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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크리에이터'에 해당되는 글 44건

  1. 2017.11.05 1999년 6월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창립취지문
  2. 2011.10.10 잡스, 시장원리를 바꾸어놓았다
  3. 2011.08.30 ‘잡스의 혁신’ 세상을 10번 놀라게했다 (3)
  4. 2011.04.18 [단독] “3D TV 편광방식이 확산될 것”<세계일보> (1)
  5. 2011.03.17 영화 ‘해운대’ 윤제균 감독과 쓰나미… “영화서 포기했던 원전 폭발… 현실이 됐다”
  6. 2011.03.04 트위터 창업자 스톤 "퀵퀵퀵! 그게 트위터다"
  7. 2011.03.04 스티브 워즈니악, 말 알아듣는 `아이폰 앱`
  8. 2011.03.04 잡스 "갤럭시탭은 아이패드 모방품에 불과"
  9. 2011.01.24 잡스 대행 팀 쿡, 잡스 못지않은 열정 종결자
  10. 2011.01.17 `시크릿 가든` 작가 김은숙, "인생에는 마법 같은 순간 온다"
  11. 2011.01.17 [신년 인터뷰] 프랑스 대표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22)
  12. 2011.01.11 <양방언 "가장 마지막에 꽃 피웠으면..">
  13. 2010.12.12 박칼린 " 지금도 조승우를 망원경으로 지켜본다" (8)
  14. 2010.12.12 [Weekly BIZ] "건축은 共存이다… 거리와 소통하고, 도시에 숨을 불어넣어라" (14)
  15. 2010.12.05 [매경이 만난 사람] 카리스마 있는 여자 박칼린
  16. 2010.12.05 “소리는 오감 중 제일… 21세기형 문화콘텐츠로 뜰 것”
  17. 2010.12.01 제3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 선정 발표
  18. 2010.11.10 [문화리더] 이천도자기 명장 藝松 유기정
  19. 2010.10.25 [최보식이 만난 사람] '트위터 팔로어' 43만명… '김연아를 앞선' 작가 이외수
  20. 2010.10.18 [주간조선] 박칼린 "내가 독하다고? 한밤에 펑펑 울기도 해요"
  21. 2010.10.14 소통과 융합과 백남준 스마트폰 시대의 과학커뮤니케이션
  22. 2010.10.10 [Cover Story] '디자인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
  23. 2010.09.19 알렉산드로 멘디니 "한국車ㆍ전자제품 디자인 수준 이미 세계정상 올라섰다
  24. 2010.09.17 [홍상수]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 서로 기댄 세 개의 막대기처럼
  25. 2010.09.13 [Close-up] 한국 온라인게임의 대부 송재경씨 [중앙일보]
  26. 2010.09.11 [Why] "민홍규 같은 사람 여럿… 국새 말고도 터질 일 많아" (6)
  27. 2010.09.08 [이사람]강 재 수 광양시립합창단 지휘자
  28. 2010.08.31 '섬진강 시인' 김용택 광주서 초청 강연
  29. 2010.08.29 [Why] [김형석의 후아유]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팔봉 선생 장항선
  30. 2010.08.23 손작업 애니 고집…“3D 언젠가 싫증날 것”

인간의 모든 생활양식의 수준과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오락, 교육, 예술, 정치, 경제 등 모든 인간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통합과 융합을 요구하는 디지털문명시대, 여기에 현재 우리 지식인의 위기의식과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19996월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창립취지문 중에서, 창립취지문 기초 작업 수행, 전충헌 콘텐츠코리아 회장 (당시 코리아디지털콘텐츠 대표이사)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잡스, 시장원리를 바꾸어놓았다

세상을 바꾼 혁신적 인물… 추모 이어져

2011년 10월 10일(월)

> 창의·인성 > 창의성의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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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의 현장을 가다   

▲ 스티브 잡스 영면 후 그에 대한 추모와 찬사가 그치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일(현지 시간) 스티브 잡스가 영면한 이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스티브 잡스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혁신가 중 한 명으로 세계는 위대한 예지자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MS 전 회장 시절 스티브 잡스와 치열한 경쟁을 했던 빌 게이츠도 “세상은 스티브만큼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을 보기 힘들 것”이라며 “그와 같은 시대에 일했던 것이 행운이며, 앞으로도 그를 많이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에 대한 추모의 물결이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영국의 철학자이면서 작가인 줄리언 바지니(Julian Baggini)는 6일 가디언지에 흥미로운 글을 실었다.

소비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는 스티브 잡스가 인간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우리들이 기술을 보는 방식, 음악을 듣는 방식,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 회화나 디자인 등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방식,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시장원리에까지 큰 변화를 준 인물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말로 '소비자는 왕이다'란 말을 예로 들었다. 기업 입장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지만 스티브 잡스는 이 원칙을 벗어났다. 그에게 있어 소비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어떤 사람도 자신이 맥(Mac), 아이팟(iPod), 아이폰(iPhone), 아이패드(iPad)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잡스는 소비자들이 이미 원했던 것을 주려고 시도했던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더 원하게 될 것을 창조해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가격구조에 있어서도 놀라운 개념을 선사했다. 특히 모든 웹 기업을 연결해 정보를 무료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던 오픈 소스 운동(open source movement)에 직면해 특별한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특별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었다.

특허관리에 있어서도 매우 남달랐다. 협동연구가 성행하던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자신이 고안한 아이디어가 다른 기업 등에 넘어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특허경영에 있어서는 매우 비민주적이었다. 폐쇄적이었지만 그의 성공은 철저한 비밀주의의 성공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영감을 통해 비전을 성취한 고집센 리더

시장원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시장원리란 시장가격이 수요·공급이 만나는 점에서 결정된다는 가격 결정의 원리와 경쟁 원리를 말한다. 그동안 시장원리는 상품가격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정된다는 원칙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잡스의 아이패드(iPad)에게는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 그가 아이패드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누가 그것을 대신할 수 있었겠느냐며, 비슷한 것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아이패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위크(Newsweek)는 10월 첫 주간호에서 ‘미국의 천재 스티브 잡스, 그가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켰나?’란 제목의 커버 기사를 실었다.

뉴스위크는 이 기사를 통해 잡스가 자신의 비전을 영감(inspiration), 일방성(unilateralism), 직감(instinct)으로 이끌어가면서 그것을 성취해나가는 고집 센 리더(wilful leader)임을 증명했다고 썼다.

위스콘신 대학 스피치 석사학위 과정의 대학원생이었던 어머니, 그리고 시리아 출신 정치학박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미혼모인 어머니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의 폴(Paul)과 클레어러(Clara) 부부에게 입양됐다.

뉴스위크지는 세상을 바꾸어나갈 수 있는 잡스의 영웅적인 능력인 설득력(persuativeness), 모험심(risk-taking), 완벽주의(fierce perfectionism),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점(Willingness to fail) 등은 어릴 적 성장기에 형성됐다고 분석했다.

뉴스위크지는 이밖에 잡스의 굴복하지 않는 끈기(Sheer tenacity), 탄력성(Resilience), 거대한 자부심(Grandise ego), 강력한 자신감(Overwhelming belief in himself) 등을 위대한 인물이 탄생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지목했다.

스티브 잡스의 영면은 세계인들에게 매우 강력하면서도 지속적인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에 대한 기억과 흠모, 그리고 찬사 역시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지만 세계인들은 그를 진정으로 세상을 바꾼 혁신적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이강봉 객원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1.10.10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잡스의 혁신’ 세상을 10번 놀라게했다

한겨레 | 입력 2011.08.29 21:00

[한겨레] 마우스 도입한 '매킨토시'


직영 매장 '애플스토어'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


35년동안 IT업계 선도

스티브 잡스가 애플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밝힌 이후,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에선 그동안 잡스가 세상에 선보인 제품들의 면면을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혁신적 기업가', '뛰어난 마케터'를 넘어, 스티브 잡스는 세계 정보기술 산업 전반의 지형을 뒤흔들고 동시대인들의 생활 방식을 바꾼 인물로 오래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손에 의해 탄생한 대표적 상품들을 꼽아본다.

1. 애플 1(1976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이 애플컴퓨터를 설립한 해에 내놓은 첫 작품이다. 워즈니액이 제품 개발을, 잡스가 자금조달과 마케팅을 총괄했다. 개인용 컴퓨터로 출시됐지만, 실제로는 일부 전문가들만 사용했다.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님에도 애플발 혁신 시리즈의 출발점으로 기록된다.

2. 애플 2(1977년)

애플 1을 내놓은 이듬해 나온 애플 2는 베이지색 외관에 컬러 그래픽이 가능한 1300달러짜리 제품으로, 대중시장을 겨냥한 작품이다. 비로소 전문가뿐만 아니라 개인 사용자들로부터도 높은 인기를 끌었으며, 애플에 첫 번째 상업적 성공을 안겨준 제품으로 꼽힌다. 1993년까지 16년간 생산됐다.

3. 매킨토시(1984년)

잡스가 제록스연구소를 방문했다가 본 그래픽 사용자환경(GUI)을 적용하고 마우스를 도입한 컴퓨터로, 이후 컴퓨터 사용환경에 일대 혁신을 불러온 역작이다. 2500달러에 판매됐다. 특히 출판계에 널리 도입돼 데스크톱 출판의 기본 환경으로 자리잡았다.

4. 아이맥(1998년)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난 잡스가 1996년 복귀해 만들어낸 첫 제품이다. 컴퓨터 시장에서 점유율이 줄어들면서 고전하던 애플의 상황을 한순간에 반전시킨 히트작이다. 기능보다는 과감한 디자인으로 혁신을 가져왔다. 원색을 사용하고 본체와 모니터를 결합한 일체형으로, 인터넷 환경에 맞췄다.

5. 애플스토어(2001년)

전자제품 구입 행태가 브랜드별 직영매장에서 베스트바이 같은 양판점과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와중에, 애플은 주요 도시 요지에 직영매장을 열었다. 제품 판매뿐 아니라 고객기술 지원을 하는 애플스토어는 독특한 건물과 내부 디자인으로 많은 도시에서 관광명소가 되었고, 경쟁업체들은 잇따라 모방에 나섰다.

6. 아이팟(2001년)

분명 디지털음악재생기(MP3)로 처음 출시된 제품이 아니다. 하지만 휠을 이용한 간편하고 직관적인 조작법과 음악관리 소프트웨어와의 결합으로 인해 순식간에 관련 시장을 제패했다. 휴대용 기기 아이팟의 성공은 아이폰과 아이튠스, 아이패드, 앱스토어의 모태 노릇을 했다. 애플이 컴퓨터를 넘어 콘텐츠산업과 엔터테인먼트 기기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7. 아이튠스(2001년)

아이팟의 음원 관리용 도구로 선보였으나, 애플의 다양한 모바일 기기와 콘텐츠를 관리하는 핵심도구가 됐다. 하드웨어 운영체제의 손쉬운 업그레이드는 물론, 뮤직스토어, 앱스토어, 북스토어 등 애플이 미래에 출시할 제품과 콘텐츠까지도 연계되도록 설계됐다. 애플 사용자로 하여금 지속적인 구매에 이르도록 하는 촉매제 구실도 했다.

8. 아이폰(2007년)

애플이 내놓은 터치식 스마트폰으로, 이후 앱스토어와 결합해 스마트폰 혁명을 이뤄낸 기념비적 제품이다. 출시 당시엔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컴퓨터도 제대로 못 만드는 애플이 전화기를 만든답니다"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이후 아이폰 3G, 아이폰 4로 이어지면서 갈수록 영향력이 커졌고, 통신 시장구조와 사용자 환경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9. 앱스토어(2008년)

전세계 개발자들이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판매하도록 한 콘텐츠 장터로, 아이폰과 아이패드 생태계를 만들어냈다. 아이폰 출시 1년 뒤 나왔으며, 아이폰을 기존의 스마트폰과 완전히 다른 제품으로 만들었다. 매출은 개발자와 애플이 7:3으로 나누며,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안겨줬다.

10. 아이패드(2010년)

아이폰과 같은 운영체제를 사용하고 기능적으로도 유사한 태블릿피시(PC)다. '화면 커진 아이폰'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숱한 업체들이 도전했다가 실패한 태블릿 시장을 제패했다. 미국에서 출시 첫날에만 30만대가 팔렸고, 6개월 만에 판매량이 600만대를 넘어섰다.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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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단독] “3D TV 편광방식이 확산될 것”<세계일보>
입력 2011.04.15 (금) 00:00, 수정 2011.04.15 (금) 08:26   
        

‘아바타’의 캐머런 감독, LG전자에 우호적 발언

지난해 5월14일 서울 강남구 삼성 서초사옥. 세계에 3D 붐을 일으킨 영화 ‘아바타’의 연출가 제임스 캐머런(사진) 감독과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프로듀서, 삼성전자가 3D 콘텐츠 협력을 위한 공동기자회견을 열었다. 캐머런 감독은 그 전날엔 ‘서울디지털포럼 2010’ 기조연설에서 삼성의 액티브 셔터 글라스 방식 3D TV가 관련 기술의 정점이라고까지 치켜세우면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삼성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캐머런 감독이 돌변했다. LG전자의 3D TV 기술인 패시브 필름패턴 편광안경(FPR) 방식을 치켜세우고 나선 것이다.

14일 외신 등에 따르면 캐머런 감독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방송장비 전시회인 전미방송협회(NAB) 쇼 기조연설에서 “나는 액티브 셔터안경 방식 3D TV의 팬이 아니다”며 “패시브 방식이 액티브를 넘어 3D TV를 지배할 때, 홈 3D 확산에서 다음 분기점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몇백 달러짜리 액티브 안경을 사느니, 재활용 가능하고 저렴하면서도 양쪽 눈에서 좋은 화질을 구현하는 패시브 방식이 가정에서 급격히 확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의 셔터방식을 완전히 깎아내린 것이다.

삼성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캐머런 감독이 왜 태도를 180도 바꿨을까. 업계는 삼성전자와 캐머런 감독 사이에 3D 콘텐츠 사업과 관련된 모종의 마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캐머런 감독은 액티브 안경이 고가이기 때문에 3D TV 보급이 늦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며 의미를 애써 축소했다. 안경 2개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가격도 최소 50달러로 인하해 비용은 큰 문제가 안 된다는 입장이다.

삼성과 LG는 현재 3D TV 기술을 놓고 불꽃튀는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캐머런 감독의 발언이 3D TV 시장 경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최현태 기자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영화 ‘해운대’ 윤제균 감독과 쓰나미… “영화서 포기했던 원전 폭발… 현실이 됐다”
국민일보|
입력 2011.03.17 18:25
"영화 '해운대' 보는 것 같다." TV로 방송된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 화면은 우리에게 영화 해운대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재앙을 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거였다. 해운대는 지진에 둔감한 한국인이 쓰나미를 얘기할 때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간접경험이다.

얄팍하다는 것, 안다. 10여m 파도가 도시를 잠식하는 컴퓨터그래픽 화면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배우들의 연기를 두 시간 소비한 것으로 일본의 통탄을 헤아릴 수 없다. 그저 1000만 관객이 구매한 영화를 발판 삼아 성난 자연의 위력을 짐작할 뿐이다.

해운대를 만든 윤제균(42) 감독을 14일 서울 논현동 'JK픽쳐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영화는 일본 서쪽 해역에서 강진이 발생해 대마도가 가라앉고 초대형 쓰나미가 부산 해운대로 몰려온다는 설정 아래 만들어졌다.

영화 속 지진은 규모 8.5, 쓰나미 최고 속도는 시속 700㎞. 이번 동일본 대지진의 규모는 9.0이었다.

"현실이 더 영화 같고, 영화가 현실 같기도 하고. 막 무섭고 이상하고. 해운대 찍을 때만 해도 쓰나미 규모를 너무 크게 잡은 거 아닌가 했는데 이번 뉴스 화면은 더 끔찍하고 생생하고…. 영화 속 재앙이 현실이 돼 버렸네, 묘하다, 이상하다, 무섭다, 그런 마음이네요. 해운대 찍었던 배우들에게서 전화가 많이 오고요."

그의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열뜬 얼굴의 윤 감독 뒤에는 제작·연출한 영화 포스터가 두 줄로 전시돼 있었다. 짙은 먹구름 밑에서 배우들이 두려운 눈동자를 하고 있는 해운대 포스터는 아랫줄 왼쪽 두 번째 자리에 걸려 있었다.

해운대를 기획한 시점은 2004년 12월. 당시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를 덮친 쓰나미 뉴스가 연일 TV에 나올 때 윤 감독은 해운대에 있었다. TV 화면을 보고 '100만 인파가 몰려든 해운대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하는 생각에 빠졌다. 5년 뒤 이 상상은 영화가 됐다.

영화 기획 단계에서 쓰나미 때문에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원자력발전소가 폭발 위기에 놓인다는 설정을 넣으려 했다. 원전 책임자가 폭발을 막으려 고군분투한다는 내용도 검토됐으나 스토리가 복잡해질까 봐 삭제했다고 한다.

"원전 폭발을 영화에 넣으면 결국 방사능 유출 얘기로 넘어가고, 그럼 아무리 영화지만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잖아요. 도저히 끝맺음이 안 되니까. 원전이란 게 쉽게 가동이 중단되는 게 아니고 또 중단되면 다시 가동하는 것도 쉽지 않다더군요."

재난·모험 영화가 재미를 주는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절대 발생하지 않을 사건을 위험하지 않게 경험하고픈 욕망, 영화를 보고 나서 증가하는 현실의 안락함에 대한 감사. 영화가 개봉된 2년 전, 누구도 한반도 가까이에서 이런 초대형 재앙이 벌어지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를 12세 이상 국민 4명 중 1명이 관람하고 열광한 배경엔 이런 낙관도 작용했을 것이다. 인간의 계획과 예상은 얼마나 허망한가.

"비행기 타면 고작 1시간 만에 도착할 곳에서 이런 일이 생기니까 인도네시아 쓰나미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느껴지는 거죠. 또 인도네시아 쓰나미는 관광객들이 캠코더에 찍은 영상이 방송됐는데, 이번엔 방송국이 중계하는 압도적인 영상을 우리가 본 거예요. 정말 사람은 나약할 수밖에 없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죠."

물은 제 갈 길을 간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고 잠깐 기다려 달라 할 수도 없다. 피하지 못한 집채와 자동차, 사람은 그 물에 떠오르거나 가라앉는다. 한순간이다. 그제야 인간은 인간임을 깨달아 자존(自尊)을 버리고, 순응을 배운다. 종교, 환경주의, 인도주의, 원전 반대 등 각자의 방법으로 방황의 출구를 찾는다. 방향은 다르나 모두 겸손해지는 쪽이다. 수많은 사람이 자연에 살해돼도, 자연을 단두대에 세우는 법은 없다.

"나 혼자 살려고 아우성치지 않고 일본인들이 침착하게 대응하잖아요. 줄을 길게 서도 불평하지 않고, 먹을 만큼만 식품을 사고. 겨울이 온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것처럼 자연재해를 수없이 경험한 일본인들은 순응할 줄 아는 것 같아요."

영화를 찍으면서 윤 감독은 물의 공포를 체험했다. 배우 엄정화가 물이 차오르는 엘리베이터에 갇혀 마지막으로 딸과 통화하는 장면을 찍을 때다. 엄정화의 입술까지 물이 차올라 까치발로 서서 허우적거린다. 그걸 찍을 때 엘리베이터는 물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강한 쇠 빔을 여러 개 박아 만든 엘리베이터였어요. 겨우 물이 반만 찬 상태에서 박살나더라고요. 그 튼튼한 쇠 빔을 쪼개다니, 물의 위력이 이런 거구나, 정말 오싹했어요. 결국 엘리베이터 다시 만들어서 촬영했죠. 겨우 세트장에서의 경험도 그런데 실제로 겪는다면 공포가 오죽할까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거죠."

동일본 대지진 이후 국내 방재 시스템을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부산·경남은 불안감이 크다. 한반도는 유라시아판 안쪽에 있어 큰 지진이 발생할 확률은 높지 않다. 그러나 일본 서쪽 해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한다면 부산까지 여파가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05년 3월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북서쪽 해역에서 규모 7.0 지진이 발생하자 부산의 건물이 흔들려 대피 소동이 있었다.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일본 서쪽에서 쓰나미가 발생하면 부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를 전문가로부터 들었어요. 제 영화로 인해, 또 이번 재해로 인해 우리나라 재난방지 시스템도 다시 점검됐으면 좋겠어요."

윤 감독이 요즘 기획하는 영화는 '템플스테이'. 외국인 가족이 사찰에 머무는 동안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모험영화다. 외국 영화 '박물관이 사라졌다'나 '인디아나 존스'류의 영화로 제작비는 해운대(130억원)를 훌쩍 넘는 300억원 이상이라고 한다. '두사부일체' '색즉시공1' 등 코미디로 시작한 감독의 행보는 미개척 장르로 뻗어가고 있다.

"'해운대2' 얘기도 나오는데 영화적으로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재난영화 해보니까 어휴, 정말 힘들고요. 또 이번에 대재앙이 왔다고 해서 그걸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싶지도 않고."

부산 출신인 기자는 왜 영화 속 부산사람은 다들 억세고 과격하냐고 농담 삼아 물었고, 부산 출신 감독은 그런 면이 좀 있는 건 사실 아니냐고 답했다. 시시콜콜한 대화였다. 이러쿵저러쿵 말해 봐야 남의 아픔은 여과돼 찌꺼기는 빠지고 허연 액체만큼만 전달될 뿐이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평안함과 고요함에 감사한다면, 이 또한 이기적인 것일까.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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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트위터 창업자 스톤 "퀵퀵퀵! 그게 트위터다"
기사입력 2011.03.03 17:28:46 | 최종수정 2011.03.03 21:01:23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 MBN 세계경제와 미래포럼 ◆

"퀵퀵퀵(Quick, Quick, Quick), 그게 트위터다(That`s what twitter is)."

비즈 스톤 트위터 공동 창업자는 `퀵`이라는 단어마다 손가락을 튕겨가며 말했다. 빠르다는 게 트위터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몸짓이다.

트위터는 2006년 시작된 140자 단문 블로그 서비스. 현재 전 세계 사용자가 2억5000만명이 넘는 초대형 소셜네트워크서 비스(SNS)다.

스톤이 말하는 `빠르다` 의미는 두 가지다. 우선 트위터로 빠르게 전 세계에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휴대전화, PC에서 140자로 지인에게 실시간으로 하고 싶은 말을 보낼 수 있다. 2억명이 넘는 사람이 보낸 짧은 문장이 모이면 전 세계 어떤 미디어보다 새로운 소식을 빨리, 자세하게 전할 수 있다. 이를 `140자의 마법`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트위터가 빠르다는 두 번째 의미는 시장 요구에 기민하게 대응한다는 뜻이다. 트위터는 올해 초 한국어 서비스를 시작했다. 트위터 사용자가 2500만명에 달하는 중국에서도 현지어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 스톤은 "한국 사용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고 한국어 서비스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기 때문에 빨리 한국어 서비스를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트위터로 세상을 "재미있게 변화시키고 싶다"고 말할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것에 더해 재미까지 세 가지 요소 모두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를 항상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미래를 확신하는 사람이 오히려 미래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 데서도 이런 점이 드러났다.

최근 최고경영자(CEO) 교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당당했다.

지난해 말 트위터는 본격적으로 수익 사업을 벌이기 위해 새 CEO로 구글 출신 딕 코스톨로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선임했다. 이전 CEO는 스톤과 함께 트위터를 창업한 에번 윌리엄스가 맡았었다.

스톤은 "원래부터 잘하던 것을 찾아간 자연스러운 변화(natural change)기 때문에 CEO 교체 후 큰 변화는 없다"며 "윌리엄스는 현재 서비스 개선, 제품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CEO 교체 덕분인지 수익 사업도 성과가 좋다. 스톤은 "초기 트위터는 수익에 앞서 서비스 가치를 높이는 데 치중했지만 현재 3개 서비스의 반응이 매우 좋다"며 "구체적인 수치를 밝힐 수는 없으나 상당한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위터는 지난해 약 4500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업계는 올해 트위터 매출이 1억~1억2500만달러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스톤은 또 "트위터를 독립적인 회사로 남길 것"이라며 최근 불거진 구글과의 인수설에 대해 선을 그었다. 그는 "꼭 인수ㆍ합병(M&A)을 하지 않고서도 좋은 협력 관계를 통해 서로 필요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트위터를 매각하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스톤은 "구글이 소셜 분야를 강화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 He is...

