

"내가 천마도를 들고 무덤 바깥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마른하늘에 억수로 비가 쏟아졌어요. 천둥 번개가 치고 사무실에 들어오기 직전에는 발목까지 삐었어요. 황남대총 발굴 때는 관곽이 드러나자 하늘이 벌겋게 변했어요."

―정말 이런 자연현상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까?

"난 그건 아닙니다. 뭐, 그저께도 하늘이 벌겋던데요. 다만 사람들이 이상하다고들 말하지요."

―발굴을 마친 고분은 겉은 멀쩡해도 속은 비어있겠군요.

"당초 발굴할 때 무덤 속에 있던 흙을 따로 보관해둡니다. 흙 속에는 시신과 그분이 입고 있던 옷이 썩어 있을 겁니다. 흙이 바로 무덤 주인인 것이지요. 발굴이 끝나면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에 이 흙과 발굴경위를 담은 석함을 안치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무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겁니다. 당초 박정희 대통령의 구상은 발굴 뒤 고분 속을 일반인이 관람하는 것이었지요. 못할 것이 없었지만, 훼손이 심하고 아직도 무덤으로 살아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 방편으로 발굴한 천마총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지요."

―무덤이 살아있다고 하니, 영생(永生)을 믿는 쪽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무덤으로서 살아있다는 것이지요. 제 인생관은 사람은 죽으면 원소로 분해돼 흙과 공기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제 고배.

☞황남대총은…

남북 길이 120m, 동서지름이 80m로 경주 황남동에 있다. 두개의 무덤이 남북으로 맞붙어 있는 쌍분(雙墳)이다. 남쪽 무덤에는 남자가 묻혔고 북쪽에는 여자가 묻혔다. 부부로 추정된다. 신라 마립간(4세기 신라에서 사용한 왕의 칭호) 시기의 왕릉으로 아직 그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분에서 금관, 금제 관꾸미개, 순금 허리띠, 금동칼, 유리병과 유리잔, 비단벌레 날개껍질로 장식된 말안장 꾸미개 등이 출토됐다. 또 제수용품을 담은 항아리 3개에서는 소, 말, 바다사자, 닭, 꿩, 오리, 참돔, 졸복, 다랑어, 농어, 상어, 조기, 전복, 오분자기, 소라, 눈알고둥, 밤고둥, 논우렁이, 홍합, 재첩, 백합, 거북이 조각뼈 등의 흔적이 나왔다.

한국의 투탕카멘묘 '황남대총'이 열린다
chosun.com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반구대암각화 암면 24% 훼손..접합 필요"

연합뉴스 | 입력 2010.09.09 08:15 |

공주대팀 '암각화 보존방안' 학술용역 결과

(울산=연합뉴스) 서진발 기자 =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반구대암각화(국보 제285호)의 바위 표면 23.8%가 훼손됐다."

울산시로부터 '반구대암각화 암면 보존방안' 학술연구 용역을 의뢰받은 공주대 산학협력단은 이와 함께 "암각화를 보존하기 위해 강화제를 이용한 접합이나 충전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9일 울산시와 공주대 산학협력단에 따르면 지난해 9월부터 반구대암각화에 대한 비파괴조사를 실시한 결과 암각화의 표면에 발생한 탈락 및 박락의 면적이 39.027㎤로 산출됐다. 이는 암각화 주암면의 23.8%를 차지하는 것이다.

바위표면 성분분석에서는 암석 구성광물의 하나인 방해석(석회질과 동일)이 내부로 침투한 물과 반응해 최대심도 3∼4㎜의 풍화가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지난해 울산대 조홍제 교수가 반구대암각화에서 발견했다고 밝힌 스멕타이트(바위의 훼손을 가속화하는 점토광물)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주대 산학협력단은 또 초음파 탐사결과 지난 2003년의 같은 탐사 때보다 초음파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7년 동안 침수 반복으로 암각화 바위면의 강도가 그만큼 떨어졌다"는 결론을 얻었다.

공주대는 이에 따라 사연댐에 의한 침수와 노출의 반복으로 생긴 반구대암각화 바위 표면의 다양한 균열과 탈락 등 훼손을 보완하기 위해 접착제와 충전제를 사용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주사기법이나 링거기법 등으로 훼손된 바위면에 강화제를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화가 진행되고 있는 암각화 하부면 또한 동일한 암석을 사용해 보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울산시의 보전방안대로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해 만수위를 현 60m에서 52m로 낮출 경우 암각화의 침수를 방지할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울산시는 울주군 사연댐 상류에 위치해 만수위 때 물에 잠겨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는 반구대암각화의 보전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해 9월 학술용역을 의뢰했다.

