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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지원/통일 2011.06.28 03:25

[최보식이 만난 사람] 北협동농장 운영하는,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 김필주씨

“난 혁명가 아니다… 북한주민 한 명이라도 덜 굶게 만들고 싶을 뿐”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 입력 2011.06.27 03:12 | 수정 2011.06.27 15:49 |

"하드(hard)한 질문은 안 된다."

"하드한 게 뭔가?"

"난 정치 같은 것은 모른다. 인도주의와 농사밖에 모른다."

"하지만 정치와 체제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통화를 한 뒤 김필주(74)씨를 만났다. 엷은 꽃무늬 챙모자를 쓴 노인이었다. 말씨가 조근조근했다.

↑ [조선일보]김필주씨는 '농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올해 북한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전기병 기자

↑ [조선일보]협동농장의 농업지도원들과 함께.

재미(在美) 농학박사인 그녀는 북한에 이모작을 전파했고, 북한 내 협동농장 5곳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활동으로 미(美)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에 뽑혔다. 그녀는 지난주 또 북한을 다녀왔다. 지금껏 방북횟수는 100회가 훨씬 넘을 것이다.

―북한에서의 일정은 어떻게 되나?

"매달 한 번꼴로 들어가 일주일쯤 머문다. 평양 의 호텔에 묵으면서 농장까지 왕래한다. 농장이 다섯 곳인데, 자동차로 각각 50분과 1시간 반쯤 걸린다. 나는 농사짓는 사람이니까, 농장에서 작물 생육을 보면서 기후·비료·병충해 등을 상의한다."

―체류 경비는?

"본인 부담이다. 평양에서는 유로(euro) 베이스로 달러와 중국돈이 통용된다. 하루 숙박비가 120유로쯤 되고, 자동차와 운전수 비용도 든다."

―합작회사라고 들었다. 농장을 어떻게 운영하고 수익을 배분하나?

"북한 행정단위에서 리(里)가 하나의 '협동농장'으로 되어 있다. 국가 소유여서 50년간 임대했다. 외국인은 계약 주체가 될 수 없어, 북한의 '은파산 무역총회사'와 합작한 것이다. 내가 합작회사의 회장으로 되어 있다. 10년마다 재계약을 한다."

그녀는 황해도 봉산군과 삼천군 내 5개 협동농장을 임대했다.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는 6500명이다.

―계약 조건은?

"내가 비료 및 종자, 농업 기술 등을 제공하고, 내 수익금을 갖고 나가지 않고 농장에 재투자하는 조건이다."

―선생의 수익금은 얼마나 되나?

"지금까지 흑자가 아니어서 내 수익금이 책정된 적이 없다. 구두로 보고만 받을 뿐이다. 사실 나는 돈 계산을 잘 못한다. 당초 자선사업 성격으로 한 것이다. 내 집도 주식도 다 팔았다."

―어느 쪽의 제안으로 시작됐나?

"1989년부터 나는 북한의 농업을 도왔다. 우리 민족이 한 사람이라도 덜 굶어 죽게 하고 싶었다. 2003년쯤 내가 '농장을 하나만 맡겨달라. 정말 수익성 있게 운영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쪽에서 '4곳을 맡아달라. 대신 목화를 재배해 달라. 중국 에서 목화솜을 사오는데 너무 비싸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2002년 목화솜 1t당 1060달러를 받다가 2005년 2500달러로 올렸다. 나는 중국을 돌아다니며 북한에 심을 만한 목화 종자를 찾았다. 그렇게 시작됐다. 지금 농장작물 중 3분의 1은 목화, 나머지는 옥수수, 벼, 감자 등으로 이뤄져 있다. 농장 4곳을 하다가 금년에 하나 더 맡았다."

―북한에는 목화 종자가 없었나?

"재래종은 1ha당 목화솜이 0.5t밖에 나오지 않는다. 1t쯤 나와야 겨우 경제성이 있다. 처음 재배 했을 때 0.72t이 소출됐고, 지금은 1.5~3t 나온다."

―수확한 목화의 판로는 어떻게 되나?

