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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둘리 아빠’ 김수정 “둘리 나이? 1억27살… 요즘은 애니메이션 총감독”
박민기자 minp@munhwa.com | 기사 게재 일자 : 2010-05-14 11:37
▲ 김수정 인덕대 교수가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둘리나라’ 사무실에서 둘리의 탄생비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김선규기자
국민캐릭터 ‘둘리 아빠’ 김수정 인덕대 교수

아기공룡 둘리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재산이다. 둘리는 아직 디즈니랜드의 스타 미키마우스처럼 미국문화를 세계에 전파하고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진 못했다. 그러나 둘리는 우리사회의 소통 가능성과 문화적 잠재력을 보여주는 존재다. 만화를 보기 시작한 어린이부터 환갑을 전후한 장년층에 이르기까지 둘리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어느덧 50을 바라보지만 6살 늦둥이와 둘리 만화를 볼 때면 쉽게 공감대가 형성된다. 더구나 둘리는 카피나 표절의혹이 제기된 적이 없는 순수 토종이다. 12일 오후 ‘둘리 아빠’인 김수정(만화애니메이션학) 인덕대 교수를 만나기 위해 서울 강남구 역삼동 ‘둘리나라’를 찾았다.

‘둘리나라’는 애니메이션 제작과 캐릭터 라이센싱을 위해 김 교수가 설립한 회사다. 사무실은 도우너, 또치, 희동이, 고길동 캐릭터로 만들어진 인형과 시계, 학용품으로 가득 차 마치 보물창고 같았다. 애들마냥 ‘너무 귀엽다’를 연발하고 있는데 특유의 ‘아줌마 파마머리’를 짧게 자른 김 교수가 들어와 둘리와 도우너 인형 사이에 앉았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작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장발단속이 심했습니다. 당시 반독재운동에 나서는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저는 운동권은 아니었으니까 저만의 저항하는 방식으로 파마를 했습니다. 머리가 귀와 상의 칼라를 덮으면 안된다는 것이 장발단속 규정이어서 머리를 기른 뒤 파마를 해서 귀와 칼라 위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어울린다고 해서 30년간 파마머리를 유지했습니다. 머리를 자른 건 2년 정도 됐는데 단골 미용사가 매번 조금씩 더 자르다 보니 이렇게 짧아졌습니다. 이제 파마를 못하게 됐지만 편하긴 합니다.”

그는 1950년생으로 올해 환갑이다. 그러나 활짝 웃는 그는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영원히 늙지 않는 둘리와 함께 하다보니 그에겐 세월이 멈추었을까. 우선 근황부터 확인했다.

“몇년간의 작업 끝에 지난해 SBS에서 둘리 애니메이션을 방영했습니다. 러닝타임이 22분30초 짜리인 애니메이션을 26편 제작했는데 편당 제작비가 1억1000만원이니까 30억원 정도 투자됐습니다. 그런데 방송사의 편당 매입가격은 1000만원 정도입니다. 그래서 케이블방송 판매 수익과 캐릭터 수입으로 투자받은 돈을 계속 갚아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외국에서도 계속 주문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내년쯤에 여러나라에서 방영될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미국 3대 영화제중 하나로 꼽히는 휴스턴국제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동상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상하이 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수상대상에 노미네이트됐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상을 받으면 해외진출에 좀 유리해지겠죠.”

―이젠 직접 만화를 그리지는 않으십니까.

“요즘은 애니메이션을 위한 시나리오를 쓰고 캐릭터 디자인과 컬러 등을 체크하는 등 총감독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만화를 안 그리기 시작한 건 첫 애니메이션 ‘얼음별 대모험’을 만들던 1995년 때입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다 보니 일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저는 애니메이션 감독·제작자로는 신인이었으니까 만화가까지 병행하면 둘다 실패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시적으로 출판만화를 접었습니다. 그런데 1996년 상영된 ‘얼음별 대모험’이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하자 미국 워너브러더스가 공동제작을 제안했습니다. 그 협상을 하다보니 출판만화를 다시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중 1997년말 IMF(국제통화기금)사태가 터지면서 공동제작 논의가 중단됐습니다.”