1974년생. 미국 캘리포니아. 트위터를 창업하기 전 벤처기업인 장가(Xanga), 블로거(Blogger), 오데오(Odeo), 오비어스(Obvious)에서 창업 멤버로 일했다. 블로거가 구글에 인수된 뒤에는 잠시 구글에서 일하기도 했다. 구글에서 나온 뒤 트위터를 만들었다. 디자이너답게 자유롭고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블로깅(Blogging:Genius Strategies for Instant Web Content), 누가 블로그를 닫았나?(Who Let The Blogs Out?) 등 몇 권의 블로그 관련 글도 저술했다. 우유도 마시지 않는 열렬한 채식주의자다.

[최순욱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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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워즈니악, 말 알아듣는 `아이폰 앱`
음식점 예약에 택시까지 불러줘
기사입력 2011.03.03 17:29:45 | 최종수정 2011.03.03 19:08:56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 MBN 세계경제와 미래포럼 ◆

"새로 나오는 아이폰 앱은 가장 큰 관심거리다."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 공동창업자(60)는 3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MBN 미래포럼에서 새로 나오는 아이폰 앱들이 본인의 최고 관심사인 동시에 삶을 바꾸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런 언급은 PC를 최초로 만든 주역이 `포스트PC(PC가 아닌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주요 입력도구)` 시대가 도래한 것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 그는 아이폰 캘린더에 그날의 일정을 시간대별로 빼곡하게 입력해두고 있었다.

워즈니악은 "앱은 아침 잠을 깨워주고, 집안 전자제품을 조종하는 리모컨이 되며, 실시간 다국어 통번역 앱도 정말 유용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음성으로 모든 일을 하는 방향으로 스마트폰이 진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폰에서 가능한 음성 명령, 검색, 인식 등 다양한 기능을 가리킨 설명이다.

사용자의 음성을 인식하고 문자화해 빠르게 검색해주고 실시간 번역해주는 기능은 이미 일부 스마트폰에 기본 탑재되거나 앱 형태로 들어가고 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폰7 등 애플 `아이오에스 운영체제(iOS OS)`의 경쟁자가 여럿 등장한 것과 관련해 그는 "애플이 방향을 제시했더니(Set the tone) 안드로이드가 가장 빨리 따라오고 있다"면서 "구글은 이동통신사들이 장악해온 휴대폰 시장에 뛰어들어 유력한 모바일 OS를 내놓았고 통신요금도 낮췄다"고 말했다. 애플이 지난해 말 기준 시가총액 2958억달러(약 331조원)로 정보기술(IT) 업계 1위 기업으로 우뚝 선 데 대해서는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꺼리는데 애플은 그렇지 않다"면서 "애플은 언제나 동시대에서 가장 놀라운(Most Incredible) 제품을 만들어왔다"고 말했다.

워즈니악은 당대 최고의 컴퓨터 엔지니어로 평가받지만 인터뷰와 세션에서는 놀랍도록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워즈니악은 "잡스가 (특유의 비즈니스 감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 뭐가 제품이 돼야 할지 안 될지 잘 안다면, 나는 수줍음 많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채로 제품을 만드는 스타일"이라며 "그래도 처음에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이 실제 제품화되면 스스로 매우 뿌듯하다"고 말했다.

실제 애플 창업 초기에 스티브 잡스는 워즈니악의 기술적 공로를 가로챈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문자를 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그래픽으로 보여주고 터치 한 번으로 모든 기능을 사용하며 사용설명서를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직관적인 아이폰의 사용자환경(UI)은 워즈니악이 처음 생각해낸 것이다.

1979년 제록스 기술시연회에 갔다가 영감을 얻어 그래픽 UI를 개발했으며 이를 컴퓨터(매킨토시)에 탑재해 모니터에 배경과 글씨가 나올 수 있도록 했다. 이 직관적인 UI는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로 이어지는 i(아이) 시리즈의 뿌리를 이뤄 워즈니악은 `아이워즈(iWoz)`로도 불린다.

그에게는 `마지막 해커` `마법사 워즈(Wizard Woz)` 등 수식어도 따라붙는다. 대학시절 무료로 전화를 걸 수 있는 해킹 장치인 `블루박스`를 만들어 선한 목적으로 해킹을 시도한 마지막 인물로 평가받는다.

HP에서 계산기 개발 업무를 하던 그는 "회사를 만들더라도 관리업무는 하지 않고 평생 엔지니어로 남을 수 있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에 넘어가 잡스와 함께 1976년 애플을 공동 창업했다. 애플을 키운 후에는 일반 직원들에게 자신의 개인 주식을 헐값에 나눠줘 그들을 백만장자로 만들어줬다. 고생은 함께했는데 일부에게만 부가 돌아가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1981년 비행기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애플에서 물러났고 회복 후 다시 애플로 돌아갔다. 그러나 순수 전자공학도인 그는 애플이 급성장하면서 생기는 대외출장 등 `잡무`가 끔찍하게 싫어 애플을 그만뒀다.

1983년 `클라우드9`이라는 회사를 차려 통합 리모컨을 발명했고 2002년 자신의 애칭을 딴 회사 `워즈`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후 투자업체 액콰이어사를 설립하고 애플의 직원 및 주주 상태를 유지하는 동시에 자문역을 맡고 있다. 록 콘서트 기획자로, 초등학교 컴퓨터 교사로, 실리콘밸리의 자선가로, 강연가로도 활약 중이다.

워즈니악은 2007년에 이어 한국을 두 번째 방문했다. 강연에 곧잘 나서지만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고 외신과의 인터뷰도 매우 드물다.

그는 지난 2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아이패드2 발표에 앞서 스티브 잡스의 건강 이상설을 정면 부인하고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고 말했다. 또 잡스가 아이패드2 발표장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단언했다.

■ He is

스티브 워즈니악은 1976년 스티브 잡스 애플 최고경영자(CEO),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하고 차고에서 인류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1`, `애플-2`, 매킨토시를 개발했다. 세계인이 열광하는 애플 특유의 직관적인 사용자환경(UI)은 그가 처음 생각해낸 것이다. 그는 모니터에 배경과 글씨가 보이도록 하는 등 그래픽적 요소를 접목해 당시 마이크로소프트가 지배하던 도스(DOS) 방식에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애플을 떠난 이후 발명, 창업, 록 콘서트 기획, 초등학교 컴퓨터교육, 자선가, 강연가 등으로 활동하면서도 애플의 직원, 주주, 자문 역을 유지하고 있다. 빌 게이츠와 함께 현존하는 최고의 컴퓨터 엔지니어로 불린다.

[황시영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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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갤럭시탭은 아이패드 모방품에 불과"
기사입력 2011.03.03 08:49:52 | 최종수정 2011.03.03 17:05:04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애플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2 설명회에 `깜짝 등장`, 갤럭시탭을 비판하는 등 건재함을 과시했다.

잡스는 2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예르나 부에나 센터에서 열린 아이패드2 발표장에 나타나 열정적인 모습으로 아이패드2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잡스가 무대에 오르자 청중들은 기립박스로 환호했고 그는 미소를 보이며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아이패드 2` 설명 도중 `갤럭시탭`을 언급했다.

잡스는 삼성전자 이영희 모바일 마케팅 부사장까지 언급하며 "삼성이 지난해 (태블릿PC)를 내놨는데 시장 진입은 성공했지만 판매는 200만대에 그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잡스가 행사 도중 갤럭시탭을 언급한 것은 아이패드가 갤럭시탭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구글 안드로이드 플랫폼을 탑재한 대표 제품에 대한 경계감을 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잡스는 또 휴렛팩커드(HP)와 모토롤라, 리서치인모션(RIM) 제품도 함께 언급하며 아이패드 `모방품`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한편 이날 발표한 아이패드2는 시장 예상대로 기존 제품보다 두께가 얇고 가벼워졌으며 카메라 2개가 탑재됐다.

이 제품은 오는 11일부터 미국에서 판매를 시작한다.

한편 바클레이스 캐피탈은 애플 아이패드의 판매량이 올해와 내년 각각 3370만대, 4210만대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상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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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대행 팀 쿡, 잡스 못지않은 열정 종결자

송주영 기자 jysong@zdnet.co.kr 2011.01.24 / PM 03:27 팀 쿡, 애플, COO

스티브 잡스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또 병가를 내면서 IT업계 관심이 잡스 CEO 업무를 세 번이나 대행하게 된 팀 쿡 최고운영책임자(COO)에게 온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잡스 CEO가 실리콘밸리에서는 독보적인 창의성, 열정을 갖춘 인재로 평가받는 만큼 지난 병가 때도 그의 존재를 무난하게 메운 것으로 평가받는 쿡 COO가 이번에도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에 대해 온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 팀 쿡 애플 COO

23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는 팀 쿡 COO에 대한 일화 등을 통해 그의 면모를 자세히 소개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쿡 역시 잡스 못지 않은 업무에 대한 열정의 소유자라는 설명이다.

 

뉴욕타임스는 팀 쿡에 대한 소개로 몇 개월전 싱가포르 출장을 언급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싱가포르까지는 무려 18시간이 걸린다. 쿡 COO는 싱가포르 출장 비행기 안에서 동료 임원진과 겨우 몇마디만을 나눴다고 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비즈니스석에 마련된 좌석에 묻혀 애플 아시아 지역 임원진과 나눌 의견을 정리하는데 보냈다.

 

오전 6시에 도착한 팀 쿡 COO는 샤워, 아시아 지역 애플 임원과의 회의를 준비하는데 시간을 보낸 후 장시간에 걸친 회의를 진행했다. 12시간 후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자 애플 아시아 지역 임원진은 회의에 지쳐 슬슬 마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이클 제인스 애플 임원은 “아시아 지역 애플 임원들은 많이 지쳐있었지만 쿡은 아니었다”며 “이후에도 다음 슬라이드로 계속해서 넘어갈 준비를 하며 열심히 일했다”고 설명한다.

 

팀 쿡은 이후에 그 열정으로 잡스 CEO를 대신해야만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현재는 잡스 CEO 이후 애플 경영을 맡게 될 유력한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

 

잡스 역시도 열심히 일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데 실리콘밸리에서 최고라고 꼽히고 있다. 팀 쿡도 열심히 일한다는 면에서는 잡스와 비슷한 평가를 받지만 외부 평가를 그 둘은 상반된 인물로 묘사한다.

 

잡스는 변덕스러운 인물로 독단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자신이 만든 애플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반면 쿡은 알라바마의 작은 도시에서 자랐으며 예의바르고 부드러운 스타일로 알려졌다. 쿡은 종종 ‘남부신사’로 평가되기도 한다.

 

잡스가 상품의 자세한 부분까지 모두 관여한다면 쿡은 운영과 관련한 부분에 전문가다. 잡스와 쿡의 환상적인 조화가 애플이 미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환을 하고 높은 시가총액으로 평가받는 기술회사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팀 쿡은 지난 1998년 애플에 입사했으며 잡스를 비롯해 뛰어난 경영진 아래서 열정적으로 일했다. 쿡의 업무는 애플 제품을 구분해 전 세게에서 생산, 조립, 출하해 수익을 만드는 것이었다. 쿡은 이 업무를 맡으면서 단기간에 공급망에서 비효율을 제거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쿡과 자주 출장을 다녔던 애플 전임 경영진은 “공급업체와의 회의가 정말 좋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쿡은 미스터 스프레드시트로 불렸으며 만일 공급업체의 주장이 맞지 않으면 공급업체를 주문하고 그들의 요구를 개선했지만 동시에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설명한다.

 

애플이 PC사업으로 커졌을 때 제조 업무를 개선한 것도 팀 쿡의 작품이다. 당시 애플은 캘리포니아, 아일랜드, 싱가포르 등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했다. 90일 동안의 재고물량을 보유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팀 쿡은 이를 과감히 아웃소싱 모델로 전환하면서 출하에 맞춰 생산하는 체계로 바꾸고 재고량이 감소될 수 있도록 했다. 팀 쿡 주도 아래 애플 재고 물량은 30일분으로 줄었다.

 

잡스의 상상력, 기술자, 개발자로서의 전문성이 애플 제품을 만들었다면 팀 쿡의 운영 능력은 애플이 좋은 제품을 늘리고 분기매출 267억달러 규모 회사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TAG 팀 쿡

입력: 2011-01-16 08:55 / 수정: 2011-01-16 09:23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신년 인터뷰] 프랑스 대표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컴퓨터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 상상력 넘을수 없어"
"한국은 제2의 조국 한반도 지정학적 위험 나에게도 민감"
기사입력 2011.01.16 17:05:15 | 최종수정 2011.01.16 21:38:38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커다란 개미가 걸려있는 파리의 집필실에서 새 작품을 구상 중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사진 제공=열린책들>

"상상력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하더라도 인간이 가진 `창조` 능력은 갖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컴퓨터는 절대로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죠." `개미`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50)가 새해를 맞아 매일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했다. 두 번에 걸친 이메일을 통해 이뤄진 인터뷰에서 작가는 상상력과 창의력 그리고 스스로 `제2 조국`이라는 한국과 한반도 문제 등 폭넓은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자연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문학세계로 한국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그는 인터뷰 말미에 한국 독자에 대한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한국은 미래지향적인 나라입니다. 항상 미래를 향해 열심히 달려나가는 나라죠. 또 모든 창의적이고 독특한 것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한 `젊은 나라`예요. 그것이 제가 한국을 좋아하는 이유이자, 한국 독자들이 저를 사랑해주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해 있으니까요."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유독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다. 출판사 측은 그의 책이 국내에서만 500만부 가까이 팔렸다고 밝혔다. 베르베르 데뷔작인 `개미`는 150만부가량 팔렸다. 그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한다. 작가 자신은 이런 인기 원인이 "늘 새로운 것을 찾는 한국인 기질 때문"이라고 답했다.

우리나라 독자들이 보내주는 뜨거운 사랑이 다행히도 `짝사랑`은 아니다. 작가는 "한국은 작가로서 나를 발견해 준 최초의 나라"라며 한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과시한다. 첫 작품을 펴냈을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그의 가치를 가장 처음 알아봐준 것이 바로 한국 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베르는 한국 독자들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싶어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고맙습니다`를 비롯해 간단한 한국말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 심지어 한국은 "프랑스에 이은 제2의 조국"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베르베르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작품 속에 한국인을 등장시키는 것으로 간혹 표현된다. `신`에서 `은비`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 소녀를 등장시킨 것이 한 예다.

한국인이 주인공인 작품도 있다. 최근 번역ㆍ출간된 `카산드라의 거울`이다. 미래를 보는 소녀 `카산드라`와 왕년의 외인부대원, 한국인 컴퓨터 천재 김예빈 등 노숙자 네 명이 재앙을 예견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는 이야기다.

베르베르는 "어쩔 수 없이 순응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필수"라며 "다가오는 미래에는 모두가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작품 배경을 쓰레기 하치장으로 설정한 것은 "하다못해 쓰레기 하치장 같은 곳에서도 미래에 대한 준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아본 독자들은 `한국인 주인공`에 대해 약간 실망감을 표했다. 등장인물 `김예빈`은 주인공 `카산드라`에 이은 주요 등장인물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주인공은 아니다. 게다가 그는 `탈북자` 출신 프랑스인. `주인공인 남한 사람`을 기대했던 독자들은 실망하기도 했다.

독자 반응을 전하자 베르베르는 "나는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지정학적 문제(위험)들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김예빈을 탈북자로 설정한 것은 북한에서 발생하는 불행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김예빈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출하고자 애쓰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베르는 "한반도 문제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며 "온 마음을 다해 대한민국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고 전했다.

"저는 중세시대적인 북한 정권이 현대 민주주의 정권으로 교체되는 것으로 끝을 맺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루빨리 두 한국이 통일되어 헤어진 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는 또 "한국은 미래가 매우 밝은 나라"라고 평가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한국만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강한 생존력에 놀라게 된다고도 했다. 그는 과학 기술에 대한 뜨거운 관심 역시 한국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덧붙였다.

"한국 독자들을 만날 때면 늘 기대를 갖게 됩니다. 새로운 작품을 낼 때면 한국 독자들이 어떻게 평가해줄지에 늘 관심을 갖게 되고요."

"지금껏 출간된 작품보다 아직 발표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는 그에게 끝없는 상상력이 솟아나는 원천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규칙적으로 상상하는 습관`이 비결"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상상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전 8시부터 난 12시 30분까지 매일 4시간30분 동안 글을 씁니다. 그런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비현실적인 것(상상)이 현실(글)이 되는 경험을 하지요.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여행도 많이 하고요."

또한 그는 창의력을 발휘하는 데 `주체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남이 하라는 대로 해서는 절대로 창의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율이 곧 창조를 의미한다"며 "스스로 자기 운명을 이끌어나가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역시 중요하다. 자신이 상상하고 꾸며낸 것들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현실 세계로 끌어올 힘 또한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는 자기 능력과 개성을 펼치는 데도 꼭 필요한 요소다.

그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생과 우주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믿는 것이 필수"라고 피력했다.

그는 지금껏 창의력과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주로 써왔다.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작품 `개미`는 개미 시각으로 사랑과 반역, 투쟁을 그린 작품. 개미 생태에 대한 세밀한 묘사에 녹아 있는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작품을 한층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그 밖에도 사후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 `타나토노트`를 비롯해 `천사들의 제국` `파피용` 등 그의 작품은 출간 즉시 서점가에서 화제가 되곤 한다.

베르베르가 상상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이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는 기발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결국은 현실을 꼬집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베르베르 역시 "나는 상상을 통해 현실을 이야기한다"며 "(글을 쓰는 데 있어서는)상상과 현실을 잘 구분해내는 현실감을 잃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글쓰기란 여러 가지를 실험해볼 수 있는 실험실과 같다"고 말하는 베르베르는 매일 작은 노트북PC 하나를 들고 집 근처 카페에 나가 글을 쓴다. 다음 작품으로는 " `개미` 작품 정신에 기반한 장대한 소설 두 편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생각이란 마치 바이러스처럼 스스로 생명력을 갖고 퍼져나간다"며 "그래서 소설과 문학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저는 제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아마 다른 모든 작가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가진 생각을 누군가가 평가하고 비판한다는 사실에 겁을 먹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두려움을 버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1961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부터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해 고등학교 때에는 만화로 된 신문 `유포리`를 발행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과학 잡지에 개미에 관한 평론을 발표했다. 1991년 120여 회의 개작을 거쳐 출간한 소설 `개미`로 단숨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에도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사후세계를 소재로 한 `타나토노트`, 뇌에 관한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 탐구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준 `뇌`, 신들의 게임을 통해 인간 세상을 우의적으로 풍자한 `신` 등 창의성과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프랑스 내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는 두꺼운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다. 그의 작품은 35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2000만부 가깝게 판매됐다.

[정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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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언 "가장 마지막에 꽃 피웠으면..">

21-22일 '영상콘서트-네오라마' 개최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어제 일본에서 왔다"는 의사 출신 재일 한국인 2세 피아니스트 양방언(51)은 새로운 도전 거리에 흥이 났는지 컨디션이 좋아보였다.
그는 오는 21-22일 광장동 악스코리아에서 '영상콘서트-네오라마(NEORAMA)'란 타이틀로 자신이 프로듀싱한 영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게임, CF 등의 OST 곡들을 영상과 함께 선보인다.

   그간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작업한 일본 NHK 애니메이션 '십이국기', 니혼TV 애니메이션 '엠마', KBS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 엔씨소프트 온라인 게임 '아이온(AION)' 등 OST 곡들을 한 무대에서 펼쳐보이는 것이다.

  
최근 양방언의 숙소인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한 그는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 회사인 스튜디오 피에로의 회장님이 이 공연의 아이디어를 냈다"며 "그간 왜 이런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이 곡들을 처음 라이브로 들려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네오라마'란 타이틀은 전방위적인 창작 활동을 하는 그의 음악 세계와도 맞아떨어진다.

   "'파노라마'란 제목의 제 음반이 있어요. 전 이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좋아요. 몽골의 초원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마치 그곳에 있는 듯 360도의 공간감이 느껴지거든요. 생소한 공간에 갔을 때의 자유로움도 떠오르고요."
이 단어에 '새롭다'는 뜻의 '네오(NEO)'를 조합한 것은 단순히 LED에 영상을 틀어두고 OST 곡들을 연주하는게 아니라 새로운 창작물을 선보인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OST 곡들을 재편곡하거나, 짧은 곡을 대곡으로 완성했다"며 "관객의 몰입을 위해 총 25곡 중 6-7곡씩을 하나의 섹션으로 묶어 일관성 있는 스토리로 선보인다. 또 2명의 영상 작가를 기용해 이 음악에 맞는 새로운 영상도 창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지난 창작 활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십이국기'는 8년 전 작품인데 '이때 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라고 느꼈죠. 평소 전 후회를 안해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단지 만약에 그 작품의 속편이 나오면 다르게 음악을 만들고 싶단 생각은 하죠."
그렇다면 니혼의과대학 출신의 의사에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인의 길을 택한데 대한 후회도 없는지 물었다. 그는 지난해 출간한 자전적인 책 '프런티어, 상상력을 연주하다'를 쓰며 시간을 되돌려봤다고 했다.
"그즈음 신기한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났어요. 제가 진료받으러 간 병원에서 과거 함께 병원에서 일한 의사 선배를 만났고요. 개를 끌고 산책을 하던 중 만난 부인이 제 고교 동창의 아내였죠. 과거를 떠올려주는 만남이었는데 다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 지 궁금해지더군요. 아마 지금의 제 아내도 안 만났고, 다른 나라에서 살고있을 지도 모르죠. 하하."


그러나 양방언은 시간이 반복되도 자신 안의 정답은 음악일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아들을 의사로 키우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죄송함은 지금 음악에 매진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는 내게 떠날 수 없는 개념이기에 나와 공존한다"며 "죄송한 마음도 있지만 그 마음만이 계속되면 안된다. 그 힘으로 나아가야 한다. 단지 임종을 못 지킨 게 후회된다. 그래서 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다"고 말했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이 깊은 건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북한 국적의 제주 출신 아버지와 남한 국적인 신의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로인해 지난해 북의 연평도 포격 사건 등 남북의 대치 상황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지켜봤다고 한다.

   "전 열강들의 세력 다툼에 한반도가 무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장 걱정되는 건 어려운 환경의 북한 주민들이죠. 지금 어머니가 86세인데 빨리 통일이 돼 신의주에 가보고 싶어하세요. 가슴이 아파요."
총련계 중학교를 다니며 일본에서 성장한 그는 일본에서 인 한류 열풍을 바라보는 남다른 감정도 있다고 했다.
"광복절만 되면 한국 미디어에서 연락이 와 주위에선 나를 '광복절 아티스트'라고 부른다"며 웃은 그는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이 현상을 바라본다"며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일본은 더 깊이 한국을 의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류는 드라마부터 음악까지 장르가 다양해졌다"며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입구가 열렸으니 대중문화 콘텐츠 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도 올곧게 흡수됐으면 좋겠다. 그런 흐름 가운데 나의 역할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음악인생 30년 동안 다양한 음악 세계에 도전한 그에게 여전히 개척하고픈 영역이 있는 지 물었다.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돌아온 답변은 뮤지컬이다.

   "매번 눈 앞의 일을 하면서 다음에 할 새로운 것에 빠지죠. 사실 지금 전 뮤지컬 모드가 돼 있답니다. 하고 싶은 게 많으니 제가 음악인으로 만개하려면 아직 멀었죠. 중간에 피는 꽃은 시들테니 가장 마지막에 꽃을 피웠으면 좋겠어요."


mimi@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1/11 06:35 송고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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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칼린 " 지금도 조승우를 망원경으로 지켜본다"

  • 조선닷컴
박칼린(Kolleen Park·43) /사진=여성조선
KBS 2TV ‘남자의 자격’에서 오합지졸 합창단을 진두지휘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낸 박칼린(Kolleen Park·43). 강한 카리스마와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진정한 리더라는 평을 받은 ‘영혼의 지휘자’ 박칼린의 어제와 오늘을 그녀가 최근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 ‘그냥’을 통해 여성조선이 살펴 봤다.