"국가에서 1t당 1100달러로 수매했다고 들은 것 같다. 이를 북한 인민폐로 농장에 지불한다. 사실 북한 돈으로 살 게 없다. 대외 구매력이 없어 외국에서 비료나 농기계 등을 사들여올 수도 없다. 농장에서 일한 주민들의 인건비로 돈과 작물을 배급해준다."

―선생이 직접 나눠주나?

"농장관리위원장과 농업지도원들이 분배한다."

―주민들에게 직접 혜택이 됐는지 알 수가 있나?

"주민들이 받았다고 한다. 입성이나 낯빛을 보면 많이 나아졌다. 옛날에는 내가 지나가도 그냥 쳐다봤다. 요즘은 달려와서 인사하고 사진도 같이 찍자고 한다."

함경도 출생인 그녀는 8·15 해방 때 남하했다. 여덟살 때였다. 서울대 농대를 나온 그녀는 1962년 미국 으로 유학했다. 코넬대에서 작물생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유명 종자회사에서 옥수수종자 생산기술을 담당했다. 그 시절 뉴욕 의 북한대표부로부터 '강냉이 품종 개발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89년 3월 그녀는 유서를 써놓고 남편과 함께 평양에 갔다.

―북한을 방문해 농업을 도운 지 22년이 됐다. 북한 주민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느끼나?

"많이 자유스러워진 것 같다. 과거에는 바깥사람을 피하고 같이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했다. 이제는 그런 두려움이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요즘에는 '수익성'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내게 찾아와 '수익성 작물을 알려달라' '수익성 판로를 소개해 달라' 한다."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주민들은 따로 개인 텃밭이 있나?

"농장에서는 자기에게 할당된 몫을 일한다. 각자 집에는 텃밭이 있다. 또 우리가 과일나무 다섯 그루, 돼지 두 마리, 닭 열 마리씩을 지원해줬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생산한 것을 장마당에 판다고 들었다. 실제 농장으로 가는 도로변에서 그렇게 파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선생은 얼마 전 북한지원을 촉구하는 모임에서 "당장 150만t의 식량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할 것"이라고 했다.

"아사자 속출보다는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뜻으로 말했다."

―우리 정보당국에서는 북한의 식량난에 대해 다르게 판단한다.

"농학자의 입장에서는 식량이 부족하다. 북한에서는 풍작이 좋아도 외부로부터 일년에 60만t쯤 작물이 들어가야 여유가 있다. 특히 작년에는 냉해와 홍수, 비료 부족으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벼를 베어서 논에 말렸다가 탈곡하는데, 가뜩이나 그 시기에 비가 많이 내렸다. 수확한 벼에는 쭉정이가 많았다. 식량 부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전까지는 체면 때문에 내게 식량 달라는 소리는 안 했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가니 '심각하다.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쪽 지원이 막힌 상태라, 미국 내 교단 쪽에 연락하고 있다."

―선생은 '식량 지원은 한계가 있다. 종자 보급이나 농업기술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이번엔 사정이 워낙 급해 그렇지만, 식량 지원으로 해결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맞다."

―근본적인 문제가 종자 보급이나 농업기술 지원인가?

"그렇다."

―북한농업과학원의 전문연구원이었던 이민복씨가 있다. 그도 증산 연구를 했다. 그의 결론은 '종자 잘못이 아니라 체제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식 개인농(個人農)을 전국적으로 행하면 수확이 두 배 올라간다. 북한 주민들이 굶게 된 것은 정치 문제지,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해결될 수 없다는 걸 알자 1995년 그는 탈북했다.

"…그가 어떤 압력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것에는 토양 문제도 있다. 토양 속에 미생물이 적어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한다. 연료(燃料)가 없어 풀이나 강냉이, 목화대를 모두 땔감으로 쓴다. 토양으로 다시 들어가야 할 유기물질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 비료를 쓸 가축의 똥도 부족하다."

―가축 똥까지 왜 부족한가?