시와 공주대 산학협력단은 이날 오후 시청 상황실에서 이 같은 내용의 용역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sjb@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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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가字 세계 '最古' 금속활자 공인되면

연합뉴스 | 입력 2010.09.01 18:41 | 수정 2010.09.01 18:58

"세계사적 사건"..직지 위상 흔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직지심체요절보다 최소 138년이 앞선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인 '증도가자(證道歌字)'(가칭)가 발견됐다는 서지학자 남권희 경북대 교수의 주장은 사실로 확인되거나 적어도 학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한다면 그야말로 '세계적인 사건'이다.

언론계에서 흔히 쓰는 '국사교과서가 바뀐다'는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번 주장은 단순히 특정한 학자 한 사람의 의견 개진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간단히 넘기기에는 우선 그것을 주장한 연구자의 역량이 만만치 않다. 일부 비판적 시각이 없지는 않지만, 남 교수는 서지학 분야 중진 중에서 현재 가장 권위 있는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만약 그의 주장이 타당성을 얻는다면 정말 국사교과서가 바뀐다. 당장 직지는 현존 세계 최고 금속활자 인쇄물이라는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잃게 된다.

물론 직지는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이기에 '증도가자'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로 공인된다고 해도 여전히 현존 최고 금속활자본이다.

하지만 책을 찍어내던 금속활자 자체가 발견됐다고 하면 이런 금속활자보다 138년 이상이나 흐른 뒤에 그와 같은 금속활자로 찍어낸 인쇄물이 예전과 같은 위광을 누리기는 힘들 것이다.

대대적인 직지 활자 찾기 활동을 벌이는 청주고인쇄박물관만 해도 김이 빠질 수 밖에 없다.

1일 남 교수의 주장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직지를 심벌로 내세우는 청주에서 "남 교수 주장은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건가? 진짜 증도가를 만드는 데 찍었다는 금속활자가 맞다면 우리 직지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식으로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남 교수가 주장하는 '증도가자'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실제 직지는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증도가자가 됐건 직지가 됐건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한 민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 이 점은 오히려 한층 더 강화된다.

직지만 해도 서양에서 구텐베르크가 '42행 성경'을 금속활자로 찍어내기보다 무려 78년을 앞선 1377년에 나왔다.

물론 세계 문명 발달에 미친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역사가 훨씬 오래된 우리의 활자는 구텐베르크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구텐베르크는 그야말로 세계 문명의 흐름을 뒤바꿨지만 우리의 금속활자는 국내, 혹은 동아시아에 국한된 측면이 있다.

이는 실제 서구 중심 역사가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아시아를 세계사의 주축으로 놓으면 이 지역 문명이 세계의 주류가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금속활자 발명은 분명히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남 교수 주장이 타당하다면 세계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우리 선조가 세운 셈이 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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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무예진흥,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최종표 발행인
 
▲ 무예신문 (발행인 최종표)  
세계는 지금 자국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홍보 마케팅에도 중앙정부가 나서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전통무예는 외래문화에 치우쳐 그 명맥만 이어나가고 있어 심각한 대조를 이룬다.

전통문화유산 가운데 정부지원에서 배제된 전통 무예단체들은 결코 적지 않다. 대부분 운영조차 쉽지 않은 상태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물질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때문에 우리사회 모든 영역에서는 전통과 문화 등 이념적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전통이나 문화는 단시간 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 상상력과 행동으로 이뤄지고 그 맥을 쉼 없이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의지와 지속적인 정책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전통문화는 그 나라 민족의 혼이 담겨있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승화 발전시켜야 한다. 전통문화의 전승과 활용은 국민이 향유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국가는 진흥을 수행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제서야 문화컨텐츠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다. 전통문화는 방치돼서도 아니 되거니와 저절로 발전되지도 않는다.

이에 따른 거시적인 인식구조를 확립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관련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이 충분히 마련돼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전통무예 단체들의 경우 문화적 가치를 알면서도 재정적, 정책적인 이유로 인해 개발이나 연구는커녕 보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연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정부는 이제라도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을 보여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와의 역할분담을 통한 전통무예지원 사업의 특성화도 시급하다.

