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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C-TIPS2010.04.12 05:45

중국 신화, 들여다보면 정치성 농후해 정재서 교수, ‘중국 신화의 세계’ 강연 2010년 04월 12일(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석학 인문강좌 서양에 그리스·로마 신화가 있다면 동양에는 중국 신화가 있다. 서양문화를 배우려면 그리스 신화를 읽어야 하듯 동양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중국 신화를 읽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 신화는 등장인물서부터 생소하다.

그리스·로마 신화 하면 제우스, 헤라, 아프로디테, 아폴론 등이 줄줄이 떠오르는데, 중국 신화는 누구 하나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 신화를 주의해 읽다 보면 동·서양 신화의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10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는 ‘중국신화와 상상력의 정치학’이란 주제로 중국 신화의 세계를 소개했다.

▲ 10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중국 신화는 저명한 신 반고(盤古)가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천지(天地)의 혼돈스러움이 계란과 같았는데 반고는 그 속에서 생겨나 1만8천년을 살았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 온 몸을 변화시켜 세상 만물을 창조해낸다.

반고의 세계창조 이후 신들의 세계가 도래한다. 다섯 명의 대신(大神)들이 이 세계를 다섯 방향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하는데 그들이 곧 오방신(五方神)이다.

동방은 나무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었다. 그곳을 지배하는 큰 신은 태호(太皥)인데, 보좌 신인 구망(句芒)이 그림쇠를 들고 봄을 다스렸다. 남방은 불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었다. 그곳을 지배하는 신은 염제(炎帝)인데 보좌 신인 축융(祝融)이 저울을 들고 여름을 다스렸다.

중국신화에 음양오행설 첨가

중앙은 흙의 기운이 황성한 곳이었다. 그곳을 지배하는 큰 신은 황제(黃帝)인데 보좌 신인 후토(后土)가 노끈을 쥐고 사방을 다스렸다. 서방은 쇠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었다. 그것을 지배하는 신은 소호(少昊)인데 보좌 신인 욕수(蓐收)가 곱자를 들고 가을을 다스렸다.

북방은 물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었다. 그곳을 지배하는 큰 신은 전욱(顓頊)인데 보좌 신인 현명(玄冥)이 저울추를 들고 겨울을 다스렸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맏형 제우스가 하늘을 다스리고, 동생 포세이돈과 하데스가 각기 바다와 지하세계를 분할 통치하는 것과 비교해 중국의 신들은 다섯 방위에 따라 세계를 분할 통치한다.

▲ 반고(盤古) 상. 중국신화에서 세계를 창조했다. 
그런데 다섯 방위, 즉 오방(五方)은 단순한 방향과 공간이 아니다. 다섯 가지 우주의 원소이자 작용원리이며, 또한 그것들과 상관된 계절이기도 하다. 이른바 고대 중국의 우주론인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의해 신들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 속에서 중국 신화가 “원시 시대에 출현한 것이 아니라 음양오행설이 우주를 설명하고 있던 후대에 과거 신화를 각색해 빚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신들의 탄생 이야기다. 황제(黃帝)의 출생과 용모에 대해 “큰 번갯불이 북두성을 감돌다가 들녘을 비추는 것을 부보(附寶)가 보고 감응해 임신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염제(炎帝) 출생과 관련해서는 “신령한 용을 보고 감응해 염제를 낳았는데,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신의 부모 모두 신의 혈통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로마 신화 범주에서 보면 이들은 신이 아니다. 영웅일 뿐이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그리스에서는 엄격함이 있었던 반면 중국에서는 그 구분이 느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신들이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였다면 중국의 신들은 인간이 노력해서 달성할 수 있는 상향적, 연속적 존재였다.