―워너브러더스 쪽에서 발을 뺀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쪽에서 접었습니다. IMF사태로 환율이 급등하면서 50대 50으로 공동투자를 할 경우 우리 쪽에서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워낙 부담이 큰데다 다들 망했으니 돈 빌릴 데도 없었죠.”

―‘얼음별 대모험’이 흥행에 성공했다면 돈을 좀 벌지 않으셨나요.

“사실 처음엔 극장을 잡지 못했습니다. 앞서 나온 국산 애니메이션들이 계속 ‘쪽박’을 차다보니 마지막 개봉작인 ‘얼음별 대모험’에 극장대여를 안해준 거죠. 어쩔 수 없어서 코엑스 대서양관을 빌려 의자를 1000여개 갖다놓고 상영했는데, 20일 남짓 상영하는 동안 연일 매진사례를 이뤄 서울에서만 30만명 이상이 들어왔습니다. 당시는 관객수 100만명을 넘기면 대흥행이었습니다. 7월20일에는 지방에서 개봉을 했는데 역시 극장을 제대로 잡지 못한 데다 폭우와 폭염이 번갈아 닥쳐 결국 전국 관객 45만명을 기록하는데 그쳤습니다.”

―그 정도면 당시로서는 대박 아닙니까.

“영화를 만들면서 5억원 정도를 금융권에서 빌렸습니다. 세부 계약조건도 잘 모르고 돈을 빌렸는데 결과적으로 23억원을 금융권에 갚았습니다. 흥행을 못했다면 안갚아도 됐을 텐데 그 돈 갚느라고 6∼7년이 걸렸습니다. 그때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면 바로 애니메이션이나 TV시리즈를 제작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준비중인 새로운 작품이 있습니까.

“지난해 방영한 TV시리즈 제작 빚부터 갚아야죠. TV시리즈는 준비하는 데 3~4년 걸리는데다 제작비도 많이 들어 후속작을 만드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 같습니다. 조만간 SBS에서 재방송을 시작합니다. 둘리 열기가 식기 전에 후속작을 내고 싶은데….”

―요즘 ‘뽀로로’라는 캐릭터가 유아들 사이에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둘리는 여전히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 아닙니까.

“지금도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1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반드시 좋은 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그만큼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영광이지만 만화계 전체로 보면 불행이죠.”

―1983년 ‘둘리’가 만화잡지 ‘보물섬’에 처음 등장했을 때 반응이 어땠습니까.

“보물섬은 스폰서가 육영재단이어서 배경이 탄탄했죠. 그래서 보물섬에 연재하는 작가는 이상무· 길창덕· 신문수 선생님 등 당시 초특급 작가 15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저는 당연히 거기에 끼지 못했죠. 그런데 길창덕 선생님이 5회까지 연재하시다 건강이 나빠져 연재를 중단하게 돼 대타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당시 보물섬은 독자엽서로 15명 작가들의 인기순위를 매겼습니다. 저는 1983년 4월부터 연재를 시작했고 다른 작가 만화에 비해 분량이 절반밖에 안됐는데 첫달에 바로 6위를 했습니다. 편집자들이 당연히 의아해했는데 그 다음달에는 3위로 올라섰고 3번째달 이후에는 내리 1위를 했습니다. 곧바로 캐릭터 인형을 만들자는 제의가 왔습니다. 판매를 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경품으로 주는 조건이었는데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애니메이션 제작 여건이 너무 좋지 않아 “둘리와 함께 캐나다로 이민가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둘리가 캐나다 교포가 될 수도 있을까.