또한 중앙 정부는 전국 차원으로 추진사업을 점차 확대해 나가야 하고 지역특성화 사업에 대한 지원 업무를 구체적으로 분담해야 한다. 현행 전통무예진흥사업 중 지역이관 가능사업은 지자체와 공동 추진하여 관련단체와 함께 발굴하고 향후 전통무예진흥사업으로 확산시켜 국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여기에 따르는 인적ㆍ물적 지원에 대한 부분은 정부가 적극 지원하여야 하며 무예 단체들은 정부지원에만 과민반응을 보이지 말고 종목별 무예발전을 위해 혼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무예신문 (http://mooy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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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칸 전통한옥' 故 육영수 생가 복원

  • 연합뉴스
  • 입력 : 2010.08.17 11:30
99칸 조선시대 전통한옥인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고(故) 육영수(陸英修) 여사 생가가 복원됐다.

17일 옥천군에 따르면 국비 등 37억5천만원을 들여 9천181㎡의 터에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사당 등 건물 13채(711㎡)와 못, 연자방아, 뒤주 등을 최근 복원했다.

1800년대 한옥인 육 여사 생가는 1971년 중수됐으나 부친 육종관(1965년 사망)씨 사망 뒤 상속분쟁에 휘말려 방치되면서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 1999년 철거됐다.

조선시대 전통한옥인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고(故) 육영수(陸英修) 여사 생가가 복원됐다. 옥천군이 국비 등 37억5천만원을 들여 복원한 생가는 건물 13채(711㎡)와 못, 연자방아, 뒤주 등이 들어섰다.(옥천군 제공) /연합뉴스

그 뒤 옥천군은 유적훼손을 막기 위해 2002년 터 전체를 충북도 기념물(123호)로 지정받아 복원공사에 나섰으나 일부 후손(상속권자)이 기부채납을 거부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옥천군 관계자는 “복원공사는 유족과 학계 전문가 등의 고증을 거쳐 최대한 원형에 가깝도록 시공했다”면서 “지름 50㎝ 안팎의 소나무와 흙으로 구운 한식기와 등을 사용해 조선 전통한옥의 분위기를 살렸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연차적으로 육 여사 기념관을 짓고 주차장 등도 조성해 인접한 ’향수’의 시인 정지용 생가와 함께 관광상품으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옥천군은 소품 등을 갖춰지는 오는 11월께 준공식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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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하루 동시체류 5000명 제한

동아

2010-08-16 03:00  2010-08-16 03:00  

세어볼 수도 없고… 실효성 의문  

최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북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122호)에 한꺼번에 머물 수 있는 관광객이 15일부터 5000명 이하로 제한된다.

안동시는 “민속마을의 원형을 보존하고 문화재 훼손을 막는 한편 관광객들이 쾌적하게 마을을 둘러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안동시는 당초 하루 입장권 판매를 5000장 이하로 제한하려고 했으나 세계유산 등재 이후 전국에서 관광객이 줄을 잇자 동시에 머물 수 있는 관광객 수로 조건을 완화했다.

그러나 이런 제한은 현실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 특정 시간대에 마을 안에 있는 관광객이 5000명 이상인지 이하인지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말이나 연휴라도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하루 입장객이 5000명 이상인 경우도 드물다. 하회마을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입장객을 제한하기보다는 세계유산을 잘 보존하기 위해 관광객들도 관심을 가져 달라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며 “동시 체류 관광객 제한을 하더라도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부터 입장료를 받은 하회마을은 2008년 8월 2일 1000만 명을 돌파한 이후 매년 80만 명가량이 찾는다. 1999년 4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방문을 계기로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올해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약 100만 명이 찾을 것으로 안동시는 예상하고 있다.

안동=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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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늠름한 위용 드러낸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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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주년 광복절을 맞은 15일 4년여의 복원공사를 마친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 늠름한 위용을 드러냈다. 145년 전 고종의 재건 당시 모습을 되찾은 광화문은 이날 시민들에게 공개되어 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머니투데이

 

새 광화문, 민의·민심의 소통 상징

 [충청일보]6·25 한국전쟁 때 소실됐던 광화문이 새롭게 제모습을 찾았다.
 

화강석 기단부에 금강송 목조 누각의 신조물로 65주년 8·15 광복절에 정식 제막됐다. 광화문은 42년 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임시 복원됐으나 당시는 사라진 목조 부분만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서의 의미는 사실상 없다는 비판이 대세였다. 위치도 원래 자리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떨어지고 방향각 역시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도 틀어진 그대로였다. 이런 '짝퉁' 복원의 한계와 문제가 이번에 극복됐다. 국민과 함께 경축할 일이다.
 

1995년 발표된 광화문 복원 계획은 1865년 고종 중건 때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내용이었다. 문헌과 발굴 조사에서 조선 후기 고종 때는 물론이고 창건된 태조 때의 위치와 규모까지 확인해 2006년 말 철거로 시작된 대역사가 4년 만에 마무리된 것이다.
 

