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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62주 특집> 이승만의 대한민국 만들기

아버지를 버린 나라, 사생아 5천만명?

<우리는 사상아인가>
건국대통령 부정은 국가정통성 부정, 세계의 조롱거리
건국절, 기념관등 '이승만 브랜드'만들어 국격 세우자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은 아버지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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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추도식 

낳아주고 키워주고 외적으로부터 지켜서 잘 살게 해준 아버지를 50년이나 버려둔 채 잊어 버렸다. 버려진 아버지는 남의 땅을 떠돌다가 적(敵)들이 덮어씌운 더러운 저주의 거적 속에서 죽어갔다. 오늘은 어느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인가.
한민족을 다시는 외세의 노예로 만들지 않겠다며 자유민주 독립국가를 세운 아버지, 이 나라를 멸망에서 지키려고 국제공산주의와 싸우고 싸웠던 아버지, 그 적들이 붙인 이름 ‘독재자’ ‘친일정권’이란 오명을 오늘날까지도 적들과 함께 지껄이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국민들인가.
올해는 국치 100년, 해방 65년, 건국 62년, 6.25남침 60년, 4.19 학생운동 50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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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을선포하고 있다. 
다.
‘나라 찾기, 나라 세우기’에 몸 바친 아버지, 그 나라 대한민국이 아버지를 찾지도 않고 모시지도 않고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는다.
서럽고 외로운 아버지, 그 분은 그러나 슬퍼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으시리라.
당신이 세운 나라가 이토록 번영하는 강국으로 자라난 것이 기쁘고 기뻐서, 사랑하는 국민들의 피땀 흘리는 모습이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서, 이 순간도 아버지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날아다니며 자애 넘친 미소로 우리를 쓰다듬고 계실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아버지가 젊은 시절 꿈꾸던 바로 그 자유국가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왕비를 살해하고 나니 러시아가 국왕을 인질로 잡는구나.”
20세때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등 강대국들의 한국 쟁탈전을 겪으며 왕정개혁,  국민계몽운동을 벌인 이승만. 국모살해 복수 쿠데타도 실패하고 입헌군주제를 부르짖다 투옥된 이승만, 7년의 감옥생활중 러-일전쟁이 터지자 <독립정신>을 저술한다.
이승만이 이 책에 그린 나라와 백성의 조건들은 글로벌 현대 선진국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승만을 논하려는 자, 모름지기 이 책부터 읽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독립정신>의 국가정신이야말로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 할 것이다.

일본의 보호국 신세가 되자 다급해진 황제의 밀사로 미국에 갔던 이승만은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프린스턴대 박사가 되었고, 한국 국적을 한사코 고집하며 쓰라린 신고를 이겨낸 35년의 망명투쟁 끝에 조국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이것은 광복이 아니라 또 하나의 비극, 강대국들의 영토 나눠먹기 노름판이었다. 소련의 북한 단독정부 건립, 미국의 좌우합작 협박, 국내의 타협세력들을 달래고 가르치며 고군분투한 이승만의 나라세우기 작업은 전세계와 맞선 1인 혈투였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갓 벗어난 조국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바쳐야 할 것인가. 20세부터 70세까지 신앙으로 굳어진 ‘자유민주’ 정신과 더불어 국제정치를 꿰뚫는 예지력, 외교와 영어의 달인 이승만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태어날 수 있었다.

이승만이 일찍이 예견했지만 그러나 너무나 빨리 신생 대한민국은 맨손으로 공산세력의 침략을 받았다. 사상자와 규모에서 세계 7대전쟁의 하나인 6.25. 이때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미국과 유엔의 참전을 신속하게 이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며 지금쯤 우리는 김정일 치하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소련의 스탈린, 중공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을 3대1로 대적하여 승리한 호국(護國)의전략가, 전세계 3분의 1이 붉게 물들 때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켜낸 이승만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영웅이다.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손자병법이 아니라도 이승만의 명품 '한미동맹‘은 G20의 대한민국을 이뤄낸 안보 울타리였고, G2로 급상승하는 중국의 권토중래 국면에서 재연될 한반도 4강대결의 제어장치로서 우리는 이를 더욱 굳건히 지켜가야 할 것이다. 이 한미동맹 역시 청년시절부터 한민족국가의 독립과 아시아 평화를 담보하는 ’완충지 대한민국‘을 주창했던 이승만의 꿈이 실현된 작품이다 (프린스턴대 박사논문). 군사주권 운운하며 전작권 전환에 매달린 정략꾼들을 보면서 이승만은 얼마나 탄식할 것인가.

