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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우리군이 흘린 피의 대가로 뜻밖의 제의를 한 박정희

  • 문갑식 선임기자
  • 입력 : 2012.01.21 03:16 | 수정 : 2012.01.21 14:17

    그가 찍었다, 한국과학이 찍혔다

    그것은 월남에서 국군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혈맹(血盟)의 우정을 경제원조로 갚으려 했다. 대학도 하나 지어주려 했는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뜻밖의 제의를 했다. “제가 원하는건… 종합연구소입니다.”

    1966년 2월 2일자 재산출연증서가 있다. 펜으로 쓴 이 낡은 서류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의 모태다. 작성자는 박정희, 개인자격으로 사재(私財) 100만원을 내겠다는 것이다. 당시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이 인가(認可) 서명했다.

    KIST 역사, 한국경제 성장史
    삼성 반도체·현대 車·포스코 대표기업들 신화 이면엔 한국과학기술硏 뒷받침 있어…
    그 현장 렌즈에 담아 행복했다

    과학자들이 꼭 찾는 남자
    눈에 안 보이는 국새의 틈, 물방울 튈 때의 순간 포착…
    미세한 과학의 세계 찍느라 별짓 다했죠, 신나게

    1978년까지 과학자 410명이 돌아왔다. 미국에서는 “세계 최초의 역(逆) 두뇌유출 프로젝트”라며 난리가 났다. ‘전자산업의 아버지’ 김완희 박사가 밝힌 비결은 이렇다. “대통령이 밥 숟가락 위에 손수 깻잎을 올려줄 만큼 간곡했다.”

    33년7개월 동안 이순재는 과학의 현장을 기록해왔다. 그가 일했던 사무실에는 20만장에 달하는 필름과 슬라이드, 비디오테이프가 쌓여 있었다. 그것은 한국경제의 발전을 견인해온 KIST가 걸어온 길 그 자체였다. / 오종찬 기자 ojc1970@chosun.com

    ‘과학의 집현전(集賢殿)’이 들어설 터로 홍릉(洪陵) 임업시험장이 결정됐다. 농림부가 반발했지만 대통령은 지적도 들고 현장을 돌며 부지를 골랐다. 처음에 원한 땅이 5만평 정도였다. 대통령이 준 넓이는 정확히 8만2644평이었다.

    60년대 세계후진국 중 ‘과학기술연구소’에 눈 돌린 나라는 대한민국뿐이었다. 그 불모지(不毛地)에 과학자 18명이 발을 디뎠다. 유명연구소와 대학에서 받던 연봉이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고급두뇌들은 돈 대신 조국을 택했다.

    1969년 준공 후 KIST가 걸은 길이 우리 경제의 성장사다. 대일청구권 자금을 들고 박태준이 영일만에서 빚은 기적의 배경에 KIST의 계획서가 있었다. 이병철이 반도체, 정주영이 자동차에 달려든 것도 KIST가 보여준 희망 때문이었다.

    이순재(李順載·59)는 1978년 5월 20일부터 2011년 12월 31일까지 KIST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한국 유일의 ‘과학기록 사진가’라는 이 특이한 이력의 사내는 렌즈를 통해 33년의 과학사(科學史)를 적었고 이전의 역사를 복원했다.

    ◇"사진은 정직하다"

    불과 보름 전까지 이순재가 일하던 5평 사무실 벽엔 필름과 슬라이드가 빼곡했다. 20만장이 넘는다고 했다. 한쪽 책상은 방송 장비였다. 정년(停年)의 벽이 그를 떠나게 했으나 그 머릿속에 남은 기억만큼은 나이와 관계없이 선명했다.

    ―왜 기록이 중요합니까.

    "원진레이온 사태가 문제가 되자 KIST가 뛰어들었어요. 고품질에 저렴하면서도 공해 없는 레이온 제작법을 개발해 한일합섬에 전해줬는데 얼마 뒤 '일본 도레이에 매각된다'는 얘기가 돌자 노사분규가 일어났어요. 100m나 되는 생산라인(line)이 죽창 든 노조원들에게 망가질 뻔했어요. 기록을 남겨야 할 것 같아 달려갔죠. 한참 사진 찍는데 노조원 대여섯명이 둘러싸더군요. 필름을 내놓으라면서요."

    ―자기들 얼굴 촬영한 줄 안 모양입니다.

    "함께 간 연구원은 겁에 질려 '이형 그냥 돌아가자'고 했지만 저한텐 필름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잖아요. '현상해서 당신들 얼굴 없으면 돌려달라'고 했죠. 몇 시간 기다려 인화해보니 제 말대로였어요. 몇년 지나 레이온 생산라인이 재건됐습니다. 그 바탕이 제가 찍은 사진이었어요. 그 공장 재가동되던 날 다시 촬영하러 갔다 절 협박했던 노조원들과 만났습니다. '그때는 미안했다'고 하더군요. 몇년 만에 사과를 받은 거죠."

    국내 유일 과학기록 사진가 이순재

    ―필름 하나로 수백억을 아낄 수도 있군요.

    "가천의대로 간 조장희 박사와 KIST와 KAIST가 합병됐을 때 함께 일했어요. 그분의 MRI가 세계적인 수준인데 그걸 제가 촬영했어요. 한참 사진찍는데 의전(儀典)행사가 있다는 연락이 왔어요. 가려고 하니 조 박사가 호통을 치더군요."

    ―왜요?

    "'이게 더 중요한데 왜 그런 델 가!'라며. 의전촬영을 포기했는데 그게 조 박사가 만든 첫 번째 모델이었어요. 얼마 전 조 박사가 낸 책에 그 사진이 수록됐습니다. 고마워하시더군요. '나도 없는 자료인데 자네 덕에 찾았다'면서요."

    ―사진은 정직하군요.

    "제가 정년 전까지 하던 일이 5대 국새(國璽) 제작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3대 국새 보수(補修)작업도 했었는데 이 사진 보실래요?"

    ―금이 심하게 갔습니다.

    "이렇게 확대해야 비로소 크랙(crack)이 보이죠. 눈으론 절대 확인할 수 없는 겁니다. 국새는 석고로 본을 떠 주물을 만들고 그 안에 금을 녹여부어 만드는데 본 자체에 문제가 있으면 엉터리 국새가 나옵니다. 제가 남긴 국새 관련 기록만 1만장 분량이에요. 그 인연으로 고대(古代) 철 관련 기록도 남길 수 있게 됐고요."

    ―국새와 고대 철(鐵)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3대 국새를 만든 분이 최주 박사였습니다. 고대 금속 관련 연구의 권위자였지요. KIST에 전통과학연구센터가 생긴 것도 그분 고집 때문이었어요. 경기도 용인에 고로(高爐)를 만들고 고대 철을 재현하고 기자들과 논쟁하는 장면도 녹화했습니다. 이런 기록은 정말 귀중한 것이지요."

    ―사진을 보면 같은 물체인데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 보입니다.

    "'사진은 빛'이란 말이 있지요. 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KIST에 처음 입사해 난관에 부닥쳤는데 그 해법이 바로 빛이었어요. 지금 독일의 대학교수와 인하대 교수가 된 연구원 둘이 자동 납땜 로봇을 만들었는데 납땜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아무리 찍어도 납땜의 세밀한 부분이 안 보여요. 접사(接寫)의 차원이 아니었던 겁니다. 며칠 밤샘 끝에 담배를 피우러 나갔습니다. 그때 KIST 타워에 떠오르는 새벽 햇살이 비치는 겁니다. '아! 빛이 답이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트레이싱 페이퍼로 돔(Dome)을 만들어 씌우고 거기 구멍을 내 빛을 통과시켰죠. 빛을 이용하면 아무리 미세한 부분도 찍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현재 개발 중인‘에어로젤’은 강력한 단열효과를 낸다. 밑에서 토치로 화염을 뿜어도 에어로젤 위에 얹힌 꽃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 KIST 제공

    ―KIST 내의 모든 과학자가 33년 동안 선생을 찾은 격입니다. 다 분야가 다른데 어떻게 적응할 수 있죠.

    "누가 우리나라한테 항공모함을 공짜로 주면 어떨 것 같습니까. 경험이 없으니 운용을 못할 겁니다. 과학사진도 마찬가지예요. 다 경험이 있어야 해요. 장비를 스스로 만들어야 할 때도 있고요."

    ―직접 만들기도 합니까.

    "옛날 카메라에 달린 '자바라'라고 불리는 주름통이나 발광(發光)에 쓰는 스트로보(플래시)에 모터를 달아 주기적으로 자동으로 터지게 하는 장비며 반자동 현상기도 만들어 서울대 의학사진실에 기증한 적도 있어요. KIST 공작실에 재주꾼이 많거든요."

    ◇한국사를 바꾼 4대 과학기술

    "역사를 바꾼 4대 과학기술이 있다. 한글창제, 개항(開港), 원자력 도입(이승만)과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박정희)이다. 그에 따라 KIST 설립, 과학기술처 발족, 고리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연쇄추진됐다."(정진익 고대 객원교수)

    ―실패한 촬영도 있습니까.

    "고 윤한식 박사가 '아라미드 펄프'를 개발했어요. 방탄(防彈)소재, 단열재로 쓰이는데 펄프가 비커 안에서 섞이는 걸 찍어야 했는데 너무 빨라 실패했습니다. 지금 다시 도전하면 성공할 것도 같은데…. 그분은 희귀한 연구를 많이 했어요. 물방울이 튈 때 생기는 왕관(Crown)을 찍어달라고 한 적도 있었죠. 그걸 물리학적으로 증명해내겠다면서. 기발한 분이었습니다."

    ―이 파일엔 정말 희귀한 사진이 많네요.

    "이게 1979년 국내에서 처음 개발한 납전지 전기차고요, 이건 1978년에 만든 태양열을 이용한 솔라하우스, 이건 1980년에 만든 태양풍력복합발전소와 저상형(低床型)버스, 86아시안게임 때 도핑테스트하는 사진도 있고요."

    필름 한 장이 수백억 가치
    생산라인 없어졌는데 사진 통해 재건한 적 있죠
    수십년前 전기차·태양열…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과학은 기록이다
    필름·슬라이드만 20만장
    독일 같은 선진국에선 매우 중요시한다는데
    내 기록 귀하게 쓰였으면…

    ―이건 대우의 VTR?

    "93년 대우전자가 '탱크주의'를 내세우며 만들어낸 VTR의 다이아몬드 헤드가 바로 이겁니다. 이건 일진그룹을 일으켜 세운 인공 다이아몬드죠. 크기가 모래알만 한데 제가 찍는 데 성공했어요. 그것도 마이크로 렌즈가 아니라 광각(廣角)렌즈로요."

    ―제1호 세종컴퓨터(1975년) 같은 역사적인 발명품 못지않게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도 많습니다.

    "포항제철이나 삼성의 반도체 산업 같은 것의 모체가 사실 KIST입니다. 이 사진 보실래요? 고 이병철 삼성회장, 홍진기 회장 뒤에 젊었을 적 이건희 회장이 보이죠. KIST연구실 곳곳을 눈을 번득이며 살피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작업모 차림의 정주영 현대회장도 보입니다.

    "현대그룹의 주력업종이 건설에서 자동차로 바뀐 것도 KIST의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죠. 정 회장에게 우리 연구진이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장년기 때 모습이죠."

    ―젊었을 때의 구자경(LG), 최종현(SK), 김우중(대우) 회장도 있군요.