'光化門'이라고 쓰인 현판도 고종 중건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가 유리원판 사진으로 밝혀지면서 원형 복원됐다. 고 박 대통령의 친필 글씨나 훈민정음체의 한글로 현판을 새겨야 한다는 반론이 일부 나왔으나 창건과 중건 때의 모습으로 잘 복원했다고 본다.
 

광화문은 조선 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으로, 경복궁과 함께 1395년(태조 4년) 건립됐다. 원래의 이름 사정문(四正門)은 1425년(세종 7년) 광화문으로 바꿨다.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이나 전란 속에 두 차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 처음 불탄 광화문은 고종 2년 경복궁과 함께 재건됐으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경복궁 경내에 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광화문이 헐릴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당시 여느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도요대(東洋大) 유종렬(柳宗悅) 교수의 반론이 먹혀 '철거' 당하지 않고 '이전'돼 살아남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포화는 비켜가지 못했다. 목조로 된 다락이 다시 소실된 것이다. 결국 광화문은 1995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경복궁 복원 계획에 포함돼 그동안 틀어지고 옮겨진 부분도 바로 잡혔다. 숱한 고난을 겪은 광화문이 이전과 복원의 대공사를 마치고 615년의 역사를 이제서야 되찾은 것이다.
 

옛 나라의 심장부였던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 고증을 거쳐 복원된 것은 한·일강제병합 100주년과 광복 65주년을 맞은 올해의 뜻깊은 경사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오욕의 역사를 딛고 영광된 미래로 나가야 한다.
 

일제는 조선의 황후를 무참히 살해하고도 모자라 한국 문화를 대부분 말살하면서 그 상징인 경복궁을 총독부 청사로 가로 막았다. 그런 경복궁의 정문이 복원을 마치고 광복절에 새롭게 열린 뜻이 거룩하다. 나라의 큰 문이 제대로 복원된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65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함께 가는 국민, 더 큰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경축사를 했다. 이 대통령이 "통일은 반드시 온다. 이제 통일세 등 현실적인 방안도 준비해야 할 때가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광화문은 닫히는 기능보다 열리는 역할로 민의와 민심이 소통하는 상징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 국운융성으로 직통해 빛나는 새 길로 뻗어나가기를 바란다.

기사입력시간 : 2010-08-15 19:01:39
글쓴이 : 충청일보 /  [충청일보]의 다른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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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 & Mania] "유물에서 시대를 읽죠" 문화재 관리의 산 증인… 옛 기와에 빠진 변호사 "와당(기와의 끝 막음), 수사하듯 파고들어"

  • 기사입력 : 2010.08.14 03:03 / 수정 : 2010.08.14 07:50

[Master & Mania]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와 '기와 검사' 유창종씨
안휘준… “빗물 막으려 만든 와당 예술성 높은 문화재로”
유창종… “아름다운 기와에 반해 전국 골동상 뒤졌어요”

한국의 대표적 미술사학자인 안휘준<70·사진 오른쪽> 서울대 명예교수와 '기와 검사'로 알려진 유창종<65·왼쪽> 변호사가 만났다. 한국회화사 연구에서 한 획을 그은 안 교수는 24년간 문화재위원을 맡았고 8년간 동산(動産) 문화재 분과위원장, 4년간 문화재위원장을 지낸 문화재 관리의 산 증인이다. 유 변호사는 검사 시절부터 옛 기와에 대한 연구와 수집에 몰두해온 '전문가급 마니아'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일본의 와당(瓦當·기와 끝을 막는 것) 5000여점을 수집했으며, 2008년 서울 부암동에 본인과 부인의 성(姓)을 딴 유금와당박물관을 열었다.

유창종=제가 문화재에 관심 갖게 된 게 실은 안휘준 교수님 책을 읽으면서부터입니다. 삼불(三佛) 김원용 선생님과 함께 내신 '신판 한국미술사'를 읽으면서 한국뿐 아니라 중국·일본 미술사를 깊이 연구해 비교하신 걸 보고 감탄했습니다.

안휘준=모든 예술이 다 중요하지만, 미술은 특히 역사적 측면에서 다른 장르보다 가치가 있어요. 선사시대부터 모든 시대를 거쳐서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를 알 수 있죠.

=와당만 봐도 한국·중국·일본에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데, 제작된 시대와 나라마다 특징이 명확하게 구별돼요. 발굴 조사를 할 때도 와당이 시대 측정의 기준치가 되죠.

=유 선생님은 법조인이지만 이제 와당에 있어서 독보적 존재가 됐어요. 어떻게 와당을 수집하게 됐나요?