박칼린은 미국 유학생이었던 한국인 아버지 박근실 씨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아이렌 박 사이에서 셋째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한국무용을 배웠던 큰 언니 킴벌리, 개나리합창단원이었던 작은 언니 켈리, 성악을 전공했던 어머니 밑에서 첼로와 피아노를 배웠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공부를 하던 그녀는 만화영화 대부 ‘디즈니 아저씨’가 세운 명문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 지원해 엉뚱하게도 ‘새타령’을 불러 합격했다고 한다. 대학 4년을 음악과 연극에 흠뻑 빠져 지낸 뒤 지난 1991년 돌연 귀국, 서울대 대학원 국악작곡과에 들어갔다.

박칼린의 어머니는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으로 ESL(모국어가 아닌 제 2의 언어로서의 영어) 교수였고, 아버지는 무역일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녀는 “우리 가족은 모두 음악을 사랑했다”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된 것도 음악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아버지가 뉴욕의 한 대학에서 ‘아리랑’을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에 한 눈에 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생일대 전환점이 된 ‘남자의 자격’에는 왜 출연하게 됐을까. 박칼린은 어느 날 제작진으로부터 ‘만나자’는 이야기를 들었고,처음으로 ‘남자의 자격’을 찾아 봤다고 한다.

“과연 합창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가르칠 수 있을까라는 토론을 했는데 한참 동안 고민을 하다가 매우 흥미로운 퍼즐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대신 그녀가 방송국에 내건 조건은 두 가지. 첫번째는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TV에 출연하겠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각본을 짠 예능은 하지 않겠다는 것.

박칼린은 온 국민을 감동에 빠지게 했던 ‘남자의 자격’ 합창단 공연에 대해 “무대 생활을 30년 했지만 그런 감동은 처음이었다.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며 “솔직히 아직도 후유증이 큰 상태다. 다른 작품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믿어주었던 많은 사람들과 이런 특별한 미션을 안겨 준 ‘남자의 자격’팀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또 ‘박칼린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작가이자 작사자인 양인자와 소설가 이문열, 그리고 배우 조승우. 세 사람과의 만남은 뮤지컬 ‘명성황후’가 계기였다. 그녀는 ‘명성황후’에서 작사가나 작곡가들이 작업한 곡들을 편곡하고 배우에게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박칼린은 양인자에 대해 “언제나 자상하고 소녀 같은 분”이라고 했고, 이문열은 존재감이 명징한 사람이라고 했다. 조승우에 대해서는 “멀리서 망원경으로 지켜봐야 하는 사람”이라며 “그리고 그가 뭔가를 필요로 할 때 그때만 잠시 가까이 가는 게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조승우를 멀리서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기사 전문은 여성조선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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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건축은 共存이다… 거리와 소통하고, 도시에 숨을 불어넣어라"

도쿄=선우정 특파원 su@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건축계의 노벨상' 프리츠커상 받은 日 세지마·니시자와… 건축과 삶을 말하다

가나자와(金澤)는 한국 동해 쪽의 일본 도시다. 역사적 자산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지만, 수도권과 멀어 주목받지 못했다. 이런 도시에 지금 세계인들이 몰리고 있다. '21세기 미술관'이란 이름의 미술관이 개관한 2004년 이후의 일이다.

스페인 소도시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처럼 21세기 미술관은 전시품보다 건물이 더 유명한 미술관이다. 수족관처럼 투명하고 공원처럼 개방적인 이 모던한 건축은 쇠락하던 고도(古都)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꾸고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미술관을 설계한 것은 일본의 건축회사 SANAA(사나아·Sejima and Nishizawa and Associates)다. 회사 이름대로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妹島和世·54)와 니시자와 류에(西澤立衛·44) 콤비가 이끈다. 지난 3월 두 사람이 세계 최고 권위의 건축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았을 때, 일본 언론은 일본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처럼 흥분했다. 하지만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리처드 마이어, 프랭크 게리, 알도 로시, 렘 콜하스, 장 누벨, 자하 하디드 등 세계적 건축가가 이름을 올린 역대 프리츠커상 수상자 명단에서 일본 건축가 5명(수상은 5회)의 이름을 발견하면 새삼 일본의 저력에 놀란다. 단게 겐조(1987년), 마키 후미히코(1993년), 안도 다다오(1995년), 그리고 세지마와 니시자와(2010년)다.



일본 건축가 세지마(오른쪽)와 니시자와. / 사진작가 오카모토 타카시 제공
세지마와 니시자와의 건축사무소는 공장 같았다. 어떤 칸막이도 없는 도쿄 한구석의 커다란 창고에서 그들은 세계 도시를 바꾸고 있었다. 미국 뉴욕의 뉴뮤지엄, 도쿄 오모테산도의 크리스찬 디오르 빌딩,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 러닝센터, 서울 한남동의 현대카드 콘서트홀까지.

日 가나자와에 '21세기 미술관'
쇠락하던 '古都 이미지' 단숨에 바꿔
관광객 몰려와 지역 경제 활력…
한남동 '현대카드 콘서트홀'도 설계


■공원과 같은 건축을 하고 싶다

―일본의 나오시마, 에스파냐 바스크의 빌바오처럼 건축 예술이 도시 이미지를 바꾸고, 도시 이미지가 경제와 활력으로 연결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니시자와·이하 니) "지금까지 늘 일어나던 일이다. 오페라하우스(1973년 완공)에 의해 호주 시드니의 이미지가 국제적이 됐고, 1980년대 노먼 포스터(영국의 건축가)가 홍콩상하이뱅크를 만든 뒤 홍콩의 이미지가 단숨에 세계로 확대됐다. 파리의 퐁피두센터(1977년 완공)도 그렇다. 특별한 건축이 도시에 매력을 주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을 매혹해 끌어당긴다. 물론 건축만으론 오래가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사용하는가가 중요하다. 나오시마의 경우 안도 다다오가 처음 건축을 시작했을 땐 사람들이 잘 몰랐다. 여러 아티스트가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사람들이 모였다. 이사 오는 사람도 생겼다. 주민 인식이 달라지면서 마을의 아이덴티티도 생겼다. 커뮤니티의 힘이다. 지역은 건축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연환경, 역사적 재산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빌바오의 이미지를 변화시킨 것은 구겐하임미술관이지만, 이미지를 강화시킨 것은 빌바오가 가진, 요리와 같은 독자적 바스크(Basque) 문화였다."

(세지마·이하 세) "역사적 재산을 가진 서울도 그렇다. 많은 사람이 흥미를 품는 도시다. 같은 모양의 건물이라도 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건축의 의미가 달라진다. 레스토랑의 요리가 프랑스 요리라도 서울의 프랑스 요리는 서울의 문화를 만든다."

―SANAA 건축의 특징은 투명성과 개방성이다.

(세) "항상 공원과 같은 건축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공원엔 나이가 다른 여러 사람이 여러 목적을 가지고 공존한다. 홀로 휴식해도, 시끌시끌 놀아도 되는 공간이다. 각자 자신의 공간을 만들지만, 공간은 서로 개방되고 연결돼 있다. 무의식 속에서라도 그들은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건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거리에 열린 건축, 거리와 관계하는 건축, 들어가기 쉽고 나오기 쉬운 건축. 그런 철학에서 출발했다."

(니) "우리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건축의 실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연결을 중시한다. 안만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도 잘 만드는 것, 건축을 만들면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관계성을 만드는 건축이다. 단절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관계하면 어떤 관계를 만들까 서로 여러 상상을 시작하고 상상을 넓힌다."

―정원 문화에서 나타나듯 일본의 전통 건축은 건물만이 아니라 환경과 밀접한 연관성 속에 발전해 왔다. '와비사비(한적과 고담의 정취)' '젠(禪)' 등 전통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단순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SANAA의 건축을 보면 일본적이란 인상을 받는다.

'뉴 뮤지엄' 세지마 가즈요와 니시자와 류에가 설계한 미국 뉴욕 맨해튼의 뉴 뮤지엄(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가운데 하얀 건물). 2007년 개관한 이 건물에 대해 뉴욕타임스는“뉴욕이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도시라는 우리의 믿음을 되살려주는 건물”이라고 평가했다. / SANAA 제공
(니) "일본에서 자랐으니까 일본 전통문화의 영향이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건축가이기 때문에 '일본의 전통을 바꿔야지'하고 늘 생각한다.

일본의 전통문화가 지금까지 만들지 못한 것을 만들자는 생각이다. 일본 전통의 틀에 머물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도 해외에선 ‘일본적’이라고 평가한다. 일본적이지 않은 것을 만들겠다고 해도 우리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결국 일본 전통의 일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인터뷰에서 ‘일본인에게 야만성이 부족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니) “대륙인들의 건축을 보면 인간적이다. 상당히 와일드하고 거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다이내믹하고 인간적인 에너지가 분출한다. 부분부분이 정밀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감동적이다. 유럽의 건축, 아시아의 건축에서도 일부 느껴진다.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세) “일본은 성실하고 정교하고 깨끗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반대로 부족한 점이기도 하다.”

"일본 건축 섬세함이 너무 지나쳐
거칠고 역동적인 대륙의 양식 좋아…
건축가의 자질은 상상력만이 아니다
실제로 구현하는 인내력이 필수"


■일본인에겐 ‘야만성’이 부족

―하지만 그래서 일본 건축이 세계적인 평가를 받는다.

(니) “일본 전통에 속해 있는 인간으로서 늘 일본 전통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 “나는 한국의 전통 가구를 매우 좋아한다. 많이 가지고 있다. 작은 상이라든가, 선반이라든가. 섬세하지 않고 거칠고 쉽게 만들어낸 듯하지만 아름답다. 작은 것을 강조하는 일본과 다르다.”

―좋아하는 일본의 전통 건축은?

(니) “도다이지(東大寺), 이세(伊勢)신궁, 교토고쇼(京都御所·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일본의 왕궁), 이쓰쿠지마(嚴島)신사, 무로우지(室生寺)…. 너무 많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다이나미즘이 있다.”

―이세신궁(신화상 일본의 시조를 기리는 곳)은 같은 자리에서 20년에 한 번씩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천궁(遷宮)을 반복한다. 1300년 동안 계속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독특한 전통이 일본의 건축 문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미술관' 세지마 가즈요와 니시자와 류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일본 가나자와(金澤)의 21세기 미술관. 2004년 문을 연 이 미술관은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함께 대표적 현대 건축물로 꼽힌다. / SANAA 제공
(니) “신궁을 해체하면 목재를 하급 신사에 분배한다. 하급 신사는 그것으로 신사를 만든다. 전체적으로 (이세신궁이) 일본 각지에서 복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건축 기술을 역사 문화로 유지한다.”

■일본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

―건축가의 자질로 니시자와씨는 ‘이매지네이션(상상력)’을 꼽은 반면, 세지마씨는 ‘인내력’을 꼽은 적이 있다.

(세) “물론 상상력이 중요하다. 100년에 한 번, 1000년에 한 번 나오는 건축가라면 상상력만으로 통할지 모른다.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확 떠오르는 상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을 실제 건물에서 구현하는 과정, 실제 건물에서 상상력을 확대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내력이 필요하다.”

―일본의 장인들은 천재성보다 물건 만들기를 익히는 긴 과정을 중시한다. ‘수교(修業)’라고 하는데, 건축가 역시 장인과 같은 과정 속에서 성장하는 것인가.

(세) “생각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설계해도 그것은 아직 2차원의 세계다. 이것을 3차원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건축가는 수많은 공부를 한다.”

―지금 중국의 도시들은 세계 건축의 경연장처럼 변하고 있다. 한국의 도시도 중국을 따라 하려고 한다. 경이적이지만, 저런 변화가 정말로 좋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세) “아직 중국에서 작업을 하지 않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아시아에선 일본이 먼저 발전을 했으니까 잘 보고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일본은 급성장한다고 ‘와’ 하고 지어버렸다. 일본은 그것을 지금부터 부수고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역시 한국은 한국이고, 중국은 중국이다. 정말로 초고층이 좋은가, 아니면 초고층 대신 옛것을 보수해 좀 더 남겨두는 것이 좋은가, 고민해야 한다. 도시는 나라에 활력이 있을 때 건설된다. 파리가 그랬고, 지금 중국이 그런 시기다. 그전에 실패한 사례가 엄청나게 많다. 그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니) “중국이든, 브라질이든 그들의 도시가 앞으로 ‘21세기 도시’의 전형을 보여줄 것이다. 그래서 중국 도시의 변화는 중국만의 과제가 아니라 세계의 과제다. 도쿄가 경험한 개발형, 소비형 도시와 다른 형태의 도시가 틀림없이 건설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흥미진진한 전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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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매경이 만난 사람] 카리스마 있는 여자 박칼린
무대는 지독한 곳…제 삶도 마찬가지
기사입력 2010.12.03 15:09:01 | 최종수정 2010.12.03 19:35:14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가장 먼저 무대에 들어서고, 가장 늦게 나오는 사람이 있다. 붉은 벨벳 객석에 앉으면 이 자리는 한 뼘의 뒤통수로만 보인다. 하지만 그 자리는 치열한 무대의 리트머스지와 다름없다. 황홀한 오렌지빛 조명을 묵묵히 받으며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세 시간 동안 공연하면서 흐트러질 수도, 쓰러질 수도 없다. 기침이 나도 참아야 하고, 손끝에서 힘을 놓는 순간 그 극은 실타래처럼 풀려버린다. 뮤지컬 음악감독. 그녀 이름 앞에 18년 동안 따라다닌 `또 다른 이름`이다.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그에겐 최근 또 다른 별명이 생겼다. `남자의 자격` 오합지졸 합창단을 전국합창경연대회 입상팀으로 `환골탈태`시킨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칼마에`로 불리게 됐다. 혹자는 자고 나니 스타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에겐 단지 무대인생에서 작은 쉼표일 뿐이었다. 20여 년 만에 생긴 빽빽한 스케줄표 속 빈 공간. 그로 인해 택한 두 달여 외도로 `박칼린 열풍`이 불었지만, 정작 본인은 언제나처럼 앞으로도 항상 무대에 서겠다는 바람뿐이다. 종종걸음으로 곧장 뮤지컬 `아이다`로 돌아온 그의 치열했던 무대인생. 그 편린을 엿보았다.

`남자의 자격`에서 박칼린은 매혹적이었다. 쉴 새 없이 `플랫`을 외치며 틀리는 부분을 지적할 때는 엄격했고 불같이 뜨거웠다. 하지만 공정했다. 단원을 신뢰했고 소통을 중시했다. 전국합창대회 무대에 오르기 직전 긴장한 단원들에게 "I 믿 You(나는 너를 믿는다)"라며 따뜻한 포옹을 해주는 따스한 리더십엔 온 국민이 감동했다. 사실 연습실에서 그는 오래전부터 `서쪽의 사악한 마녀`로 불렸다. 완벽한 공연을 위해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성격 탓이다. 1995년 26세에 `명성황후` 음악감독을 맡았던 그는 한국 뮤지컬 1세대다. 황무지에서 오늘날 한국 뮤지컬을 일궈낸 그들에게 창작 과정에서 타협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틀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연습에 들어간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음과 가사를 못 외울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피곤하면 불평도 잘하고 잘 싸우기도 하는데 너무 좋게만 그려진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배우한테 엄청 화도 내고 벽에 머리를 찧기까지 하는데 말이죠. 하하."

박칼린 인생에도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었다. 엄마처럼 돌보며 첼로를 가르쳐준 로즈마리 크로보사, 리처드 마이어 선생님, 음악감독을 응원해준 피터 케이시, 국악을 전수받은 박동진 명창 등이다. 이들에게서 그는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모두 고요하고 부드러웠다. 공통적으로 제자들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 제자들을 흔들림 없이 그들 길로 이끌어갔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인연은 한 인간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다고 믿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인연이고 싶어요. 사실 리더라는 말을 싫어해요. 제가 누군가보다 위에 있거나 동등하지 않은 위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 군단에서도 물론 제가 나이는 많지만, 그들 얘기를 열심히 들으려고 해요. 동등한 관계이고 싶은 거죠. 사실 위아래 관계면 끌고 갈 수가 없죠. 가장 조심해야 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가야 하고, 마지막으로 밥을 먹어야 해요. 그런 다음에 정말 힘들 때 한번씩 `미안하지만 도와줄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리더가 아닐까요?”

사실 그의 자리는 항상 누군가보다 앞이었다. 지휘봉을 처음 잡은 것은 중학교 시절. 오케스트라 첼로 주자였을 뿐인데도 음악 선생님은 잠깐 자리를 비울 때면 지휘봉을 맡겼다. "심지어 여름에 음악캠프를 가도 항상 지휘는 제 차지였다"며 "키가 커서 그랬을까요?"라며 웃는다. 그렇게 언제나 꼭 앞에 서 있었고 누군가를 이끌고 있었다. 뮤지컬 스태프와 배우들을 이끌면서 그의 앞에는 수십, 수백 명까지 사람들이 늘어났다.

언젠가 공연 연습을 하고 있는데 `투턴(무대에서 두 바퀴 도는 동작)`이 안 되는 배우가 있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며 짜증을 내는 배우에게 그는 따끔한 한마디를 던졌다.

"딱 100번만 해봐. 한 번, 한 번을 진지하게. 주변 사람 시선 의식하지 말고 너만 깊숙이 들여다보며 거울 앞에서 진지하게 해보란 말이야. 그렇게 100번만 해봐. 100번 해서 안 되면 1000번을 진지하게 해보란 말이야." 결국 그 배우는 해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자기 실력을 탓하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배우들에게 그는 `진지한 노력`을 요구할 뿐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첼로를 전공하던 대학입학 초기, 실망스러운 연주로 괴로워하던 그가 선생님께 받은 레슨이기도 하다.

무대 인생이란 시계 같은 삶이다. 배우든 스태프든 그 어떤 이유로도 공연을 펑크내거나 단 1분도 지각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심지어 공연을 위해 차를 버리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기억 속 `동호대교 사건` 전말은 이렇다. 공연을 세 시간여 앞두고 서울시청 앞에서 출발한 차는 공연 30분 전까지도 동호대교를 넘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다 급기야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구조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차를 버리고 동호대교까지 달렸다. 공연 15분 전, 친구가 타고온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고 달려 정각에 가까스로 `배달`됐다. 숨가쁘게 오케스트라 피트로 뛰어들었고 물론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무대 위의 삶이란 감정조차도 다스려야 한다. 가족이 아프거나 다쳐도, 누군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공연을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관객에게 용서라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5년 전 친할머니가 뮤지컬 `아이다` 막을 올리기 전날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마지막 연습을 끝낸 밤 11시, 탈진한 몸을 이끌고 부산에 내려가선 이튿날 새벽 올라와 무대 앞에 서야 했다.

"우리 뮤지컬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이만큼 자란 건 감기에 걸려도 쉰 목소리로 노래한 배우, 강행군으로 팔이 마비되어도 드럼을 두드린 연주자와 같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뮤지컬은 불과 10여 년 만에 지금 이 자리에 올라섰다.

"배우들 실력이 매우 높아졌어요. 우선 기초체력이 많이 쌓였고 몇몇 배우들은 세계적인 수준이죠. 옛날에는 작품 연습을 하기 전 석 달 동안은 트레이닝을 해야 했어요. 투턴도 못하고, 심지어 걷는 것도 못했어요. 발성 연기 춤수업을 죄다 해야 했죠. `명성황후` 때만 해도 정말 배우들이 노래방에서 마이크 잡던 실력, 디스코에서 막춤 추던 생각으로 들어왔거든요."

이미 배우가 샐러리맨처럼 되어버린 브로드웨이에서도 우리 배우들만큼 무대 위에서 열정을 쏟아내진 못한다고 했다. 아직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배우들이 사랑스럽다. 탁월한 기술로 무대를 만들어내는 스태프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라 단언했다.

"그럼에도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부족해요. 작곡, 대본, 연출, 가사 쓰는 사람, 안무하는 크리에이터들은 턱없이 부족해요. 훌륭한 우리 자원들을 담아낼 좋은 창작 뮤지컬이 나오기엔 말이죠."

최근 그는 18년간 잡아온 지휘봉을 놓고 연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2008년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가 첫 작품이었다. 지난해엔 첫 창작뮤지컬로 김영하 원작의 `퀴즈쇼`를 연출했다. 지난번엔 음악감독을 맡았던 `아이다`로 이번엔 연출에 도전한다. 후배들과 10년째 매년 새로운 대본과 작품을 써보는 워크숍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본인 창작 뮤지컬도 내년쯤이면 선보일 작정이다. 이토록 지독하게 매달리는 무대. 그를 참을 수 없이 매혹시키는 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쟁이 짓`을 사랑하는 스태프와 배우들이다.

■ 아빠의 눈물

8세 무렵이었다. 함께 골목길을 누비던 절친한 언니와 공터에서 모래놀이를 하던 소녀에게 덩치 큰 소년들이 다가왔다. "넌 왜, 노랭이랑 노니?" 겁에 질려 우는 언니에게도 그 남학생들에게도 할 말이 없었다. "너네 나라로 가"라는 말에 눈물을 펑펑 쏟는 것밖엔.

그를 맞아준 아빠가 "그건 그냥 니가 다른 사람하고 다르게 생겨서. 그건 그 사람이 몰라서 그런 것뿐이야. 칼린. 여기도 네 나라고, 미국도 네 나라야. 그리고 모든 나라가 네 나라란다"고 위로해주며 흘렸던 눈물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주 어린시절 미국을 떠나 9세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이렇게 작은 아픔은 문득 찾아오곤 했다. 미국에선 다시 영어를 익혀야 했고 그는 불가수행자만큼이나 조용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첼로라는 악기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몰라요. 커다란 악기 뒤에 조용히 숨어 있는 게 적성에 맞았죠. 조용한 오케스트라 멤버였던 저에게 어느 날 선생님은 연극 공연 연주자로 초청을 하더니 덜컥 1인 5역 배역을 맡겨버렸어요. 숨어 있길 좋아하는 아이에게서 끼를 끌어낸 건 이토록 신기한 우연이었던 거죠."

그렇게 우연과 우연이 만나기 시작했다. 경남여고 2학년 무렵, 민속마당놀이를 변형시킨 학교 창작공연 `할미전`에서 그는 남장 배역 `한량영감`을 연기했다. 전국 순회공연을 다닐 정도로 극단 실력은 대단해서 전국청소년연극제에서 연기상을 탈 정도였다. 무대의 매력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자란 그는 이후에도 한국에 들를 때면 부산에서 여러 극단들과 정극, 뮤지컬, 무용 등을 가리지 않고 무대에 섰다. 89년 서울 무대 첫 연극 `Tally`s Folly- 여자의 선택`에서 그는 전례없는 사고를 겪었다. 배우가 둘뿐인 무대 위에서 상대배우가 대사를 까먹고 무대에서 달아나버린 것이다. 황당했지만 무대를 이리저리 누비며 사고를 수습해야 했다. 전무후무한 사고에 놀란 연출자는 `대사 까먹기`에 대비해 노래를 만들어 넣기로 했다. 마침 그의 노래 네 소절을 듣게 된 다른 작품 연출자가 곁에 있었다. 그에게 `뮤지컬` 제안이 들어온 계기다. `명성왕후`로, 그리고 음악감독으로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실 언제나 음악은 곁에 있었다. 마치 운명처럼.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항상 저희 세 자매 손을 붙잡고 본인이 강의하는 학교로, 빈소년합창단, 발레 공연장 등으로 데려가셨어요. 매일밤 어머니가 틀어주는 말러 교향곡 1번 LP판을 들으며 잠들곤 했죠. 그래서인지 몰라요. 큰언니는 한국 무용, 작은언니는 개나리합창단, 저는 언니를 따라 피아노도 무용도 배웠죠."

■ 박칼린은

1967년 미국 LA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자랐고,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아이렌)에게서 언니들(킴벌리, 캘리)과 함께 첼로와 피아노를 배웠다. 칼린이라는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셨다. 칼린은 `아일랜드 소녀`라는 뜻이다. 캘리포니아예술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했고 서울대 대학원(국악 작곡)에서 명창 박동진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 명성황후에서 음악감독을 맡은 후 오페라의 유령, 사운드 오브 뮤직, 페임, 렌트, 시카고, 미녀와 야수, 노틀담의 꼽추, 아이다 등 작품을 지휘했다. 지금은 `킥 뮤지컬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호원대학교에서 뮤지컬을 가르치고 있다. 우주인을 꿈꾸며 비행학교를 다니기도 해서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까지 갖고 있다. 곱슬머리 삽살개 해태, 도깨비와 함께 살며 여름이면 이들과 목적지도 없이 국도를 운전하며 길이 부르는 대로 떠나는 `구름투어`를 즐긴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길 즐겨 지금은 8개월째 탭댄스를 배우는 중이다. `남자의 자격`으로 인한 유명세로 물론 불편해진 점은 있다. "슈퍼마켓에 가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가 되어 길거리에서 떡볶이 먹는 일도 이제 힘들어졌다"고 했다. 2012년까지 그의 공연스케줄 표에는 이미 빈자리가 없다.