    "구 회장께선 KIST에서 개발한 필름산업을 하려 했는데 중간에 접길 잘했지요. 나중에 필름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으니까요. 최종현 회장의 1978년 모습인데 VTR에 관심이 많았고 같은 해에 방문한 김우중 회장은 자동차에 흥미를 보이셨죠. 이런 사진들이 의외로 제값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정년퇴직하기 며칠 전, 그러니까 작년 12월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야마니 장관이 KIST를 찾았습니다. 그때 뭔가 머리를 스치더군요. 1979년부터 84년 사이에 사우디 연구원들이 KIST에 공부하러 온 적이 있었거든요. 당시 필름을 다 찾아보니 학생 때의 야마니장관이 있었습니다."

    ―좋아했겠습니다.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선물하니 그렇게 감격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게 아직 남아있느냐'며. 이 사진 보면 KIST 공사할 때 한 인부가 불도저를 찍은 건데 더 중요한 건 그 배경들입니다. 옛 경춘선 철도며 동덕여대 건물이 다 나오죠. 그 인부가 일부러 찍었을 리는 없을 텐데 지금 와선 배경이 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거죠."

    오늘날 삼성이 세계 최고 기업으로 발돋움한 데는 KIST의 역할이 컸다. 고 이병철 회장(맨왼쪽)과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오른쪽 끝)이 KIST의 연구실을 둘러보고 있다. / KIST 제공

    ―이건 뭡니까, 빵 만드는 장면 같은데.

    "KIST에서 제빵공장을 한 적도 있습니다, 모르셨죠? 이분이 김성호씨라고 제빵제과협회장까지 지낸 분입니다. 당시 국내엔 변변한 연구소가 KIST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필요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밖에요."

    ―기업인 못지않게 대통령도 다 보셨겠군요.

    "박 대통령은 KIST 설립자이셨으니 많이 찾았는데 제가 입사한 78년 이후엔 오신 적이 없어요.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에 한 번, 며칠 전에 한 번 왔고 국회의원 때 강연하러 오신 적이 있고요. 노무현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 노조 파동이 있었을 때 오신 적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당선자 시절에만 한 번 오셨죠."

    ―그럼 KIST를 한 번도 안 찾은 '비(非)과학 대통령'도 있단 말입니까.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인데…, 무슨 바쁜 사정이 있었겠지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나를 이 길로"

    이순재의 선친은 동대문시장에서 큰 사업을 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에 물감을 들이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5남매의 맏이로, 종로구 연건동 토박이인 이순재의 삶은 그가 여섯살 때 '으르릉'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군인도 많이 보입니다.

    "박 대통령 시절엔 영관급 이상을 의무적으로 KIST에 보냈거든요. 이 사진이 전두환 대통령의 대령 때 모습인데 말석(末席)에 있지요. 이건 노태우 대통령이 준장(准將) 때인데 당당한 자세가 대령 때의 전 대통령과 다르죠."

    ―박 대통령 말고 KIST에 제일 애정을 보인 분이 누굽니까.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였죠. 모두 4번 KIST를 찾아오셨습니다. '나도 KIST 설립에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휴먼로봇 개발할 때 JP가 연구센터 지원을 해준 게 큰 힘이 되기도 했고요. 아까 얘기했던 레이온 공장이 되살아난 것도 JP 덕이었어요."

    ―그렇습니까.

    "한일합섬이 고전한다는 이야길 듣더니 '5·16혁명 한 후 제일 먼저 1억불 수출의 탑을 받은 회사인데…'라며 안타까워하시더니 지원책을 마련해보라고 지시했거든요."

    ―기인(奇人)들도 많이 만났겠습니다.

    "고대 철 연구한 최주 박사는 혀가 짧아요. 문 부장께서 근무하는 회사의 모 기자도 혀가 짧은데 둘이 대화하면 가관이었어요. 조장희 박사도 그랬고요. '학생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며 그 당시에도 생수를 먹이고 학용품도 최고로 지급해주고 실험실에 카펫을 까는 통에 뒤처리하느라 애를 먹었지요. 일찍 돌아가신 분들도 많아요. 대부분 암으로…, 스트레스가 심했겠지요."

    KIST가 납전지를 이용해 만든 최초의 전기자동차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에 우리나라에도 이 같은 신기술이 있었다. / KIST 제공

    ―원래 집안이 부유했지요.

    "아버지 친구분이 방직기계를 들여오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을 하기 전까지는요. 아버지께서 앞뒤 안 재고 모든 재산을 쏟아부었다가 그만 사기를…. 그 충격으로 쓰러지신 뒤 곧 돌아가셨어요."

    ―가세가 기울었겠네요.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못 먹지도 않았어요. 아버지가 워낙 급하게 재산을 정리하느라 빠트린 집이며 땅이 꽤 됐거든요."

    ―지금은 없어진 수송고 출신입니다. 명문 공고였죠.

    "제가 전기과 출신입니다. 3수를 했는데도 대학을 못 갔습니다. 태권도를 했는데 그것도 오른쪽 무릎 근처 뼈가 부러지면서 그만뒀고요. 접골원에서 대충 맞췄는데 잘못돼 지금도 이렇게 뼈가 돌출돼 있습니다. 그 때문에 징집면제도 받았고요. 졸업 후 DP점을 했습니다."

    ―DP점?

    "제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어요. 우연히 동네 DP점을 보고 하도 신기해서 방과 후엔 매일 놀러 갔습니다. 거기서 '페트리7S'라는 중고 카메라를 빌려 매일 창경궁에 촬영하러 다녔고요. 그 인연 때문에 시작한 DP점이었는데 장사가 꽤 잘됐어요."

    ―그런데 왜 접었습니까.

    "2년 반 뒤 점포 주인이 '내 아들이 군에서 제대하는데 여길 써야겠으니 나가라'는 겁니다.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나다시피 나왔지요. 새로 가게 얻을 돈도 없어 고민할 즈음 KIST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얘길 듣고 응시한 거죠."

    ―그때 이 일을 삼십년 넘게 할 생각을 했습니까.

    "그럴 리가요. 한 6개월쯤 하다 말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젊을 때여서 직장에 매이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하다 보니 이 일이 정말 재미있는 겁니다. 그래서 정식 사원이 되고 계속하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흘렀네요."

    ―원래 선생의 선임자가 있었겠지요.

    "주의식씨라고 초기부터 사진을 하신 분인데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후임으로 1년6개월간 대타를 고용했는데 그분은 사진을 전혀 모르는 분이었고요. 그래서 제가 들어온 후엔 직접 찍고 예전 자료 복원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KIST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태양열을 이용한 솔라하우스를 만들어 실험했다. KIST 부지에 설치됐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 KIST 제공

    ◇'KIST에 다닌 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박 대통령은 '청계천 다리 밑에 사는 사람도 나와 보통의 집에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대덕단지가 만들어질 즈음엔 근처 언덕에서 '여기 세계적인 전자단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재미과학자 김완희 박사)

    ―대외직함이 홍보팀 섭외과 직원이었는데 실제론 사진가입니다. 사진전도 두 차례나 열었지요.

    "제가 한 일이 과학사진, 의전사진 외에 KIST의 구석구석을 담는 건데 평일에는 차와 사람이 많아 촬영하기가 힘들잖아요. 토요일에 매번 출근했는데 하다 보니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촬영 지점들이 달라지는 거예요. 연구소 전경(全景)은 태풍이 지난 뒤 가을 초입의 낮 12시부터 1시 사이가 제일 멋있게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 자투리 시간이 자꾸 생겨 꽃 사진을 찍게 된 겁니다. 꽃사진과 과학사진이 비슷한 점이 많아요. 근접촬영을 많이 하거든요."

    사진은 나의 인생
    원래 6개월만 하려 했는데 일이 재미있어 정년까지…
    한국 과학史 한복판에 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결혼도 사진 때문에 했다면서요.

    "디지털 카메라는 인간관계를 삭막하게 만듭니다. 필름카메라 시절엔 한 번 찍을 때도 세 번 이상 생각해야 하고 현상, 인화할 때도 사진 전해줄 때도 정성이 필요하잖아요. 요즘은 이메일로 보내주면 끝인데. 아내가 친구와 놀러 왔기에 사진 한번 찍어준 게 인연이 되긴 했죠."

    ―이게 1990년 나온 첫 사진집 '우리 직장의 꽃들'이군요.

    "KIST가 원래 임업연구소 자립니다. 모두 30만평인데 생태계가 아주 잘 보존돼 있지요. 이 사진 중엔 지금 사라진 게 많아요. 이 박태기꽃은 냉해로 죽었고 무궁화나무는 작년에 태풍으로 쓰러졌습니다. 능소화나 배초향도 지금은 볼 수 없고요. 이거 촬영하는 데 7년이 걸렸어요."

    ―그게 계기가 돼 1996년 두 번째 사진집 '홍릉수목원의 야생화'가 나왔습니다.

    "산림청에 근무하는 분들이 제 사진집을 보고 부탁해서 만든 겁니다. 역시 매주 토요일에 홍릉수목원에서 가서 살았지요. 6년 동안을 그렇게요. 처음엔 아이들도 데리고 갔는데 제가 사진만 찍느라고 놀아주질 않아서 그런지 다음부터는 안 따라오더군요. 가족에게 그게 제일 미안해요."

    ―대한사진가협회 이사까지 지낼 정도의 실력인데 왜 전문사진가의 길로 나가지 않은 겁니까.

    "기로에서 고민했지요. 제가 어렸을 적부터 꽃과 사진을 좋아해서 시작한 건데 정말 승부를 보려면 KIST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았아요. 그런데 KIST를 떠나기가 정말 싫더라고요."

    ―이제는 다시 시작해도 되지 않습니까.

    "카메라를 잡긴 잡아야겠지만 이 방면에 워낙 대가가 많아서요. 배병만 선생도 그렇고, 김정명 선생도 대단한 분이지요."

    ―아무리 정년이지만 일터를 떠나는 게 쉽진 않겠지요.

    "제 자식을 남겨놓고 떠난 것 같은 생각은 들지만 전 정년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기 자신을 한번 되돌아볼 기회가 되니까요."

    ―지금까지 거쳐 간 카메라가 몇대나 됩니까.

    "아사히펜탁스 포토마틱, 라이카M3, 브로니카645, 테크노라마, 최근엔 니콘D3X를 썼으니 10대쯤 되겠네요. 그중에 몇대는 셔터가 녹아버린 것도 있지요."

    ―선생이 떠나면 KIST의 기록관리는 누가 합니까.

    "원(院)에 사정이 있겠지만 저도 그게 제일 아쉬워요. 후임자가 있으면 자료도 넘겨주고 구전(口傳)할 것도 많은데….(임환 KIST문화홍보실장은 "데이터베이스화를 못한 게 너무 안타깝다"며 "방법을 강구하고있다"고 말했다.)

    ―외국에는 백발성성한 과학기록 사진가가 꽤 많을 텐데 우린 왜 등한시할까요.