중국신화에서 반인반수는 신성한 모습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신들의 모습이다. 중국의 신들은 대체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은 모두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염제는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신이 아닌 식인 괴물 미노타우르스가 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 중심 사고 속에서 동물성을 폄하했던 그리스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자연과의 일치를 꿈꾸면서 자연의 생동하는 표상인 동물을 긍정적, 신성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관심을 둬야 할 부분은 훌륭한 임금에 대한 이야기다. 즉 요(堯), 순(舜) 등 이른바 고대 성군들이 선양(禪讓)이라는 방식으로 사이좋게 왕권을 교체했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내용들이 그것이다. 성군 순의 신화는 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요는 천하를 염려했는데 어려운 백성들에 대해 더욱 신경을 썼다.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것을 마음 아파했고, 그들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까 근심했다. 어떤 사람이 배고프다고 하면 ‘이것은 내가 그를 주리게 한 것이다’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이 추위에 떨면 ‘이것은 내가 그를 춥게 한 것이다’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이것은 내가 그를 죄에 빠뜨린 것’이라고 했다.”

▲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 
요는 선정을 다한 후 노쇠해 당시 명망 있던 은사였던 허유(許由)에게 왕위를 전하려고 했으나, 거부당한다. 그래서 다시 적임자를 찾던 중 순이란 사람을 발견한다. 순이 효행이 뛰어나고 성실하다는 중론을 듣고 마침내 순에게 임금 직을 양위한다. 순에 효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순의 아버지 고수(瞽叟)는 장님이었다. 순의 어머니가 죽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얻어 상(象)을 낳았는데, 상은 교만했다. 고수는 후처와 그 아들을 사랑했고 항시 상을 죽이려 했다. 순은 피했지만, 작은 과실이 있을 경우는 벌을 받았다. 아버지와 계모, 의붓동생을 섬기고 거둠에 날로 성실하고 게으름이 없었다.”

순은 즉위 후에도 놀라운 효심과 우애를 발휘, 완악한 가족들을 잘 대해줘 마침내 그들을 개과천선의 길로 이끄는 인간승리를 이루어낸다. 또한 어질고 부지런한 성품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좋은 정치를 펼쳐 요와 다름없는 태평성대의 군주가 됐다.

그런데 순의 만년은 어두웠다. 남방을 순행하다가 창오(蒼梧) 땅에서 객사했는데, 비보를 듣고 애통해하던 두 왕비는 상수에 스스로 몸을 던져 후일 상수의 여신으로 거듭 태어난다. 그리고 우(禹)가 왕위를 계승하는데 문제는 순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만년의 돌연한 비극 이야기다.

요순 시대 격앙가와 남풍가는 후대에 지어진 위작

정 교수는 비극 전까지 지나칠 정도로 완벽하게 짜여 진 순의 효행담이 돌연히 비극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대해 이를 설명해줄 짤막한 언급들을 제시했다.

“요의 덕이 쇠하여 순에게 유폐되었다. 순은 요를 유폐하고 다시 단주(丹朱)를 연급시켜 부자가 서로 보지 못하게 했다.”(竹書紀年) “순은 요를 핍박했고, 우는 순을 핍박했다.”(韓非子) “구의산은... 또한 말하기를 순이 아홉 개의 봉우리를 보며 우를 의심하고 슬퍼했는데... 이로 인해 그것을 ‘의(疑)’라고 했다”(九疑山圖記)

이런 언급들은 오늘날 전해지는 순에 대한 성군으로서의 완벽한 이미지 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현실을 암시하는 듯 하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요와 아들 단주를 각기 유폐시켜 부자가 상면도 못하게 해놓았다는 문구는 순의 효행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며, 순이 요를 핍박하고 우가 다시 순을 핍박했다는 문구는 요, 순, 우 3자가 사이좋게 왕위를 넘겨주고 받았다는 선양의 실상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것.
더욱이 순이 객사한 현장에서 구의산을 바라보면 우를 의심하고 슬퍼했다는 문구는 순의 객사와 두 왕비의 익사 등 잇따른 횡사가 우로부터 비롯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강력한 세습 왕조가 성립되기 이전, 고대의 권력교체는 거의 예외 없이 격렬한 투쟁과 폭력을 수반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정황이었다면 중국 신화에 있어 선양은 사실상 폭력적인 권력교체를 미화한 ‘신화 만들기(myth making)'의 산물이 아니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정 교수는 중국에서 이처럼 신화 만들기가 필요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유교의 영향력을 언급했다. “전국 시대 이후 한(漢) 대에 이르러 국교로 자리매김한 유교에서는 그들의 이념을 구현한 모범적인 군주와 잘 다르려진 국가 모델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신화적 인물에 대한 유교적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졌다”는 것.