[김슬기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TAG 박칼린

“소리는 오감 중 제일… 21세기형 문화콘텐츠로 뜰 것”

[2010.12.02 17:26]


‘폴리아티스트, 소리를 부탁해’ 펴낸 음향효과 장인 안익수 감독

안익수(46) 음향감독은 소리를 만들어온 ‘장인’이다. 어릴 때부터 소리가 좋아 기찻길이나 계단 난간에 귀를 대고 놀았다는 그는 다양한 도구와 몸을 이용해 우리 생활 속 숨어 있는 수많은 소리들을 진짜보다 더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1992년 KBS에 음향효과맨으로 입사한 이후 18년간 TV와 라디오 제작현장을 누볐던 경험을 바탕으로 ‘폴리아티스트, 소리를 부탁해’(효형출판)를 펴낸 그를 1일 만났다. 폴리아티스트란 할리우드 음향효과의 선구자 잭 폴리(1891∼1967)의 이름에서 딴 용어다.

안 감독은 인터뷰 시작 전 자신의 장기부터 선보였다. 점퍼 주머니에서 조개껍질 2개를 꺼내더니 수십 마리 개구리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를 만들었고, 세상에서 딱 하나 뿐이라는 나무피리로 높고 독특한 톤을 지닌 종달새 울음을 표현했다. 그는 가죽 가방이 있으면 ‘갸갸갸갸’ 외치는 원숭이 소리를 만들 수 있고, 알약 캡슐로 음료수 병의 뚜껑 따는 소리를 낼 수 있다고도 했다.

안 감독은 소리가 인간의 오감(五感) 중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보다 그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 잘 모르고 있어요. 공기가 소중한 줄 모르듯 말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소리가 없다면 세상은 소금 치지 않은 음식 같을 겁니다.”

그는 우리가 방송에서 듣는 익숙한 56가지 소리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책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눈 밟는 소리를 내려고 고구마 전분을 주무르고, 얼음 깨지는 소리를 내기 위해 아크릴판 사이에 소금을 뿌리는 식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담는 과정과 좋은 효과음을 만들기 위한 노하우 및 라디오 드라마 제작 과정 등도 담았다.

안 감독은 소리가 21세기형 문화콘텐츠로 각광받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마트 수박판매대에 실개천 흐르는 소리를 틀면 매상이 오르고, 풀숲 소리로 불안증세를 치유할 수 있으며, 클래식으로 동식물 생장을 돕거나 방범장비에 귀를 찢는 굉음을 넣는 등 소리는 경제와 의학, 예술 등 폭넓은 분야에서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음향 전문가들의 역할이 시대 흐름에 맞게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작업의 중요성이 점차 낮아지고 있으니 이제 소리를 제작하는 일보다는 소리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50년 전에는 녹음기가 바위처럼 무거워서 자연의 소리를 담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이제 녹음기술이나 마이크 성능이 좋아서 효과음향을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일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에요. 소리는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무형의 자원이거든요.”

글·사진=김상기 기자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제3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 선정 발표



‘심사위원 선정 특별예술가’,‘올해의 주목할예술가’

시상식, 오는 17일 오후6시30분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회장:金鍾萬(김종만), 음악평론가)는 제 3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 ‘심사위원 선정 특별예술가’,‘올해의 주목할 예술가’, ‘공로예술가’를 선정 1일 발표했다.

 

시상식은 12월 17일(금) 오후 6시30분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있을 예정이다.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는 1981년 4월 21일 전 예술장르의 평론가들에 의해 발족, 9월26일/27일 ‘한국예술비평의 미적 규범’이라는 세미나를 연 이래 지금까지 세미나 및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진행시키고 있다.


장석용 총괄 감독은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는 1981년 창간호를 낸 이래 <예술평론>을 발간해오고 있으며, 해마다 장르별 ‘최우수예술가’, ‘주목할 예술가’를 선정해온 예술평론가 집단”이라고 소개했다.


관련사항문의 

전화 : 02)916-9429, 팩스 : 02)986-6046

총괄감독 장석용/문화비평가: 011-782-3249 


 

<다음은 심사위원들이 모여 2010년 심사한 결과이다.>


◆공로상/최지희(영화배우, 한국원로영화인회 회장)


◆올해의 최우수예술가

무용/양선희(세종대 무용과 교수, 안무가 ) <비우니 향기롭다>

문학/박범신(명지대 문창과 교수, 소설가) <은교>

미술/구자승(전 상명여대 미대학장, 서양화가 ) <정물화> 의 진화

연극/권병길(극단자유, 연극배우) <오장군의 발톱>

영화/이재한(영화감독) <포화속으로> 

음악/임평용(시립국악관현악단 단장) <음으로 쓰는 전람회>

연희․전통/이상수(맥간공예, 보릿잎 자개 개척) 맥간공예 창시 및 후진양성


◆심사위원 선정 특별예술가

 우현영(재즈댄스, 한예종 강사) 재즈댄스의 변주와 활성화

 조가현(작곡, 관동대 교수) 여류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서정세계 개척

 이혜경(한국창작무용, 세종대 강사) 이즈음 무용단, ‘박’ 등 다수

 예술평론/이창식(세명대 한국어문학과교수,전통문화연구),‘한국신화와 스토리텔링’,‘전통문화와 콘텐츠’


◆주목할 예술가

출판/조유현(늘봄), 다수의 고양서적 출간 

무용/김수정(현대무용) ‘볼레로’외 다수

     이정화(현대무용) ‘몸의 문’ 등 다수

     정보경(연기, 한국창작무용) Drive Through 연기, 춤

미술/박향미(울산대 강사, 서양화) 다수 전시회

     박원주(성신여대 강사, 조소) 다수 전시회

영상/강낙현(현대영상, 퓨전) Drive Through 연출, 촬영

연희/권슬기(송포 호미거리단 사무국장) 경기도 무형문화재22호 송포

      호미거리 진흥 발전

예술평론/이희병(성균관대 강사) <성남 오리뜰두레놀이: 농악과 농요>등 집필

 

 

<수상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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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평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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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선정 특별예술가’,‘올해의 주목할예술가’

시상식, 오는 17일 오후6시30분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회장:金鍾萬(김종만), 음악평론가)는 제 3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 ‘심사위원 선정 특별예술가’,‘올해의 주목할 예술가’, ‘공로예술가’를 선정 1일 발표했다.

 

시상식은 12월 17일(금) 오후 6시30분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있을 예정이다.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는 1981년 4월 21일 전 예술장르의 평론가들에 의해 발족, 9월26일/27일 ‘한국예술비평의 미적 규범’이라는 세미나를 연 이래 지금까지 세미나 및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진행시키고 있다.


장석용 총괄 감독은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는 1981년 창간호를 낸 이래 <예술평론>을 발간해오고 있으며, 해마다 장르별 ‘최우수예술가’, ‘주목할 예술가’를 선정해온 예술평론가 집단”이라고 소개했다.


관련사항문의 

전화 : 02)916-9429, 팩스 : 02)986-6046

총괄감독 장석용/문화비평가: 011-782-3249 


 

<다음은 심사위원들이 모여 2010년 심사한 결과이다.>


◆공로상/최지희(영화배우, 한국원로영화인회 회장)


◆올해의 최우수예술가

무용/양선희(세종대 무용과 교수, 안무가 ) <비우니 향기롭다>

문학/박범신(명지대 문창과 교수, 소설가) <은교>

미술/구자승(전 상명여대 미대학장, 서양화가 ) <정물화> 의 진화

연극/권병길(극단자유, 연극배우) <오장군의 발톱>

영화/이재한(영화감독) <포화속으로> 

음악/임평용(시립국악관현악단 단장) <음으로 쓰는 전람회>

연희․전통/이상수(맥간공예, 보릿잎 자개 개척) 맥간공예 창시 및 후진양성


◆심사위원 선정 특별예술가

 우현영(재즈댄스, 한예종 강사) 재즈댄스의 변주와 활성화

 조가현(작곡, 관동대 교수) 여류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서정세계 개척

 이혜경(한국창작무용, 세종대 강사) 이즈음 무용단, ‘박’ 등 다수

 예술평론/이창식(세명대 한국어문학과교수,전통문화연구),‘한국신화와 스토리텔링’,‘전통문화와 콘텐츠’


◆주목할 예술가

출판/조유현(늘봄), 다수의 고양서적 출간 

무용/김수정(현대무용) ‘볼레로’외 다수

     이정화(현대무용) ‘몸의 문’ 등 다수

     정보경(연기, 한국창작무용) Drive Through 연기, 춤

미술/박향미(울산대 강사, 서양화) 다수 전시회

     박원주(성신여대 강사, 조소) 다수 전시회

영상/강낙현(현대영상, 퓨전) Drive Through 연출, 촬영

연희/권슬기(송포 호미거리단 사무국장) 경기도 무형문화재22호 송포

      호미거리 진흥 발전

예술평론/이희병(성균관대 강사) <성남 오리뜰두레놀이: 농악과 농요>등 집필

 

 

<수상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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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문화리더] 이천도자기 명장 藝松 유기정
도예는 魂과 功의 예술 神·자연이 만드는 결정체
2010년 11월 10일 (수)  전자신문 | 20면   김동섭 기자 kds610721@kgnews.co.kr
   
 
 사진=이준성기자 oldpic316@

‘불살이 바람개비 되어 춤춘다. 불살춤은 가마의 여신이 사기장에게 신내림을 하는 춤이다. 여신이

불살을 휘두르며 나비처럼 사뿐사뿐, 춤사위를 펼쳐 보인다. 나는 장작으로 장단을 맞춘다. 불살은

강한 회오리가 되어 가마칸을 휘감았다. 휘감은 불살이 크게 용솟음치고 춤사위는 점점 격렬해진다.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휘몰아치는 불살이 폭풍이 되어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나를 삼킬 듯이

날름거린다. 몸이 움찔해졌다. 질세라 사정없이 장작을 불통으로 던졌다. 뻥! 불살이 굴뚝 위로

치솟아 불기둥이 되었다. 불기둥이 밤하늘로 솟구쳤다.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예송(藝松)이 힘에 부칠때 7부 능선까지 박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반려자인 아내 조경래(50)씨

덕분이다.

아내가 아닌 동업자다. 예송(藝松)이 ‘원초적 재료로 세상을 빚는’ 도공이라면, 조 씨는 그 빚어진

도자판에다 목단이 피고 폭포수가 흐르는 자연을 조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해 ‘신의 그릇’이란 이름으로 도예가 신한균씨가 펴낸 2권의 역사소설이 큰 화제가 됐다.

이 대목은 책 1권에서 주인공 신석이 아버지로부터 “용은 가마의 불때기를 보고 만들어낸 상상의

동물이다.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는 가마 속의 도자기다”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소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도공)의 삶을 그린’ 예술가적 소설이었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을 읽어서인지 예송(藝松) 유기정(柳基靖·53) 이천도자기

명장의 첫 인상은 기대가 컸다. 꽁지머리를 매고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백발의 한복을 걸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예측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예송(藝松)은 마치 백자처럼 깨끗한

 피부색에 소년같이 환한 미소, 분청사기처럼 품성과 음성도 아주 차분하고 고왔다. 평생

도공(陶工)으로 오로지 도자기만을 빚고 구워서일까. 심성 착하고 인자한 영락없는 시골 분교의

선생님이었다.

그를 만난 건 갑자기 영하권으로 뚝 떨어진 지난 8일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각, 그의 삶터이자 일터인

이천시 신둔면 소정리 92-3번지 그의 아호(雅號)를 딴 ‘예송요(藝松窯)’ 였다.

동네 어귀 2~3곳에 ‘예송(藝訟) 유기정 선생의 젊은 명장 탄생을 축하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이 눈길을

 끌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 예송(藝松)이 지난 1991년 제26회 동아공예대전에서 동아공예상을 수상한 ‘분청사기화문입호(粉靑沙器花紋立壺)’



명장 예송(藝松)과 그의 아내 조경래(50) 씨 내외가 반갑게 맞아주며 작업장으로 안내했다.

너른 마당 우측으론 2층 양옥의 살림집이, 좌측으론 그의 작업장과 가마터, 전시장과 창고로 갖춰 놓았다. 작업장엔 물레와 초벌구이한 각종 사발과 제기, 작품용 청자와 백자, 육중한 가스 가마로 꽉 차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예송(藝松)은 지난달 ‘2010년 이천시 도자기명장’에 선정됐다. 이 상은 30년 이상 도예산업에 종사하고 만 50세가 넘은 전통 도예인에게 주어지는 매우 값지고 영예로운 상이다. 올해는 성형, 서화, 조각분야 등 3개 분야 9명이 각축을 벌인 끝에 최연소자인 그에게 돌아갔다.

심사도 매우 까다롭고 엄격했다. 도예에 관한 학식과 덕망이 있는 인사로 명장선정심사위원회를 구성해 1차 서면심사와 2차 현장심사를 거쳐 최종 선정한 것이다. 국내 도자기 메커인 이천 지역에만 도예의 경지에 오른 도공(陶工)들이 500여명이란 것을 감안할 때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이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송(藝松)은 유난히 상복이 많다. 지난 2006년 ‘경기으뜸이’로 선정됐다. 이 상은 경기도가 전문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직업인에게 수상한 것이다. 앞서 1998년 동아공에대전에서 수상하는 등 그간 각종 도자기 관련 공모전과 대전에서 40여회 입상해 그의 예술혼과 탁월한 기량을 과시했다. 그는 바로 이 작업터에서 나서 자랐다. 흙을 빚고 구어 ‘도자’를 만들어 내는 건 어쩜 그의 업인 것 같았다. 예송(藝松)은 채 스물도 되기 전인 열일곱에 이 길에 들어섰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어요.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도공(陶工)의

길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어요. 이제와 생각해보니 제 운명같아요” 예송(藝松)은 1975년 故 도암

지순택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요장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꼬박 3년을 보낸 끝에 4년째 물레를

잡고 조선백자 성형을 완성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후 송월 김종호 선생 문하로 들어가 2년간 청자를 배우고 1980년 8월 군 입대를 했다. 1983년

4월 제대한 그는 대한민국 명장인 항산 임항택(現사단법인 한국전승도예협회장) 선생의 문하로

다시 들어가 1995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분청사기와 백자를 사사한 후 자신의 아호(雅號)를 따

‘예송요(藝松窯)’란 이름을 걸고 독립했다.

“말이 독립이지, 독립의 길은 갓난아기가 엄마 젖을 뗀 이후 이유식 과정이지요. 이 홀로선 도공의

 길은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는 거예요. 선생님의 예술 기법을 따라할 수도 없고요. 오로지

나만의 독특한 창안과 예술 기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하는 것이지요.

뼈를 깍는 아픔이 이때부터 다시 시작돼요. 밤잠을 안자고 빚고 굽고 깨고 칠하고…” 사실 그의

천재적 재능은 1991년 제26회 전국기능경기대회 도자기 공예부문 1위를 수상하면서부터다.

당시 항산 임항택 선생의 문하로 있을 때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공모에 나가는 것은 결례라고 판단,

작품이 아닌 기능대회에 참가해 이같이 당당히 입상했다. 예송(藝松)은 이때부터 ‘될 성부른

 떡잎’이었고 명장 탄생을 일찌감치 예고했다.

이제 예송(藝松)은 산 정상으로 치자면 7부 능선에 다다른 셈이다. 산을 탈 때 7부 능선에 접어들면

어려움과 갈등의 문제가 새로운 시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1차 체력의 한계점이다.

하지만 7부 능선이 없다면 산 정상이 그만치 아름답고 황홀하지 않다. 7부 능선이 없이 오른 정상은

 아마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송(藝松)이 숨이 턱까지 차는데도 7부 능선까지 박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반려자인 아내 조경래(50)씨의 덕분이다. 아내가 아닌 동업자다.

예송(藝松)이 ‘원초적 재료로 세상을 빚는’ 도공이라면, 조 씨는 그 빚어진 도자판에다 목단이 피고

폭포수가 흐르는 자연을 조각하기 때문이다. 일컬어 부창부수다. 도자로 맺은 기막힌 부부의 인연이다.

아내 조씨 없이, 명장 예송(藝松)을 얘기할 수 없다. 그에게 도자에 대한 철학과 향후 꿈과 소망을

물어봤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도자는 혼(魂)과 공(功)의 예술이예요. 조금이라도 정성이 덜하면 작품이

나오지 않아요. 모든 것을 신과 자연에게 맡기고 그저 결과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도공의 진정한

자세입니다. 앞으로의 소망도 오직 일념으로 도자를 만드는 거에요. 특히 분청사기에 각별한 얘정을

 갖고 있어요. 도공의 길은 끝이 없어요. 죽는 순간까지 전통과 혼을 잇고 우리 도자가 첨단길술지

 어엿한 문화콘텐츠로 주목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도자는 혼(魂)과 공(功)의 예술이예요
조금이라도 정성이 덜하면 작품이 나오지 않아요.
모든 것을 신과 자연에게 맡기고 그저 결과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도공의 진정한 자세입니다.

※약력

   


1958년 경기 이천 출생
1975년 도암 지순택 선생 문하 입문
1983~95년 대한민국 명장 항산 임항택 선생 사사
1995년 예송요 설립
2005년 제3회 세계도자비엔날레 국제교류작가 워크숍 참가
2007년 명지대 산업대학원 도자기 기술학과 수료
2008년 제22회 이천도자기축제 한중교류작가 워크숍 참가
2008년 중국 경덕진 국제교류작가 워크숍 참가

▲수상 경력
1991년 제26회 전국기능경기대회 도자기 공예부문 1위
1998년 동앙일보사 주최 제26회 동아공예대전 동아공예상
1999년 제10회 여주도자기박람회 세종도예공모전 우수상
2001년 제26회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2002년 제2회 강진청자공모전 대상
2002년 제3회 경기도 우수관광기념품 공모전 동상
2003년 제33회 전국공예품대전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 회장상
2004년 제2회 청주공예문화 상품대전 특별상
2008년 제2회 이천도자공모전 동상

▲전시
2001년 대구 푸른방송 주최 도자기엑스포 참여 명품전
2005년 동아공예동우회 회원전(한국공예문화진흥원)
2006~08년 제11~13회 전승도예협회 회원전
2007~08년 중국 경덕진 현대국제도예전

▲작품 소장

강진청자박물관, 노르웨이 대사관, 이천시, 명지대학교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최보식이 만난 사람] '트위터 팔로어' 43만명… '김연아를 앞선' 작가 이외수

  •  입력 : 2010.10.24 21:56

"글 쓴다고 처자식 굶긴 삶 떳떳하지 않아… 요즘은 내가 대세"
親盧? 난 어느 정파와도 무관… 내 안티는 찌질하다고 생각… 트위터 치킨광고로 장학금 줘
지금은 두 끼 먹고 매일 씻어… 베스트셀러 작가로 30년인데 문단과 평론가는 나를 외면

10여년 만에 다시 만나니, 그의 외양이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이외수(64)씨는 분홍색 폴라셔츠에 흰 스웨터를 받치고 백바지까지 입었다. 등과 뱃가죽이 붙어 구부정했던 그의 몸은 거의 직립 상태가 됐다. 안 감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던 장발머리에는 이제 비듬 하나만 달랑 매달려 있었을 뿐이었다. 부스럼이 피었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내가 계속 카메라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매일 씻어야 해요. 과거에도 내가 남한테 피해를 주는 일은 안 했잖아요. 알다시피. 남의 결혼식에 가거나 세 사람 이상을 만나거나 작품에 들어갈 때면 꼭 씻고 옷도 갈아입었어요. 이제는 스타가 됐는데 관리를 해야지. 게다가 술 담배를 끊고 나니 입맛도 돌아와 하루 한 끼만 먹던 것을 두 끼를 먹어요."

정말 가장 달라진 것은 그의 대중적 인기였다. 그가 떠드는 인터넷 잡담(트위터ㆍtwitter)의 추종자만 43만명이나 된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서 '한국에서 김연아를 능가하는 아이콘(우상)은 예순이 넘은 노인'이라며 취재하러 왔을 정도다.

―그 인기는 지난 대선부터 MB를 '까면서' 얻어진 것이죠? 일부 젊은층과 MB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의 호응으로 비롯된 것으로 보는데.

"거 무슨 말씀을. 옛날에도 인기가 있었어요. 내 작품에는 늘 30만명 이상의 고정독자들이 있잖아요. 오히려 그런 정치적 발언으로 '안티'가 많이 생겼어요. 최초로 포문을 연 것은 당시 후보가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겠다'고 했을 때죠. '무식을 갑옷처럼 착용하고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나'고 받았지요. 작가는 시대의 감시자라고 생각하니까요. 제일 괘씸한 것은 이런 나를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아버지는 무공훈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누워계시고, 아들 두 놈은 병역 필(畢)이고, 나도 36개월 빡빡 기다가 제대했는데 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이었던 1970, 80년대에도 그런 '시대의 감시자' 역할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나는 실천이나 참여문학에 줄 서기만 안 했지, 그때도 비판은 했어요. 작품 속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한마디씩 했지요. 물론 정면으로 한 적은 없어요. 내 작품은 현실문제나 정치적인 것과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일각에서는 이 선생을 '친노파(親盧派)'의 아류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없어요. 난 정치적 성향으로 MB를 '깐' 것은 아니에요. 내가 '이외수의 언중유쾌'라는 라디오프로 DJ를 할 때는 당시 노 대통령을 두들긴 적이 있어요. 욕먹는 사람은 자기 욕만 부각돼 보일 뿐이지요."

그는 산골 속에 앉아 날마다 트위터에 최소 3개, 최대 10개씩 글을 올리고 있다. 거의 주업이다시피 여기에 네댓 시간의 정성을 쏟아붓는다. 서재의 앉은뱅이 탁자 위에는 성능 좋은 컴퓨터와 돋보기들이 놓여 있었다.

―추종자들 사이에는 유명인이 됐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작가로서 이 선생을 염려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가 언제 글을 쓰느냐 하겠지만, 박지성이 CF를 찍는다고 축구 못하는 것도 아니고, 김연아가 다른 활동을 한다고 스케이트 못 타는 것이 아니거든요. 어느 경지에 올라가면 자기가 다 알아서 하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내가 글을 안 쓰느냐, 책이 계속 나오잖아요."

―글이란 누구든 못 쓰겠습니까. 좋은 작품, 깊이 있는 작품을 써내느냐가 관건이지요.

"내 글은 다 문학적이라니까요. 꼭 길어야 좋은 것은 아니에요. 트위터는 140자를 넘지 못하는데 전송하고 나면 마음에 안 들어 여덟 번씩이나 고쳐 올리기도 했어요. 살을 발라낸 글이지요. 나름대로는 열심히 트레이닝을 하고 있어요. 권투 시합 전 스파링처럼."

나중에 그가 "내 글에 대해 뭐라고 씹는 놈이 있으면 못 참는다. 그럴 때면 욕설도 불사하고 맹렬하게 맞붙는다"고 애착을 보였을 때, 속이 뜨끔했다.

―젊은 세대와의 소통 노력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경박한 세태에 동조하고 영합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동안 내 방식으로 충분히 살았다는 거죠. 글을 쓰기 위해 방문에 철문을 치고, 내 스스로를 옭아매었고, 글을 쓰려면 수도사처럼 자신에게 가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혹독했던 삶이었죠. 여기로 옮기면서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지요. 어차피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인데…. '글 쓰는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사슬을 다 끊어버렸어요.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쓴다는 겁니다. 벽을 허물 나이잖아요."

―객관적인 잣대는 아니지만, 이 선생 작품은 '들개'(1981년) 이후로 더이상 치열한 맛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쥐어짜는 게 이제 싫다는 거요. 초월적인 삶이 좋지. 고통 중에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아요. 삶의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데 급할 뿐이지. 나는 마흔세 살까지 처자식을 굶겼거든. 그게 결코 떳떳한 삶이 아니에요. 그때 나온 작품이 좋은 작품이 아니에요. 고통이 끝난 뒤에 좋은 작품이 나올지는 몰라도. 무엇보다 내 과거처럼 그렇게 궁상스럽게 살 필요가 없다고 봐요. 오히려 작가로서 멋있게 사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봐요."