    "외국엔 많죠. 특히 독일이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우린 왜 그럴까, 아무래도 기록의 중요성을 모르는 게 아닐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화가 오후 7시 끝났다. 드넓은 과학의 산실에 장막처럼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일행과 근처 낙지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순재는 "우리 KIST 주변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라고 했다. 그에게 KIST는 인생의 전부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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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Why]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한옥 프런티어' 안영환

    • 입력 : 2010.06.12 02:56 / 수정 : 2010.06.12 08:26
    삐그덕 소리나는 문을 열자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 마시고 기왓장 너머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질반질한 기둥에 기대 한옥 내음을 맡는다. 외국인 사로잡은 락고재의 안 영환은 "가슴이 짜릿해진다"고 말했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허허허, 들어와 보세요"
    이 집에서 하룻밤 자려고 사람들이 줄을 선다는데…

    외국인들이 말했다… "한국문화 정체성이 뭐냐… 규모는 중국이 크고… 디테일은 일본에 밀린다"… 그가 말했다… "한옥에서 한번 자보라"…

    일제시대 진단학회 있던 자리… 네 채를 합쳐 '락고재' 지어… '진사댁' 한정식… '제주 물항' 고등어ㆍ갈치… 밥장사해 번 돈으로 한옥 사랑…

    "한옥에 완벽한 설계도는 없어… 80% 주인 안목, 20% 목수 솜씨"

    어떤 사람이 한옥 헐고 빌라 짓는데… 나한테 자문을 해달래… 가서 보니 허물기는 그렇고 수리를 하는데… 숨어있던 한옥의 선이… 그 아름다움에 반해버렸지…

    #1.락고재

    종로구 계동 뒷골목에 한옥 한 채가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대금(大琴) 가락이 객(客)을 맞았다. 방 네 칸에 정자(亭子) 하나, 한복판에 한 그루 소나무가 굽어 있는데 모습이 영락없는 거북이 등껍데기이다. 200평 공간. 청아하기 그지없다.

    '락고재(樂古齋)', 이 집의 이름이다. '옛것을 즐긴다'는 뜻이다. 이 터의 주인은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였다. 거기서 문일평, 최현배 같은 우리 선비들이 일제에 맞서 '한국학'을 지키려 했다. 1934년 발족한 진단학회(震檀學會)다.

    그 집에 일본인들이 줄서 있다. 하루 자는 데 20만원 가까운 돈을 기꺼이 지불할 태세다. 터와 인연 맺은 주인이 말했다. "한옥을 보면 가슴이 짜릿해지지요. 온돌에 누우면 '시원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우리 문화유전자지요."

    #2.진사댁(進士宅)

    명동파출소 옆 골목은 어른 셋 지나기도 비좁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하고 목울대가 울린다. 기와지붕이 맞은편 건물과 닿을 듯 하늘로 솟아있다. 에게해 어느 절벽에 매달린 수도원처럼 기이한 풍경이 좁은 골목 안에 있다.

    이 자리엔 낡은 건물이 있었다. 70년도 넘어 전선이 안에서 얽히고설켜 있었다. 거기서 불이 났다. 음식 만들던 아주머니는 집을 잿더미로 만든 뒤 우울증까지 앓았다고 한다. 그는 불난 집에 대운(大運) 터진다는 말을 알았을까.

    "이왕 다 타버린 거 한옥을 만들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자재며 기와를 전부 몸으로 실어날랐어요. 그래도 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명동 한가운데, 이런 골목에도 한옥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요, 하하하!"

    #3.안동 부용대 옆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95번지를 몇 시간째 돌던 나그네가 있었다. 돈깨나 있어 뵈는 그는 과연 서울 강남에 빌딩만 여덟채를 가진 이였다. 그가 말했다. "이런 명당이 있다니. 도대체 어떤 이가 주인인지 얼굴 좀 보고 싶소."

    안동 락고재 맞은편 부용대는 해발 64m다. 언뜻 뒷동산 같지만 어엿한 태백줄기 자락이다. 정상에 오르면 태극 모양으로 하회마을을 휘도는 낙동강 줄기가 보인다. 그 뒤로 하회(河回)마을을 보호하고 있다는 만송정 솔숲이 짙다.

    거기 네채의 초가가 세워졌다. 초가 안에는 편백나무 욕조가 있다. 거기 몸을 적시며 휘영청 밝은 달을 보다 외국인들은 운다. 조선 선비들의 품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초가집 주인이 또 큰소리쳤다. "그게 우리 풍류(風流)지요."

    인생 전사(前史)

    안영환(安永桓·53)은 영락없는 '밥 장수'다. 마포·명동·선릉에서 한정식집 '진사댁(進士宅)'을 한다. 목동·명동·여의도에선 '제주미항'이란 고등어·갈치 전문점도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을 '한옥(韓屋)예술가'라 했다.

    '몽중(夢中)', 그의 호(號)다. '꿈속에 있다'는 뜻일 것이다. 호로 그의 팔자(八字)를 풀어보면 초년운(初年運)은 악몽이었을 것이다. 서울교대부국 나와 K중에 가려 했지만 나라가 정책을 바꿔 그를 '뺑뺑이 1세대'로 만들었다.

    K고에 두 번 도전했다 다 낙방했다. 2차 명문(名門) 대광고에 진학했더니 이번엔 원치 않는 종교 문제로 말썽에 휘말렸다. "종교자유를 외치다 흠씬 두들겨맞았어요. 후배 중에 강모라고 있었죠? 사실 제가 그 친구의 원조였습니다."

    남에게 맡기고 손 놓기보다는 주인이 나서서 움직여야 제대로 돌아간다.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얘기다. 제주도에서 새벽에 고등어 공수하던 '극성 음식점 주인' 안영환은 목수 사서 직접 한옥을 지어 올렸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입학 때 전교 20~30등쯤 하던 성적이 내리 비탈길을 탔다. 고3 때 반(班) 성적을 돌아보니 뒤에 야구특기생 두 명밖에 없었다. 뒤늦게 정신 차려 공부했지만 다시 서울대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모두가 의욕상실 때문이었다.

    겨우 힘내 나라에서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번엔 호메이니가 혁명을 일으켰다. 팔레비왕(王)은 호메이니에게 쫓겨났고 장학금은 그의 품에서 날아갔다. 그 뒤 안영환은 테니스로 소일했다.

    군 복무 하던 어느 날 광화문 외국어학원에서 만나 사귀던 지금의 아내가 선언했다. "나, 미국 이민 가야 해. 부모님 따라서. 같이 갈래, 헤어질래?" 제대 후 가보니 아내는 캘리포니아주립대 3학년 과정에 남편을 편입시켜 놓고 있었다.

    전공이 듣도 보도 못한 '컴퓨터 사이언스'였다. 한국에서 팽팽 놀던 사나이가 된통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것도 미국 땅에서였다. 그가 말했다. "왜, 수석들은 예습·복습만 한다잖아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거 맞는 말이던데요."

    아침 7시 도서관에서 2시간 예습했다. 10%가 이해됐다. 교수 강의 들으면 80~90%가 머리에 들어왔다. 다시 교수 방 찾아 1~2시간 이야기하니 그제야 하루 배운 게 자기 것이 됐다. 졸업 때 그는 난생처음 수석(首席)이란 걸 해봤다.

    1985년부터 91년까지 그는 EDS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했다. 거기서 두 가지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수습에서 정사원 되는 데 3년 걸리던 것을 8개월 만에 해치웠다. 월 2000달러 하던 연봉을 2년 6개월 만에 '더블'로 만들었다.

    그때 아버지가 2남3녀의 장남을 한국으로 불렀다. 그 호출이 없었다면 안영환은 평생 모기지론 갚다 인생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라고 했다. 은행원 출신 아버지는 아들에게 명령했다. "부동산 시행업을 하는데 와서 도와. 빨리 와!"

    진사댁

    ―그래 한국에 들어와 뭘 했습니까.

    "선친을 도와 경기도 광명과 목동에 상가 세 채를 지었습니다. 분양이 다 잘됐는데 꼭 안 팔리는 곳은 있지요."

    ―미국에서 그냥 번듯한 직장 그냥 다니지.

    "선배들 보며 회의를 느꼈어요. 모기지론 갚고 그럭저럭 살다 퇴직하는. 20년 후 제 모습이 저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즈음 한옥과의 인연이 생겼어요."

    ―어떻게요.

    "한옥 헐고 빌라를 지으려는 이가 자문을 해달래요. 마포구 대흥동이었어요. 사람도 살지 않고 팔리지도 않아 토초세(土超稅)만 무는 애물단지였어요. 아무리 봐도 빌라 지을 자리는 아닌 것 같았어요. '그냥 수리해서 한정식집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요.

    "주인이 '난 자신 없으니 당신이 해보라'는 겁니다. 뭐에 씌었는지 그냥 맡았어요. 수리를 시작했지요. 콘셉트를 노출(露出)로 잡고 천장 뜯고 시멘트 발라놓은 것 뜯어냈지요. 아! 그런데 그제야 숨었던 한옥의 선(線)이 살아나는 겁니다. 그 모습이란…."

    ―한옥이 다 그런 거 아닌가요.

    "보통 집이 아니었습니다. 마포 황부자 아시죠? 그가 살던 집이었어요. 상량문(上樑文)엔 광서 6년이란 글귀도 보이고."

    ―거기가 원조 진사댁이지요? 이름은 왜….

    "락고재와 진사댁이란 택호(宅號)에 유래가 있어요. 락고재는 선친께서 '학고재'를 봤다며 권한 이름입니다. 어찌 보면 표절이지요. 아버님 위로 3대째 성균관 진사를 했습니다. 거기서 생긴 이름입니다."

    ―음식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데, 겁이 없나요.

    "처의 이모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음식점을 했어요. '우래옥'이라고…, 서울 우래옥과 동업하다 나중에 인수했지요. 제가 우래옥 전산관리 시스템을 만들어줬어요. 몇달 하다 보면 운영과 재고관리를 훤히 알게 되지요."

    ―그래서 잘 됐습니까.

    "된장찌개 파는 5000원짜리 밥집으로 시작했는데 하루 손님이 댓명도 안 될 때가 많았어요. 1년 반가량 정말 고전했어요."

    ―음식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던데요.

    "이유가 있어요. 주방장 아주머니가 아침에 밑반찬을 한꺼번에 해놔요. '손님이 올 때마다 해야 맛있을 텐데'라고 하니 음식점은 다 그렇대요. 간장게장도 너무 짰어요. '이게 아니다' 싶어 후임자를 물색하고 다녔지요."

    ―은인을 만났겠군요.

    "'왕 실장'이란 할머니가 있어요. 경기도 기흥에 손님들이 줄서 기다리는 집이 있었어요. 왕 실장이 거기서 일했는데 빚을 3000만~4000만원쯤 지고 있었어요. 월급 130만원 받아 주인에게 월 3부 이자 내니 어땠겠어요. 제가 모셔왔죠."

    ―대박입니까.

    "그때부터 손님이 몰렸어요. 각종 메뉴를 머리 싸매고 개발했으니까요. 간장게장도 짜지 않게 만들고. 손님이 많아지니 실내에서 가야금, 대금 연주도 하게 됐고요."

    제주미항

    황부잣집에서 열었던 원조 진사댁과의 인연은 6년 만에 끝났다. 어느 날 교회에 팔렸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집 팔겠다고 해 한참 흥정하던 참이었다. 안영환이 깜짝 놀라 쫓아갔지만 이미 계약이 끝나 있었다. 인연은 왔다 간다.

    ―진사댁 다음이 '제주 물항'이지요.

    "친척 동생이 제주도에서 고등어와 갈치를 팔았어요. 테이블이 8개뿐인데 수입은 월 300만~400만원이나 됐어요. '되겠다' 싶어 '서울에서 해보면 안 될까'라고 물으니 안 된대요."

    ―남 잘하는 걸 공짜로 하겠다니 싫다고 했겠군요.