=충주지청 검사로 일하던 1978년 충주 탑평리 중앙탑(국보 6호) 부근에서 기와 파편을 하나 주웠어요. 삼국시대에 제작된 연꽃무늬 와당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죠. 선조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품을 지붕에 장식하고 살았다니,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절터와 건물지에 버려진 기와 파편을 모으고, 전국 곳곳의 골동상을 뒤지기 시작했죠.

=와당은 원래 기와집 지붕 끝에 빗물이나 바람이 들어가는 걸 막으려는 실용적 목적에서 출발했는데, 각종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예술적 가치도 뛰어나죠. 그야말로 창의성·국제성·독자성·예술성이 융합된 문화재입니다.

=탑평리에서 출토된 연꽃 무늬 와당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 다 들어 있어요. 빛깔은 백제 특유의 회백색인데 연꽃잎이 6개인 것은 신라의 특색이고, 웅건한 느낌은 고구려이고…. 왜 그런가 봤더니 그곳이 세 나라가 뺏고 빼앗기던 접경지역이었던 겁니다. 옳거니, 그게 중원문화의 특수성이구나, 그럼 다른 지역에서 나온 건 어떨까 하면서 범죄를 수사하듯 파고들었죠.

=미술사 연구라는 게 원래 수사하고 비슷해요. 수사관들이 머리카락, 핏자국 같은 단서를 종합해서 범인을 찾듯이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를 모아서 종합 결론을 내거든요.(웃음)

=미술사를 책으로 공부하면 학문이 되지만, 유물로 접근하니 흥이 나더군요. 박물관 가서 보고 골동품상 가서 만지고 수집하니까 점점 빠져들어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학생들에게 국립박물관에 가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을 고른 다음 선정 이유랑 특징, 역사적 의의 등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많이 냈어요. 유 선생께서는 2002년 평생에 걸쳐 수집한 와당 18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셨죠. 사재를 털어 박물관도 세우시고…. 존경스럽습니다.

=별말씀을요. 저는 와당을 모으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실컷 즐겼으니 제가 받은 깨우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게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30년간 와당이 제게 준 재미와 보람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겁니다. 와당에 감사하고, 그 과정을 함께 해준 아내(금기숙 홍익대 미대 교수)에게 감사하죠.

=한국 미술은 중국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보다 뛰어난 경지에 오른 게 많아요. 청출어람(靑出於藍)이죠. 고구려 고분벽화, 신라의 금관과 금귀고리, 백제의 금동대향로, 고려의 불화와 청자, 조선의 산수화와 백자….

=맞습니다. 한국은 중국의 와당을 받아들였지만, 독창적으로 해석해 새로운 문화를 꽃피웠어요. 통일신라 와당은 예술성이 중국 와당을 능가합니다. 한민족에게는 청출어람을 실현할 재능이 수천년간 이어져 온 거죠.

=과거에 국한된 게 아닙니다. 놀라운 경제성장, 반도체를 위시한 세계 제일의 공산품(工産品), 국제무대를 휩쓰는 음악과 스포츠 스타들…. 현대판 청출어람이죠. 와당을 비롯한 과거의 유물을 통해서 현대의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배우는 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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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서 5세기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종합)

    연합뉴스 | 입력 2010.08.14 19:12 | 수정 2010.08.14 20:15

    "내실, 봉분양식 독특..청자 촛대 등 출토"

    (서울=연합뉴스) 북한 평양의 락랑구역 동산동에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벽화 고분이 발굴됐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14일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현장에 학자와 취재진을 보내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측과 함께 발굴을 진행했다면서 이번 발굴이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와 풍습, 일본 등과 문화교류 양상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북한은 이 고분을 국보로 등록하고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할 계획이다.

    이 통신은 연구팀이 이 고분에서 벽화들을 발견하고 천장에서도 벽화의 흔적을 더 찾아냈다며 고분 내부는 입구, 진입로, 전실(면적 2.4m×2.1m, 높이 3.3m)과 후실(3.36×3.28×3.4), 별실 등으로 이뤄져 있다고 설명했다.

    벽화는 뿔 모양의 모자를 쓰고 말을 타는 남성과 무장한 말을 타고 깃발을 든 행렬, 칼을 든 무사 등의 모습을 담았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전실의 아치형 천장은 삼각 받침대가 층을 이루고 있는데, 고분에서 이런 형식이 발견되기는 처음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석회와 숯, 점토를 번갈아 다지면서 석실을 덮는 양식도 이번 고분에서 처음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사회과학원은 이 고분이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면서 함께 출토된 남녀 인골과 금.은 장식품, 호랑이 모양 자기, 청동 화폐, 관에 쓰인 못 등은 고구려인의 문화 발달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고분에서 함께 출토된 청자 촛대는 북한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라고 교도통신이 전했다.