사는 곳이 강원도 화천이라 했지만, 읍내에서 한참 갔다. 군데군데 군용트럭과 탱크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는 산길을 한참 달리니 검정 새를 그려놓은 이정표가 겨우 보였다. '이외수 감성마을은 새가 바라보는 쪽으로 1.4km'. 혹시 그려놓은 새가 엉뚱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화천군에서 26억원을 들여 그의 집을 지어줬다. 그는 청춘부터 환갑 때까지 살았던 춘천 생활을 청산하고 여기로 옮겨왔다. 그가 들어오니 첩첩 산속의 땅값이 일곱 배나 뛰었다고 한다. 그 집은 전국에서 '감성'을 갈구하는 이들의 '명소'가 된 것이다.

작가 이외수는“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인데 과거처럼 궁상스럽게 살 필요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형편이 나아지니 인생관도 바뀌는군요.

"가끔 '젊은 날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나'라고 물으면, '아예 안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나이가 들면 젊어서 고생은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내가 겪은 젊은 날은 너무 끔찍해요. 처가 식구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저런 놈에게 아직까지 붙어있나 이혼하지 않고' 하는 소리도 들려왔어요. 그런 왕따와 외로움을 모를 겁니다. 요즘도 아내가 '그때 당신 변소에 가서 몰래 운 적이 많았지?' 하면 울컥해집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첫째예요. 가족이 딸려 있으니까 나도 용의주도합니다. 사람들은 내 외모를 보고 '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많이 노력하고 도전해왔어요."

―TV 드라마와 예능프로까지 출연하니 이 선생이 원래 연예인인 줄로 아는 젊은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렇죠. 그전에는 TV에 나오는 걸 꺼렸어요. 얼굴도 받쳐줘야 되고 말도 어눌하니 좀 기피했어요. 하지만 여기에 온 뒤로 예능 프로든 어떤 것이든 심지어 바둑알 까기까지 모두 수용했어요. 해보니까 정말 재미있어요."

―이런 이 선생이 어떤 조사에서는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로 꼽혔던데, 다른 문학 대가들은 상당히 기분 나빴을 것 같은데요.

"자기들이 1등 할 때 나는 기분이 안 나쁘겠나요(웃음). 사실 춘천에 살 때 내 문학기념관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어요. 그때 가장 먼저 반대한 쪽이 문인협회요. 당시 글 쓰는 사람은 찬성할 줄 알았어요. 그런 선례가 있으면 다른 작가들에게도 기회가 돌아갈 수 있지요. 하지만 내가 그 대상이 되니까 인정을 못한 것이죠. 결국 내가 화천으로 오고 나니까, 뒤늦게 춘천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끼게 됐어요. '춘천 3수'로 '막국수·호수·외수'가 있는데 '외수'가 빠져나갔다는 거죠."

―사실 어떤 평가보다 동업자들의 평가가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쪽은 동업자가 아닌 것 같아. 그것이 내 방식대로 더 자유롭게 살 수 있게 조장해줬어요. 나는 더이상 작가로서 눈치를 볼 게 없어진 거죠. 내 작품에는 늘 고정독자만 30만명이 넘습니다. 한번 반짝한 게 아니라, 그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30년을 유지했어요. 이를 문단이나 평론가가 주목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난 글 잘 쓰는 작가로 인정받는 게 소망이었죠. 하지만 그걸 포기했어요."

―왜 주목하지 않았을까요? 작품성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시기 질투입니까?

"과일이 달면 달수록 벌레가 제일 먼저 꼬이지요, 하하하."

―인터넷상에서 젊은이들과 막 싸우기도 하던데, 나잇값을 못하는 것 아닙니까?

"내 감정대로 하는 거죠. 나이로는 이순(耳順)이라고 하나, 사실 귀는 안 순해졌어요. 내 입장에서는 '안티'는 찌질하다고 봐요. 지난번 학력 의혹을 받은 가수 타블로를 옹호하자, 그를 비방하는 '타진요'회원 20만명이 내 홈페이지를 공격했어요. 그때 '야 찌질이들아 너나 잘해라'고 맞붙었지요. 열 받으면 스트레스가 되지만 난 그걸 즐겨요."

―지난번 트위터상에서 치킨 광고를 해서 시끄러웠지요.

"국회의원이 시비를 걸어 시끄러웠지, 도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어요. 한 달에 네 번 그 치킨을 언급하면 1000만원을 주는데 얼마나 큰돈입니까. 치킨업체가 그렇게 제의했을 때, 마누라가 '이제 1000만원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며 기부하자고 해요. 멋있잖아요. 광고 문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아요. '힘차게 하늘을 나는 독수리에게 닭이 말했다. 니가 천년을 날아봐라 치킨이 될 수 있나', '이외수에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물으니, 치킨이 먼저다'. 그 돈을 농촌 청소년들에게 전액 기부해왔어요. 이를 국회의원이 뒷북치고 찬물을 끼얹을 줄 몰랐지."

―이동통신사 CF를 찍었을 때도 말이 많았죠.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사람만이 광고 모델이 될 수 있잖아요(웃음). 왜 말이 많았겠어요? 자기들이 내 작품을 읽어봤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인지?

"내 작품의 주인공은 대부분 자유분방해요. CF를 찍고 안 찍고 쪼잔하게 그런 걸 안 가려요."

그가 살아온 젊은 날에 대해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 같군요.

"나는 옛날이 정상적인 것 같은데, 어쨌든 순리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내가 하는 걸 보면 다들 부러워할 겁니다. 네댓 시간 틈틈이 트위터에서 토닥거리지,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이면 다 만나주고 사진도 같이 찍어주지, 그림을 그리지, 작곡하지, 노래 부르지…."

―요즘도 본인을 약자, 소수, 방외(方外), 비주류로 봅니까?

"요새는 내가 주류요, 하하하."

작별하려는데 응접실에 노래방 기계가 보였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맨정신에 그는 마이크를 잡고 한 곡 불렀고, 나도 답가를 했다. "이럴 때 술 한잔 해야 하는데…." 절정의 삶을 누리고 있는 그가 아쉬운 듯 말했다. 술 끊은 지 20년 가까이 됐다.
 
chosun.com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주간조선] 박칼린 "내가 독하다고? 한밤에 펑펑 울기도 해요"

  • 입력 : 2010.10.17 15:56 / 수정 : 2010.10.17 17:39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박칼린 음악감독과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 인터뷰

<이 기사는 주간조선 2126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두 사람, 외모는 다르지만 꼭 오누이 같다. 박칼린(43) 뮤지컬 음악감독과 신시컴퍼니 박명성(47) 대표 이야기다. 박 감독은 최근 KBS 2TV 예능 프로그램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으로 떴고, 박 대표는 ‘아이다’ ‘시카고’ ‘맘마미아’ 등 인기 뮤지컬을 제작해 왔다. 박칼린 감독은 ‘남자의 자격’에서 연예인을 포함한 급조된 합창단을 이끌면서 뛰어난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박 감독은 10월 5일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박명성 대표와 자리를 함께 하자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남격’에서 보인 강한 이미지와 좀 달라보였다. 10년 이상 뮤지컬 제작을 통해 팀워크를 맞춰온 두 사람은 업계에서 “연인 사이 아니냐”라는 말까지 듣기도 했다. 박 대표는 “오래도록 둘이서만 작업하니까 그런 것 같다. 박칼린과 작품을 위해 자주 만나다 보니 사귀는 느낌도 든다고만 대답한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이에 대해 “박 대표님은 오빠, 아버지 같은 분이자 제 멘토다. 밤 12시에 전화를 걸어 울면서 고민을 토로한 적도 여러 번 있다”고 말했다. 충무아트홀에서는 박 대표와 박 감독이 힘을 모아 만든 뮤지컬 ‘틱틱붐’이 공연 중이다.
 
박명성/ 뮤지컬계에서는 이미 스타였던 박칼린 감독이 ‘남자의 자격’을 통해 국민적 스타가 됐어요. TV를 잘 안 보는 저도 ‘남자의 자격’은 봤습니다. 저 같은 사람까지 봤으니 시청률이 30%가 넘었겠죠. 박 감독을 TV로 보니까 더 예뻐보이더라고요. 그동안 제게는 화장 안하고 부스스한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그런가 봐요. 등잔 밑이 어두웠던 거죠. 그건 그렇고 TV는 박 감독 능력을 조금밖에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박 감독은 TV에 나온 것보다 더 ‘고품질 인간’이에요. 그리고 칼린이가 유명해진 건 좋은데 박 감독 인터뷰 섭외가 안 되니까 저한테까지 연락이 많이 와요. 제가 칼린이 매니저도 아닌데 말입니다. (웃음) 아무튼 박 감독과 둘이서 인터뷰 코너에 출연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박칼린/ 박 대표님과는 2000년부터 뮤지컬 작업을 함께 해오고 있습니다. 당시 박 대표께서 제게 전화를 걸어 “잠깐 얼굴 볼 수 있을까요?”라며 다가오셨죠. ‘시카고’를 시작으로 이후 ‘렌트’ ‘사운드 오브 뮤직’ ‘아이다’ ‘댄싱 섀도우’ ‘틱틱붐’ 등을 함께 작업하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박 대표님은 제게 ‘밥을 주시는 분’이세요.

박명성/ 박 감독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욕심 내는 스타일이 아니고, 자기와 마음이 맞는 제작사와 꾸준히 작업하는 ‘의리녀’예요. 저는 박 감독과 와인 마시면서 ‘한국 최초의 뮤지컬 음악감독’이고 ‘뮤지컬계의 인간문화재가 될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줬죠. 박 감독과는 국내 무대에 올릴 해외 작품을 고르기 위해 외국에도 많이 같이 갔어요. 제가 영어를 잘 못하니까 통역도 해줬죠.

박칼린/ 작품 문제로 박 대표님과 단 한 번도 부딪쳐 본 적이 없습니다. 음악에 대한 권한은 모두 제게 넘기세요. 배우 오디션장에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무대를 진지하게 사랑하고 항상 새로운 작품에 도전하죠. 수익만 생각했다면 차범석 선생님의 ‘산불’을 뮤지컬로 만든 ‘댄싱 섀도우’ 같은 대작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항상 돈이 목적이라면 일반 사업을 하는 게 낫다고 하시죠.

박명성/ 우리는 부딪칠 것 같으면 서로를 피했어요. 추구하는 곳은 같은데 방법이 잠시 다른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칼린이가 음악감독을 많이 했으니 뮤지컬 연출 쪽으로 옮겨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작품해석 능력이 뛰어나거든요. 박 감독은 이미 김영하씨의 동명소설을 무대에 올린 ‘퀴즈쇼’ ‘라스트 파이브 이어즈’를 연출한 바 있고, 12월부터는 ‘아이다’를 연출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겸직을 했는데 내년부터는 진로를 아예 바꿔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내년에는 ‘렌트’도 맡기고 싶고, 본인만 수락한다면 2012년 무대에 올릴 대형 창작 뮤지컬을 박 감독에게 맡겨볼 생각입니다. 한 예술가의 일대기를 다룬 대작입니다. 원래 오늘 둘이서 저녁 먹으면서 할 얘기였는데 지금 해버렸네요.

박칼린/  저도 오늘 처음 듣는 얘기예요. 하지만 도전하고 싶은 욕구는 있어요. 박 대표님 아니면 대한민국의 어느 제작자가 저를 연출자로 쓰겠어요? 저를 연출자로 쓴다는 것은 모험이거든요. 뮤지컬은 음악, 안무, 연출이 함께 조화를 이뤄 움직이는 것인데, 저는 그중 음악을 주로 맡아왔죠. ‘라스트 파이브 이어즈’ 같은 경우 음악 중심으로 이뤄진 작품이고, 워낙 여러 번 무대에 올리다 보니까 제가 연출을 하고 싶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 작품과 ‘노틀담의 꼽추’는 제가 꼭 연출을 해보고 싶었는데, 하나는 이미 했고 다른 하나도 언젠가 하겠죠. 그리고 또 욕심이 생길 겁니다. 저는 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박명성/  도전정신이 강한 박 감독은 신인 발굴에도 적극적이에요. 그리고 박 감독의 장점은 배우들의 소리를 잘 끄집어낸다는 겁니다. ‘남자의 자격’에서 배다해씨(대중가요 가수) 훈련시키는 것 보세요. 실제로 자기 속의 소리를 못 끌어내는 배우가 90%가 넘어요. 박 감독은 정서적으로 이들을 잘 요리해서 소리를 잘 끄집어내죠.

박칼린/  지인들 중에는 TV 보다가 “어쩌면 실생활에서처럼 똑같이 해요?”라고 연락을 해오기도 했어요. 사실 배우들 훈련시킬 때는 TV에서보다 더 심하게 합니다. ‘남자의 자격’ 촬영 때는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뮤지컬 연습 때는 대부분 제가 아는 사람이니까 한마디를 해도 빨리 알아들을 수 있게 하죠. 어떨 때에는 독설처럼 들릴 거예요. 그래서인지 초창기에는 ‘마녀’라는 별명도 있었어요.

박명성/ 마녀라는 말은 박 감독에게 사사하고 성공하지 못한 배우들이 만들어낸 것일 겁니다. 박 감독은 일을 즐기면서 합리적으로 배우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스타일이지 무조건 윽박지르진 않아요.

박칼린/ 가끔 제가 조금 심하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제한적으로 약속된 시간과 공간에서 연습하기도 바쁜데 흐트러지게 되면 참을 수 없어서입니다. 적어도 연습실 안에서 흐트러지는 꼴은 잘 못 봐요. 그리고 무섭기는 저보다 박 대표님이 더 무서워요. 내내 참다가 한 방에 날려버리죠.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박칼린 리더십은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가 됐다. ‘여자 히딩크’ ‘칼마에(제2의 강마에-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박 감독은 엄격하면서 공정했고, 신뢰와 소통을 중시했다. 긴장을 풀어줄 때는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안아주었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이 9월 3일 거제에서 열린 전국합창대회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긴장한 단원들에게 ‘I 믿 You(나는 너를 믿는다)’라며 따뜻한 포옹을 해주기도 했다. 그야말로 ‘따뜻한 카리스마’다. 박 감독은 신뢰할 만한 리더십으로 구성원을 차별하거나 핍박하거나 배제하지 않았고, 그것이 합창단과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다.

신경민 MBC 전 앵커는 최근 트위터를 통해 “박칼린은 매력적인 지도자”라며 “두 달 만에 오합지졸을 근사한 합창단으로 승격시킨 요소는 실력, 열정, 피, 땀이었죠. 혈연, 지연, 학연, 근무연, 술 실력이 아니었죠. 바로 이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박 감독은 자신의 리더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저는 항상 반대로 생각해요. 제가 리더가 되겠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에요. 구성원들에게 올바른 언행을 보여줬을 때 비로소 믿음이 생깁니다. 그랬을 때 리더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박 대표님 리더십의 경우는 ‘믿음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을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죠. 또 한번 믿은 사람에게는 잔소리도 안 해요. 그야말로 ‘대인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이 무척 깊고 크세요.”
 
박칼린/  ‘남자의 자격’도 믿음에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구성 자체가 없었어요. 담당 PD와 미팅할 때 저는 ‘진짜 목적이 9월 3일 거제도 합창대회가 맞냐’고 거듭 물었죠. 그러자 PD는 ‘사전 구성도 없고, 아무 요구도 않겠다. 이건 예능이 아니라 다큐’라고 하더라고요. 첫 미팅 세 시간 중 두 시간은 그에 대한 확답을 듣는 거였습니다. 촬영 중 ‘이쪽으로 서주세요’ ‘웃겨주세요’라는 말을 들은 적도 없고, 촬영 현장에서 대본을 본 적도 없어요. 강요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더 큰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박명성/ 스포츠 명승부처럼 각본 없는 드라마였기 때문에 더욱 감동적이었어요.

박칼린/  방송이 나간 후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늘어서 좋지만 사실 방송으로 얻은 인기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저는 지금 경기도 성남 산골마을에서 애완견 해태와 둘이 살고 있어요. 버스도 안 들어오는 곳입니다. 그만큼 조용히 살고 싶어한다는 거죠. 방송이 나간 후 인터뷰 요청이 수백 건은 들어왔을 거예요. 하지만 했던 얘기를 또 해야 하는 인터뷰는 이제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습니다. 오늘 인터뷰는 박 대표님과 함께 해서 신선한 것 같아요. 저도 몰랐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박명성/  저희에게는 강한 신뢰가 형성되어 있어요. 대부분의 뮤지컬 제작사 대표는 오디션장에 들어갑니다. 저는 박 감독을 믿기 때문에 안 들어가요. 2배수 정도 뽑아 놓고 저와 상의하지만 그때도 박 감독이 추천한 사람을 다 뽑아요. 나는 칼린이를 믿으니까. 그리고 신시컴퍼니는 대중스타 기용률이 낮습니다. 실력 위주로 뽑기 때문입니다. 대표가 관여하다 보면 대중스타를 더 많이 뽑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스타 마케팅을 통한 홍보가 되니까요.

박칼린/ 가요계에서 온 옥주현의 경우는 노래도 잘하고 머리도 좋아서 뮤지컬 배우로 잘 정착한 케이스입니다. 연말부터 8개월간 무대에 올릴 ‘아이다’에서도 주인공 역을 맡았어요. 요즘은 더블 캐스팅(2인), 트리플 캐스팅(3인)은 물론 쿼드러플 캐스팅(4인)까지 하지만 옥주현은 8개월간 혼자 공연할 겁니다.

박명성/ 주현이를 발탁할 때 주변에서 반대가 많았지만 그녀는 성실함으로 캐릭터를 자기 것으로 소화시킬 줄 아는 배우예요. 저와 박 감독은 인성을 중시해요.

카리스마, 리더십, 무대 사랑 외에도 두 사람의 닮은점이 너무나 많다. 무용으로 예술을 시작했고, 도전 정신이 투철하며, 신체적으로 큰 위기도 겪었다.

박명성 대표는 2005년 위암선고를 받았다. 박 대표는 ‘갬블러’ 일본 초청공연과 ‘아이다’ 국내 초연을 앞둔 시점에 스태프와 직원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해서 40일간의 ‘갬블러’ 공연을 마칠 때까지 수술을 받지 않고 끝까지 그의 임무를 다했다. 이후 10개월 지난 뒤 우연하게 그의 위암수술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이다’ 쫑파티는 눈물의 파티가 됐다고 한다.

박명성/ 2005년에 위암수술을 했는데 다 나았습니다. 그때 아무에게도 말 안 했어요. 2주 동안 영국에 갔다 온다고 해놓고 수술을 받았죠. 지금은 폭탄주 30잔까지 마실 수 있어요.

박칼린/ 당시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제게도 말씀을 안 하셨어요. 큰 공연을 앞두고 우리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이야기를 안 하신 거죠. 제 건강에 대해서는 이미 언론에서 관까지 짜주셨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끄떡없습니다. 신장이 조금 안 좋지만 아픈 사람 치고는 매우 건강해요. 박 대표님과 제 체력을 배우들이 못 따라갈 정도입니다.

박명성/ 전 서울예대 무용과를 나와 배우를 잠시 했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 빨리 접었어요. 무용은 배우가 되기 위해 시작했죠. 그러다가 극단 신시의 김상열 대표님을 만났는데, 선생님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제가 극단을 맡게 됐고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제가 쓴 책 ‘뮤지컬 드림’에 모두 담았습니다.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기 전에 항상 메모를 해두는 습관이 있어요. 술을 마시고 늦게 집에 들어가도 잊어버릴까봐 꼭 노트에 메모를 해두죠. 그 메모들이 모여서 책이 됐습니다.

박칼린/ 저는 어릴 적에 한국 무용을 했어요. 뮤지컬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공부했어요. 부산 초량초등학교를 2학년까지 다니다가 미국으로 갔고, 다시 한국으로 와서 경남여고에 다녔어요. 대학은 미국에서 나왔고, 대학원은 한국에서 다녔어요. 대학교 때 잠시 항공기 조종을 배우기도 했어요. 어려서부터 우주를 탐험하고 싶었고, 첫 단계로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자들만 다니는 파일럿 학교에 들어갔고, 혼자서 비행기를 조종해서 하늘을 날아봤어요. 요즘에 뮤지컬 작품을 올리는 것처럼 짜릿했어요.
 
박 감독은 1967년 미국 LA서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아이렌)에게서 언니들(킴벌리, 캘리)과 함께 첼로와 피아노를 배웠다. 칼린이라는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셨다. 칼린은 ‘아일랜드 소녀’라는 뜻이라고 한다.

캘리포니아예술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했고 서울대 대학원(국악 작곡)에서 명창 박동진으로부터 판소리를 사사했다. 지금은 ‘킥 뮤지컬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으며 호원대 방송연예학부 뮤지컬학과 교수이다.
 
박칼린/  딸만 셋인데 집에서는 차별이라는 게 없었어요. 모든 게 실력 순이었죠. 부모님께서는 당신들의 잘못도 이야기할 수 있게 하셨고, 어떤 일이든 충분히 설명해주셨어요. 충분한 설명을 들으니 매사 불평이 없었고, 세상에 말로 해서 안 될 일이 없다는 믿음도 생겼습니다. 진심 어린 말로 소통해서 안 되는 일은 없죠.

박명성/  박 감독은 모험정신이 무척 강합니다. 저는 박 감독이 앞으로 연극 연출도 하길 바라요. 저희 회사는 연극도 많이 제작하기 위해 2009년 이름을 신시뮤지컬컴퍼니에서 신시컴퍼니로 바꿨어요. 작년에는 최정원의 ‘피아프’, 손숙·추상미의 ‘가을 소나타’ 등을 올렸고, 올해는 ‘대학살의 신’ ‘33변주곡’ ‘엄마를 부탁해’ 등을 올립니다.

박칼린/ 제 좌우명은 ‘어제처럼 살지 말자’입니다. 그리고 ‘일할 때는 열심히, 놀 때도 열심히’가 삶의 모토예요. 놀 때는 확실히 놀아요. 지난 6월에는 2주 동안 완전히 사라졌었죠.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나라의 섬에 가서 2주 동안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수영하고, 먹고 잔 게 전부였죠.

박명성/ 앞으로 박 감독은 연출자로 진로를 바꿨으면 좋겠고, 나중에는 뮤지컬 배우도 했으면 좋겠어요. 노래를 잘하니까 전혀 문제 없을 겁니다.

박칼린/ 오늘 인터뷰를 통해 처음 알았어요. 저도 무용으로 시작했고 대표님도 무용으로 시작했네요. 우리는 정말 여러모로 비슷한 게 많아요. 저도 최근 배우로 무대에서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저랑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네요.

박명성/ 박 감독은 뭐든지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에요. 음식도 참 잘해요. 빵도 맛있게 굽고. 

박칼린/ 요리를 좋아해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거잖아요. 그리고 마트에서 식품 살 때 뒤에 적힌 재료를 보는 걸 좋아해요. 어떤 성분으로 이뤄졌는지를 보는게 재미있어요. 요리를 좋아하는 제게 나이도 꽉 찼는데 왜 결혼 안 하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주변에 남자가 없어요. 심지어 키우는 개도 암컷이에요. 하지만 저는 외로웠던 적이 없어요. 제 군단(킥 뮤지컬 스튜디오 직원들)이 있어서 항상 행복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왜 브로드웨이에 가지 사서 고생이냐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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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소통과 융합과 백남준 스마트폰 시대의 과학커뮤니케이션 2010년 10월 14일(목)

시각1. 2009년 12월 서울대 규장각에서 ‘근대성에 대한 회의: 고려 말의 세계화 과정(Questioning the Modern: Globalization in the late Koryo)’을 주제로 특강을 한 존 던컨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한국학연구소장은 “한국은 고려 말에 원나라와 대규모 인구 이동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로 세계화를 경험했다.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구화(세계화)라는 용어는 어제 오늘 생긴 신조어가 아닌 이미 7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인적 교류나 다방면의 교류 등 당시 어느 모로 보나 현재 목격하고 있는 지구화 현상들과 아주 흡사하다”고 평가했다.