잠 깨면 성경을 낭독하고 잠들 때 기도하며 ‘자유 대한민국’의 안녕을 하늘에 빌었던 이승만. 문맹율 70%의 무지한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미숙한 민주정치 행태에 한탄하면서도 자유주의 이상향이던 미국 모델을 지켜가려고 애태웠던 80세 애국혁명가, 날마다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는 그가 어찌 후계자 걱정인들 떨칠 수 있었을까. “趙모는 애국애족심은 강한데 자기관리가 부족하고, 張모는 자기관리는 잘하는데 애국애족심이 부족하니 어찌하리오.”(미국인 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
그의 장기집권이 권세와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위기의 국가관리를 맡길 인재들을 못 찾아 방황했음을 역사는 이해하리라. 더구나 부정축재를 위한 것도 아니었음은 건국전 지지자들이 마련해준 이화장(梨花莊) 한 채가 증거하고도 남는다.
국부(國父)에의 과잉충성과 ‘인의 장막’속에서 기득권층이 저지른 3.15부정선거로 폭발한 4.19학생의거, 뒤늦게 진상을 보고 받고는 “부정을 왜 해? 내가 떠나야 학생들이 안 다치겠군.” 부상자들을 문병한 뒤 홀홀히 떠나간 이승만. 그것은 차라리 평생의 나라걱정에서 그를 놓아준 인간해방이었던 셈이다.
“불의(不義)를 참지 못하는 순수하고 열렬한 애국청년들이 있어 대한민국의 장래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장개석에게 보낸 편지)는 고백대로 이승만은 4.19학생운동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높이 평가하고 받아들였다. “국민이 원하면 그만둬야지.” 자기 발로 물러나는 독재자를 어느 나라에서 볼 수 있던가.6.25남침전쟁 후 체제수호와 국민통합을 위해 실시했던 반공법, 공산주의자들에 가차 없었던 통치를 독재로만 몰아붙일 것인가. 이승만 때문에 적화통일의 야욕을 접어야했던 패배자 김일성-김정일 세습독재세력의 ‘독재 타도’ 선전선동에 언제까지 눈감을 것인가.

50년전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이승만 동상을 끌어낸 4.19세대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민주화를 일궈낸 주역이기도 하다. 식민시대에 태어나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해낸 4.19세대야말로 이승만의 자유민주 헌법체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체험한 역사의 당사자들이다.
전후 140여개 신생국중 최단기간에 성공한 대한민국이, 태어난 날을 국가명절로 정하지도 않고 축하하지도 않는 것은 국가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성공이 부끄러운 세계의 조롱꺼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21세기 글로벌 지구촌은 국가경쟁력 시대다. 경제 지표만으로 선진국이라 할 것인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처럼 국가브랜드 파워는 그 나라 역사와 문화, 정신수준의 총합체라야 경쟁력을 인정받는다. 이승만 만큼 경쟁력 있는 브랜드도 없다. 그의 삶 자체가 수백편의 드라마, 웅장한 오페라다. 이승만 정신은 한민족의 역사적 재산이며 세계 약소국가의 독립모델이다. 더구나 전세계에 잘 알려진 전설적 이름 ‘싱맨 리’ 아닌가.
‘이승만 광장’에 동상을 세우고, 건국절 축제도 만들고, 우남로(雩南路)와 건국기념공원도 조성하여 후세들에겐 교육장으로, 세계인들에겐 문화상품으로, 국격을 갖춘 선진 한국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다.
대한민국이 태어난 날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른다면 우리는 분명 사생아 아니랴.

newdaily

<건국62주 특집> 이승만의 대한민국 만들기

몇 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불세출의 영웅

<이승만의 예지력과 배짱>
독도 살린 선견지명 '평화선' 선포...각국이 뒤따라
유례없는 포로석방 "자유를 위한 전쟁, 자유를 주었다"

    