“2008년과 2009년 정부측에 지원을 신청했다가 탈락했습니다. 누가 ‘애니메이션 만들 때 어떻게 해야 돈을 버느냐’고 물어보면 저는 ‘투자 안하면 돈을 법니다’라고 답합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캐나다나 프랑스는 지원대상 작품수에 신경쓰지 않고 콘텐츠의 질이 좋으면 대부분 지원을 합니다. 그같은 여건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둘리 같이 유명한 작품이 탈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둘리가 국제성이 약하다고 하더라고요. 판단기준의 문제겠지만 국제성이 없으면 해외에서 상을 받을 일이 없을 겁니다. 둘리는 이미 10년 전에 독일에 극장용으로 수출됐고, 3∼4년 뒤 방송될 때는 시청률이 10%대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무국적인 문화도 필요합니다. 업자들은 외국 투자를 유치하려고 그런 방향으로 가기 마련이고요. 하지만 국가는 국적성 있는 작품을 지켜줘야죠. 도라에몽 등에서 보듯이 일본은 적어도 해외에 팔기 위해 무국적 만화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둘리가 국제적 스타로 성장하려면 무국적성이 도움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둘리 애니메이션 방송을 기획했을 때 프랑스에서 공동제작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거절한 이유는 밥을 먹어도 된장국을 먹는, 한국 색깔이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작비 1억1000만원 중에 투자받아봐야 3000만∼5000만원인데, 그 돈을 받고 외국에 작품 색깔을 넘겨준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안 그러려고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좀더 서구화된 둘리, 변형된 둘리가 나올 수도 있겠죠.”

그에게도 늦둥이 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딸도 둘리를 좋아할까.

“애가 셋인데, 7살짜리 막내딸이 둘리 ‘광팬’이에요. 태어나면서부터 늘 머리맡에 둘리 인형을 놓아뒀으니까 자연스럽게 친근해진 거죠. 그런데 이 아이가 ‘아빠가 포켓몬 그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제일 좋아하는 게 포켓몬하고 둘리거든요. 자기가 보는 게 일본만화라는 점에 속상해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둘리 만든 사람이 아빠다’고 얘기를 해주니까 좋아하더군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김 교수는 경산대 축산학과와 인덕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를 졸업했고 1975년 소년한국일보 신인만화공모에 ‘폭우’로 당선되면서 만화가로 데뷔했다.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이사,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5년부터 인덕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대표작으로는 ‘오달자의 봄’,‘미스터 점보’,‘천상천하’ 등이 있다.

인터뷰 = 박민 전국부장 minp@munhwa.com
<오랜만입니다>
둘리 ‘탄생 비화’… 예의 따지는 심의 칼날 피하려 ‘동물’ 설정
처음엔 갈색…“웬 똥색?” 지적에 초록으로
기사 게재 일자 : 2010-05-14 11:36
▲ 김수정 인덕대 교수가 1988년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 인근 한 카페에서 만화 ‘짱뚱이시리즈’의 작가인 고 신영식씨 등 동료 만화가와 술을 마시고 있다.
강아지처럼 혓바닥을 쭉 내민 둘리는 ‘공룡’하면 떠오르던 무서운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러나 둘리의 이런 귀여운 얼굴 뒤에는 군사독재 시절 심의의 칼날을 피해 사실적인 아동만화를 그리고자 했던 김수정 교수의 고심이 녹아 있다.

둘리가 만화잡지 ‘보물섬’을 통해 첫선을 보인 것은 1983년 4월22일. 서슬퍼런 전두환 정권 시절이어서 만화에 대한 검열도 심했다. 어린이는 무조건 예의바른 ‘철수와 영희’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김 교수 생각에 철모르는 아이들이 처음부터 성인군자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심의를 피하는 방법으로 동물 의인화를 택했다. 하지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을 그리고 싶진 않았다. ‘아기공룡 둘리’ 콘셉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둘리의 색깔에도 비밀이 숨어 있다. 흑백만화였기 때문에 원래 둘리 색깔은 고민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둘리가 인기를 끌고 표지에 등장하게 되자 컬러판 둘리가 필요해졌다. 김 교수가 생각한 색깔은 희동이 머리카락 같은 갈색. 그러나 이를 본 편집장이 “이게 웬 똥색이냐”고 하면서 초록색으로 할 것을 주문했다. 김 교수는 당시에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최근 ‘녹색성장시대’를 맞고보니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 됐다고 밝혔다.