시각2. “늑대는 바람을 따라 움직인다” 북방 속담이다. 바람을 가르며 초원을 뛰는 늑대는 북방 민족의 자유롭고 강인한 열정, 혼의 상징이다. “초원에선 평온함 뒤에 평온함이 없고 위험 뒤에는 또 다른 위험이 있다”고 한다. 신바람과 피와 눈물의 땅이다. 우리 문화의 원형은 그 땅에서 시작됐다. 잊혀졌던 그 북방 DNA의 원형을 뜻밖에 비디오아트스트 백남준(2006년 사망)이 부활시켰다. 1963년 독일의 파르나스갤러리에서 개최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은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선보이는 자리. 그는 이 전시회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소머리를 내걸며 “짐은 곧 황색 공포(yellow peril)”라고 했다. 즉 ‘오늘날의 예술은 백남준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메시지였다. 황색 공포는 칭기스칸을 상징했다.

백남준은 생전 “내 예술세계의 출발은 북방문화 원형”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아예 로제타-돌비석을 패러디한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95년)’에 “나는 내 핏속에 흐르는 시베리안-몽골리안 요소를 좋아한다”고 새겼다. 북방문화 원형에서 출발한 그는 꾸준히 세계 통합제국을 건설한 칭기스칸과 통합됐다. 백남준이 몰두한 북방 DNA는 인류사에 빛을 남긴 존귀한 이념의 원천이다.

시각3. 2008년 5월 한미간의 쇠고기협상파문 때문에 발생한 촛불시위가 두달이 넘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 참가 인원은 수만, 수십만에 이르렀고 가장 많이 참가한 6월 10일에는 전국적으로 백만명 이상이 참가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대중이 광장의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최근 수십년의 역사과정에서 보면 지난 87년 6월 민주항쟁과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를 중심으로 한 응원집회에 이어 세 번째이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오늘의 촛불시위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과학적 해석을 할 것이며, 촛불시위를 선도한 10대, 20대에 대해 ‘촛불세대’라는 평가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한국사회는 지난 10여 년 동안 IMF체제를 거치면서 급속한 세계화, 정보화의 진전을 경험해왔다.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의 본질, 21세기의 본질을 일컬어 ‘세계는 평평하다 (The world is Flat)’라고 한 바 있다. 그는 평평한 세계에서의 경쟁은 더 평등해지고 치열해질 것이며, 사람들은 더 많이 일하고 더 빨리 달리고 더 똑똑해질 것이라고 통찰했다.

우리 국민들은 지난 10년 동안 세계 어느 나라 국민들보다 프리드먼이 이야기한 바들을 실질적으로 체험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보의 평등을 실현하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어설픈 전문가들을 그냥 추월하고 촛불시위의 현장에 휴대폰, 노트북을 등장시켜 현장중계, 상호연락 등을 취하는 최첨단 세계화, 정보화의 실현을 보여준 것이다.

소위 ‘똑똑한 군중’의 확대와 그들의 세계화, 정보화의 실현이 시위 현장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또한 87년 민주항쟁 이후 성장한 시민사회는 2000년대 이후 세계화, 정보화현상과 결합되기도 하면서 더욱 그 역할을 확대시켜 왔다.

특히 정치권의 역할 부족현상과 결합되면서 시민사회의 과잉현상을 빚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그 역할을 확대시켜왔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권리의식은 세계적으로 가장 선도적이라고 할 정도고, 그 권리를 실현시키는 방법에 있어서도 인터넷과 모바일 인프라가 발달한 한국사회의 조건을 활용해서 첨단을 달려왔다.

소통과 융합을 통한 새로운 창조를 해낸 백남준

우리는 고려 말 몽골의 고려 지배시기에 대해 지금까지 삼별초의 항쟁으로 대표되는 당시 몽골제국에 대한 반제국주의 투쟁의 시각에서 역사를 배웠었다. 그 배경을 보자면 근대 우리 사학계의 주류가 일제식민사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로 형성되면서 그들의 민족자주콤플렉스가 작용돼 고려 말 시기 대몽항쟁을 실제 사실보다 과도하게 묘사한 측면이 있었다. 또한 80년대에 민족해방투쟁적 사관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이같은 경향이 지속, 확대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실체를 보면 던컨 교수의 지적대로 당시 세계 1차 지구촌제국을 건설하였던 몽골제국과 고려는 형제동맹, 혼인동맹적 관계 속에서 정치경제문화에 걸친 긴밀한 교류의 역사를 만들었었다.

물론 몽골제국이 고려를 침략한 것은 사실이나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몽골제국이 타 민족국가를 침략할 때와는 대단히 큰 차이가 들어날 정도로 고려에 대해 형제민족으로 대했으며 깊은 인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한반도가 최초의 세계화 현상을 경험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백남준은 이같은 새로운 역사인식의 맥락에서 몽골제국, 북방의 대초원, 칭기스칸을 재평가하고 소통하면서 한반도의 문화 DNA와 몽골의 대초원, 칭기스칸, 말 등의 문화 DNA를 융합해 20세기의 첨단 디지털 ART, 21세기를 열어갈 새로운 문화세계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소통인프라의 과잉과 소통콘텐츠의 빈곤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

그런데 2008년 촛불시위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겼는지 평가해볼 때 소통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소통 콘텐츠는 대단히 빈곤했고 포퓰리즘에 휩쓸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세계 최고수준의 인터넷 환경과 이동통신 네트워크, 그리고 노트북과 휴대폰 등을 이용한 정보교환은 가히 세계에서 두번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 할 정도로 발달돼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통 콘텐츠의 측면을 평가해볼 때 첫째 정부는 협상을 야무지게 하지 못한 측면과 더불어 소통능력의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둘째 과학자 등 소위 전문가들은 상당수 국민들이 우려했던 광우병에 대해 제대로 소통하지 못함으로 인해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의사소통(Communicating)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셋째 이에 따라 다수국민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부정확한 과학적 사실, 뜬소문 등에 휩쓸리면서 결국 포퓰리즘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MBC의 PD수첩 광우병 보도는 이같은 상황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한국사회가 겪었던 몸살과 사회적 손실은 천문학적 규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 촛불시위 사태과정에서 전문 과학자들의 과학적 콘텐츠에 기반한 대중과의 의사소통(Communicating)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불필요한 사회적 손실과 귀중한 국가예산의 낭비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소통인프라는 이제 인터넷, 기존의 휴대폰 환경을 더 진화시켜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역사상 최고, 세계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소통인프라가 아무리 발달되어 있어도 소통콘텐츠가 빈곤하다면 그 발달된 소통인프라는 또 다른 사회적 손실을 확장시키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인 백남준은 600여 년 동안 끊겨져 있던 북방 대초원의 문화, 세계제국을 만들었던 징기스칸의 문화 DNA를 한반도 문화 DNA와 다시 소통시키고 융합해 21세기 새로운 세계문화를 이끌어갈 위대한 예술작품과 문화세계를 창조해냈다.

이제는 백남준이 보여준 소통과 융합과 창조의 지혜를 배워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소통인프라 위에 훌륭한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과학인들의 과학적 콘텐츠에 기반한 대중과의 의사소통(Communicating)은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제공: 월간 과학창의 |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저작권자 2010.10.14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Cover Story] '디자인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

  • 입력 : 2009.10.10 03:30 / 수정 : 2009.11.13 16:14

그가 디자인하면 가구도 말을 한다
사람 얼굴의 와인 병따개 상어·개구리등 형상화한 형형색색의 바닥재…
제품에 스토리를 입혀 소비자의 감성 사로잡아
'남친' 있는 병따개, 족보 있는 의자… "내 디자인은 이야기 보따리"
와인 병따개 실제 모델은 내 여자 친구와 나…
병마개·후추통 등에 응용 아예 '자매'까지 만들어 줘
내 창의력의 비결은 남의 얘기 잘 듣는 것…
난 완벽하지 못해 항상 불안 내가 최고라고 여기면 끝

세계 디자인 사(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78·사진)를 인터뷰하러 간다고 했더니 동료 기자가 "멘디니?"하고 되물었다.

한국을 방문한 이탈리아의 디자인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환하게 웃고 있다. 셔츠의 윗단추까지 꼭 채운 그는 “일은 항상 책상에서만 한다”고 말했다. / LG하우시스 제공
"거 있잖아요, 얼굴 모양을 한 와인병 따개, 그걸 디자인한 사람"이라고 했더니, "아~"하고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멘디니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사람 얼굴 모양을 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병 따개를 본 기억은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주방용품회사 알레시(Alessi)가 생산하는 '안나 G.'라는 이름의 깜찍한 와인 오프너는 전 세계에서 1분에 1개꼴로 판매되면서 1000만개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로, 멘디니의 대표작 중 하나다.

1931년생. 팔순을 코앞에 둔 나이지만, 지금도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탈리아의 거장 디자이너가 한국을 찾았다. 이탈리아 사람, 게다가 디자이너라고 하면 자유분방하고 독특한 머리 모양과 차림새부터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이 자유롭다는 것과 외모가 자유분방하다는 게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멘디니는, 재킷 속에 받쳐 입은 셔츠의 맨 윗단추까지 꼭꼭 잠근 채, 공무원처럼 단정한 차림이었다. 여덟 살 아래인 동생 프란체스코 멘디니(Francesco Mendini)도 함께 왔다. 두 형제는 밀라노에 있는 디자인회사 '아틀리에 멘디니'를 공동 운영한다.

"우리 형제는, 아마도 자유분방한 나라의 대명사인 이탈리아에서 제일 정리정돈을 잘하는 두 사람에 꼽힐걸요. 창의적인 일을 한다고 지나치게 로맨틱하거나 약속도 잘 안 지키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정확한 걸 좋아하고 시간 허비하는 걸 싫어합니다. 양치질하는데 영감이 떠오르거나 기발한 곳에서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은 어디까지나 책상에 앉아 합니다."

그는 필립스, 까르띠에, 스와치, 에르메스, 알레시 등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의 제품을 디자인하거나 디자인 컨설팅을 해주었다. 최고의 품질과 기술, 디자인을 자랑하는 이 브랜드들도, 자신들의 제품에 플러스 알파의 가치를 더하기 위해 이 거장을 찾는다. 19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공장 건물을 개조한 밀라노의 사무실에서, 지금도 컴퓨터 대신 종이와 연필로 스케치하고, 이메일 대신 편지를 쓴다는 이 '아날로그 세대'의 창의력과 아이디어를 빌리는 것이다.

인터뷰는 서울 강남에 있는 LG하우시스 매장과 그가 묵고 있는 하얏트 호텔의 1층 커피숍에서 장소를 바꿔가며 진행됐다. 이번에 방한한 이유는 바닥재, 창호, 벽지 등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LG하우시스가 보통의 바닥재보다 1.5배 비싼 신제품을 개발하면서 디자인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색상을 주로 쓰는 멘디니가 바닥재를 디자인하다니, 바닥이 벌떡 일어나서 춤추는 게 아닐까' 하고, 처음엔 좀 냉소적인 생각으로 갔었다. 정말로 넥타이나 스카프로 만들어 한 조각만 둘러도 100m 전방에서 눈에 확 띌 것 같은 색채의 파도였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음, 한국 사람들은 차분한 색을 좋아하는 편인데, 과연 이렇게 화려한 바닥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처음엔 깜짝 놀랄지 몰라도 한 번쯤 그 공간을 생각해 보겠지요. 그리고 이걸 바닥 전부에 깔아야 할 필요도 없어요. 하얀 바닥의 한쪽만 써도 되고 소비자들이 마음껏 색상과 패턴을 골라 재구성할 수 있지요."

1994년 선보인 독일 하노버의 버스 정류장.
멘디니의 디자인 개발 이야기를 들으며, 고정관념을 벗지 못하는 범인(凡人)으로서는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다. 가령 '멘디니 바닥재'는 정사각형, 마름모 등 5가지 기본 패턴이 있다. 기자 눈에는 그냥 사각형이요, 기하학적 무늬에 불과한데, 각각이 물속에서 헤엄치는 가오리, 농어, 가자미, 상어, 그리고 개구리를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45개의 기본 색상이 제시돼 있다. 이 패턴과 색상을 이리저리 조합해 총 1만3000종의 다른 바닥을 만들어낸다.

또 개구리 패턴을 노랑-연보라색으로 반복한 바닥에는 '왈츠', 회색-베이지 계열로 반복한 바닥에는 '스윙'이라고 이름 붙였다. 가자미에서 따온 마름모 패턴과 상어에서 따온 정사각형 패턴을 섞은 바닥에는 '탭댄스', 가오리 패턴을 노랑-빨강-분홍-하늘색 등으로 조합한 바닥에는 '플라멩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와인 병따개에도, 바닥에도, 의자에도 감정과 영혼을 불어넣는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세계적 히트 상품인 와인오프너 '안나 G.'를 저도 좋아합니다. 어떻게 사람 모양의 와인오프너를 생각해냈나요?

"(팔을 들면서) 어릴 적에 삼촌이 팔을 이렇게 높이 들면서 와인 따는 걸 볼 때마다 꼭 발레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는 순간이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느껴졌지요. 그래서 와인오프너에 그런 움직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저는 생명이 없는 오브제(물건)에도, 사람을 보는 것처럼 얼굴 표정을 넣는 걸 좋아한답니다."

멘디니는 사물에 감정을 이입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연결시키는 디자인 작업을 많이 해왔다. 세계에서 제일 예쁜 와인오프너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안나 G.'를 보면, 집에 혼자 있어도 마치 친구랑 있는 것 같은 친근감을 준다.

멘디니는 "폭력적인 세상에서, 집은 보다 보호받는 곳이어야 한다"면서 "나는 보다 감정이 드러나고 느림의 미학(美學)을 자극해주는 오브제들로 채워진, 그런 집안 공간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멘디니의 디자인 철학에서는, 가구도, 생활 소품도 각각 자신의 스토리를 가진 완결된 건축물과 다름없다.

―'안나 G.'는 여자친구 안나 질리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면서요?

"네. 지금도 밀라노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지요. 아~. 내 동생이 옆에서 다 듣고 있으니까 더 깊은 사연은 못 들려주겠고…(웃음).

1994년에 선보인 '안나 G.'는 원래 네덜란드 전자회사 필립스가 기자 회견을 준비하면서 기자들에게 나눠줄 기념품으로 만든 것이었어요. 이탈리아의 주방용품회사인 알레시가 만들었는데, 기념품을 열쇠고리로 할까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좀 색다른 와인오프너로 정하고 제가 디자인한 것이지요. 5000개 한정품으로 생산했는데, 너무 반응이 좋아 더 살 수 없겠느냐는 문의가 빗발치는 바람에 알레시가 아예 제품화해서 내놓게 된 것이지요."

알레시는 '안나 G.'의 성공에 힘입어 와인 병마개, 후추통, 양초꽂이, 주방용 타이머 등에도 '안나' 이름을 붙인 '안나 자매'들을 줄줄이 탄생시켰다. 멘디니는 "안나가 대가족을 이뤘다"고 표현하면서 껄껄 웃었다.

'안나 G.'에게 남자 친구도 생겼다. "안나의 짝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에 멘디니는 3년간의 연구 끝에 지난 2003년 자신을 형상화한 '알레산드로 M.' 와인오프너를 내놨다. 안나보다 키도 작고, 짧은 머리를 한 모습이 영락없이 멘디니 자신이다.

대가족을 이룬 '안나 G.'와 달리, '알레산드로 M.'은 똑같은 형태의 와인오프너에서 계속 옷을 바꿔 입는 후속 제품을 내놓는 식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멘디니는 "알레산드로 M.은 여행 가고, 일하고, 파티 가는 등 계절과 장소에 따라 멋지게 보이고 싶어하면서 옷을 자주 바꿔 입는 남자"라고 제품의 이야기 보따리를 펼쳤다. 가령 2005년에는 각각 다른 옷을 입혀 뮌헨, 베이징 등 도시 이름을 붙인 한정판을, 2006년에는 요리사, 호놀룰루, 시에나 등의 이름을 달고 각각 다른 옷을 입힌 제품을 내놨다. 2008년에 '선 드림'이라고 부제를 단 제품은 판매 수익금의 일부를 브라질몽골의 가난한 어린이를 돕는 데 쓰인다. 얼굴에 베니스 가면을 쓰고 어릿광대 복장을 한 제품은 물의 도시 베니스의 재건을 돕는 데 쓰인다.

제품에 이야기를 덧입히고 감동을 주면서 소비자의 감성과 영혼에 호소하는 게 최신 마케팅이라고 하는데, 멘디니의 내공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좀처럼 끝날 줄 모르는 '네버 엔딩 스토리(never ending story)'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

어릴 때부터 축적한 예술적 안목

―형제가 함께 일하면서 비슷한 길을 걷는 걸 보니,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신 건가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예술가 집안은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변호사였지만 앤틱 가구를 수집하는 게 취미였어요. 어머니도 그림 모으는 걸 좋아하셨지요. 엔지니어였던 할아버지도 그림 수집을 좋아하셨고, 그 영향으로 삼촌 역시 엔지니어였지만 그림을 수집해서 아예 개인박물관까지 열었어요. 그 덕에 어렸을 적부터 그림을 많이 보고 자랐어요. 이탈리아에는 그처럼 예술가가 아닌 일반인 중에도 예술을 좋아하고 예술품 수집하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알레산드로 멘디니(오른쪽)가 동생 프란체스코(왼쪽)와 함께 자신이 디자인한 베스트셀러 와인 오프너 ‘안나 G.’와 ‘알레산드로 M.’의 대형 모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이진한 기자
―왜 그렇게 생동감 넘치고 화려한 색채를 좋아하시나요?

"20세기 초 큐비즘(입체파)을 비롯한 아방가르드(다다이즘 등 20세기의 혁신적 예술 운동) 작품을 특히 좋아해요. 그 작품들의 색깔이 무척 강렬하지요. 어린 시절부터 그런 그림을 좋아했고, 쭉 보면서 자라다 보니 제 작품에도 색상을 넣기 시작한 것이죠. 테크놀로지는 색상이 없지요. 하지만 자연에 가까운 알록달록한 색상을 넣으면서 물건에 온기를 불어넣고,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되지요."

―대표작 '프루스트' 의자(1978년 작)도 마치 가구에 그린 그림처럼, 강렬한 색상이 인상적입니다(프루스트는 앤틱 의자의 틀에, 형형색색의 점묘화로 그려진 천을 씌우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름을 붙인 1인용 안락의자다). 비슷한 의자를 여러 개 봤는데 지금까지 몇 개나 만들어졌나요? 매번 만들 때마다 색채가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나요?

"수제품으로는 50~60개 정도 만들어졌어요. 흰 바탕으로 된 18세기풍의 앤틱 의자 틀을 가져다, 그 위에 점묘화를 그리듯 손으로 붓 터치를 하면서 색상을 입힙니다. 주문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검은색과 노란색이 더 섞이기도 하고, 매번 색감(色感)이 달라지지요. 점묘 작업은 미술을 전공한, 프란체스코의 딸 클라우디아가 합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제가 전체 마무리를 합니다. 곧 프루스트 의자에 대한 '족보책'을 만들 작정입니다. 누구에게 팔려가서 현재 어디에 소장돼 있는지를 책으로 엮어내는 것이죠. 한국에서는 그걸 청자(靑磁)로 만들고 있고, 이탈리아 베니니사(社)에서는 유리로 만드는 것도 추진 중입니다. 수제품과는 별도로, 이탈리아 가구회사 카펠리니사(社)에서 인쇄한 천을 이용해 더 많이 생산도 하고 있습니다."

1 와인 오프너 ‘안나 G.’의 성공에 힘입어 다른 주방용품에까지 응용돼 대가족을 이룬 알레시사(社)의 안나 시리즈. 2 앤틱 의자의 틀에, 형형색색의 점묘화를 덧입힌 멘디니의 1978년 작 ‘프루스트’ 의자.
멘디니는 기존에 존재하던 오래된 '기억'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입혀 재표현해내는 작업을 많이 해왔다. 이 같은 리디자인(redesign)을 통해 낡고 오래된 것들이 영혼과 감성(感性)을 부여받고 새로운 시각적 언어로 이야기를 한다. 프루스트 의자 역시 점묘주의와 결합하기 전까지는 여느 가구들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멘디니는 리디자인을 통해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가족 같은 조직을 유지

―21세기는 창의력의 시대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창의적 교육'이나 '창조 경영'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이 곧 브랜드가 되는 최고의 '창의적 인간'이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다 창의적이라면 세상이 정말 아름답겠지요. 하지만 전문가가 되는 건 쉽지 않아요. 무엇보다 자유가 중요하겠지요."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것에 비해, 또 세계적 기업들과 일하는 것에 비해 20명 남짓한 회사 규모는 너무 작지 않나요?

"우리 사무실은 큰 프로젝트 하나를 완성해내는 공장 같은 곳이 아니라, 일종의 연구소 같은 콘셉트입니다. 어떤 디자인 회사에는 100명의 디자이너가 있어 트렌드를 잡아내고, 마케팅하고, 또 기존에 했던 걸 변형해서 새 프로젝트를 해내지만 우리는 일하는 방식이 달라요. 트렌드를 '창조'하고, 또 제시하려고 노력하지요. 우리가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있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건축물에 비유하자면, 늘 한 가지 자재만 쓰는 게 아닙니다. 매번 프로젝트마다 다른 자재를 쓰고, 그렇게 다른 것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지요."

―회사 규모를 더 키울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100명이 있으면 서로 얘기하게 되질 않아요. 명령 체계가 작동하는 피라미드 조직이 되고 말지요. 저희는 20여명 중에서도 정직원은 12명에 불과합니다. 서로 가족 같아요. 하루 중에 제일 행복한 시간은 아침에 직원들과 함께 커피 마시는 시간입니다."

―아침에 티타임을 가지면서 회의를 하는 건가요?

"아니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아침 몇 시라고 정해진 시각까지 출근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어요. 각자 맡은 일에 따라 자유롭게 출퇴근해도 하루에 7~8시간 이상씩 일하면서 각자 맡은 일을 해내지요."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젊은 디자인 감각과 창의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얘기하고 있다. 뒤쪽 벽면에는 자신이 디자인한 알록달록한 바닥재가 걸려 있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재충전은 어떻게 하시나요?

"책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주말에는 건축 잡지, 디자인 잡지를 특히 많이 봅니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신기술이 세상을 많이 바꾸지 않았나요?

"저는 그렇지만, 동생은 아주 일찍부터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컴퓨터로 대체할 수 있는 작업도 있지만, 아직도 절반은 전통적 방식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디자인이란 세상을 품격 있게 바꿀 수 있는 것

―디자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디자인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되, 품질을 갖춘 것. 어떤 제품은 기술만으로 개발할 수 있지만, 와인오프너 같은 것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걸 다르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가 있지요. 좋은 디자인이란 시(詩)와 같습니다. 어떨 때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고, 어떨 때는 미소와 로맨스를 줍니다. 물론 하이테크 제품 중에도 애플사의 제품처럼 기술과 디자인을 고루 갖춘 제품이 있습니다."

―그렇게 젊은 감각을 유지하면서 창의력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전 궁금한 게 무척 많아요.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기를 좋아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나이 들면 자기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는데, 나는 아직도 남의 얘기 듣는 걸 좋아합니다. 오늘은 내가 인터뷰를 당했지만 다음 번엔 내가 기자님 인터뷰를 할 거예요."

―디자이너들은 대개 자유분방하게 살고 기발한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고들 생각하는데, 잘 정돈된 책상 앞에서 일을 하신다고요?

"일이란, 우리가 체력 단련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해보고, 문제점이 뭔지를 발견하면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다시 해보고 그럽니다. 대신 저는 일을 다 끝낸 후에는 지나친 자아비판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하는 일이 절대 완벽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내가 최고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걸로 끝입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이 있겠지만, 저는 늘 완전하지 못하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학교 나가 강의하는 것도 잘 하지 않습니다. 혹시 강의 중에 잘못된 것을 전달할까봐…."

얼마 전 위클리비즈가 인터뷰한 '실패학의 대가' 잭디시 세스(Sheth) 미국 에모리대 교수는 "좋은 기업이 병들어가는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자기 파괴적 습성이 '오만'이라고 했다. 그에 비춰보면 멘디니는 실패로 치닫는 자기 파괴적 습성을 원천적으로 경계하는 성격이었다.

―요즘은 어떤 기업과 일을 하고 있나요?

"20개 남짓한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보석업체 까르띠에의 의뢰로, 전 세계에 순회 전시할 보석 기둥도 만들고 있지요."

―평생 현역으로 일하실 계획인가요?