    조사에 동참한 일본 도쿄대학의 사오토메 마사히로(早乙女雅博) 교수(고고학)도 고분의 구조와 벽화의 수준을 감안할 때 이번 발굴은 중요한 성과라면서 "고구려 벽화 고분이 없을 것으로 여겨졌던 곳에서 발굴돼 더욱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일본 학자들은 또 이번 고분이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평안남도 남포시의 덕흥리 벽화고분에 견줄만하다고 말했다.

    동산동 벽화 고분은 평양 중심가에서 남동쪽으로 4.5㎞ 떨어져 있으며 지난해 10월 주택 건축 과정에서 처음 발견됐다.

    교도통신은 북한과 일본이 전면적인 학술조사를 함께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학술조사에는 일본 측에서 사오토메 교수와 함께 사이버대학의 아오키 시게오(靑木繁夫) 교수(유적보존학)가 참여했다.

    hanarmdr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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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시대, 전북을 말하다]

    ⑤홍동원 글씨디자인 대표…여태명 원광대교수

    전북일보(desk@jjan.kr)

     

    전주향교에 전시돼 있는 완판본 목판을 살펴본 여태명교수(사진 왼쪽)와 홍동원대표는

     전주는 글자만으로도 전 세계 사람들을 모을수 있는 지역이라며 전주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안봉주(bjahn@jjan.kr)

     

     

    하늘이 뚫린 것 같았다. 지난주 토요일 오후, 갑작스럽게 쏟아진 폭우에 우리 일행은 전주향교 대성전 앞에 갇혀버렸다.

    향교 뒷편의 장판각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글자는 형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쓴 사람의 철학과 내용을 보는 것이예요."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아트디렉터 홍동원 글씨디자인 대표(50) "전주도 마찬가지"라며 "단순히 형태를 볼 것이

     아니라 전주의 내용을 봐야한다"고 말했다.

    여름 더위가 여전히 기세 높지만 가을이 시작되는 입추(立秋)였던 7. 글씨디자인 작업을 줄기차게 해오는 홍대표와 조선시대 서민들의

     삶이 생동감있게 담긴 글씨체인'민체(民體)'를 세상에 내놓은 서화 여태명 원광대 교수(54)를 만났다.

    "전주향교 장판각에 보관돼 있을때 완판본 목판을 보았어요. 오랫동안 방치되어 병충해와 습기로 훼손되어 있던 목판을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전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지고 일부만 향교에 남아 전시돼 있는 목판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이 빛났다.

    완판본(完板本)의 고장 전주. 한글과 글자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전주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둘의 인연 역시 글자로 시작됐다.

    34년 전, 홍대표는 '선수'에게 직접 배우라며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데리고 12일 동안 여교수를 찾아온 적이 있다.

    그때 여교수는 홍 대표와 제자들에게 막거리 주도(?)까지 아낌없이 내주었었다.

     

    전주는 오래된 도시이긴 하지만 전통이 깊은 만큼 미래에 대한 기대도 많은 도시입니다. 창조력이나 상상력은 어느 도시보다 풍부하지요.

    오래된 전통의 도시에서 가장 자유롭고 독립적인 양식인 '비보이'의 전주 젊은이들이 세계를 석권했습니다. 밖에서 볼 때 전주는 어떻습니까?

     

    (홍동원 대표-이하 홍) "전주는 '엘도라도(El Dorado)'예요. 아직 금을 캐내지 않은 금광의 상태. 그런데 엘도라도로 가는 지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도가 없다 보니 자기 발 밑에 금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것을 찾고 있는 거죠.사실 우리 지도, 우리 전통과 역사를 잘 읽어내면

    그것이 바로 지도가 됩니다. 전주를 파기 시작하려면 전주의 역사와 전통을 먼저 알아야 하죠. 월드컵을 통해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 알려졌는데, 그 배경이 재미있어요.

    '그 나라에서는 응원을 왜 그런 식으로 하느냐.' 그러면서 세계가 우리나라 응원을 따라하기 시작했거든요. 그 에너지가 전주에는 없겠습니까.

    전주에는 나름대로 전주스러운 부분이 있을 겁니다. 왜 그걸 버리고 서울을 따라오려고 하는 지 모르겠어요.