"가축에게 먹일 사료가 모자라고 식량도 부족하니, 가축을 잡아먹어 버린다. 우리가 농가에 돼지를 줘 기르게 해서 퇴비를 넣는 걸 막 시작했다. 나는 경기도 를 찾아가 '북에 축분(畜糞)을 보내자'고 했다. 북쪽에서는 자존심이 상해 '남쪽의 축분까지 받겠느냐'고 했다. 내가 축분으로 만든 유기질 비료를 들고가 실험을 해보였더니, 토양이 개선됐다. 그렇게 북쪽을 달래 축분 1만t까지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았지만, 남쪽 사정으로 불발이 됐다. 축분비료 값은 싼데 배 운송료가 너무 많이 들었다."

―다시 묻지만, 북한의 식량난은 농업의 문제라기보다 체제의 문제가 아닌가?

"어느 나라에 가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우리 민족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식량이 부족하다고 하니까, 될 수만 있다면 한 명도 굶지 않게 해주고 싶다."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외국구호단체의 트럭이 오면 주민들은 식량을 받고서 사인한다. 하지만 그 트럭이 떠나면 군대가 와서 몽땅 도로 거둬간다고 했다.

"믿을 수 없다."

―미 의회에서 한 증언이다. 그런 인도적 지원이 독재정권만 연명시킨다. 선의가 악용되는 것이다. 정권의 주민 통제를 약화시키려면 시장(장마당)을 활성화시키는 쪽으로 돕는 게 옳다.

"나는 믿기 어렵다. 농장 주민들은 우리가 지원한 물품을 먹고 입고 있다. 굶는 사람의 입에서 먹을 것을 다시 빼앗아가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난리가 난다. 순박한 북한 주민들도 먹는 것에는 이악스럽다."

―북한의 다른 지역을 자유롭게 가봤는가?

"1997년부터 미국에서 봄보리 종자 120t을 갖고 들어가 북한의 안주·함흥 이남으로 이모작을 지도했다. 그래서 여러 곳을 다녀봤다. 물론 북측에서 안내해준 것만 봤다. 시골도 생각보다 잘 정돈돼 있었다. 원산이나 해주에 가도 고층 건물과 호텔이 있다는 데 놀랐다. 무엇보다 주민들이 행복해 보이는 데 놀랐다."

―행복해 보였다고?

"몹시 불행하리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 않았다는 뜻이다. 행복지수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생각도 해봤다."

―선생의 눈에는 독재 치하에 순치된 노예의 행복이 좋게 보였는가?

"미국에 유학가기 전까지 남쪽에서 1년 반 동안 농촌지도원을 했다. 그때 남한의 농촌은 지금 북쪽보다 더 어려웠다. 춘궁기면 사람들이 누렇게 떴다. 이런 기억 때문에 북쪽에 갔을 때 별로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 세월 동안 남쪽은 눈부시게 발전했는데 북쪽은 왜 똑같이 머물러 있는가 하는 생각은 안 해봤나?

"난 혁명가가 아니다. 내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내 민족을 돕고 싶을 뿐이다."

―같은 동포를 굶주리게 하고 탄압하는 독재자에 대한 분노는 없었나?

"…."

―선생으로서는 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불만이 많을 것이다.

"여유있는 남한이 좀 더 대범했으면 한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하지 않는가."

―지난 정권 10년 동안 그렇게 했지만 돌아온 것은 핵무기 개발이었다.

"북쪽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겠지만…, 한 민족으로서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면, 서로 협력하는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 내가 정치가가 아닌 게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북한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통상 '북쪽 인사'가 된다. 독재 정권의 입장을 그대로 표방하거나 옹호한다. 이 때문에 나는 당초 인터뷰를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도주의에는 한 점 의심이 없다. 북한 주민 한 명이라도 덜 굶기겠다는 마음은 고귀한 것이다. 비록 북한 체제를 보는 입장이 달라도, 우리 사회에 그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에 선정됐을 때 국적이 '북한'으로 표기됐다.

"나는 미국시민인데 왜 이렇게 됐는지 추천한 쪽에 전화를 했다. 그쪽에서 '뉴스위크가 조크(농담)를 했나 보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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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황해도에서 협동농장을 임대해 북한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있는 김필주 박사. 그는 북한주민들이 한명이라도 더 살아남도록 돕는게 자신의 목표라고 말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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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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