"내가 디자인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50세였습니다. 그 전엔 잡지 일을 주로 했지요. 이탈리아의 권위 있는 건축 및 디자인 잡지 세 곳에서 각각 5년씩, 15년간 일했습니다. 기사만 쓴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기획도 하고 프로젝트도 맡았지요. 늦게 시작했으니, 늦게까지 일하는 게 당연하지요."

창의적 DNA 앞에,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현대 디자인 흐름 뒤바꾼 강렬한 색채의 마술사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누구

1931년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의 건축가 겸 디자이너. 밀라노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건축 및 인테리어 디자인 잡지인 '카사 벨라(Casa Bella)' '모도(Modo)''도무스(Domus)' 편집장을 지냈다.

멘디니는 특히 1979년에 '스튜디오 알키미아', 1980년대에는 진보적인 디자인 그룹 '멤피스'의 일원으로서 급진적인 디자인 운동을 주도, 디자인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멤피스 디자인 그룹'은 그전까지 디자인의 주류를 이뤘던 기능주의에 맞서, 보다 장식적이고 다양한 형태와 강렬한 색상을 강조하면서 현대 디자인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1978년작 '프루스트' 의자, 1994년에 내놓은 알레시사(社)의 와인 오프너 '안나 G.' 등이 대표작. 그의 작품들은 뉴욕 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등에 영구 소장돼 있다. 가구, 생활용품, 인테리어용품 등을 디자인한 것 외에도 이탈리아 로마 테르미니역의 리노베이션, 일본 히로시마 항구의 기념탑, 네덜란드 그로닝겐 미술관 등의 건축 작업도 했다.

1979년과 1981년에 최고의 디자인에 주어지는 이탈리아의 황금콤파스(Compasso d'Oro)상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기사 작위를, 미국 뉴욕건축연맹에서 명예훈장을 받았다.

지난 1989년부터 밀라노에서 동생 프란체스코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디자인회사 '아틀리에 멘디니'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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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월요인터뷰]

세계 산업디자인계 거장 알렉산드로 멘디니
디자인보다 기능 중요, 못생긴 '프리우스' 잘 팔리는건 탁월한 성능 갖췄기 때문
한국 디자인 장ㆍ단점은
힘 넘치고 기능적인 면 강해, 가구 등 생활 디자인은 아쉬워

입력: 2010-09-19 17:35 / 수정: 2010-09-19 17:35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홍상수]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 서로 기댄 세 개의 막대기처럼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 2010.09.16

홍상수 감독, 13회차 촬영으로 완성된 <옥희의 영화>를 말하다

-지난해 여름 <하하하>를 찍고 얼마 여유를 두지 않고 단 4명의 스탭과 함께 13회차 촬영으로 <옥희의 영화>를 만들었다. 원래 가벼운 행장으로 영화를 찍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이번은 특수한 경우로 보인다.
=<하하하>의 마무리도 끝나지 않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기 중간이었다. 몸은 많이 피곤했고 투자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약속된 배우도 없었다. 보통 같으면 전혀 영화를 찍을 형편이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장편이냐 단편이냐는 둘째치고 완성 못해도 좋으니 뭔가 찍고 싶더라. 이렇게 모든 조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를 찍으면 무엇이 나올지 보려는 마음이 있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이후로는 훨씬 자유로워질 거라는 생각을 한 건가.
=어떤 상황이 되어도 찍을 수 있다는 자기 확인의 의미도 물론 있었지만 그건 부수적이고, 모든 조건이 적대적일 때 내 안에서 뭐가 나올지 궁금한 마음이 제일 컸다.

-배우와 스탭에게 완성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했나. (웃음)
=그런 말은 안 했지. (웃음) 거짓말 한 건 아니고 밀고 나갈 의지는 있었으니까. 준비가 없어도 너무 없으니 도중에 막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이선균씨에겐 미안하지만 일주일에 이틀만 시간을 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고맙게도 영화에 대해 아무 정보없이 허락해주었다.

-4편으로 구성된 <옥희의 영화>의 작명법은 수록 단편 중 한편의 제목을 전체 제목으로 삼는 단편소설집의 그것 같다. 초기에는 이 영화의 가제가 <사친>(思親)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사친’(思親)은 이 영화와는 관계가 없고, 다만 내가 영화를 찍는 어떤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허구적인 사고의 틀에서 자유로워지는 제일 적극적인 방법이 내게 가까운 것들을 갖고 생각하는 거라고 믿는다. 나나 생활, 주변의 작은 일들을 통해 바라볼 때 ‘틀’의 허구성이 보이지 않나. <옥희의 영화>는 깊이 생각해 정한 제목은 아니고 그저 다른 제목이 내키지 않았다. 각편의 제목은 첫신 찍는 아침에 정해지기도 하고 당일 촬영분 편집을 하면서 떠오르기도 했다.

이선균에서 시작해 정유미, 문성근까지

-<옥희의 영화>를 구성하는 네 단락은 독립된 단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옴니버스의 에피소드도 아니다. 뭐라 부르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나. ‘편’? ‘부’?
=‘부’는 너무 한 덩어리로 전체가 모이는 느낌이고, ‘편’이 좋겠다. 어느 정도 독립성도 느껴지고.

-<옥희의 영화>를 보고나면 2-3-4-1편 또는 1-2-3-4편 순서로 찍은 것 같지만 실은 1-2-4-3 순서로 찍었다. 1편을 찍은 뒤 2편 그리고 4편의 필요성을 느낀 과정과 최종적으로 3편이 있어야 완결된다고 판단한 경로를 순서대로 설명해달라.
=우선 이선균씨와 하기로 정하고 촬영 이틀 전에 영화의 대강을 두세장에 썼다. 좌충우돌하는 한 남자의 겨울날 하루의 이야기 정도의 틀을 생각했다. 찍으면서 그 장면들이 늘어지면 영화 한편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편집해보니 27분 정도밖에 안됐다. 뭘 더하라는 뜻 같았다. 여기 정유미씨가 더해지면서 <첩첩산중>의 구도를 소진시켜보자는 생각이 떠올라 1편에 나와준 문성근씨를 다시 섭외했다. 그것이 2편 ‘키스왕’이 됐다. 2편의 중간쯤까지 갔을 때 장편까지 가볼까 생각이 들었다. 1, 2편에서 문성근씨가 연기하는 송 교수가 완전히 다르고 2편에서 옥희(정유미)와 송의 관계가 암시되니까 그것을 더 풀어줘야 할 것 같아 4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몇분부터 장편으로 간주되냐고 주변에 물어보니 80분이라고 하더라. 1, 2, 4편을 편집하니 80분이 안됐다. 그래도 긴 중편으로 남긴 채 더 건드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꼭 중편이나 장편이 돼야 한다는 압박은 어느 쪽도 없었다. 많은 돈을 들이지도 않았고 배우들도 양해해줄 터였다. 그런데 마침 103년 만의 폭설이 내렸고 3편이 바로 떠올랐다. 아침에 일어나 3편 대본을 쓰다가 송 교수가 나와야 한다는 판단이 들어 문성근씨에게 전화를 했다. 안 받더라. 연락을 기다리며 계속 썼다. 40분 뒤 전화가 왔고 나와달라고 해서 그날 오후에 바로 3편을 찍었다. (웃음) 1편이 6회차, 2편이 4회차를 찍었고 3편이 하루에, 4편은 2회차 촬영했다.

-각편이 시작할 때마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과 함께 출연자 크레딧을 꼬박꼬박 넣었다. 일부러 마디를 노출시킨 거다. 이렇게 중간에 경계를 그어도 하나의 장편으로 설 수 있는지 보겠다는 의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마디마다 넉넉하게 쉬고 싶었다. 죽은 시간이 될까봐 걱정도 했고, 제스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각편이 다른 영화임을 표시하고 하나의 영화가 시작되는 형식을 약식으로라도 주고 싶었다. 배우들의 이름도 반복해 보여주고 싶었다. 세 주연배우의 크레딧 순서는 각편에서의 비중에 따라 편마다 다르게 배치했다. 학교 연구실 테이블에 출연진 이름을 쓴 A4 용지를 놓고 <위풍당당 행진곡>을 틀어놓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소형 디지털카메라를 움직여 내가 찍었다.

-유독 4편의 크레딧만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의 이름을 한번 비춘 다음 다시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 이름을 반복해 보여주던데.
=편집하고 보니 장편이 되기에 약간 시간이 모자라서 그랬다. (좌중 웃음)

-각편의 시작과 끝에 두 가지 편곡의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썼다. <극장전>의 <라데츠키 행진곡>이나 <밤과낮>의 <베토벤 교향곡 7번>처럼 전형적인 곡을 가져다 쓴 경우다. 황량하고 일상적인 영화의 앞에서 “당신이 볼 이 모습이 진짜 장엄한 거다”라고 선언하는 기분도 든다.
=<옥희의 영화>를 만드는 초기에 그 음악에 꽂혔다. 원래 좋아하던 곡을 오랜만에 들었는데 더욱 좋았다. 이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듣고 있던 음악이고 그 곡이 내게 준 만족감과 쾌감이 있으니 영화(를 만드는 나의 상태)와 이 음악은 당연히 연결돼 있다고 본다.

구조, 그리고 리듬의 조율, 간결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차이와 반복으로 구성된 세계를 매번 달리 설계한 구조를 통해 드러내왔다. <옥희의 영화> 설계의 핵심은 인물들의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우들은 자신의 인물을 동일인이라고 여기고 연기했나.
=인물의 내면, 각편의 관계를 설명한 적은 없다. 나도 마지막으로 ‘폭설후’를 쓸 즈음에야 구조를 알았다. 배우들도 추측은 했겠지만 어떤 영화인지 몰랐을 거다. 내가 해준 거라고는 2편과 3편에서 문성근씨의 옷차림을 조금 다르게 주문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연출이었다. 대사를 보고 “동일인이 아닐 수 있겠다” 짐작했을 수는 있지만. 대사 톤이 잘못됐다면 개입했겠지만 그런 경우가 없었다.

-1편 ‘주문을 외울 날’부터 영화를 따라가기로 하자. 영화를 여는 첫 대사가 무려 “떼다보목지질케나봉바”다. (웃음) 그리고 이어 아내가 남편을 엉뚱한 남자의 이름으로 잘못 부른다. 1편의 도입부를 찍을 무렵엔 이 영화가 인물의 동일성을 회의하는 이야기가 될 거라는 계획도 서 있지 않았을 텐데 절묘하게 영화 전체와 어울리는 대사다.
=(웃음) 남진구(이선균)는 자기 주문을 만들어놓고 사는 남자고 아마 하루를 잘 지내보자는 뜻으로 그걸 왼 거다. 이름을 잘못 부르는 대사는 계산하고 쓴 건 아닌데, 한 영화를 만드는 동안 정해진 대상과 계절과 조건이 있으니 내가 무엇을 떠올리든 그 원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뒤에 찍는 내용이 이미 찍어놓은 것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전에도 먼저 찍은 것이 우연히 뒤쪽 내용과 맞아떨어지곤 했다.

-1편에서 영화과 강사인 진구는 “인위를 통해 진심을 전해야 해”라고 가르친다. 홍상수식으로 말하자면 인위는 ‘구조’인가.
=구조, 그리고 리듬의 조율, 간결화 등등 타인에게 진심을 전하기 위해 의존해야 하는 인위적 틀이 오만 가지 있다. 중간에 틀이 있어야 진심이 전달되지 100% 날것으로 그냥 말하면 도리어 타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진부함에 질려 귀를 막을 수도 있고 장광설에 질리거나 엄격하지 못한 자기 연민이 꼴보기 싫어 도망쳐버릴 수도 있다.

-2편 ‘키스왕’의 도입부는 명백히 1편이 <극장전>의 전반부처럼 영화 속의 영화였는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준다. 그러나 끝까지 확증은 제공되지 않는다.이처럼 네편의 상호 관계를 암시하는 동시에 지워버리는 괴상한 ‘고리’들이 있다. 예컨대 1편의 진구의 집이 2편에서 옥희의 집인데, 진구는 옥희의 집을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1, 2편과 3편에서 송 교수는 같은 인물 같은데 다른 지위와 성격을 가진 교수이기도 하다. 즉 이 영화는 네 단편 사이에 복잡한 관계를 만든다기보다 어떤 관계도 불가능하도록 피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는 인상이다.
=<옥희의 영화>를 구성하는 네편의 관계를 깔끔히 정리할 수는 없을 거다. 토막인 동시에 독립적이다. 다만 세 인물의 관계가 주는 정서는 일관되게 간다. 내 전작들은 관객에 의해 구조적으로 다시 꿰맞추어지는 영화들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반발이 있었고 그게 주는 쾌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서만 일관되고 관계는 비논리적으로 겹쳐지게 하면 인물들이 확장되는 느낌이랄까. A라는 사람이 B 같기도 하고, 충분히 구체적인 인물이지만 고유한 단일 정체성은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 보인다. 세 사람 모두가 섞여서 만든 뿌연 그림이 인간들 전체로 확장되는 것 같은. 그럼으로써 한 인물의 일면은 구체적인데 영화 전체를 의식하며 그를 바라보면 옆에 있는 인물과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나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1인다역이다. 보통 영화에서 1인다역이라면 한 배우가 변신해 전혀 다른 인물을 표현하는 연기인데 <옥희의 영화>는 그냥 한 인물을 연기해도 그것이 다른 상황과 앙상블 안에 있으면 다른 인간으로 보임을 거꾸로 증명한다. ‘키스왕’의 ‘교수-그와 사귀는 여자 제자-제자의 남자친구’라는 구도는 <첩첩산중>과 같고 배우도 동일하다.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의 조합에서 어떤 기운을 보나.
=서로 기댄 세개의 막대기 같다. A의 머리는 B의 등에 기대고 B의 머리는 또 C의 어깨에 기대고 하는 식으로 편하게 있는 기운이 포착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옥희의 영화>가 <첩첩산중>의 미래라든지 백그라운드 스토리인 건 아니다. 정서도 진구와 옥희의 분위기는 <첩첩산중>의 그것보다 건조하다.

-2편에서 벤치에 놓인 우유팩을 보며 진구가 그것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를 알면 우주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김승우)가 언급했던, 모든 우연을 연결하는 선을 연상시킨다.
=젊은 친구의 사고유희다. 극소한 부분도 거기에 위치함으로써 그를 중심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의 위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수많은 관념틀과 전체를 쳐다보는 데에 지친 젊은이가 선(禪)을 하듯 눈앞의 작은 것만 제대로 보면 연결된 모든 걸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3편 ‘폭설 후’는 휴강한 교실에서 진구와 옥희와 송 교수가 일문일답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대로 답이 안된 채로 다음 질문으로 계속 넘어가는 이 장면은 낙지를 토하는 장면과 함께 초현실적인 느낌을 불어넣는다.
=지난겨울 103년 만의 폭설이 왔고 촬영날 아침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폭설 후’라는 제목을 정했다. 텅 빈 교실에서 선생이 학생들이 오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다음엔 셋이서 뭘 할 것인가. 교수가 학교를 그만둘 마음이니 개인적이거든 근본적인 거든 잘 안 물어봤던 질문을 뭐든 맘대로 물어보라고 할 것 같았다. 그러고는 겨울 골목에서 혼자 걷다 상투적인 뭔가를 토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4편 ‘옥희의 영화’에서는 송 교수와 진구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이든 남자’, ‘젊은 남자’로 지칭한다.
=일단 옥희가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려고 이 영화를 찍었다는 전제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사람으로서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억지로 가짜 이름을 짓는 것보다 거짓말을 안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 그렇게 부름으로써 개인의 정체성이 세 인물 테두리 바깥으로도 퍼지고 섞이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옥희의 영화> 포스터는 옥희와 진구의 흑백사진 귀퉁이에 홍 감독이 펜으로 그린 송 교수의 얼굴이 들어간 디자인이다.
=4편을 아차산에서 촬영하는데 한 어른이 지나가다 배우들 사진을 한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새로 산 카메라로 풍경을 찍어보려고 산행을 왔는데, 자제분이 좋아하는 이선균씨를 알아보고 만났다는 증거를 남기려고 사진을 찍으신 거다. 그런데 이분이 알고보니 내가 일하는 건대에서 정년퇴임한 교수님이셨다. 나중에 연구실로 배우들과 나를 위해 뽑은 사진 세장을 갖고 오셨다. 내 몫의 사진을 벽에 붙여두고 물끄러미 보다가 장난치듯 무심코 거기 빠진 문성근씨를 그려놓고 ‘옥희의 영화’라고 썼는데 그것이 포스터가 됐다. (웃음)

절감(節減), 절감(切感)

-4편 말미에는 감독인 옥희의 내레이션이 있다. “배우 해주실 분은 최대한 원래 모델이 된 분과 비슷한 인상의 분을 선택했습니다. 그 비슷함이란 한계 때문에 제가 원래 보고 싶었던 붙여놓은 두 그림의 효과를 절감시킬 것 같습니다.” 이것은 둘로 이해된다. 비슷해봤자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효과가 절감(節減)됐다는, 즉 영화매체의 한계에 관한 말 같기도 한 반면, 동일하지는 않고 비슷하기 때문에 형상화의 효과를 절감(切感)할 수 있었다는 표현 같기도 하다.
=실제로도 두 번째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나 역시 이상한 어감 때문에 그렇게 쓴 면도 있다. 어쨌든 옥희가 의도한 건 첫 번째다. 영화를 통해 두 그림을 나란히 붙여놓음으로써 자신이 기억하는 것 이상을 보고 깨닫고 싶었는데, 즉물적 느낌이란 진짜를 붙여놓아야만 알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부족했다는 뜻이다. 이 내레이션으로 인해 세 인물은 갑자기 다 배우가 되어버린다.

-다음 영화는 전북 부안에서 찍는다고 들었다.
=겨울에 찍을 듯하다. 원래 <옥희의 영화>를 만들면서 다음 영화는 반팔 입고 8월에 찍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옥희의 영화>가 9월에 개봉하면서 어려워졌다. 막상 올 8월이 너무 덥고 비도 많이 와 잘됐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홍상수의 첩첩심상(疊疊心象) <옥희의 영화> 1/4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1] 2/4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2] 3/4
[홍상수]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 서로 기댄 세 개의 막대기처럼 4/4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Close-up] 한국 온라인게임의 대부 송재경씨 [중앙일보]

2010.09.13 18:49 입력 / 2010.09.13 21:24 수정

바람의 나라, 리니지 개발 주역 새 게임 들고 7년 만에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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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바람의 나라’ ‘리니지’ 같은 대박 온라인게임을 탄생시킨 송재경(43·사진)씨가 ‘아키에이지(태초의 시대)’라는 게임으로 다시 한번 출사표를 던진다. 본인이 세운 엑스엘게임즈라는 회사를 통해서다. 그는 게임 유저(사용자)들이 스스로 뭔가를 구상하고 도전해볼 여지를 많이 줬다는 점에서 이전 게임과 차별화된다고 설명했다.

“미국 블리자드의 ‘월드오브워크래프트(WOW·이하 와우)’ 같은 요즘 온라인 게임들을 놀이공원이라고 한다면 아키에이지는 놀이터라고 할 수 있어요.” 놀이공원에선 이미 설치된 놀이기구를 즐길 수밖에 없지만 놀이터에선 모래성도 쌓고, 폐타이어로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텃밭인 온라인게임, 좀 더 구체적으론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으로 돌아온 건 7년 만이다. 2003년 엔씨소프트의 부사장이라는 안정된 자리에서 뛰쳐나와 지금 회사를 차린 직후 만든 것이 ‘XL1’이라는 자동차 경주 게임이었다. 하지만 고배를 들었다. 2006년 말부터 다시 온라인게임 개발에 몰두해 지난해 아키에이지를 공개했고, 지난 7월 1차 베타서비스(비공개 테스트)를 마쳤다. 본격 서비스는 내년 시작한다. 이 게임 개발에 들어간 돈은 3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유명 판타지 소설 작가인 전민희씨가 동서양 고대신화로 스토리를 만들고, 가수 윤상·신해철씨가 음악을 맡았다. 11월 열리는 국내 최대 게임박람회 ‘지스타’에선 40개 부스를 빌려 대규모 홍보에 나선다. 그는 “게임 개발자로서 마지막 작품이라는 각오로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중국의 한 유명 인터넷 서비스업체는 최근 이 게임의 판권을 5000만 달러 이상에 사 간 것으로 알려졌다.

송 대표는 한국 온라인게임, 특히 MMORPG의 산증인이다. 자라나는 게임개발자 세대한테서 ‘한국 온라인게임의 아버지’ 소리를 들을 정도다. 서울대(컴퓨터공학과)·KAIST(전산학과 석사)를 나온 그는 1994년 국내 처음 PC통신에서 여러 명이 함께 즐기는 ‘머드(multi-user dungeon)’ 게임 ‘쥬라기 공원’을 만들고, 서울대·KAIST 동기인 김정주씨와 넥슨을 공동 창업했다. 이듬해 머드게임에 그래픽을 입힌 본격 MMORPG ‘바람의 나라’를 개발해 ‘바람’을 일으켰다. 97년엔 엔씨소프트로 자리를 옮겨 대히트작 ‘리니지’를 만들었다.

송재경 대표도 굴곡이 많았다. 특히 블리자드가 2004년 ‘와우’를 내놨을 때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이제 MMORPG는 완성됐다.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다’고 탄식했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생각했으나 할 수 없다고 본 것들을 모두 구현했다고 느낀 때문이다. 이후 2년간 그냥 일반 유저로 와우를 즐기면서 최고 등급 아이템까지 획득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좌절이 다소 과장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더 나은 게임을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 차기작 개발에 착수했다. 그것이 이번 아키에이지다. 송 대표와의 일문일답.

-블리자드의 와우보다 어떤 점이 뛰어난가.

“와우에선 정해진 길을 따라서 하면 된다.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를 펼칠 여지가 별로 없어 답답하다. 아키에이지에는 유저들이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가는 재미를 넣었다. 손수 집을 짓거나 마을·숲을 조성할 수도 있다. 대규모 전투 장면은 박진감과 리얼리티를 살렸다.”

-국내 양대 게임업체인 넥슨과 엔씨소프트를 그만둔 계기는.

“그땐 좀 어렸다고 해야 할까. 개성이 강해 최고경영진과 더러 충돌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잘 지낸다. 김정주 넥슨 회장과는 오늘 낮에도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10여 년 사회생활을 하면서 ‘평균적인 사회성’은 획득한 것 같다.”(웃음)

-천재 개발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과찬이다. 학창 시절 ‘찌질이 범생이’ 쪽에 가까웠다. 격투나 우주선 격파처럼 순발력을 요하는 게임은 아직도 잘 못한다. 내가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직접 만들었을 뿐이다.”

-소셜게임 열풍이 만만찮다.

“정보기술(IT) 업계엔 10년 주기설이라는 게 있다. 소셜, 즉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IT가 향후 트렌드라는 점은 맞다. 다만 온라인 게임은 이미 소셜을 기반으로 커왔다. 수천 명이 동시 접속해 협력해 가며 게임을 펼친다. MMORPG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기반의 간단한 소셜게임은 공존하며 발전할 것이다.”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한꺼번에 수천 명 이상의 이용자들이 접속해 게임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정해 즐기는 온라인 게임.

박혜민 기자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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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민홍규 같은 사람 여럿… 국새 말고도 터질 일 많아"

  • 입력 : 2010.09.11 03:12 / 수정 : 2010.09.11 10:53
조선장 김귀성씨가 한 달 전부터 만들고 있는 배에 이칠용씨가 올라탔다. 이제 세 번째 옻칠을 앞두고 있는 목선이다. 이씨가 김씨에게 말한다. “내가 자꾸 폭로한다고 한 사무관이 ‘이칠용이는 간첩보다 나쁜 놈’이라고 했다더라.”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공예 운동가 이칠용이 말하는 '한국 공예예술의 현주소'
匠人… 가짜 경력 내세운 사기꾼들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장인들 속는데
문화부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2006년 여름 민홍규(56·전 국새제작단장)씨가 서울 중구 장교회관 지하상가에 있는 한국공예예술가협회에 들어섰다. 공예·나전칠기 책이 사방으로 꽂혀 있고, 보석함·목공예 수저·펜꽂이 등 온갖 공예품이 있는 18평짜리 단출한 사무실이다.