이승만의 예지(叡智)와 배짱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은 예지와 배짱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그는 적어도 수십년 후의 일을 꿰뚫어 보고 걱정하고 대책을 세우는 예지의 지도자다.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은 언감생심 엄두도 못내는 일, 많은 사람들이 겁내는 일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지도자였다.
일본의 유명한 사회평론가 아이다 유지(會田雄次)는 사람을 세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첫 째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 회사원이나 공장의 기술자 같은 보통의 농력 있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두 번째는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사람. CEO급 인간을 말한다. 회사 간부나 사장, 회장등이 이에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치우는 인간형. 초인적인 대단한 능력을 가진 정치가. 바로 이승만과 같은 인물을 말한다.
이승만의 초인적인 능력과 예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많은 학자들이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논문으로, 서책으로 엮어낸 바 있다.
예컨대 공산당과 정적(政敵)들이 맹렬히 반대하는 38선 이남만의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했다든가, 1953년 6월 18일, 휴전 성립을 한달 남짓 앞둔 시점에서 2년여의 휴전협상을 깡그리 망가트릴지도 모를 반공포로 석방이라든가, 이승만은 ‘해서는 안될 일’을 수없이 저지르고 모두 성공 시켰다.
여기서는 그 밖의 비교적 덜 알려진 에피소드를 소개할까 한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권 제1호 발행자이자 최초의 소지자였다.
그는 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배재학당 선배인 서재필(徐載弼) 박사와 함께 ‘신대한 건국구상(新大韓 建國構想)의 틀을 짜고 그해 8월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립한 직후, 중국 상해로 달려가 대한민국 임시 대통령직에 취임한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외국에 나갔다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마다 이승만은 늘 출입국에 애를 먹었다.
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되면서 이승만도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무국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3.1운동 직후 미국에서 밀선을 타고 중국에 밀입국했던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직에 있다가 여러 경위를 거쳐 워싱턴에서 1932년 말경 다시 제네바 국제연맹에 가게 되었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에게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되어 다소 침체되었던 이승만을 임정이 다시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계기가 생겼다.
일본의 중국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일본편에 섰던 미국 영국등 열강이 일본을 국제사회에서 몰아 세우기 시작한 1932년 11월 상해임정의 김구 주석은 이승만에게 전권대사로 제네바에 가 줄것을 간청했다. 이승만은 쾌락하고 미국을 떠나려는데 재입국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미국 국무성에는 이승만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미워하는 관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 총장으로 있는 우드로 윌슨(후에 28대 대통령)을 찾아갔다.
이승만은 윌슨에게 국무성 관리들이 재입국 허가를 안해준다면서 주선해 줄것을 부탁했다.
윌슨은 이승만에게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했다.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그건 말도 안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이래뵈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다. 어찌 남의 나라 시민권을 받겠는가.”고 항의하듯 따졌다. 윌슨은 이승만의 이 한마디에 강렬한 충격과 감명을 받았다.
윌슨은 국무성에 연락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재입국 비자를 받도록 해주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지도층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이중국적을 지닌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서재필, 안창호등 어지간하면 미국시민권을 획득한 ‘독립운동가’가 적지 않았다. 이승만처럼 미국서 5년동안에 학사(조지워싱턴대), 석사(하버드대), 박사(프린스턴대) 학위를 두루 받고 외국여성과 결혼까지 한 사람이 미국 시민권 권유를 뿌리친 것은 그의 조국독립에 대한 열의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다른 역대 대통령(7명)과 동열에 놓거나, 심지어는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만도 못한 평가를 내리는 일이 있다. 여타 대통령들을 굳이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이승만은 몇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지도자다.
이것을 못 알아보는 한국민에게 하늘은 복(福)보다 화(禍)를 더 내려주시는 건 아닐까.

이승만의 위대함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바쁘지만, 그중에서도 1952년 1월18일의 평화선 선포, 1953sdus 6월18일의 반공포로 석방---이 두가지 만은 이승만이 아니면 해내지 못할, 이승만 특유의 타고난 뱃심의 산물이다.