    "고등어, 갈치는 금세 상한다고 생각했잖아요. 아무도 그걸 비행기로 공수(空輸)해 올 생각을 못한 겁니다. 운임(運賃)이 들어도 부가가치가 20~30%는 넘어보였어요. 동생을 석 달이나 설득했습니다. 매일 새벽 첫 비행기 편에 선어(鮮魚)를 부쳐주고 전 찾으러 다녔어요."

    ―정성이 대단합니다.

    "공항 직원들도 제가 이상하게 보였나 봐요. 사정을 안 뒤 편의를 많이 봐줬어요. 아침에 제주도에서 온 생선을 저녁에 서울서 먹는다는 게 특이해 보이잖아요. 언론에 여러 번 소개됐어요."

    ―그래도 생선은 조심스러울 텐데.

    "나중에 진사댁 한정식 코스에도 고등어와 갈치를 내놓았습니다. 그 전에 테스트를 했지요. 제가 한 달 동안 먹어봤어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왜 상호(商號)를 '제주미항(美港)'으로 바꿨나요.

    "그 부부가 이혼했거든요. 상호를 전처(前妻)가 가져간 거예요."

    ―진사댁과 제주미항이 잘될 때 차린 게 '한산기획'이란 회사지요.

    "처음부터 음식점 하며 평생 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사귄 친구들이 만나면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 문화의 정체성이 뭐냐? 규모는 중국이 크고 디테일은 일본에 밀린다'고요. 자존심 상했어요. 그래서 개발한 게 안동 고택(古宅)체험여행입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한옥에 묵으며 한국인의 정(情)과 풍류를 느끼게 해주자는 것이었어요. 지례예술촌, 경주 독락당, 병산서원, 봉정사를 코스로 잡았어요. 하회마을에 탤런트 류시원씨의 아버님 소유의 담연재가 있는데 거기도 이용했어요. 찜질방도 만들고 쑥뜸 체험도 하게 했습니다."

    ―한옥이 외국인이 살기엔 불편할 텐데.

    "직원들이 먼저 가 준비를 해놓지요. 플라스틱 집기, 포마이카 장롱, 철제 캐비닛을 싹 치운 뒤 가져간 사방탁자, 도자기, 놋수저, 방짜유기를 놓는 겁니다. 3만~4만원 하는 한옥 숙박업소는 이부자리도 지저분하잖아요. 전 풀 빳빳하게 먹인 비단금침으로 준비했어요. 해 뉘엿뉘엿 넘어가면 직원들이 미리 설치해놓은 가짜 달(月)이 뜹니다. 그때 개다리소반에 음식을…."

    ―가짜 달?

    "그거 그럴듯해요. 음식이야 진사댁이 있으니까. 봉정사에 들러 발우공양도 체험하게 하고. 그런 경험 하면 우는 외국인들이 많아요. 특히 일본인들이요. '20년간 한국에 와봤지만 오늘만큼 한국을 이해하게 된 날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때의 전 드라마 PD나 영화감독이었어요."

    ―외국인들이 다 고택체험을 좋아합니까.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미국·유럽인들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중국인들이 달라요. 워낙 크고 화려한 걸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한옥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화장실일 텐데.

    "그건 어쩔 수 없지요. 화장실까지 들고 갈 순 없으니까요. 고택의 문제점이 또 있어요. 워낙 제사를 많이 지내니 갑자기 집을 비워줄 수 없는 경우도 생기거든요."

    진단학회

    그때 종로구 계동 98번지 한옥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학자 이병도가 내놓은 집을 이대 교수가 소유하고 있었다. 주인이 내놓은 집이 잘 팔리지 않아 공시가격 근처까지 값이 떨어져 있었다. 안영환은 당일로 계약했다.

    ―고택체험여행으로 돈 좀 벌었습니까.

    "1인당 30만원쯤 받았는데 한번 하고 나면 100만원씩 적자가 생겼어요. 후회는 없었어요. 한정식 팔고 고등어·갈치 판 돈이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오기가 생겼어요. 내가 꼭 한옥으로 상업적 성공도 이뤄보겠다고. 문화도 돈이 되지 않으면 지속되지 않잖아요."

    ―락고재엔 진단학회 원형이 어느 정도 보존돼 있나요.

    "기와가 많이 깨졌고 부자재들도 썩어 있었습니다. 1년 반 공사했습니다. 원형은 될 수 있는 대로 살리려 했어요."

    ―집 지으며 목수를 세 명이나 바꿨다면서요.

    "처음엔 동네 목수를 썼어요. 아무리 봐도 '아니다'싶더군요. '집 지어본 적이 있느냐' 물었더니 서까래 고친 적은 있대요. 석 달 만에 바꿨죠. 두 번째는 문화재쪽 인사를 통해 소개받은 젊은이였는데 6개월 만에 본인이 포기했어요."

    ―왜요?

    "자신이 없었대요. 마지막에 대목장 정영진씨에게 맡겼습니다. 그분이 한숨을 푹 쉬더군요. '아니! 그놈이 왜 이런 짓을 하고 갔어'라고. 사연 많은 집입니다. 한옥은 잘못 지어지면 뜯어내고 다시 짓는 게 나아요. 돈 몇푼 아끼려다 잘못된 건물 보고 살면 괴롭잖아요."

    ―원래 한 채였나요.

    "네 채를 사서 합친 겁니다. 락고재 밖에 주차장이 있지요? 그 땅도 산 겁니다. 그게 없었으면 맹지(盲地) 비슷하게 됐을 겁니다."

    ―마당의 저 소나무가 근사합니다.

    "저건 C급인데…. 진짜 좋은 건 거북이 등껍질하고 똑같아야 하거든요."

    ―제 눈에 저 소나무도 거북이 등껍질처럼 보이는데.

    "제가 10년 전부터 소나무를 사모으고 있거든요. 한 150그루 돼요. 건물에 10억 들어간 집과 건물에 5억, 조경에 5억 들어간 집, 어느 게 나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조경에 돈 들어간 집이 좋아요. 전 조경에 무척 신경씁니다."

    ―두 번째 한옥이 명동 진사댁이지요.

    "그 건물은 대지 90평에 건평이 50평쯤 됩니다. 원래 제 선친과 다른 한 분이 공동 등기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사려 하겠어요. 4~5년째 안 팔리다 2000년 초엔 가격이 공시지가 근처였어요."

    ―듣고 보니 부동산 투자의 귀재네요.

    "그 건물에 불이 났어요. 식당 아주머니가 뭘 튀기다 불이 옮겨 붙은 겁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지요."

    ―그 아주머니도 아주 놀랐겠습니다.

    "전 괜찮다고 했는데 본인이 오히려 괴로워했지요. 쾌활하던 사람이 우울증까지 걸리고.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그 집을 제가 목수를 사서 직접 지었습니다. 2층은 건물 안에, 3층은 외부에 목조 한옥을 올렸지요. 한옥으로 만든 후 예약이 꽉꽉 차요. 제가 한옥으로 돈 버는 법 보여주겠다고 했죠? 그때 실천했어요."

    ―설계를 해본 적이 없을 텐데 한옥을 직접 짓다니.

    "한옥은 완벽한 설계도가 나올 수 없어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80%는 주인의 안목이고 20%는 목수 솜씨라고."

    명문의 조건

    안영환은 한자를 '榮煥'에서 '永桓'으로 바꿨다. 3년쯤 됐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사주에 불(火)이 많아 그리 했는데 과연 마음이 편해지고 여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환풍류문화원'의 환(桓)은 한(韓)과 비슷한 의미다.

    ―그리고 세 번째가 안동 락고재지요. 거긴 왜 기와가 아니라 초가로 지은 겁니까.

    "초가로 하면 귀찮은 일이 많긴 해요. 특수벼를 써야 하고 벼 벨 때도 손으로 베야 합니다. 기계로 자르면 길이가 짧아지거든요. 2인1실이 25만원(1인당 12만5000원), 1인1실은 18만원 받습니다. 아침과 저녁 식사를 제공합니다. 백김치, 갈치나 옥돔구이, 성게미역국에 짜지 않은 간장게장, 모듬전이 제공되고요, 아침은 고등어구이에 전복죽이나 콘티넨탈 브렉퍼스트 중에 택일하도록 합니다."

    ―자꾸 간장게장, 간장게장 하는데 혹시 간장게장에 한 맺힌 게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옛날에 너무 짠 기억 때문에."

    ―안동은 유림(儒林)들이 많지요. 보수적일 텐데.

    "땅 나왔다는 소릴 듣고 곧바로 내려가 계약했어요. 그 후 주변 종가(宗家) 어른들을 찾아뵀지요. 하회마을에 풍산 유씨가 많지만 전에는 광주 안씨도 살았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니 선선히 허락해주셨어요. 전 하회 락고재 지은 후에 주민등록을 아예 안동으로 옮겼습니다. 하회 락고재는 하회마을 안에 있고 밖에 또 한옥호텔도 지을 겁니다."

    ―경기도 용인에도 지금 뭔가를 짓고 있지요.

    "백남준 미술관 옆에 경회루 같은 누각(樓閣)을 짓고 있습니다. 누각은 통풍이 잘못되면 강풍에 휘청거리거나 아예 무너져요. 그래서 몇백명이 올라가도 버틸 신공법을 채용했어요. 통유리를 설치하되 접이식으로 통풍도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달 말에 오픈합니다."

    ―이름이 특이하더군요.

    "운외몽중루(雲外夢中樓)라고, 추사 김정희 선생 친구가 금강산에 여행 갔다 그 풍광에 감탄해 지은 시구인데 추사가 문집명을 '운외몽중'으로 지었습니다. 거기서 유래한 겁니다."

    ―환풍류문화원은 왜 만들었습니까.

    "락고재의 서브 타이틀이 환풍류문화원입니다. 음식, 음주, 음악, 시, 서, 화, 문학을 즐길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전 오래전부터 외국관광객들이 갈비나 뜯고 룸살롱이나 가는 걸 굉장히 못마땅해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것 갖고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북촌 한옥마을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잖아요. 평당 800만~1000만원인데 그래선 한옥 대중화가 안 돼요. 평당 450만~500만원으로 낮춰야 하는데, 6·25 이후 60년간 우리 한옥은 사라지고 아파트만 잔뜩 들어섰잖아요. 한옥이 완전히 단절된 거지요. 제가 한옥학교를 만들려 합니다. 부지도 마련했어요. 안동의 고등공민학교 자리 8000평입니다."

    ―목수 양성소인가요.

    "내년 봄부터 1기당 20명씩을 배출할 겁니다. 그 친구들 활용해 전국의 한옥 짓는 거 지원도 하고, 일자리도 알선해주면 일석이조지요. 3년 정도 인력을 배출하면 대단한 자산이 될 겁니다."

    ―원래 그렇게 거침없이 일을 벌입니까.

    "지금까진 약과예요. 락고재를 하면서 다미야라는 일본 출판인을 알게 됐어요. 그분이 '지구여행시리즈'를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일본 교토(京都) 부근에 '락고재 재팬'을 지을 계획입니다. 왜 우리만 일본 전통 료칸에 가서 돈을 써야 합니까. 그들도 우리 한옥에서 자고 찜질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혹시 일본의 노(能) 아세요?"

    ―가면극의 일종 아닌가요.

    "가부키가 대중적이라면 노는 옛 일본 쇼군(將軍)이 장수들에게만 보여주는 공연입니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난(亂)'이란 영화에도 나와요. 이런 식이에요. '둥' 하는 소리에 맞춰 꽃을 턱 꽂는. 그걸 보며 감탄했는데 저도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도 일본 땅에서."

    ―업무상 알게 된 일본인과 그런 사업까지 하다니 남을 잘 믿는 모양입니다.