만화에 둘리 엄마는 등장했는데 둘리 아빠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김 교수의 실수와 관련돼 있다. 둘리 모델이 된 공룡은 케라토사우루스라는 외뿔 육식 공룡. 둘리 코에 달린 건 엄연히 뿔인 셈이다. 그런데 김 교수가 둘리 엄마를 그릴 때 이 설정을 잊은 채, 크고 인자한 어머니 이미지만 생각하다 초식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를 등장시켜버렸다. 둘리 아빠를 어떻게 설정하든 족보가 복잡해진 것. 그래서 ‘1억년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운’ 둘리는 항상 엄마만 찾게 됐다.

둘리 신상정보는 어떻게 될까. 둘리 나이는 만화 등장 기준으로 27세지만, 그 1억년 전에 태어났으니 1억27세로 볼 수 있다. 지난 2007년 도봉구청에서 만든 호적등본에 따르면, 둘리는 현재 서울 도봉구 쌍문동 2-2(둘리)번지 고길동씨 양자로 입양돼 있다. 물론 둘리가 고길동을 아빠라고 부르진 않는다. 호적등본에는 계속 아저씨로 부르기로 양측이 합의했다고 적혀 있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머니투데이] 김수정 "'둘리'와 이민 가고 싶다"(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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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9070211100390514&type=1&ou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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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화백 <사진제공=손홍주>


"시원섭섭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숙제가 남아있는 느낌이네요."

'2009 아기공룡둘리'(이하 2009 둘리)가 2일 26부를 마지막으로 6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친다. 지난 1983년 KBS를 통해 TV애니메이션으로 첫 선을 보인 '둘리'는 이후 30년 가까이 사랑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지난해
성탄특집으로 첫 선을 보인 2009년 판 '둘리'는 올 1월부터 SBS를 통해 새로운 TV시리즈를 선보였다. 오후 4시라는 시간대에도 불구, TV 애니메이션으로는 이례적으로 평균 1%대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4% 가까운 경이적인 시청률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방송 시간대와 낯선 주제가와 주인공들의
목소리는 일부 시청자들의 불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역삼동 '둘리나라'
사무실서 만난 '둘리아빠' 김수정 화백은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는 "29일에 '둘리'의 모든 작업이 끝났다"고 말했다. 이번 '둘리'는 350 여 명이 투입돼 3명의
감독이 동시진행하며 1년 8개월에 걸쳐 만들어졌다.

소감을 묻자, "시원섭섭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감회가 새로울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숙제가 남아있는 느낌이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2009 둘리' 70점 정도..시즌2나 극장용은 2010년 초에"

"애니를 해서 떼돈을 벌려고 한 게 아녜요. '둘리'만의 어떤 것을 그려내고 그러한 것들을 팬들과 공유하고 싶었죠. 결과물을 막상 보니 좀 더 시도를 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해요."

"만족 하냐"고 물었다.

"100점 만점에 65점에서 70점정도 아닐까 생각합니다. 팬들이 생각하는 점수와 차이가 있을 수는 있죠. TV 시리즈 같은 장편은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기가 힘들거든요. 이런 게 상당히 압박으로 다가왔어요.
작가들도
지치고, 후반으로 가면서 리테이크(재촬영)를 잡지 못한 것들은 아쉬움으로 남아요."

김 화백은 지난해 '2009 둘리'를 시작하면서 시즌2에 대한 욕심도 내비친 바 있다.

"사실 '2009 둘리'를 시작할 때 작가진이나 기술력에 대한 검증이 안 된 상태에서 출발했어요. 이제 서야 앞으로 '둘리'가 갈 방향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스태프는 나름대로 문제가 없다고 봐요. 현재로서는 재원 등 여러 문제가 있어요. 올해 말까지 기획을 끝내고 2010년 초에나 착수할 것 같습니다. 1년에서 1년 2개 월정도 지나면 시즌2나 극장용에 대한 확실한 계획이 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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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아빠' 김수정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실에 대해 "화가 난다"고 했다 <사진제공=손홍주>



◆"아직도 '둘리'냐고요?..韓 애니산업 여건상 어쩔 수 없어"

30년 만에 돌아온 '둘리'에 대해 반가움을 표하는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아직도 둘리냐. 우리에겐 둘리밖에 없냐'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그는 "화가 난다"고 했다. 우리 애니메이션산업 여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여건이 '왜 둘리 밖에 없나'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여건입니다. 팬들이 소상히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화가 나는 것은 제 입장에서는 제 작품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둘리'
프로젝트가 끝나면 '동동이'나 '일곱 개의 숟가락'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실제 출판만화는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되지만 애니메이션은 재원 등이 따라 줘야합니다.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적자를 깔고 들어가야 합니다. 적자를 해소하는 기간이 기니 검증된 캐릭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에요."