첫째 평화선.
한반도 해안으로부터 평균 60마일까지 선을 긋고 모든 외국선박의 어업을 엄금한 것이다.
동시에 이 선은 적의 함정의 침투를 막는 방어선이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선을 평화선이라고 선포한지 8개월후인 1952년 9월 유엔사령관 마크 W 클라크 대장은 한반도 주면 9백킬로미터까지 선을 그어 해상방어지대(Sea Defense Zone)를 선포하였다. 이는 전쟁이 진행중이던 당시 순전히 작전목적을 위해 유엔군 선박외에는 허가없이 못 들어오도록 한 조치였다.
이승만은 그만큼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제2창세계대전 종전직후 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한국과 일본의 해역을 구분하기 위해 설정한 맥아더 라인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이승만은 미증유(未曾有)의 전쟁을 치르면서 국방과 경제 양측면을 고려하여 평화선을 선포한 것이다.
더구나 이승만이 ‘해양주권선’이라 하여 선포한 평화선은 일본과 예비회담을 거쳐 겨우 본회담을 열기로 합의한 한일회담(국교정상화)이 열리기 한달 전의 일이었다.
이승만은 일본측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 것이다.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을 36년간 강제로 지배한 보상으로 36억달러를 받아내야 한다고 한일회담 대표들에게 역설했다. 그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1억달러도 안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6.25 전쟁덕분에 일본은 1950년 1월부터 1955년 6월까지 무려 16억1천900만 달러(계약고 기준)를 벌어들였다. 이른바 ‘한국 특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1차 한일회담이 열린 1952년(1월)만 해도 일본은 가난했다. 이승만은 그런 일본과 지금 타결할 필요가 없다고 계산한 것이었다.
본회담 대표로 부임하는 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등에게 이승만은 당부했다.
“그대들은 본회담을 타결짓지 않아도 괜찮아.”
의아해 하는 유진오가 “그럼 언제 타결 짓습니까?” 물으면 이승만은,
“그대들이 다 죽은 다음 후세대에 가서 타결지어도 늦지 않아.”라고 대답했다.(이도형 저 ‘흑막’(黑幕)-한일외교교섭비화 p66)
사실 이승만의 예측대로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당시 한국 대표단원들이 과거 일제하에서 선생이나 선배의 위치에 있던 일본대표들을 상대로 회담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칫 불리한 조건으로 타결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리(李) 라인’으로 불리던 평화선은 그후 얼마 안되어 ‘전관수역’(專管水域)등으로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다.

둘째 반공포로 석방.
먼저 이승만 대통령은 왜 국제법(제네바협정등)을 위반해가면서까지 반공포로 2만5천명을 석방 시킨 것일까. 우선 이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반공포로 석방일 현재로 부산 마산 논산 및 상무대등에 분산 수용된 북한인민군 포로들 가운데 북한으로 송환을 원하지 않는 반공포로는 3만5천400명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매일 몇사람씩 공산당 세포들로부터 타살(打殺)당하곤 했다.
공산당세로들은 자기들이 죽여놓고는 “악랄한 국군놈들이 죽였다“며 역선선을 계속했다.
그래서 반공포로들은 일단 분리 수용했으나 공산당 세포들의 침투로 타살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이런 보고를 접한 이승만은 기왕에 한국민의 염원에 배치되는 휴전협상이 성사될 바에야 북송될 처지에 놓인 반공포로들을 자유롭게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로수용소는 한국군 경비대를 포함한 유엔군 관리하에 있었다.
이승만은 유엔군 관할 밖에 있는 원용덕(元容德) 헌병사령관(육군중장)에게 비밀명령을 내렸다. 원사령관 휘하의 경비헌병들이 반공포로들을 석방시키라고.
이승만의 지령은 1953년 7월 18일 새벽(12시~5시) 절묘하게 집행 되었다.
이 과정에서 971명이 잡혀 수용소로 되돌아 갔고 61명이 사살되었으며 116명이 부상했다.
(US Army in the Korean War: Truce and Fighting Front, p451)
이승만의 쾌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등은 이승만 대통령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한국에 파병했느냐? 자유를 위해서가 아닌가. 나는 2만5천명의 자유와 생명을 위해서 한 일이다.”라고 그들을 침묵시켰다.

이승만의 예지와 배짱은 대한민국을 창건하고 위기에서 구해냈다.
몇 세기에도 나타나기 어려운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다.
나라가 망할 때 하나님은 이승만을 한국에 내려보내 주셨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국가적 위기에 처해있다.
이승만과 같은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대한민국, 첫 원정 16강 진출 쾌거

나이지리아와 2-2 무승부…조 2위로 16강 진출
아르헨티나는 그리스 2-0으로 제압…3전 전승

한국 축구가 역전 드라마를 연출하며 `약속의 땅` 더반에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태극전사들이 불면을 밤을 보낸 전 국민의 뜨거운 응원 속에 마침내 월드컵 출전 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꿈을 이뤄냈다.