    "다미야의 부친이 유명한 컬렉터입니다. 그분이 사는 곳이 일본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요지(陶窯址)이기도 하고요. 그 컬렉션을 지하에 보관하고 위에 한옥호텔로 지으면 일석이조지요. 그분들이 더 열심입니다."

    안영환은 락고재 정자 위에서 막걸리를 나누는 게 최상의 대접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호박전과 생선전 3점에 장독뚜껑 같은 그릇에 얼음 동동 띄운 막걸리를 내오니 그야말로 박주산채(薄酒山菜)다. 그가 한잔 들이켠 뒤 말했다.

    "아들과 명문가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런 약속을 했어요. 부모에게 받은 재산의 절반은 무조건 사회에 환원한다고. 그 전통이 3~4대쯤 내려가면 명문가가 될 텐데. 모르죠, 중간이 또라이가 나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텐데…."

    조선닷컴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칼럼, 인터뷰2010.05.15 20:04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베르나르 베르베르

    • 입력 : 2010.05.15 03:05 / 수정 : 2010.05.15 11:25

    창의력? 어젯밤 꾼 꿈을 아침에 메모하라
    개미·나무·뇌·신… 그가 썼다 하면 베스트셀러
    하루 한편 쓰기도 한다는데 그 상상력은 어디서
    "5살 때 어린이신문 읽고 과학에 관심"…"써놓은 단편소설 500편"

    서울 평창동에 있는 출판사 '열린책들' 사옥(社屋)은 특이했다. 앞은 비탈, 뒤는 꽃 만발한 북한산 자락이다. 그 공간을 기하학적 건물 두채가 좌우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작년 5월 완공됐는데 면적 380평, 건평 450평이라 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49)를 국내에 소개한 게 홍지웅 '열린책들' 대표다. 13종 27권을 냈고 판매량이 600만부 가깝다. "베르베르가 벌어준 돈으로 지은 것 같다"고 했더니 그가 픽하고 웃었다. "꼭 그렇진 않지만…."

    녹음기 2대, 볼펜 네 자루, 노트 2권에 돋보기를 꺼내고 있을 때 베르베르가 나타났다. 가는 줄무늬 들어간 청색 셔츠 차림이다. 가나아트센터를 구경하고 돌아왔다는 그는 "잠을 못 자 눈이 아프니 플래시를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베르베르의 방한(訪韓)은 이번이 여섯 번째다. 새 소설 '파라다이스'는 17개의 단편이면서도 하나의 고리처럼 맞물리는 소설이다. 환경파괴범은 모조리 사형시키고 남자는 멸종하는 '있을 법한' 미래와 과거가 소설을 관통하고 있다.

    베르베르는“모범생도 아니고 지능이 높지도 않지만 상상력을 키우며 살아왔다”고 했다. 어릴 적 만화신문을 만들고 이야기에 맞는 향수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셰익스피어와 히치콕

    ―베르베르가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헤르만 헤세와 함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작가'로 선정됐더군요.

    "그런가요? 처음 글을 쓴 1990년대 초에 프랑스엔 노(老)작가들이 많았어요.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물어보니 '젊은이들이 TV 보느라 책을 읽지 않는다'며 제게 '노인들을 겨냥한 글을 쓰라'고 했어요. 그럼에도 전 젊은이들을 위한 글을 썼습니다. 아직도 프랑스엔 나이 많은 작가와 독자가 많지요. 한국에선 젊은이들이 책을 많이 읽습니다. 글 쓰면서 젊은이들이 책을 읽게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목적이 달성된 것 같아 기쁜데요."

    ―당신과 비교된 작가 가운데 누굴 좋아합니까.

    "셰익스피어요. 제가 심리학적 묘사에 관심이 많아요. 셰익스피어의 심리학은 대단합니다."

    ―툴루즈대에서 법학과 범죄학을 전공했지요.

    "전공하긴 했지만 법학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법학은 '남을 유혹하는 것과 속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어요. 변호사들은 섭섭해하겠지만 전 그 직업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변호사는 법을 알고 아주 좋은 변호사는 판사를 안다'는 프랑스 속담이 있습니다. 법학에 대한 실망 때문에 범죄학(犯罪學)을 했습니다. 거기서 스릴러 기법을 배웠지요."

    ―작품 중에 스릴러가 있나요?, 전 기억이 없는데.

    "왜요, '아버지들의 아버지'와 '뇌(腦)'가 스릴러기법으로 쓴 겁니다."

    ―그 책들을 읽어봤지만…, 스릴러로 느껴지지 않던데.

    "전 스릴러에 폭력이 들어가는 걸 혐오해요. 요즘 유행하고 있긴 하지만요. 소설 속에 사디즘(Sadism)이 들어가거나 피가 튀는 것도 배제합니다. 그건 문학에서 존경할 만한 요소가 아니지요. 전 서스펜스적으로 쓰고 싶어요. 히치콕 감독처럼."

    ―앨프리드 히치콕? 그의 작품과 당신 소설은 꽤 거리가 있어보이는데.

    "물론 그럴겁니다. 전 제 책을 읽은 독자가 '살고 싶다'고 생각하길 원합니다. 삶을 파괴하면…, 끔찍하지요. 작가는 독자들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에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제스처를 보인 뒤) 독자들이 지금의 저 같은 표정으로 책 읽는 걸 바라진 않습니다. 책에는 오락과 즐거움이 들어있어야지요."

    ―얘기나온 김에 묻겠습니다만, 베르베르의 소설엔 성적(性的)인 요소도 없더군요. 섹스를 혐오합니까?

    "그럴 리가요, 저도 인간인데. 소설 '뇌'의 마지막 20페이지가 전부 섹스에 관련된 내용인데 안 읽어보셨어요?"

    ―섹스라기보다는 과학에 가깝던데…성적인 내용이 나오면 독자들의 몸이 후끈 달아올라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섹스에 대해 다른 작가들이 이미 풀어나간 방식이 있습니다. 그걸 답습하기 싫어요. 저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야지요. 요즘 작품엔 성적인 요소가 그전보다 많이 등장합니다. '카산드라의 거울' 같은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과거의 인터뷰를 보니 '한국 여성들이 프랑스 여성보다 훨씬 상냥하고 아름답다, 다리도 예쁘다'고 했습니다. 진심인가요.

    "다리는 아니고 얼굴은 맞습니다. 여성에겐 두 부류가 있어요. 곁에 있기만 해도 에너지를 주는 여성과 피곤해지는 여성이지요."

    ―혹시 프랑스 여성 독자들이 한국에서 한 인터뷰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 한 말은 아닙니까.

    "전 8살 때부터 아시아 여성에게 관심을 가졌어요. 한국여성 2명과 사귄 적도 있어요. 한 여성은 한국에서 만나 프랑스 파리까지 왔는데 다시 서울로 돌아갔지요."

    ―그분들을 혹시 동시에?

    "오우, 그럴 리가! 2년의 시차(時差)가 있어요."


    에드거 앨런 포와 필립 K 딕

    베르베르의 삶에서 '8세'는 중요한 시기다. 그때 그는 아시아 여성에 관심을 가졌고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는 만화신문 '유포리'를 펴냈고 올더스 헉슬리와 허버트 조지 엘즈의 영향으로 과학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18세 때 지금의 그를 만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개미'를 쓰기 시작했다. 툴루즈대를 마친 후 국립언론학교에 입학해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베르베르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지에서 과학부기자로 7년 동안을 일했다.

    ―8살 때 아시아 여성에 눈을 돌렸다니 퍽 조숙합니다.

    "섹슈얼한 걸 느낀 게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낀 겁니다. 그때가 제겐 고독한 시간이었어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거든요. 선생님들은 항상 제게 뭔가를 외우라고 했어요. 제 뇌의 용량은 그리 크지 않아요. 그 걱정을 잊기 위해 시작한 게 글쓰기입니다."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데는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소설 '파라다이스'가 바로 포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겁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황금벌레'와 '모르그가(家)의 살인'을 가장 좋아합니다."

    ―포의 작품은 대개 음울한데 베르베르의 작품은 밝지 않나요.

    "제가 영향받은 건 분위기가 아니고 '좋은 스토리는 게임과 같다'는 것이었어요. 포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 사람같이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베르베르에게 영향을 끼친 네 명의 작가가 있더군요. 에드거 앨런 포, 헉슬리, 웰즈, '블레이드 러너'를 쓴 필립 K 딕.

    "포 다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필립 K 딕입니다. 문학세계에서 큰 쇼크라고 할까, 포에게 받은 것 같은 충격을 그에게 느꼈어요. 딕은 영적(靈的)인 점을 일깨워준 아버지 같은 존재지요."

    ―얼마나 대단한 작가이기에.

    "철학을 SF에 녹여 넣은 작가입니다. 그만의 독특한 게 있어요. 그의 책을 읽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으면 싱거우면서도 밋밋하고 결말까지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세기(世紀)를 대표하는 굉장한 작가지요."

    ―만화신문 발행은 또 뭔가요.

    "15세 때 세 명이 같이 만들었어요. 만화가가 2명 있었고 전 그래피스트이자 인쇄인 역할을 했지요. 80페이지쯤 됐는데 3년간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뿐 아니라 인근 고교 두 곳에서 팔았어요. 신문만 판 게 아닙니다. 향수(香水)도 직접 제조했어요."

    ―향수?

    "스토리에 걸맞은 향수를 만드는 건데, 예를 들면 이래요. 배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면 나무향에 해초(海草)향을 섞고 숲이나 대지(大地)에 관한 스토리면 거기 맞는 향을 내는 거지요. 그래서 향수면서 안 좋은 냄새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신문도 팔고 향수도 팔았으면 어릴 적부터 돈깨나 만져봤겠습니다.

    "신문은 잘 팔렸지만 투자금액을 뽑진 못했어요. 오히려 손해를 봤지요."

    ―우리나라 고교생이 그런 짓을 한다면 부모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텐데.

    "왜요? 전 오히려 부모님의 지지를 받았는데. 몇몇 선생님들은 제 만화신문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고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대학에 들어간 걸 보면 머리가 굉장히 좋은 모양입니다.

    "공부는 잘 못했어요. 법대 1학년 때 유급당하기도 했는데요. 그때 히치콕의 작품을 연출하는 극단(劇團)을 만들었지요. 법학은 관심 밖이었거든요."


    과학과 동양철학

    그는 기자가 된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엔 글 쓰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그 두 가질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 기자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에게 프랑스언론에 대해 묻자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들어가 보니 기자들이 하나같이 자리에서 떠날 생각을 안 해요. 한마디로 게으른 거죠. 다른 기자가 쓴 기사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살짝 고쳐 내보내기도 하고. 그래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더군요. 비판도 안 하고."

    ―프랑스 신문이 그 정도입니까.

    "그 신문 자체는 좌파(左派)성향이었어요. 그런데 일하는 기자들은 하나같이 우파(右派)였지요. 투표 때도 항상 우파 후보만 뽑아요. 그러다 기사 쓸 때는 좌파적으로 쓰지요. 전 모든 신문은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어요."

    ―허!

    "한 선배가 취직하자마자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기자이면서 행복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 술과 담배에 의존할 수밖에요."

    ―프랑스 기자들도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삽니까?

    "불 꺼진 사무실을 걷는데 뭔가 물컹하고 밟혔어요. 편집장이 술에 취해 바닥에서 자고 있었던 겁니다. 척추 뼈 없는 달팽이처럼 못 일어나고 비틀거리면서도 이러더군요. '너 만나서 반가운데 마감은 했겠지?' 그 프로정신만은 사줄 만 했지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가 프랑스에서 진지한 신문으로 알려졌지만 그런 일들이 사무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거예요. 이런 말이 있지요? '좋은 레스토랑이 있다, 하지만 주방에는 들어가지 말라'."