그러면서 그는 정부에 대한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정책적
지원에 대한 기대는 안 해요. 솔직히
이민 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내가 앞으로 '둘리'를 하면 길어봐야 10년이에요. 해외의 환경은 정말 부럽습니다. '2009 둘리'를 하기 전에 프랑스 팀이 함께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어요. 프랑스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 정부에서 45%정도를 지원해주거든요. 그런데도 그들과 합작을 거부한 것은 국적 불명의 '얼치기 둘리'가 아니라 '
된장 둘리'를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된장'둘리 만들고 싶었다..현실은 '둘리'와 외국 이민 가고 싶을 정도 "

김수정 화백은 정부의 무분별한
해외진출 독려에 대해서도 일침을 놨다.

"현재 우리나라 구조에서는 애니 산업이 발전하는 게 힘들다고 봐요. 제작자로 나선 최근에 와서야 이런 사실들이 더욱 절실히 다가옵니다. 한마디로 허탈하고 화나고 어이가 없어요. 정부가 꼭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도 일말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봐요. 그런데 정부가
도움을 안주거든요. 그러면서도 외국에 나가서 소개하라고만 해요.

장기적 안목 없이 단기적으로 성과만 내려니 아무것도 안됩니다. 실상 해외 나가면 우리 업체는 봉이에요. 해외에 보여주는 것도 그들의 입맛에 맞추라는 것인데 우리가 왜 그들의 눈에 맞춰야 합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가 벌어온 것은 얼마나 되나요. 외국에 나가 8명 미팅 하면 한 사람당 5분씩 줍니다. 총체적 난국이에요."

김수정은 왜 그리 '둘리'에 집착할까. 그는 사재(私財)를 털어 '둘리'를 만들고 있다. 그는 "가족이 가장 큰 적"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거의 27년, 싫든 좋든 반평생 가까이 '둘리'와 매일같이 함께 했어요. 거의 자식 같은 존재죠. 이왕 욕심 낼 거면 만화가 입장에서 영속성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문화아이콘이 만들어 지려면 최소한 50년은 있어야 이걸 바탕으로 제2, 제3의 캐릭터가 나옵니다.

우리 만화 역사가 100년이라고 하지만 핍박의 역사였어요. 나름대로
르네상스라면 8, 90년대 초반부터 15년 정도였죠. 지금은 사실
불안 불안해요. 우리 만화나 애니의 문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것은 하나의 '귀감'이 되지 않을까해서죠. 일본의 경우도 아톰, 도라에몽을 바탕으로 가지를 치면서 슬램덩크나 크레용 신짱(짱구) 같은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하나의 문화를 이룩했어요. 우리의 경우 지난 30년 동안 내세울 캐릭터가 뭐 있나요. 우리 애니메이션에서 80년대 '까치'나 '둘리', '하니'가 나왔을 때는 탄탄하고 정직했어요. 최근에는 뭔가 영속되지 않고 끊어지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둘리'를 끝낸 김수정은 3일
캐나다로 떠난다. 2달 정도 머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계획이다. 그는 "이참에 '둘리'랑 같이 떠날 곳을 물색해 볼까도 생각한다"고 말했다.

"만화가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제작자로 막상 나서보니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한다는 게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캐나다에 가서 '둘리'의 수출 문제도 알아보면서 좀 쉬다올까 생각해요. 이참에 '둘리'와 함께 이민을 떠날까도 고려중입니다. 한국의 '둘리'로 만들고 싶었지만 여건이 그렇게 놔두질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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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김수정 화백 <사진제공=손홍주>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