사무실 안에는 작은 키(160㎝)·둥근 얼굴의 이칠용(64·한국공예예술가협회장)씨가 서류 더미와 책더미에 폭 파묻혀 있었다. 민씨가 부탁했다. "국새 보관 장식품을 만들어 줄 장인(匠人)을 찾고 있습니다. 동참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씨는 다음날 국새를 싸는 보자기·매듭·자물쇠·함 등을 만드는 장인 12명의 연락처를 정리해 민씨에게 건넸다. 이 가운데 2006년 말 민씨가 실제로 섭외한 사람은 4명. 이씨 추천으로 국새제작단으로 일했던 중요무형문화재 A씨는 "민씨가 예산이 부족하다고 해서 원래 700만원 받아야 할 것을 350만원만 받았다"고 했다.

민씨와 이칠용씨는 어떤 사이기에 이런 부탁을 했을까? A씨가 말을 잇는다. "장인들은 이야기해보면 서로 통해요. 그 사람(민홍규)은 아니었어요. 원래 공예계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아니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아는 사람이 없으니 마당발 이 회장을 찾아온 거예요."

3일 오후 기자 역시 이씨의 사무실로 불쑥 찾아갔다. 마침 지방무형문화재 B씨가 각종 자료를 들고 와 이씨에게 '진상조사'를 의뢰하던 중. B씨는 "스승이 엉터리 기법으로 부당하게 인간문화재가 됐고, 각종 복원 사업을 도맡아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이씨가 말했다. "일각에선 민홍규보다 더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아직 양측 주장을 종합해보지 않았으니 다음 주 중에 충북에 있는 스승을 만나봐야겠네요."

이씨는 1970년 차린 나전칠기업체로 돈을 많이 벌었다가 1996년 부도로 그만두고, 지금은 '공예 운동가'로 활동 중인 사람이다. 억울한 사연을 가진 장인들이 이씨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다. 이씨가 1983년부터 각종 신문 기고란에 공예계의 문제를 지적한 원고만 해도 600편 이상. 그러니까, 이씨는 장인(匠人)의 해결사다.

육군박물관이 소장했던 보물 '금고(金鼓·전쟁시에 쳤다는 청동 징)'가 '가짜'라는 것(2008), TV홈쇼핑에서 144만원·90만5000원짜리 방짜유기세트를 팔던 무형문화재가 '사이비'였다는 것(2009), 문화재청 직원이 인간문화재에게 공갈·협박편지를 보낸 사건(2002) 등이 세상에 드러나던 이면에는 이씨가 있었다.

"민원실도 아닌데 사람들이 찾아와요. 저는 관련기관에 건의를 하거나 언론사에 제보하지요. 요주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는지 문화재청에선 14년간 '문화재 전문위원'도 시켜줬어요. 그렇다고 청에서 자문을 해온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칠용은 서울 대동상고 1학년 때, 주먹 좀 쓴다는 학생들이 모인 을지로3가 '한체(한국체육관)'에서 태권도를 배웠다. 대학생들에게 휩쓸려 데모대에 가담해 청와대 담도 넘어봤다. "담 넘어봤자 아무것도 없던데요." 그러자 1965년 집 앞으로 형사들이 찾아왔다. 형사들이 무서워, 강원도 철원의 첫째 누나 집으로 도망갔다. 철원 일대에 유일한 서점 '고향서림'을 열고 1년 반 동안 운영했다. 글도 썼다. "화전민들이 비무장지대에서 탄피를 줍다 군인에게 들켜 고문·성추행을 당한 사건을 고발하는 논픽션입니다. 이름을 '이용팔'로 바꿔서 '비무장지대의 비극'이란 제목으로 월간 '야담과 실화'에 보냈더니 곧 실렸어요."

'칠용'에서 '용팔'로 바꾼 어설픈 위장술은 금방 들통났고, 그는 헌병대에 끌려갔다가 바로 입대했다. "참전용사로 베트남에 있을 때, 장교들이 군용품을 몰래 고국으로 부쳤어요. 저도 시레이션(미군전투식량)·정글화·군용 담요 등을 잔뜩 보내려다 들통나서 '사병 주제에 간부들 하는 짓 한다'며 죽도록 맞았지요. 그때 호되게 당한 게 인생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제대 후 이씨는 을지로 대영화보사에 기자로 취직했다. "귀국할 때 사온 캐논 카메라와 소니 녹음기가 있다"고 하자 합격시켜줬다. 그리고 첫 취재를 나간 중곡동 나전칠기 백골(白骨·옻칠을 하지 않은 뼈대가 되는 나무 그릇) 공방에서 공예품에 빠져든다.

"뽀얀 목기(木器)가 얼마나 예쁘고 신기하던지, 못질 없이 아교로만 붙이는 데 예술이에요. 한 달 만에 화보사를 그만두고 중곡동 무허가 판잣집에서 일하던 장인 김평산씨를 데려와 이문동에서 '한미공예사'를 차렸습니다."

시간 나면 유명한 옻칠장이를 찾아나섰다. 산자락에서 만난 칠 채취공들은 저마다 귀한 생칠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며 겪은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씨는 장인들 사이에서만 살아 꿈틀대던 지식을 정리했다. 이씨는 나전칠기 이론과 도안을 기록한 책인 '현대공예'를 1976년에 발간했다.

1970~80년대 자개장롱은 40~50대 주부들의 꿈. 장롱이 커서 들어가지 않으면 방문을 뜯어서라도 넣었고, 딸이 시집갈 땐 나전칠기 보석함을 쥐어 보냈다. 최고급 자개장롱은 1억원을 넘었다. 1970년 가정집 마당에 차렸던 한미공예사는 5년 뒤 강북구 수유동에 대지 90평 공장으로 컸고, 1982년에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대지 460평·직원 25명 대형 공장이 됐다. 이칠용은 1979년부터 칠기 판 돈으로 칠 장인들을 데리고 일본 유명 나전칠기 공방을 시찰하러 다녔다. 일본 메구로가조엔을 복원한 유명 옻칠작가 전용복씨도 그중 한 명. 이씨가 지갑과 책꽂이 사이에 끼워둔 어음을 자랑처럼 꺼냈다. 낡아 바스러질 것 같은 500만~1000만원짜리 어음들이 튀어나왔다. "장인들이 힘들다고 하면 많이 빌려줬는데 지금 와서 받아봐야 어쩌겠습니까. '업자'인 저도 몇 번씩이나 속아봤어요."

한미공예사는 1990년 이후 기울었다. 이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선거운동을 두 번이나 뛰었다"고 했다. 문화산업진흥기본법에 '공예'분야를 집어넣겠다는 모호한 목표 때문이었다. 내심 '공예인들에게 한 자리라도 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당선 이후 연락이 끊기기도 하고…. 한 비서관이 '다른 분야는 대통령께 드릴 선물도 준비하는데 공예분야는 왜 그러느냐'고 해서 8명이 2000만원짜리 서류함, 펜꽂이, 은공예품을 세 보따리씩 갖다 준 적도 있어요. 이후 연락이 끊겼어요. 속았다 싶어 영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비서관이 화를 내며 나타났어요. 한바탕 싸우고 물건을 돌려받았지요. 고스란히 자기가 갖고 있던데, 서류함은 아직도 못 찾았어요."

"바닥에서 고생하지 말고 대학에 와서 크게 놀라"고 제안한 사립대 교수도 있었다. 그는 한 대학 정보관에 비장한 각오로 들어갔다가 10개월 만에 다시 철수했다. "정치인·교수들 말에 기대한 제가 너무 한심했어요."

이씨는 "난 학벌도 없고, 인맥도 없이 좌충우돌하는데 날 찾아오는 '억울한 장인'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고 했다. "정부기관에선 전문성 없는 자료를 내요. 가짜 경력으로 전수비를 한탕 하려는 '사기꾼'도 많아요. 나전 칠기·방짜유기만 해도 절대 한 명이 만들 수 없어요. 5~6명의 합동 작품으로 탄생하는데 문화재는 스승 한 명에게만 줘요. 그 밑에 있던 제자나, 하도급받아 일했던 장인들이 나와 스승과 싸우는 일도 생깁니다. 잘 안 팔리는 공예품 장인은 정치판이나 지자체에 기웃거려보다가 실망해요. 이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계속 절 찾아왔어요. 앞으로도 제2의 민홍규도 나올 수 있어요. '범종' 분야에도 최근 다툼이 생겼죠."

8일 오전, 이씨는 '전용복 귀국 축하' 문구를 새긴 협회 기념수건 두 장을 챙겨 경기 양수리 두물머리 강가와 남양주의 한 비닐하우스를 찾았다. 두물머리에는 국내 유일의 '조선장' 김귀성(59·경기도무형문화재)씨가 배에 옻칠을 하고 있었다. 2대째 전통 한선(韓船)을 만드는 김씨는 2년 전부터 조달청의 전통 한선 제작 공개입찰에 한 차례를 제외하곤 번번이 떨어지고 있다. 공업용 배 만드는 업체보다 '실적'이 떨어지기 때문. "전 찍어내듯 배를 만들지 않아요. 나무도 낭창낭창하게 휜 낙엽송을 3년씩 말려 쓰는데…."

남양주에 사는 또 다른 장인 장경춘(70)씨는 이씨를 만나자 울기 시작했다. 그는 백골을 만든다. 일주일 전 태풍 때문에 장씨가 세든 비닐하우스 한 동이 두 번이나 무너졌다. "4년 동안 제 일생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어온 서랍장 4개가 망가질까 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이 서랍장을 처음 만들 땐 대패질도 쉽게 했는데, 이제는 몸도 잘 지쳐요." 장씨의 서랍장은 이웃의 배려로 소농가 창고에 임시 대피시켰다. 이씨가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그래도 희망을 갖고 해야지."

이씨는 "4년 전 이천에 있는 민홍규씨 공방에 갔을 땐 가마에 불 땐 흔적이 없어서 이상했었다"며 "진짜 장인들은 이런 곳에 숨어 있다"고 했다. "나중에 책을 쓰면 이름을 이렇게 짓겠다고 말하니까 다들 말려요. '불러도 대답없는 문화부장관이여!'" 탄탄한 흑단나무로 짠 화려한 서랍장 너머로 얼룩소가 음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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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8 오전 10:49:10 >> 광양경제신문의 다른기사보기

“찾아가는 음악회 열어 시민과 함께 하는 합창단 되겠다”

지난 7월 광양시립합창단이 정식 발족됐다. 찾아가는 문화서비스를 우선순위에 두겠다는 신임 강재수 지휘자의 포부를 들어보자.

문화예술회관에서 모닝콘서트 계획
“아침에 운동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분들에게 30분에서 1시간 정도 경쾌한 하모니를 들려줄 계획입니다”
광양시립합창단은 문화예술회관에 오면 항상 뭔가 볼거리, 즐길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모닝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아침이 즐거우면 하루가 즐겁잖습니까? 15만 시민들에게 즐거운 노래를 선물해 가정은 물론 광양시민 모두가 문화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찾아가는 음악회를 열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데 일조하겠습니다”
그는 시민들의 아침 운동이 끝날 즈음인 10시에서 10시30분쯤을 콘서트 시간으로 잡을 계획이라고 한다.

“시민들은 좋은 시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회관과 별로 친하지 않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문화를 접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나도 모르게 문화생활 속으로 빠져 들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광양만의 특색을 살려 르네상스 시대 열겠다
“대부분 첫 번째라는 단어를 중요시 여깁니다. 첫 자는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긴장과 설렘도 따릅니다. 따라서 첫 지휘자로써 긴장이 되면서도 그만큼 포부도 큽니다. 광양시립합창단은 젊고 활기가 넘치기 때문에 광양시만의 독특한 색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하얀 종이 위에 천상의 화음을 그려낼 준비작업을 차근차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선한 합창단으로 시민 속으로 스며들겠다고 한다.

“광양은 새로운 문화 르네상스시대, 즉 새롭게 태어나는 문화도시입니다. 잠재되어 있는 광양의 문화 콘텐트를 밖으로 끌어내 광양문화 상승에 시민들이 모두 함께 할 수 있도록 시립합창단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문화를 일깨워 주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찾아가는 음악회를 자주 열 계획입니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준비함과 동시에 어려운 이웃들은 직접 찾아가서 노래를 불러주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립합창단으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 중요
그는 미국, 러시아, 이태리, 프랑스 등지에서 공부를 한 배터랑 지휘자다.
“제가 공부 욕심이 많습니다. 제대로 된 지휘 공부를 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다니며 공부했지요. 그리고 귀국해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순천시립합창단 지휘를 맡아 하다가 2009년 사임하고 다시 미국으로 공부하려 떠났지요”
강 지휘자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광양에 신임 지휘자로 오게 됐다.

“지휘자가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새롭게 변화되고 업그레이드 되어 있어야만 합창단을 신선하게 리드할 수 있습니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합창도 어떤 지휘자, 어떤 리더를 만나냐에 따라 화합도 잘 되고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를 낼 수 있지요” 고운 목소리를 내려면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카멜레온이 되어 시민이 원하는 노래 들려줄 계획
“신규단원을 모집해서 바로 활동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각기 다른 색을 가진 연주자와 단원이 모여서 하나의 색으로 만들어 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씩 밑그림을 그려 광양만의 독특한 합창단으로 태동할 것입니다. 또 공연은 예산이 따르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시립합창단이란 이름에 걸맞게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시민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부터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원하는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들려주고 그들과 함께 하려면 합창단은 그야말로 카멜레온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일 점심 식사를 마칠 무렵 광양시청 로비에서 해설이 있는 정오의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시청을 찾아온 민원인들은 물론 시민들에게 Dona Nobis Pacem(평화 주소서)와 Flying Free(훨훨 날리라), 코믹 고양이 이중창과 오늘 같은 밤, 내가 만일, Dancing Queen(춤의 여왕)등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선사하고 마지막으로‘사랑으로’를 함께 불러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았습니다”

예술과 경제는 동반자다.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것이 뒷받침 돼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유해도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한다면 마음의 여유는커녕 생각마저 피폐해지고 맙니다. 따라서 경제와 문화는 서로 상생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는 생산성이지만 예술은 소비성이라 광양이 경제도시와 문화도시로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저희 합창단이 주춧돌 역할을 해 그야말로 살기 좋은 도시가 되도록 힘을 보태겠습니다”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운동이 등산이라 매주 토요일은 아내와 산을 찾는다는 강 지휘자, 그는 광양의 지휘자로 오게 된 것이 행복이며 앞으로 광양시민들에게 사랑 받는 합창단으로 거듭 날 것을 약속했다.
광양시립합창단은 현재 16명의 단원이 구성됐으며 추가 단원을 계속 모집 중에 있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섬진강 시인' 김용택 광주서 초청 강연

  • 기사입력 2010.08.30 17:57
  • 최종수정 2010.08.30 17:57

9월1일 광주영상복합문화관 G시네마

김용택 시인.

광주시와 (재)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은 김용택 시인을 초청해 '제4회 찾아가는 문화콘텐츠 전문가 강연'을 오는 9월1일 광주영상복합문화관 G시네마에서 갖는다.

지역 문화콘텐츠 산업의 저변확대와 활성화를 위해 마련된 이번 전문가 강연은 지역 학생과 관련 산업 종사자, 시민들에게 문화콘텐츠와 관련된 정보를 전달할 전망이다.

이날 강연에서 김용택 시인은 사람을 귀하게 가꾸어주는 글과 글쓰기에 대해 중점적으로 강연을 할 예정이다.

‘섬진강 시인’으로도 불리는 김용택 시인은 1982년 창작과 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에 시 '섬진강'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자연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 들여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그는 김소월과 백석을 잇는 시인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김용택 시인은 작품집 '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등 다수를 펴냈으며 제6회 김수영문학상과 제12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또 2008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아이들의 시선에서 작품 활동을 펼치기도 한 그는 현대적인 흐름에 얽매이기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로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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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김형석의 후아유]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팔봉 선생 장항선

  • 김형석 영화평론가
  • 입력 : 2010.08.28 03:19 / 수정 : 2010.08.28 19:23
강산이 4번 변하는 동안 연기를 했던 배우 장항선은 여러 번 설득 끝에 카메라 앞에 섰다. 덥수룩한 흰색 턱수염 과 뿔테 안경. 흰색 제빵사 옷을 벗은 팔봉 선생이 앉아 있었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배역없어 밀항까지 결심했던 '조연 名人'

팔봉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겪는 것"이라는, "나쁜 일도 겪고 슬픈 일도 겪고, 좋은 일도 겪고 기쁜 일도 겪는 것"이라는 마지막 교훈을 남기고, 제빵실의 의자에서 눈을 감았다.

이젠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 더 이상 팔봉 선생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그것은 '어르신'이 사라져 버린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겐, 비록 드라마 속 캐릭터이긴 하지만 커다란 상실감이자 아쉬움이다.

배우이자 탤런트 장항선(63·본명 김봉수)을 만나기 위해, 그가 운영하는 천안의 음식점으로 내려갔던 날은 마침 드라마 소품으로 쓰일 영정 사진을 촬영하는 날이었다. "죽는 역할을 여러 번 했지만, 이번처럼 고심한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어떻게 죽을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는데…. 대본을 읽으면서, 안갯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팔봉 선생의 모습을 봤어요." 그리고 그는 그렇게 조용히 사라졌다.

사실 장항선은 강한 이미지의 배우였다. 그 때문에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팔봉 선생은 이례적이면서도 놓칠 수 없는 역할이었다. "사실 '제빵왕 김탁구'와 주말 드라마 하나를, 같이 섭외 받았어요. PD들은 두 작품 다 해도 괜찮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연기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어요." 결국 선생은 '제빵왕 김탁구'를 선택했다. 어눌해 보이지만 결단력 있는 캐릭터와 특히 대사의 '맛'에 끌렸다. "과거에 강한 이미지의 역할을 하면서 행복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팔봉 선생을 하면서 연기 인생 40년 동안 이렇게 맛있는 대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연기 인생 40년. 1970년에 KBS 탤런트 9기로 입사했다. 어려서부터 배우의 꿈을 지녔지만, 인생을 바꾼 건 한순간의 무모한 용기였다. 1969년에 제대한 그는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운전병이었던 특기를 살려 택시 운전을 하려고 버스를 타고 다니며 서울 지리를 익히던 시절. 버스가 스카라 극장 앞을 지나는 순간, 그는 창 밖으로 영화배우들이 걸어가고 있는 광경을 봤다. 버스에서 뛰어내려 무작정 따라갔다. 그렇게 충무로의 스타 다방이라는 곳에 입성했고, 다음 날부터 출근하다시피 하며 어느 조감독과 친구가 되었다. 신성일의 운전사로 출연했던 '언제나 타인'(1969)은 그의 첫 영화. 이후 대여섯 편의 영화를 했지만, 얼굴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단역이었다. 그는 탤런트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두 번의 낙방을 경험한 후 70여명의 합격자 중 한명이 되었다.

"사실 제가 배우 얼굴은 아니죠. 그 당시엔 배우의 기준이 신성일씨였으니까요." 대사 없이 단역을 전전하던 가난한 시절, 배우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밀항도 시도했다. '집에 큰 배가 있어서 외국을 드나든다'던 군대 친구의 이야기를 믿고 무작정 속초로 달려갔지만, 작은 오징어 배 한 척이 있을 뿐이었다. "이왕 간 김에 오징어잡이를 나갔죠. 끝난 후에 친구가 3만원을 쥐여 주더라고요." 500원이 하루 용돈이던 시절, 그 돈을 밑천으로 버티며 다시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탁구에게 '너 자신에게 묻거라. 모든 것은 네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대사를 하거든요? 흔한 대사지만 가장 맛있는 대사였죠.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고, 그러면 좌절감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의미인데, 과거의 제 다짐과도 일맥상통해요." 그때 만난 드라마 '전우'(1973)의 장 하사 역은, 액션에 자신 있었던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작품이었다.

"재미를 느낄 만큼" 굴곡이 많았던 연기 인생은 마흔 즈음에 서서히 빛을 발했고 '여명의 눈동자'(1991) '마지막 승부'(1994) '모래시계'(1995) '용의 눈물'(1996) 같은 흥행 드라마의 한 자리엔 그의 이름이 있었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자신을 중용한 영화 '살어리랏다'(1993)를 통해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으로 물꼬를 텄고, 김기덕 감독의 '파란 대문'(1998) 이후엔 PD들에게 "드라마에서도 그런 연기를 보여 달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랬죠. 당신들이 나한테 그런 배역 준 적 있냐고."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텔 미 썸딩'(1999)은 아들(김혁)의 진로를 바꾸어놓기도 했다. "난 그때 5부 능선도 아니고, 3부 능선쯤에서 바동거리며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배우였어요. 그런데 아들이 '텔 미 썸딩'에서 내가 절절하게 죽는 장면을 보면서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거예요." 여러 차례 말렸지만, 현재 아들도 아버지의 길을 잇고 있다.

부모님의 냉면집을 이어 현재 장항선 철도 인근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장항선 본가'를 운영하고 있는 그에게 식당은 흔히 생각하는 '연예인 부업'이 아니라 '가업'이다. 살짝 맛보았던 황태 냉면의 독특한 맛도 직접 개발한 것. "연기도 모방의 창조요, 음식도 모방의 창조"라고 말하는 그에게, 그렇다면 팔봉 선생이 아닌 배우 장항선이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은 무엇인지 묻자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대본엔 이렇고 저렇고 답이 나와 있는데…. 단순합니다. 많이 먹으면 배부른 거죠.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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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업 애니 고집…“3D 언젠가 싫증날 것”
‘마루 밑 아리에티’ 한국 개봉 앞둔
스즈키 프로듀서·요네바야시 감독
한겨레 남지은 기자 메일보내기
» 스즈키 도시오(사진 왼쪽) 총괄 프로듀서·요네바야시 히로마사와(오른쪽) 감독
“한국에서도 <토이 스토리 3>를 이기고 싶습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스튜디오 지브리의 스즈키 도시오(사진 왼쪽) 총괄 프로듀서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새달 9일 새 작품 <마루 밑 아리에티>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지난 20일 도쿄 스튜디오에서 이 작품으로 데뷔한 차세대 감독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와(오른쪽) 그를 함께 만났다. 스즈키는 “(토이 스토리 같은) 3디 애니메이션은 재미있지만 언젠가는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지브리는 옛것을 지키는 수작업을 원칙으로 한다. 그것이 관객들이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보는 이유”라고 그는 말했다.

<마루 밑…>은 지난 7월 일본에서 할리우드 픽사의 <토이 스토리 3>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 손으로 작업한 셀 애니메이션과 3디 애니메이션의 맞대결이었다. 결과는 9월 말까지 약 100억엔(약 1400억원)의 수입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 <마루 밑 아리에티>의 승.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을 프로듀싱한 스즈키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본질은 가족의 사랑과 자연의 아름다움 등 시대를 초월해 공감하는 부분을 담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마루 밑에 사는 키 10㎝의 14살 소녀 아리에티와 인간 소년 쇼의 교감을 그린 <마루 밑…> 또한 이런 본질을 충실히 따른 작품이다. 50년 전 영국 판타지 소설 <마루 밑 바로어스>를 미야자키 감독이 일본을 배경으로 새롭게 기획하고 각본을 썼다. 특히 자연을 표현한 장면에서 하나의 미술작품처럼 섬세한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특징이 도드라진다. 1996년 입사해 <벼랑 위의 포뇨> 등의 작화를 맡았던 요네바야시 감독은 “나뭇잎 가장자리가 울퉁불퉁하거나 벽돌 끝이 부서진 느낌 등 소인이 바라본 세상은 어떨까를 표현하는 데 가장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미야자키 감독이 먼저 작품을 제안했고, 울 때 큰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등의 장면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아리에티와 쇼의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 표현으로 신선함을 더하려고 했지요.”

다른 지브리 작품들처럼 <마루 밑…>도 어린 소녀가 주인공이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등 어리지만 강한 아리에티의 모습이 눈에 띈다. 스즈키는 “지브리가 설립된 지 25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가장 많이 변한 것이 여성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요네바야시는 “미야자키 감독과 스즈키 프로듀서가 아리에티를 관능적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해서 그렇게 작업했다”며 웃었다.

<이웃집 토토로> <벼랑 위의 포뇨> 같은 비현실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사랑받아온 지브리의 창의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스즈키는 “스필버그 감독처럼 어린이를 위한 작품이라도 많은 예산과 시간을 투자해 세밀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나온다”며 “일본은 일본을 무대로 일본 것을 만든다. 한국은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적 색채가 느껴지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도쿄/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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