    ―과학부기자로 있으면서 개미를 비롯해 우주정복이나 인공지능에 관한 기사를 썼지요. 1983년과 1990년엔 상(賞)도 받았고요. 과학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다섯 살 때부터 만화로 된 어린이 신문을 읽었습니다. 매주 어린이 발명왕을 선발하는데 그 기사를 읽는 게 제겐 큰 이벤트와 같았어요. 그때부터 과학과 만화와 신문기사에 관심을 가진 거지요. 프랑스 신문도 사은품을 같은 걸 줍니다. 장난감 같은 건데, 그걸 가지고 놀면서 과학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 겁니다."

    ―베르베르의 소설에 나오는 모든 과학이 다 진실입니까.

    "시작은 반드시 사실(事實)로 하지요. '뇌'는 미디안 도블레인 벤더라는 인물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과학지식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카메라를 어떤 위치와 각도에 놓느냐에 따라 피사체가 달리 비치지요?"

    ―베르베르의 소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개미는 땅바닥에서 하늘을 보고 신(神)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고. 그 중간엔 사람이 있고요.

    "정확하게 보신 겁니다."

    ―그러면서도 명상(瞑想·'여행의 책'), 영계(靈界·'타나토노트'), 진화('아버지들의 아버지'), 천사('천사들의 제국'), 우주('파피용')처럼 동양적 요소가 많던데.

    "13살 때 친구 덕분에 동양의 정신세계를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태극권, 요가, 선(禪)을 해왔고 티베트 불교를 알게 됐습니다."

    ―동양철학 예찬론자가 됐군요.

    "나중엔 호흡법도 배웠어요. 뇌를 조절하고 심장박동의 완급(緩急)도 바꿀 수 있게 됐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일출(日出)을 보며 자연을 느끼는 습관도 그때 생겼어요."

    ―그렇게 관심이 다양하면 지능이 높을 텐데, IQ가 얼맙니까.

    "한 번도 IQ 검사를 받은 적이 없어요. 테스트해서 만족스럽지 못한 점수를 받으면 불행해질까 봐요. 지능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능좋은 고급차를 사는 것보다 그 차가 잘 굴러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인간의 능력엔 세 가지가 있어요."

    ―뭔가요.

    "기억력, 적응력, 상상력입니다. 전 상상력을 발달시켰어요. 학교에서 모범생도 아니고 지능이 높지도 않지만 상상력을 발달시키면 자기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란 방대한 책을 보면 기억력도 비상한 것 같은데.

    "그건 기억하고 싶은 걸 메모해놓은 것에 불과해요. 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컴퓨터 속 백과사전에 입력시킵니다. 그 후엔 머릿속에서 지우죠. 나중엔 이런 일도 생겨요. '백과사전에 입력을 했나 안 했나'하고 기억이 안 나는 거죠."

    렌즈를 들이대자 베르베르가 태극권 포즈를 취했다. 닭싸움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손을 이리저리 휙휙 돌렸다. 베르베르는 명상·선·요가·불교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는 작가다. 한국에 대해서도‘직관’적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한국과 러시아

    ―언젠가 한국을 '연구소' 같은 나라라고 표현했지요. 산업국가이면서도 과학에 투자한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새롭고 싱싱한 나라라는 게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한국은 외부로부터 정치적 압력을 받고 어두운 과거도 갖고 있지요. 그러기에 현대의 한국은 새로운 길을 창출해낼 수밖에 없어요. 특히 한국 젊은이들은 나라를 새롭게 바꾸려는 욕구가 있지요. 하지만 문제점은 있어요."

    ―문제점?

    "젊은이들을 틀에 맞추려는 거지요. 대입(大入)제도를 보면 한국의 경제시스템에 맞는 인재를 키워내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창의력이 없어집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모두가 똑같아진다면 나중에 큰 책임을 지는 자리에서 개인적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거든요. 물론 일본 같은 나라는 사회의 압력에 사람들이 숨 막혀 하긴 하지만요. 한국의 젊은이들이 실업이나 경쟁, 상사(上司)의 압박을 이겨내야 비로소 자유를 획득할 겁니다."

    ―어찌 그리 한국 사회를 잘 압니까.

    "전 한국에서 유명 장소나 박물관은 가지 않아요. 한 나라를 파악하는 건 직관(直觀)으로도 알 수 있어요. 작년에 고대생(高大生)들과 대화했을 때도 그들의 에너지를 느끼면서 한국사회의 숨겨진 면을 발견했거든요."

    ―최근 한국에서 프랑스가 화제가 된 사례가 두 가지입니다.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의궤(儀軌)반환 문제와 몇 년 전 서울 서래마을에서 있었던 영아 냉동고사건. 혹시 그걸 소설로 써볼 생각은 없습니까.

    "의궤가 약탈한 것이라면 프랑스가 한국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아 냉동고 사건은, 흐음…, 전 웬만해서는 이미 뉴스가 된 것은 소설로 쓰지 않습니다."

    ―베르베르의 독자가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과 러시아라는데, 그럼 러시아도 싱싱한 나라인가요.

    "그렇습니다. 다만 두 나라를 비교하자면 한국은 과거에서 훨씬 더 벗어나 있습니다. 러시아는 아직도 중세풍습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국가원수에 대한 숭배도 강하고 폭력도 남아있지요."(이때부터 베르베르는 눈이 부신듯 아예 실내조명을 다 끄자고 제안했다.)

    ―한국음식도 좋아합니까.

    "김치요. 파리에서 한국음식점에 자주 들릅니다. 갈비나 불고기는 안 좋아합니다. 한국에는 프랑스에 없는 채소(나물)가 많은 것 같더군요."

    ―1년에 보통 소설 두 편을 쓴 뒤 하나만 발표하고 나머진 킬(Kill)시킨다는데.

    "완전히 킬 되는 것도 있고 살아나는 것도 있습니다. '카산드라의 거울' 같은 작품은 5년 전에 써놨던 겁니다. 물론 '개미'는 12년간 쓴 거지만."

    ―하루 한 편, 적어도 1주일에 한 편씩 단편소설을 쓴다면서요.

    "지금까지 써놓은 게 500편쯤 될 거예요. 그게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몰라요. 작가는 꿀벌이 꿀을 모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꿀을 어떻게 쓸지는 출판사가 결정하는 거지요."

    ―아침 8시부터 4시간 반 동안 글을 쓴다는데, 나머지 시간엔 뭘 합니까.

    "요즘에는 오후에도 2시간 더 글을 씁니다. 점심식사는 주로 과학자나 철학자들과 함께 하고요. 매일 DVD로 영화 한 편씩을 꼭 봅니다. 영화를 볼 때는 꼭 실내 사이클을 타지요."

    ―소설을 써놓고 출판사와 계약을 합니까, 그 반대입니까.

    "집필을 끝내고 계약합니다. 올해 10월쯤에 끝내는 소설이 있는데 아직 계약하지 못했어요."


    꿈과 컴퓨터

    베르베르는 창의력을 강조한다. 창의력을 키우는 비법으로 그는 두 가지를 든다. 첫째가 규칙적인 생활, 두 번째가 '꿈(夢) 메모하기'다. 그는 꿈에서만큼은 자유롭다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밤 꾼 꿈을 기억나는 데까지 메모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기계 마니아'다. 사무실에 컴퓨터를 10대나 놔두고 있는데 용도가 다 다르다고 한다. 글은 제일 가벼운 맥북으로 쓰고 나머지는 사전용(辭典用), 인터넷 검색용, 프린트용 등으로 용도가 결정돼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번역하고 나면 원래 썼던 글과 달라지는 경우도 있겠지요.

    "제 책을 가장 정확히 번역하는 곳이 한국일 겁니다. 번역자가 연락해오는 곳이 한국밖에 없거든요. 최악은 일본이에요. 한번은 번역자가 허락도 없이 '개미'에 랭보의 시(詩)를 넣은 적도 있었어요. 알고 보니 여러 명이 번역을 했는데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이 랭보의 시를 넣으려 했다더군요. 그 때문에 일본에서의 출판을 포기하려 했을 정돕니다. 미국도 번역의 질이 낮아요."

    ―미국도?

    "스토리를 난도질해 모든 반전(反轉)과 갈등을 다 바꿔버린 겁니다. 제 소설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차라리 그러려면 직역(直譯)을 하라, 안 그러면 소송하겠다'고. 결국 직역을 했는데 이번엔 밋밋해지더군요."

    ―베르베르의 소설의 주제는 결국 인간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미래가 희망적입니까, 절망적입니까.

    "단기적으론 부정적이지만 장기적으론 긍정적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역사는 이런 식이에요. 처음엔 세 걸음 전진했다가 두 걸음 후퇴하는 식이지요. 주식의 변동 사이클과 같지만 앞으로 가긴 가잖아요."

    ―'인간은 생각할수록 미스터리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여자를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성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남자보다 더 강합니다. 감수성도 더 강하고요. 선사시대부터 음식을 만들기 위해 불(火)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일 겁니다. 반면 남자들은 사냥을 했으니 방향감각이 뛰어나고 전략적이지요. 여성은 주기적인 세계관, 남성은 선형적(線形的)인 세계관을 가졌지요. 그러니 상호보완적이지요."

    ―이혼했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까.

    "첫 아내와의 관계에서 터득한 것도 있긴 있지요. 이혼한 후 남녀의 심리적인 복잡미묘함을 알게 되기도 했고요. 남녀관계는 묘해요. 40년을 같이 살아도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부부도 있잖아요."

    ―몇년이나 함께 살았습니까.

    "1991년부터 98년까지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틀에 한 번씩 같이 삽니다."

    ―베르베르가 '돌싱(돌아온 싱글)'인 걸 알고 구애(求愛)하는 한국여자들이 있다면.

    "하하! 저 사귀는 사람 있어요. 프랑스 여자예요. 언제까지 사귈지는 모르지만요."

    ―프랑스에서 한국까지 오느라 48시간 동안 잠을 못 잤다는데 마지막 꿈이 기억납니까.

    "폭은 10m인데 깊이는 30~40m쯤 되는 풀에 빠져 뭔가를 찾는 꿈이었어요. 꿈속에서 '제가 찾겠다'고 했으면서도 속으론 못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꿈."

    ―혹시 해몽(解夢)을 압니까?

    "(그게 뭐냐고 물어 '꿈에 돼지를 보면 돈이 들어오는 징조 같은 것'이라고 말해주자) 꿈을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가 있겠어요? 서양에도 있긴 하지만."

    ―글을 쓰다 이렇게 취재 당할 땐 무슨 생각이 듭니까.

    "이렇게 긴 인터뷰(3시간)는 생전 처음엔데…(갑자기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잘 써주세요, 아니면 변호사를 보낼 겁니다!"