    전주는 "서울보다 좋아, 나빠? , 작아? 높아, 낮아?", 서울은 "맨하탄보다? 뉴욕보다?"하며 비교를 하지요. 그건 우리 것을 버리자는 것밖에 안됩니다."

     

     

    우리 것, 우리 전통의 중요성을 잘 알면서도 일상에서 전통의 가치를 발현시키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태명 교수-이하 여) "전통은 계승도 중요하지만 발전을 시켜야 진정한 전통입니다. 지금 이 시점의 것이 나중에는 전통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 이 시간에도 전통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과정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어요."

    ()지금 우리가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산업이었습니다. 그 산업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박물관에 집어넣고 보존하려고만 하고 있으니 안타깝지요.

     전통은 박물관에 잘 전시해 놓고 "만지지 마시오" "들어가지 마시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지고 부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그 가치가 더 커지게 됩니다.

    여교수님의 작업이 의미있는 것도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만 설명되는 서예를 온 몸으로 보여주시기 때문이지요."

     

     

    여교수님의 작업은 서예의 대중화를 향해 있지요.

    오래전부터 일상속에서 서예를 소비하게 하는 작업들을 해오셨는데, 성과가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교수님의 작업은 전통의 계승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서 응용되고 활용되면서 서예를 발전시킵니다.

    여교수님이 가지고 있는 '재주'에 폰트(font)를 만드는 IT나 그것을 정보통신기술에 응용하는 기술을 덧붙인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서예를 "문화다" "예술이다"라고만 말하고 있는 거죠."

     

     

    ▲ 그런 작업때문에 여교수님은 서단에서 이단아로 대접받지 않으신가요.(웃음)

     

    ()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얇은 가슴에 어려운 점이 참 많았습니다. 초창기 공모전에 출품할때는 전통서예가 아닌

    변화를 준 작품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탈락했습니다. 서예계의 의식 자체가 엄격하게 닫혀있을 때였죠. 전통적인 서예의 길에서 왜 샛길로 가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 우리나라에 여교수님보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많겠지만, 여교수님만큼 대중과 가장 잘 호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효봉 개똥이체' 100, 150원 주고 휴대전화에 내려받습니다. 가훈은 써주면서도, 식당 이름이나 책방 이름은 품격이 떨어진다고

    쳐다보지도 서예가들과는 다르지요. 미디어도 마찬가지예요. 이제는 정말 독자가 중심이 됐지 않습니까. 이전에는 말로만 그랬지만,

    지금은 독자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당장 광고주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죠. 그것이 산업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그걸 거부하면 퇴화할 수밖에 없어요. 일상으로 가면 다시 산업이 됩니다."

     

     

    여교수님의 작업은 진즉부터 일상으로 가있는데도, 아직 돈을 못벌고 계신것 같은데요.(웃음)

     

    ()여교수님이나 저나 문자를 가지고 작업을 하지만, 아마 제가 더 많은 돈을 벌 겁니다.

    서예는 규소 같은 하나의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규소를 가지고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지요.

    또 반도체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내느냐의 문제입니다."

    ()"나는 소재는 있는데 기술이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 서예가 돈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으로는 돈이 안됩니다. 서예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해야죠. 물론, 개인적으로는 돈이 될 지 모르겠지만, 산업적으로 돈이 되는 건 아니다는 뜻입니다. 저는 문화산업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는 문화고, 산업은 산업입니다. 구체적으로 쪼개져야 하지요. 서예도 쪼개져야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지금 시대에 맞게 바뀌고 쪼개져서 적용돼야 합니다. 요즘 세상에는 사람이 손으로 하는 건 거의 다 컴퓨터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우선 서예가 컴퓨터로 들어가는 기술이 필요하겠고, 그것들이 다시 이합집산해 또다시 어떠한 형태로 재현돼야 하겠지요. 여교수님이 쓴 글씨가 IT와 만나 폰트화되고, 산업화된다면 여교수님 글씨를 본 사람이 한 사람에서 다수로 늘어날 가능성이 커지죠."

     

     

    ▲ 그렇다면 전라북도가 글자라는 콘텐츠로 산업화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 확신하건대, 글자만으로도 전 세계 사람들을 전라북도로 모을 수 있습니다. 전주천과 전주제지, 완판본(完板本)을 비롯해

    전주의 출판문화는 전주라는 지역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전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과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곳이자

    동시에 방물장수들이 이것들을 팔고 빌려주고 하는 과정에서 산업화가 이뤄진 거죠. 전주의 완판본이 전국적으로 유명해 지자 서울에서

    경판본(京板本)이 나올 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전주는 자신들의 지도를 서울에서 찾고 있어요."