완벽하다 못해 작위적인 느낌까지 주는 순의 효행담이 그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문학사적 측면에서 이런 입장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 요순시절에 지어졌다는 ‘격양가(擊壤歌)’나 순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었다는 ‘남풍가(南風歌)’ 모두 후대 유학자들에 의해 지어진 위작임이 이미 밝혀진 바 있다고 말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0.04.12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글로컬 /중국2010.03.22 02:20

중국인…그들은 누구인가 김광억 교수, 중국인의 일상세계 분석 2010년 03월 08일(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석학 인문강좌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찾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빌딩이 계속 들어서는 도시, 거리를 가득 메운 유동인구, 낙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농촌과 농민의 모습 등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사전에 충분한 정보를 갖고 중국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중국인의 일상생활로 이루어진 현실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인의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관광루트를 돌다보면,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중국은 매우 편파적이고 피상적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인류학자인 서울대 김광억 교수는 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를 통해 그동안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현안 위주의 접근 방식을 지적했다.

▲ 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그동안 눈앞에 정치적 문제나 경제적 진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학자들이 현안 위주의 접근(연구)이 중국의 역사·문화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연구풍조를 낳았다는 것.

정부 정책과 법, 각종 통계수치, 제도와 조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지역 혹은 지방사회의 역사적 깊이와 문화적 전통의 중요성,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중국인)에 대한 관찰을 소홀히 해왔다고 말했다.

마치 제도와 정책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사회, 지역이나 민족 경계를 넘어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심어주었다며, 중국의 중요성에 비추어 이제 중국을 정치·경제적 접근과 함께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결합한 새로운 방법론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본 중국인의 일상세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역사에 대한 상상이 판단의 근거

현대 중국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행위나 국가 운명에 대해 논할 때 자신도 모르게 역사라는 기억의 세계를 언급하고 있다. 기억은 그 가장 가까운 시간에서 거슬러 올라가게 마련이라 가까운 과거의 경험이 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천안문 사태, 문화대혁명, 모택동 시절의 많은 혁명 운동, 그 이전 장개석과 손문에 의한 민국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 청·명·송나라 시대,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성당시대와 진한시대에 대한 상상의 기억을 곧잘 끄집어낸다는 것.

흥미롭게도 중국인들은 원나라와 금나라에 대한 기억은 별로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점은 기억의 선택권, 혹은 선택 능력, 혹은 기억의 주체성에 관련된 문제다.)

▲ 김광억 서울대 교수(인류학) 
중국인들은 자신의 지역을 먼 과거의 장소·지역·공간의 정치학적인 맥락에서 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산동지방을 노(魯)나라라고 하고, 교동지방을 제(齊)나라라고 한다. 산서지방을 진(晉)나라로, 절강성을 월(越)나라, 강소성을 오(吳)나라라고 부른다.

고대 역사에 편입되지 않은 동북지방은 각각 길림(吉), 요녕(遼), 흑룡강(黑), 서장(藏), 신강(彊), 청해(靑)이라 한다. 그리고 복잡한 역사로 인해 하나로 부르기 곤란한 경우에는 지방의 이름을 따서 사천(川), 절강(浙), 귀주(貴), 운남(雲), 녕하(寧), 내몽고(蒙), 감숙(甘), 천진(津), 북경(京), 중경(重) 등으로 표시한다.