본선 무대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던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선배들의 한을 풀어준 값진 승전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창조에 이어 다시 한번 한국 축구사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23일(한국시간) 더반의 모저스 마비다스타디움에서 열린 `슈퍼이글스` 나이지리아와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B조 조별리그 최종 3차전에서 칼루 우체에게 선제골을 내주고도 이정수의 동골과 박주영의 추가골로 역전에 성공한 뒤 야쿠부 아이예그베니에게 페널티킥 골을 헌납해 2-2로 비겼다.

이로써 1승1무1패(승점 4점)를 기록한 한국은 같은 시각 그리스를 2-0으로 누르고 3전 전승을 올린 아르헨티나에 이어 조 2위로 16강에 올랐다. 그리스는 1승2패, 나이지리아는 1무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한국은 이번 대회까지 7회 연속(총 8회) 본선 무대를 밟았지만 안방에서 개최된 한일 월드컵 때 준결승 진출을 빼면 앞선 여섯 차례 원정 월드컵에선 유럽과 남미의 벽에 막혀 한 번도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허정무 감독은 그리스와 조별리그 1차전 2-0 완승을 지휘해 월드컵에서 처음 승리를 맛본 한국인 감독이라는 영예를 안은 데 이어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까지 일궈내 국내 최고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

한국은 오는 26일 오후 11시 포트엘리자베스의 넬슨만델라베이 스타디움에서 A조 1위 우루과이와 8강 진출을 다툰다.

허정무 감독은 그리스와 조별리그 1차전 때와 같은 멤버의 4-4-2 전형을 썼다. 투톱에는 박주영과 염기훈이 서고 좌우 날개는 박지성과 이청용이 폈다. 오른쪽 풀백으로 차두리가 복귀했고 골문은 변함없이 정성룡이 지켰다.

그리스와 개막전 2-0 승리 때 기분 좋은 기억을 살려 나이지리아를 잡아 16강진출을 확정하겠다는 허정무 감독의 승부수였다.

1, 2차전 패배로 벼랑 끝에 몰린 나이지리아는 베테랑 느왕쿼 카누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깜짝 배치하고 스트라이커 야쿠부 아이예그베니를 최전방에 세워 한국의 골문을 노렸다.

카누의 경험으로 흐트러진 조직력을 보완하려는 라르스 라예르베크 감독의 계산이었다. 허벅지를 다쳤던 왼쪽 풀백 타예 타이워 자리에는 라비우 아폴라비가 공백을 메웠다. 골문은 빈센트 에니에아마가 지켰다.

6만9천여석의 스탠드를 메운 나이지리아 팬들의 일방적인 부부젤라 응원 속에 붉은악마와 교민들의 대∼한민국 함성이 묻혔다. 그러나 태극전사들은 강한 투지와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로 초반부터 공세의 수위를 높여갔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상대 미드필드 지역에서 수비수의 공을 가로챈 이청용은 박주영과 1대 2 패스를 주고받고 나서 오른쪽 골지역으로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이를 본 박주영이 수비수 뒤쪽으로 돌아들어 간 이청용에게 절묘하게 패스했고 이청용이 뒤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오른발을 갖다댔으나 공은 발에 걸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골키퍼 에니에아마와 충돌한 이청용은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반 8분 기성용의 오른발 중거리 슈팅으로 공격의 포문을 연 한국은 하지만 전반 12분 순간적인 수비 실수로 선제골을 내줬다.

수비형 미드필더 김정우가 빠른 드리블을 하는 치디 오디아에게 오른쪽 측면을 뚫렸고 오디아가 김정우를 뿌리치고 낮게 크로스했다. 왼쪽 페널티지역에 도사리던 칼루 우체가 차두리를 뒤에 두고 오른발로 마무리해 골망을 흔들었다. 위험지역에서 우체를 놓친 차두리의 실책이 뼈아팠다.

그러나 태극전사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강한 집념으로 나이지리아의 탄력과 빠른스피드에 맞섰다.