    ()"한글이라는 훌륭한 재료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역사성에만 갇혀서 발전시키는 작업은 간과하고 있어요.

    아직 산업화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한글이 가지고 있는 산업성이 이른 시일 내에 크게 발현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 언젠가부터 우리가 디자인에 대해 너무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주시도 아트폴리스를 내세워 디자인을 주목하기 시작했는데요. 디자인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디자인하면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것이고 과거에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디자인이 외국에만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독일에서 공부를 할 때 독일 친구들이 '한국에는 가치있는 보물들이 많이 있는데 왜 굳이 독일을 따라가려고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문자와 언어를 다루는 편집디자인을 하려면 네 나라 문자로 연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담당교수의 질문을 곱씹으며 하던 공부를 때려치우고 귀국했죠.

    한국엔 원래 디자인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디자인이란 말만 없었던 것이지

    내가 잘할 수 있는 한국적인 디자인의 철학, 원리, 소재가 다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거죠."

    ()"디자인의 기술적인 측면은 잘 모르지만, 학생들이 디자인을 위해 외국 잡지를 항상 참고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디자인하는 분들에게 우리 안을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쪽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 누가 보여주지도 않았고, 보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정말 귀중한 것들이 많습니다.

    저도 글꼴 개발을 위해 고전을 많이 연구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이 생겼거든요."

     

    전주는 글자예술의 도시입니다. 그 전통의 가치를 창조적으로 이끌어내는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유학시절 저도 우리 것의 가치를 깨닫고'빠다' 냄새에 빠져 살았던 내 청춘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주에 있는 것,

    우리가 잘 하는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일단은 시민들의 의식이 중요합니다.

    전주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전주의 에너지를 찾아야 하죠. 그런 건 밖에서 찾는 게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완판본이라는 큰 자산이 있는데 그것의 가치를 발굴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그 소스를 바탕으로 전주만의 고유한 서체를 만들어 상징적인 곳에 활용할 수 있게 해야해요."

    인터뷰가 끝날 때 쯤, 여교수와 홍대표는 다시 '전주체'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10여년 전 부터 '전주체'라는 글꼴을 만들자고 제안해

    온 여교수는 올해도 자치단체의 문을 두드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홍대표가 "참 묘하다"는 말로 여교수를 거들었다. "삼성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자료 수집 단계를 거쳐 이미 4년 전에 자신들만의 서체를 완성했어요.

    최근에는 서울시가 '서울체'에 성공했지요. '전주체'는 이미 그 이전부터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왜 그런 중요한 작업을 외면하는 것인지..."

    '전주체'야말로 전통을 오늘로 이어내는 것. 홍대표는'전주체'는 곧 한 도시의 독자성과 독창성으로 연결되며, 결과적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부심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 홍동원 대표는

     

    "친절하고 예뻐 보이는 검찰 명함을 만들어 주세요."

    홍동원 글씨디자인 대표는 지금의 검찰청 로고 디자인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개인적인 인연으로 조법종 우석대 교수가 학교 박물관장으로 취임할 때 완판에 사용됐던 글자를 다듬어 역사성과 문화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명함을 만들어 준 적이 있다. 우석대가 운영하는 전주 한옥마을 전주한방문화센터도 그의 작품이다.

    '새만금 개발구상 국제공모 2차 워크샵'에 필요한 디자인을 '새만금 프로젝트가 잘 되게 기원하는' 의미로 '부적'같이 만들어 포스터와 티셔츠가 동이 나기도 했다.

    그는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와 같은 대학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추천작가가 됐다. 독일에서 공부했다.

    출판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며 조선일보 섹션신문 '굿모닝 디지털' 창간에 참여했고, 일간스포츠와 국민일보, 한겨레신문의 리뉴얼 디자인을 담당했다.

    지금은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쓰는 수학기호를 재료로 하는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다.

     

     

    ◆ 여태명 교수는

     

    효봉 여태명 원광대 교수는 1956년 진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야기는 전주에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빠뜨릴 수 없다.

    외지인들이 전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로 꼽는 전주 인터체인지 현판 글씨가 그의 작품이기 때문.

    최근에는 KBS '1 2'의 글씨체가 그가 개발한 '효봉 개똥이체'라는 것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또한번 화제가 됐다.

    일반 백성들이 쓰던 글씨체인 민체 연구가로, 한국민족서예인협회장을 맡고 있다. 2008년에는 한국캘리그래피협회를 창립해 초대회장부터 2대째 회장을 맡고 있다.

    지금은 한글과 한자를 병기해 쓸 수 있도록 폰트 2차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대담 = 김은정 편집국장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