중국인의 일상세계에서 수천 년의 시간이 응축돼 현재의 지방을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중국인이 옛 연고를 따져서 부르는 지방의 이름은 현재 행정구역제도에 의해 경계가 정해진 지역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한 중국인의 의식은 “역사를 만드는 것은 권력자지만 그 역사를 품고 사는 자는 백성이다”란 까뷔의 언급, “기억을 통제하는 것은 곧 인민을 통제하는 것이다”란 푸코의 언급으로 모아진다.

때문에 최근 부상하는 문제들로서 세대 간의 정치적 갈등이나 문화적 긴장은 대부분의 경우 기억의 주도권을 두고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그들만의 세계와 역사적 기억을 갖고 있어서 국가, 그리고 권력 엘리트와 부단한 긴장과 경쟁, 그리고 갈등과 타협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형 다큐멘터리 통해 역사의식 고취

때로는 자신의 역사의식을 위해 엘리트, 그리고 국가와 공모를 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중국사회에 번지고 있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혹은 중화주의 열기는 이런 대중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이를 문화상품으로 조직하려는 정치적 기술이 공모해 빚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정부가 소위 인민의 다양한 성향과 세력을 국가적 통제 하에 둘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중 언론매체, 그중에서도 특히 TV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매체는 대중을 상대로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념을 교육하고 전파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 영화 '영웅'의 한 장면 
90년대부터 시작해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초대형 역사영화와 TV 사극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의 과거와 미래를 조명하는 대형 TV 다큐멘터리와 혁명의 기억을 새롭게 하는 대형 문화 프로그램이 기획됐다.

5·4운동의 맥을 이어 80년대 초에 ‘하상(河傷)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그것은 (대륙에 닫혀 있는) 늙고 느린 황색의 거대한 강, 즉 황하(黃河)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문화대혁명 이후 개혁개방의 이념적 배경을 지지하는 것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대중적 담론은 이를 중국의 찬란한 오천 년 문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서구 제국주의와 지적 식민주의의 앞잡이라는 비판이 지배적이었다.

주목할 점은 90년대 후반부터 개혁개방의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영상들이다. 이 영상들은 이 긍정적인 결과가 서구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혜택이 아니라, 중국에 내재한 중국문명의 위대함이 발동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2006년에 방영된 ‘대국굴기(大國崛紀)’란 제하의 TV 연속 다큐멘터리는 지난 세기에 세계 열강이어TEjs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러시아, 일본 등 9개 나라의 흥망성쇄를 분석하고, 중국의 흥망성쇄를 비교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공산당의 영도 아래 지난 사회주의 혁명으로 다져진 기반 위에서 위대한 대국, 중국의 부흥이 임박했음을 감동적으로 전파하면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초대형 교양물로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 교재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냈다.

이 교양물은 부국강병에서 강병부국으로 그 선후가 바뀌어야 한다는 군사대국으로서의 중국의 부상을 주장하는 여론 조성의 각종 토론회를 낳았으며, 세계질서를 문명의 중화세계와 야만의 서구열강의 이분법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여름궁’으로 불리던 ‘원명원(圓明園)의 폐허는 “이전 봉건체제의 부패와 무능이 사치를 일삼음으로써 백성과 유리되고, 마침내는 서구 열강에 중국이 패배하는” 수치의 역사를 낳은 증거물로 거론됐다. 또한 모택동에 의한 공산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을 확인시키는 증거가 됐다.

‘부흥(復興)’이란 주제의 대형 전시 프로젝트 교양물에는 지난 50년간 공산당과 해방군의 영도에 의해 중국 인민이 어떤 고난을 헤쳐 나와 대국 중국의 부흥을 눈앞에 두게 됐는지에 대해 현대사가 감동적으로 극화돼 있다.

비슷한 시기 ‘홍색기억(紅色記憶)'과 ’나의 장정(長征)‘이란 문화 활동이 연중행사로 진행됐으며, 이 행사들은 TV를 통해 전국에 되풀이 방영됐다.