한국은 후반 30분 박지성이 후방에서 길게 올라오자 골지역 왼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고 1대 1로 마주한 골키퍼 에니에아마의 파울로 옐로카드를 유도하며 프리킥을 얻어냈다. 그러나 기성용의 크로스는 무위에 그쳤다.

전반 35분 우체의 강한 중거리슛이 오른쪽 골대를 맞고 튀어나와 추가 실점 위기를 넘긴 한국에 기회가 찾아왔고 `골 넣는 수비수` 이정수가 해결사로 나섰다.

한국은 전반 38분 왼쪽 측면을 빠르게 돌파하던 이영표가 치네두 오바시의 거친태클로 오른쪽 페널티지역 외곽에서 프리킥을 얻어냈다. 키커를 맡은 기성용은 오른발로 감아 찼고 회전이 걸린 공은 수비수 벽을 넘어 오른쪽 골지역에 있던 이정수의 머리를 향했다.

이정수는 지체 없이 달려들며 헤딩을 꽂았고 머리를 맞은 공은 다시 이정수의 오른발에 맞은 뒤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 경기 연속 눈부신 선방으로 경기 최우수선수로 뽑혔던 철벽 수문장 에니에아마도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이정수의 집념이 돋보인 귀중한 동점골이었다. 이정수는 그리스와 1차전에서 결승 선제골을 사냥한 데 이어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동점골을 뽑아내 수비수답지 않은 빼어난 골 감각을 뽐냈다.

전반을 1-1 균형을 맞추고 마친 한국이 여세를 몰아 공격의 고삐를 죈 끝에 역전골을 만들어냈다.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은 간판 골잡이 박주영이었다. 박주영은 후반 4분 대니 시투의 파울로 아크 왼쪽에서 프리킥을 얻어냈고 직접 키커로 나섰다.

한 번 숨을 고른 박주영은 오른발로 강하게 감아 찼고 예리하게 휘어진 공은 오른쪽 골네트를 출렁였다. 철벽 골키퍼 에니에아마가 몸을 날려봤지만 공은 골문 모서리에 꽂혔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스위스와 3차전에서 선제골의 빌미가 된 프리킥을 허용했던 박주영은 본선 무대에서 마수걸이 득점포를 가동하며 `월드컵 불운`도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 박주영은 골을 확인하는 순간 무릎을 꿇고 기도 세리머니로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역전골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국은 후반 18분 염기훈을 빼고 김남일을 김정우와 더블볼란테의 짝으로 세워 수비를 강화했다. 박주영이 원톱을 맡는 4-2-3-1 전형으로 바꿨다.

나이지리아는 후반 21분 왼쪽에서 땅볼 크로스를 받은 아이예그베니가 골키퍼 정성룡까지 빈 골문 앞에서 살짝 찬 공이 왼쪽 골대를 벗어났다. 한국으로선 실점 위기에서 행운이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고 후반 24분 동점골을 뽑아냈다.

교체투입된 김남일이 왼쪽 페널티지역에서 마크하던 오바시의 공을 가로채려다 뒷다리를 걷어찬 것. 키커로 나선 아이예그베니는 골키퍼 정성룡을 속이고 왼쪽 골문으로 침착하게 차 넣어 2-2 동점을 만들었다. 김남일의 수비 실수가 부른 통한의 동점골이었다.

나이지리아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후반 34분에는 오바시가 왼쪽 측면을 돌파한 뒤 크로스를 해줬다. 오바페미 마틴스가 골키퍼 정성룡과 1대 1로 마주했지만 로 빙슛이 골대를 살짝 벗어났다. 후반 40분 교체 선수인 빅터 오빈나의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도 골대를 살짝 빗겨갔다.

끝까지 버텨낸 태극전사들은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는 순간 서로 포옹하며 사상 첫 16강 진출의 기쁨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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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뉴스/세미나/2010.03.01 17:48

아우내 장터의 망국세대 밴쿠버의 쾌속세대 대한민국 100년의 드라마 [중앙일보]

2010.03.01 02:34 입력 / 2010.03.01 07:45 수정

오늘이 삼일절만 아니었더라도, 올해가 한·일 강제합병 100주년이 되는 해만 아니었더라도, 그냥 너희들을 향해 박수 치고 웃고 울며 이 감동의 순간들을 함께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금메달을 걸고 시상대에 오른 너희들의 자랑스러운 모습 위로 어쩔 수 없이 떠오른 것은 김연아보다도 어린 열여덟 나이로 세상을 떠난 유관순 소녀의 얼굴이다. 밴쿠버에서 들려오는 승리의 함성과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 소리가 함께 메아리치는 곳에 우리가 있다.