    48시간 잠을 자지 못했다는 그는 서울에 온 지 2시간 만에 3시간 동안 기자에게 말의 '고문'을 당했다. 그는 기자가 갖고 있던 '파라다이스'를 보며 "아직 제 책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사진촬영을 요청하자 명상 포즈며 태극권까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앞머리 없는 그가 태극권을 마친 뒤 가운데 머리가 텅 빈 기자에게 말했다. "저처럼 해보세요. 그럼 머리가 많이 날 거예요."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서비스/아트페어2010.05.01 11:20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권대섭, 조선 백자달항아리를 현대에 되살리다

    • 입력 : 2010.04.30 16:30

    "전 항상 말해요, 최고 작품은 다음 가마에서 나올거라고"
    "기이한 인연들이 이 달덩어리를 만들었습니다"
    圓形 가까운 작품 두 점 만들었는데 며칠 고민하다 술마시고 다 깨버렸다
    그냥 놔두면 다신 작업 못할거 같아서
    백자달항아리를 현대인들도 사랑하는건 우리 민족의 DNA때문
    흰색과 백색은 다른 색… 백자 색깔 들여다보면 그 다양함이 상상초월

    도공(陶工)의 집은 동양화를 품고 있었다. 검단(黔丹) 줄기 너머 봄빛 완연한 팔당호(八堂湖)가 찰랑댔고 그 뒤로 금사리(金沙里) 분원리(分院里)가 아른댔다. 조선 백자에 나오는 '분원산수'다. 그는 그 속에서 25년을 살아왔다.

    금사, 사기그릇 굽던 터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분원, 이름 모를 500여 조선 장인(匠人)의 넋이 잠자고 있다. 조금 떨어진 도마(陶馬), 사람 괴롭히는 여우의 혼(魂)을 억누르려 질(陶)로 만든 말(馬)을 고개에 세웠다 해 붙은 이름이다.

    이런 풍경 속에 사는 권대섭(權大燮·58)의 한옥 속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이 나왔다. 잘생긴 맏며느리 얼굴같이 생긴 달덩이 넷이 두둥실 떠올라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예술의 정화(精華)라 불리는 백자달항아리다.

    조선시대 반가(班家)에서 아꼈다는 백자달항아리는 큰 사발(大壺) 둘을 붙여 만든다. 우윳빛 유약(釉藥)이 달을 연상시킨다해 그리 불린다. 한민족 정신을 상징하지만 세상에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예인(藝人)들은 아쉬워했다.

    화가 김환기(金煥基)는 그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고유섭은 '무기교의 기교'라 했다. 최순우는 후덕(厚德)이라 했다. 영국인 버나드 리치가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을 가르쳐준다"며 가져간 백자달항아리는 지금 대영박물관에 있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기대는 10분도 안돼 틀어졌다. 도공이 하지 않은 말이 기자의 이마에 진땀이 돼 흘러나왔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그의 아내 김지영(55)이 나섰다. "으이구 답답해, 저 양반이 원래 저래요."

    복스러운 달항아리. 권대섭은“단순하고 소박하다는 얘기로는 달항아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권대섭은 여러 작품 만들지 않고, 완벽에 가까운 원형 항아리는 망치로 깨부숴가며 말간 백자에 신화를 담았다. 세상은 그 안에‘소우주’가 있다고 열광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신동

    권대섭은 초등학생 때 신동(神童)으로 소문났다. 전국 대회에서 상(賞)을 휩쓸었다. 국전(國展) 심사위원을 지내며 충남고 교사로 있던 이동훈이 스카우트할 정도였다. 권대섭은 모든 이들의 기대처럼 홍익대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군(軍) 복무 후 3학년에 복학할 즈음이었다. 인사동거리에서 그는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무심코 바라본 백자(白瓷)에 넋을 잃은 것이다. 몇 시간을 바라보던 그는 "이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람 팔자(八字)가 그렇게 바뀌었다.

    ―아무리 백자가 좋기로서니 십년 넘게 해온 그림을 버립니까.

    "미술을 할수록 입체(立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미술계에 대한 실망도 작용했어요. 제가 파벌 이런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지금도 도예가협회 같은 데 가입하지 않고 있거든요. 당시 미술계는 무슨 무슨 파벌(派閥)이다 하면서 자고 나면 싸움질만 벌였어요. 어차피 돈이 없어 학교도 못다닐 정도였어요. 대학은 4학년 때 그만뒀습니다. 그 뒤론 단 한 번도 미술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집안이 학비도 못 도와줄 정도로 가난했습니까.

    "제가 3남1녀의 둘쨉니다. 선친(권순용·2008년 작고)이 대전 삼광중학교를 세웠어요. 전 재산을 교육에 환원한 분입니다. 저희 보고는 '알아서 살라'고 하셨어요. 저희 아버님이 원래 그런 분이셨어요. 진로에 대해서도 '각자의 길을 가라'는 정도만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런 빈털터리가 도자기는 어떻게 배웠습니까.

    "군 복무 중 설원기라는 친구를 사귀었어요. 지금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면서 지금 한국예술영재교육원장을 맡고 있어요. 그의 아버님이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뒤 그레이하운드 사장, 대한여행사 사장을 지낸 설국환 선생님이었습니다. 제가 도예를 배우려할 그즈음, 설 선생께서 인테리어 회사를 만든 겁니다. 막다른 길 같아 보이지만 인생에는 꼭 빠져나올 길이 있어요."

    ―그 회사에 취직했군요.

    "1년 가까이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절 불러 '너, 도자기하겠다고 했다면서', 그 한마디로 다 결정이 된 겁니다. 인테리어 회사였지만 설 선생께서 도자기 사업에 관심이 많았어요. 경기도 용인에 시설을 만들었어요. '오원도자기'라고. 그런데 맨손으로 할 순 없잖아요."

    ―당연히 전문가가 필요하겠지요.

    "일본 규슈(九州) 이만리(伊万里)에 있는 나베시마요(鍋島窯)의 오가사와라 선생을 초빙한 겁니다. 그분께 절 소개해주면서 '잘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일본에서 5~6개월 배우다 잠깐 귀국하고 다시 일본에 가서 배우는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그곳에서 수학했다는데 바로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나베시마요는 도자기로 굉장히 유명한 곳입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 도공들이 끌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도예를 가르치면서 발전했다고 들었어요. 일본 나가사키항(港)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개항을 했잖아요. 그 루트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 도자기가 바로 우리 옛 선조들이 만든 거였어요. 제 스승인 오가사와라 선생이 7대(代)째인데 당시 40대였지만 광장히 혹독하게 가르쳤습니다."

    ―얼마나 엄격하기에.

    "첫 1~2년은 청소만 했어요. 지도랄 것도 없고 눈치껏 보고 배워야 합니다. 재료에 대한 소중함 같은 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만드는 거지요. 제 아내가 충남고 2년 후배인데 대입(大入) 준비를 하는 학원에 다니다 교제했어요. 8년 연애 끝에 1980년 12월 22일 결혼했는데 오가사와라 선생께서 '곧 돌아오라'고 했을 정도였어요. 결혼한 다음다음 날 일본으로 되돌아갔지요(아내 김지영은 '특별히 납품할 일도 없었는데…'라고 했다)."

    ―일본에서의 교육을 마치자마자 독립했지요.

    "전 예술로서의 도자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상업적인 일을 해야 하니…. 사실 설 회장 입장으로 보면 상업적인 성과를 내야할 시점이었지요. 고민 끝에 설 회장님을 찾아가 '나오겠다'고 했어요."

    ―이른바 '배신'을 때린 거군요.

    "설 회장님 입장에선 그렇게 느끼셨을 수도 있어요. 제 말을 듣고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내가 자네에게 투자한 돈이 2억원이 넘네'라고 했어요. 하지만 절 비판하진 않았어요. '젊으니까 나가서 택시를 몰아도 살 수는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순순히 내보내주셨어요."

    ―대단한 분입니다.

    "1995년 덕원미술관에서 첫 전시회를 할 때 비로소 그분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요. 알고 보니 설 회장께선 제가 도자기를 그만 둔줄 알고 계셨대요. 1997년 일본 동경에서 한국문화원 주최로 전시회를 할 때는 몸이 편찮으시면서도 찾아주셨어요. 그리고 '네가 뭔가를 해냈구나'하고 기뻐해주셨어요."

    ―나중에 달항아리라도 하나 드렸습니까.

    "하하."

    천상의 옥음

    참으로 기이한 게 인간의 삶이다.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는 또 다른 누구를 낳고는 성경(聖經)에 나오는 구절이지만 권대섭의 인생에선 인연이 인연을 낳았다. 무일푼으로 설국환 회장의 품을 벗어나 하릴없이 인사동 거리를 걷고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장한 신창호 회장이란 사람이 이 실업자의 손을 꽉 잡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당신, 내가 가마 만드는 것을 도와주겠느냐."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처지의 권대섭에겐 천상(天上)에서 들려오는 옥음(玉音)이나 진배없었다.

    ―신 회장이란 분은 또 어떻게 알게 된겁니까.

    "그분이 당시 타임지(誌) 국내 총판을 하고 있었어요. 저와 관계가 전혀 없었는데 한 고미술상이 그분에게 절 소개했다는 겁니다."

    ―단 한 번에 기회를 줬나요?

    "두어 번 만났어요. 제게 그러시더군요. '너, 뭐하냐'. 그래서 '놉니다'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 바로 밑에 그분이 가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저보고 수리(修理)를 하라는 겁니다. 아주 예쁜 한옥으로 척 보기에도 별장(別莊)같아 보이는 집이었어요. 그러면서 제게 백지(白紙)수표까지 내주는 겁니다."

    ―'땡잡았다'는 게 바로 그런 거군요.

    "그렇지요. 본인의 차(車)까지 내줬고 아예 '여기 눌러 살면 어떻겠느냐'고까지 했어요."

    ―지금은 나아 보이지만 당시면 외진 곳이었을 텐데.

    "외졌지요. 서울 사는 젊은 여자(아내)가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트럭이 하루에 겨우 10대나 지날까, 고속도로도 생기기 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내는 당시 제 모습이 너무 피곤하고 안타까워 보였나 봐요. 한 번 와 보더니 '무조건 오겠다'고 하더군요. 신 회장님은 참 고마운 분이에요."

    ―또 뭘 해줬습니까?

    "연탄을 1000장 들여주고 쌀 한가마니도 들여주셨어요. 그리곤 제게 묻더군요. 작업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좀 왕창 달라고 하지 그랬습니까.

    "(그때 권대섭의 아내가 말했다. '저 양반이 더 넉넉하게 받았으면 했는데 한참을 계산하더니 딱 자기 작업에 쓸 비용만 받았어요.') 그래서 월 30만원쯤 필요하다고 하니 '한꺼번에 줄까, 다달이 줄까'라고 묻는 거예요. 한꺼번에 받으면 다 써버릴 것 같아서 매월 나눠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작업에 몰두할 분위기가 됐군요.

    "이 주변에 조선 관요의 가마터만 200개가 넘어요. 한마디로 우리 도자 예술의 메카지요. 당시 딸이 세살배기였는데 시간만 나면 아이 손잡고 사금파리 주우러 다녔어요. 그 파편 주워다가 공부를 했지요. 부서진 조각이지만 형태가 있고 이어보면 연결되기도 하거든요. 그 형태를 그려보기도 했고요. 포클레인이 나타나면 제가 학교도 안 나갔어요. 제가 최근에도 주워온 게 있는데 보여드릴게요."

    ―사금파리가 지금도 나옵니까.

    "예전보다는 적어졌어요. 지금은 안 그렇지만 일본인들이 한때 떼로 몰려와 마구 가져갔거든요."

    ―그런데 학교라뇨?

    "생계는 이어야 하잖아요. 선화예고에서 강사를 했습니다. 1주일에 두번 나갔어요. 지금 영국에서 유학 중인 딸도 그 학교를 나왔어요. 딸이 졸업하면서 학교를 그만뒀고요. 딱 15년 만이지요. 라면이라도 먹어야 살 잖아요."