진시황의 천하통일 과업은 성스러운 일

장예모 감독의 영화 ‘영웅(英雄)’은 천안문 사태로 위축된 국내 분위기를 일신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과 그 과정에서 패망한 나라의 검객이 진시황에게 복수하기 위해 찾아온다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진시황의 그 유명한 한 마디 말 ‘천하(天下)’로 요약된다.

즉 진시황이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천하를 통일하는 성스러운 일을 했으며, 진시황의 향후 관심 역시 ‘천하’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이 말은 자객을 진시황 앞에서 굴복하게 하고, 장렬한 죽음을 받아드리도록 한다. 이 영화는 곧 천안문 사태로 표현된 젊은 지식인의 불만과 공산당에 의해 이룩한 통일천하의 대업을 교차해 보여주고 있다.

김 교수는 이런 영상들이 일련의 애국심과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과거 대제국으로서의 영광된 역사가 오늘날 다시 실현되고 있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대중국이라는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 인민 정서와 감정을 하나를 묶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지금 중국 상황에 대해 두 가지 미래 예측이 나오고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예측으로서 비록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민주화는 필연적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거대한 규모의 인구, 복합적인 민족구성체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식 통치체제, 혹은 정치체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지금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혁명 프로그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에서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확산이 사회주의 체제를 종식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중국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면 경제 토대가 되는 토지를 비롯한 많은 기간 자원이 여전히 전민소유라는 이름의 국유재산으로 돼 있으며, 개인은 호구제도에 의해, 지역과 직업 기회에 있어 이전의 제도에 묶여 있다는 것.

정치 지도자와 행정관리는 신지식인의 자질을 갖췄고, 서구적 분위기를 익숙하게 연출하고 있지만, 그들은 공산당의 인력 배양의 제도적 장치 안에서 허용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0.03.08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2010.03.02 02:54

지금의 대학은 ‘소유론적 욕망의 전당’ 아리스토텔레스 지성적 진리관의 영향으로...

2010년 02월 08일(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석학 인문강좌 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지금의 대학을 소유론 적인 욕망의 전당, 지성(Intellect, Intelligence)의 전당, 의식의 전당 등으로 정의했다.

한마디로 지식의 세계를 소유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라는 것. 이런 현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이 철학의 아버지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아버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말한 이상세계의 이데아를 현실세계로 끌어 내렸다. 이데아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된 것이다.

▲ 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은 주관적 생각이나 논리, 즉 ‘지성’(지능, Intellect)과 객관적 실재의 본질인 ‘사물’을 일치시키는데 있다.

여기서 지성이란 인간이 지각한 것을 정리해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혹은 사고의 능력을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이 지성(지능)이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사물을 정확히 파악했을 때 그것을 진리로 보았다.

개념의 등급을 규명하는 것이 학문

그리고 이 진리탐구 과정 속에서 개념이 산출된다. 그 결과 (서양철학에 있어) 세상은 개념들의 집합이 된다. 명석하고(clear), 판명한(distinct) 개념의 집합이다. 이 수많은 개념들은 최상위 개념서부터 최하위 개념에 이르기까지 위계질서로 분류된다. 서양 언어에 존재론적인 명사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의 존재자, 천사의 존재자, 인간의 존재자, 식물의 존재자, 미생물의 존재자, 광물의 존재자 등등. 그리고 이 존재자들의 등급의 규명하는 것이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념과 개념을 결합 또는 분리시키면 판단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참된 판단이 진리이며, 이러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학문이 된다고 보았다.)

▲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서양 철학은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에 기반을 두고 관념론과 실재론, 합리론과 경험론 등으로 발전시켜왔다. 관념론자들은 바깥의 실재가 의식의 관념에 복종하고 있다고 본 반면합리론자들은 바깥의 실상이 의식의 합리적(혹은 수학적) 요구에 복종하고 있다고 보았다.