나라 잃은 시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차갑고 위태로운 역사의 빙판 위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고 지금 88 서울 올림픽 때 태어난 너희들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의 빙판 위에서 올림픽 경기의 운동을 즐긴다. 같은 젊음이요 같은 운동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독립운동을 한 유관순의 피와 피겨 스케이팅 운동을 한 김연아의 땀을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라 잃은 유관순이 오늘의 대한민국에 탄생한다면 김연아가 되었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김연아가 100년 전 망국의 땅에 태어났더라면 유관순의 이름으로 기억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삼일운동의 영웅들이 있었기에 오늘 밴쿠버의 영웅이 있다는 것을 너희들은 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조국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그렇다. 나라라고 하는 것은 분명 추우면 주워 입고 더우면 벗어 던지는 그런 옷가지(衣裳)가 아니다. 그것은 피부와도 같은 것이어서 어디를 가나 몸처럼 따라다닌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겨울올림픽은 기후와 그 경제조건으로 북방에 몰려 있는 유럽 선진국의 독무대였다. 그런데 오늘 너희들이 금메달을 따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개인의 기량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너희들 나라가 독립해 있었기에, 서구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발전했기에 가능했다.

너희들이 5000m와 아시아 선수들이 넘을 수 없다던 1만m 스피드 종목의 벽을 넘어 금메달을 움켜쥘 때 나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벽을 넘어서’의 대본을 만들던 일을 상기했다. 20년 뒤 너희들이 정말 벽을 넘어 세계의 한복판에 설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김연아를 보라. 피겨 스케이팅의 피겨란 그림(圖形)을 뜻하는 말이다. 영국 귀족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빙판 위에 하트 모양이나 글자들을 그리며 즐기던 운동이었다. 김연아가 세계의 빙판 위에 그린 꿈과 메시지도 ‘벽을 넘어서’였다. 김연아가 세운 세계 신기록을 남자의 채점 방식으로 옮기면 168.00점. 남자 피겨 우승자인 라이사첵의 167.37점을 넘어서는 득점이다. 피겨 여왕이 아니라 피겨 제왕이라고 불러야 옳다.

또 김연아는 라이벌 일본의 벽을 넘는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스포츠는 그냥 스포츠로 즐겨야 한다. 그러나 우연히도 강제합병 100주년이 되는 해에 김연아는 그녀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를 시원하게 이겼다. 데뷔할 무렵 연아는 주니어전에서도 시니어전에서도 패배를 당하고 일기장에 “왜 하필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는가”라며 마오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느 여자 선수도 기록하지 못한 3.5회전의 트리플 악셀을 연속 성공시킨 마오를 20점 차로 꺾은 것은 한국인다운 끈기였다. 쇼트에서는 007 본드 걸의 하드와 다이내믹한 힘을 보여주고, 프리에서는 경쾌하고 청초한 매력으로 조화를 이룬 한국인 특유의 ‘신바람’과 ‘끼’가 일본의 가다(型=틀)를 압도한 것이다.

셋째로 김연아는 한국 문화의 벽마저 뛰어넘어 글로벌한 새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상대에서 흘리는 눈물은 이미 보릿고개에 자란 선수들이 흘렸던 한의 눈물이 아니었다. 식민지인의 그늘이나 열등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김연아의 성공 뒤에는 그녀의 가족만이 아니라 코치를 비롯한 외국인 스태프의 드림팀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너희들은 물질적 풍요를 위한 ‘산업화의 경제원리’와 평등을 추구해 온 ‘민주화의 정치원리’ 사이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다. 이제는 이 두 벽마저 넘어 사랑과 소통을 추구하는 ‘생명화의 문화원리’를 창조해 내게 될 것이다.

밴쿠버의 젊은이들아. 너희들 때문에 처음으로 지역차별의 분열도 좌우의 이념대결도 그리고 여야의 갈등도 없이 대한민국은 하나가 되어 모처럼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고맙구나. 장하구나.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