    ―라면?

    "그때는 정말 그랬어요. 제 아내가 가장 먹고 싶어한 게 칼국수였는데 그것도 못 사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집은 어떻게 산 건가요.

    "그게 또 인연이에요. 이 집터가 원래 파평 윤씨 종중(宗中) 소유였어요. 잔금도 다 못 치렀는데 10년 동안을 기다려주셨어요. 나중에 잔금 갚고 등기할 때 여섯분의 도장이 필요했는데 그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요."

    권대섭은 자꾸 모자를 쓰려 했다. 그 때 기자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휑한 모습을 보고 히히 웃더니 "그래도 모자는 쓰고" 라며 가마 옆에 앉았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대기만성

    대기만성(大器晩成)은 권대섭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5년간의 일본 수학과 남종면 이석리에서의 10년 공부 끝에도 그는 '뜨지' 못했다. 그는 돈 되는 일에 손대는 여느 도예가들과 달리 평생 백자항아리와 백자사발만 만들었다.

    그에게 물었다. 왜 백자만 고집하느냐고. 그가 말했다. "백자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엄격하고 부드럽기도 하지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걸 보고 '슬프다'고 했지만."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까.

    "사실 고미술사학자들이나 야나기 무네요시가 백자달항아리를 두고 한 말들이 있지만 전 전부 '구라'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 사람들 입장일 뿐이지요. 저도 미(美)의 기준은 전통에 두곤 있습니다. 하지만 백자달항아리를 두고 단순·소박·무작위성(無作爲性)만 말하는 건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백자를 유백·설백·회백으로 나누지만 실제 백자색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다양함이 상상을 훨씬 뛰어넘거든요."

    ―백자는 백자 아닌가요?

    "흰색과 백색은 다른 겁니다. 동양화가들이 쓰는 먹색이 검은색과 다른 것과 같은 이치지요."

    ―그래도 특별한 게 있다면.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수(手)작업으로 이뤄진다는 거지요. 백자 소지(흙)는 손과 호미로 분류해 모으고 도석도 쇠몽둥이로 빻아 체에 거릅니다. 그걸 햇볕에 사나흘 말리면 꾸득꾸득해지지요. 그러면 발로 밟아 끈떡끈떡하게 만든 뒤 치댑니다. 그제서야 형태를 만든 뒤 몇단계로 말리고 초벌구이와 순수낙엽재를 이용해 장작가마에서 소나무 장작으로 굽는 겁니다. 온도는 1300도 정도인데 온도계는 사용하지 않아요. 순전히 불 색깔이나 녹아 있는 유약의 상태를 보고 제가 판단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데 약 20~30일이 걸리지요."

    ―그럼 몇개가 살아남나요.

    "전 가마에 백자달항아리의 경우 2~3개밖에 넣지 않습니다. 처음엔 다 망한 경우도 있고 지금은 절반 정도가 살아남지요."

    ―백자에 쓰는 흙은 어디서 나나요.

    "전 고령토와 양구 백토(白土)를 혼합해 씁니다. 처음부터 최고품을 고집했어요. 백토는 제일 좋은 게 톤 당 60만원쯤 합니다. 나무는 강원도 홍천에서 조선 소나무를 구해다 쓰고요. 흔히 유약을 말하는데 그건 기본이에요. 금방 만들 수도 있고 재료에 관한 책을 보면 알 수도 있어요."

    ―평론가들의 말을 너무 정면으로 반박하면 신비감이 사라지지 않나요.

    "전 지금까지 인터뷰를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다른 도예가들이 기술이다, 작가의식이다, 혼이 들어갔다, 이런 소리들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 촬영하면 도인(道人)이나 된 것 같은 행색들을 하는 것도 불만이고요."

    ―제가 도공 취재만 하면 고생합니다. 막사발 장인 천한봉 선생 취재 땐 신문 확장하러 온 사람 취급받았고 광호요 취재는 '간첩취재'로 변했고. 권 선생도 처음 절 봤을 땐 자료만 내주며 '여기 다 있다'고 말을 안 하려 했잖아요. 도예가들이 원래 그렇습니까?

    "외골수가 돼야 하거든요. 말도 안하고. 사람도 안 만나고. 자칫하면 '또라이'가 돼요. 그러니 그럴 수밖에요. 저기 밖에 있는 저 젊은이도 제게 배우겠다고 이곳에 왔는데 사실 걱정돼요. (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리며) 이렇게 될까봐요."

    ―그래도 그렇게 되진 않았잖아요.

    "제가 1984년 일본에서 돌아온 뒤 첫 개인전을 연 게 1995년입니다. 1978년부터 17년간 공부만 했어요. 오로지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참 복이 많습니다. 이 집을 살 때도 돈이 없어 2000만원을 빌렸는데 20년이나 기다려줬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일 텐데."

    ―그 뒤에는 빛을 보지 않았나요.

    "처음 덕원미술관 전시 때 25점을 내놨는데 팔린 건 5점뿐이었어요. 평균 200만~300만원쯤 했는데 그래도 가스비도 못 낼 지경이었습니다. 2006년부터 조금씩 주목받았는데 그때까지도 빚이 3000만원이나 됐어요."

    ―그런데 뜨면서 한방에 갚았다는 말이겠군요.

    "전 아직도 뜨지 못했는데…, 사실 제가 백자 외에는 외도(外道)를 한번도 안 했는데 빚 때문에 딱 한번 했어요. 서미갤러리에서 식기(食器)를 한번만 만들자고 해 만들었거든요. 그 때 번 돈으로 그 자리에서 빚을 다 갚았어요."

    ―최근 들어 백자달항아리가 각광받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봅니까.

    "우리 민족의 뭐랄까, 그래 DNA! 뭔가 유전자가 있는 것 같아요."

    분원산수

    권대섭은 1995년 국내, 1997년부터 해외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큰 새(大鵬)는 쉬 날지 않지만 한번 날개를 펴면 창공(蒼空)을 뒤덮는다. 현재 그의 작품은 멕시코·러시아·방글라데시 국립박물관과 우리 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의 도자기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서미갤러리와의 인연이다. 도예가와 수요자의 만남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면서 권대섭은 작품에만 전념하게 됐다. 서미 홍송원 관장과의 만남은 2000년 한 갤러리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했기에요.

    "당시 사발 20~30개, 항아리 2~3개를 전시했는데 모두 사간 겁니다. 그는 시각이 조금 다른 것 같았어요."

    ―그 뒤부터 가격이 폭등했지요, 요즘은 2000만~3000만원까지. 일부에선 서미갤러리가 값을 올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던데. 서미나 권 선생이야 좋겠지만 가난한 사람은 만져보기나 하겠습니까.

    "하하, 할부(割賦)로 드릴 테니 하나 사세요. 제가 사실 작품을 많이 만들지 않아요. 한 해 평균 15개 이하거든요. 줄서서 기다린다고 막 드릴 수도 없고. 전 집에 재고(在庫)도 남겨놓지 않습니다. 지금 보는 저 달항아리 네 개는 제가 소장하려고 갖고 있는 거고요. 사실 비싸다곤 하지만 가격에 거품이 있거나 일부러 비싸게 받는 건 아닙니다. 연간 작업비에 준한다고 봐야지요."

    ―1997년과 98년에만 도쿄·요코하마·오사카에서 잇따라 전시회를 했지요.

    "도쿄는 한국대사관에서 요청이 왔고, 그걸 본 일본의 갤러리 관장이 요청해 곧바로 요코하마에서 전시를 하게 됐습니다. 2007년엔 미국 뉴욕에서 했고, 작년엔 디자인 마이애미·바젤 아트페어에서 했고요. 그때 오가사와라 선생님도 오셨어요."

    ―그렇게 고생시켰다면서 스승이 밉지 않던가요.

    "젊었을 땐 사실 이빨을 갈았지요. 어디 두고보자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런데 그건 그때 생각이고 전 1년마다 꼭 스승님을 뵈러 일본엘 갑니다. 올해도 뵙고 왔어요. 연세가 들어서인지 요즘은 얼굴에 인생의 고뇌랄까, 노년의 단상(斷想)이랄까, 그런 것도 엿보이는 것 같고. 일본 전시회 때 오셔서는 흐뭇한 표정을 지어서 저도 감사했습니다."

    ―마이애미·바젤 아트페어 때 권 선생 작품이 세계적인 컬렉터들에게 팔렸지요.

    "다섯점이 평균 2만달러에 나갔어요. 외국인들이 우리 백자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지요."

    ―여러 평론을 보니 권대섭의 백자달항아리가 옛 조선 도공들의 그것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말도 있더군요.

    "항아리 형태는 기원전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새삼스럽게 만드는 건 아닙니다. 18세기 조상들에 의해 이미 개성있는 모양이 만들어졌고 전 현재에 적합하게 해석할 뿐이지요. 다만 사람의 손이 아닌 불(火)이 형태를 만든다는 데 백자달항아리의 묘미가 있긴 해요.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구우면서 형태가 뒤틀리거든요. 그렇다고 도예가가 대가 없이 결과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불의 온도와 결과를 철저하게 계산해 장작 한 개비를 더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 게 바로 도예가들이거든요."

    ―그럼 백자달항아리가 우연의 소산이 아니란 뜻입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면 조선백자를 500명의 도공들이 500년간 만들어왔는데 그 세월 동안 손을 놓고 우연을 기다렸다는 겁니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의 결과라고 봐야지요."

    ―작업은 언제 합니까.

    "아침 9시에 시작해 오후 4시면 손을 텁니다. 저녁엔 안 해요. 달력의 빨간 날도 안 하고요."

    ―지금까지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나요.

    "흐~음.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정말 원형(圓形)에 가까운 작품이 그것도 두 점이나 나온 거예요. 백자달항아리는 타원형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부러 타원형을 만드는 작가는 없어요. 그런데 며칠 고민하다 술 마시고 다 깨버렸어요."

    ―아니, 그 아까운 걸 왜?

    "그걸 놔두면 작업을 다신 못할 것 같아서요. 섭섭하긴 했지만. 제 집을 찾아오는 분들 중에 '지금까지 만든 것 중 최고를 보여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전 이렇게 말해요. '제 최고 작품은 다음 가마에서 나올 것'이라고요."

    ―백자 외에 사발도 한다고 했는데 이도(井戶)다완 같은 걸 할 생각은 없나요.

    "요즘 이도다완, 이도다완하는데 전 불만이 조금 있어요. 막사발이란 게 뭡니까. 밥 먹고 술 마시고 반찬 담고, 그렇게 막쓰는 게 막사발이잖아요. 이도다완이 유명해졌다고 그 색이나 모방하는데 조선의 백자 사발이 사실은 다 다완이에요. (백자사발을 보여주며) 이거 보세요, 얼마나 곱습니까. 아이 참, 이러다 보니 자꾸 다른 사람 욕하게 되겠네, 빨리 술이나 마십니다. 여보~."

    그 소리에 도공의 아내는 푹 삶은 시골 돼지고기에 작년에 50포기 담가 땅 속 장독에 묻어놓았다는 김치를 잔뜩 들고 왔다. 인터뷰가 돌연 술판으로 바뀔 즈음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화창하던 해 대신 비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맑은 날의 '분원산수(分院山水)'가 돌연 수묵화로 변주(變奏)되기 시작했다. 권대섭 부부와 조카 부부, 거기에 제자까지 나무로 만든 나지막한 식탁에 둘러앉아 늦은 오후의 새참을 즐겼다. 처마 밑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조선일보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