실재론자들은 의식이 바깥 실재의 고유성에 복종하고 있다고 본 반면, 경험론자들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경험의 말을 의식이 듣고 있다고 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관념론과 합리론은 의식이 대상에게 (능동적으로) 명령하고 있는 반면, 실재론과 경험론에서는 의식의 대상에 의해 (수동적으로) 지배당한다고 보았는데, 의식과 대상 간에 강조점이 다를 뿐 지성이 곧 사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신학과 인간학에서 물론으로...

이 같은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체계는 인간의 존재자적 실체의 성격을 엄격히 구분해왔다. 100%, 90%, 80%, 70% … 50% … 등등. 여기서 100% 미만의 존재자들은 결핍의 존재자로서 (온전성의 결여인) 악의 존재방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100%의 존재자는 곧 선이며, 악의 존재방식과의 대립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원죄의식은 칸트가 ‘근본 악’의 개념을 도입한 결과다.

▲ 하이데거 (Heidegger, Martin) 
칸트는 신에 대한 존재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신은 내면적·도덕적 양심의 법에 귀속되는 것이지, 지식의 영역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신을 지식세계로부터 추방한 것이다.

칸티즘(Kantism)은 중세기의 신중심주의로부터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로 서양철학을 전환시킨 계기가 됐다. 근대 철학이 신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중세처럼 현실적인 역할을 긍정한 것이 아니라, 마치 상왕(上王)과 비슷한 위치로 밀어냈다.

김형효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신중심주의와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유사함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신학에 이어 새로 등장한 인학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이 문제점은 프로이드가 이성적 명령에 의해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괴물적인 힘, 즉 무의식을 증명함으로서 불거졌다. 이어 융은 구약의 욥기(Job)를 인용, 신은 심술궂은 악마성을 구비하고 있으며, 악마성과 대칭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대극적(對極的) 무의식을 주장했다.

구조주의 정신과 의사인 라캉은 신의 가장 무서운 적은 무의식이 인간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며, 신학과 인학이 무의식의 증상으로 분쇄됐다고 주장했다. 신학과 인학이 거세되고 물학(物學)이 등장한 것이다.

본능은 동·식물의 존재론적인 욕망

무의식의 등장과 함께 등장한 물학은 철학에서 구조주의 등장과 함께 인류학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적 사유(토템적 사유), 라캉의 “그것이 말한다(Ça parle)”. 하이데거의 ”그것이 사유한다(Es denkt)”란 주장에 이른다.

▲ 라캉 (Lacan, Jacques Marie Emile) 
김 교수는 라캉이 말하는 “그것이 말한다”의 의미는 “내가 말한다는 것이 하나의 표피적 거짓말이고, 진실은 불교적 의미의 업감(業感)이 말한다와 대단히 유사하다”고 말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그것이 사유한다”의 의미는 서산대사가 말한 “아시거(我是渠)”처럼 “본능이 사유한다”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본능이란 동·식물의 존재론적인 욕망으로, 동·식물이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대극성을 통해 두 가지의 차이를 동시적으로 식별하고,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싯탈타 태자가 보리스나무 아래서 샛별을 보고, 문득 우주의 철리(哲理)를 깨달았다는 설화도 이 본능의 기호적 사유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듯 하다는 것. 또한 노자가 말한 ‘포일적(泡一的) 사유’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김형효 교수는 인간의 지능을 분별력과 분석력, 전문화가 가능한 능력, 과학지식의 탐구영역 등으로 정리했다. 반면 인간의 본능을 포일적 직관력, 본질, 열린 능력, 도(道)의 입문 능력, 인간의 본질, 불성즉신성(佛性卽神性)으로 정리했다.

특히 존재론적 도(道)에는 ‘내 것’이 없다고 말했다. 존재론의 도는 인간의 의식이 생각하는 견해가 아니고, 이미 있어왔던 진리이며, 하이데거의 Gewesenheit(having-been-ness), 즉 무위적(無爲的) 도와 통하며, 도덕윤리적 당위(當爲)의 도와 과학기술적 유위적(有爲的) 도와 다르다고 말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0.02.08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