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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생태계/지식2011.01.31 05:57

한국에서도 섬유혁명이 시작되다 코오롱, 나일론 원사 생산해 국내 시장 석권 2011년 01월 31일(월)

100대 기술과 주역 20세기 섬유혁명은 미국에서 시작됐다. 1935년 2월 뒤퐁사에 근무하던 윌리스 H. 캐러더스가 이끄는 연구팀은 1938년 최초의 폴리아미드계 합성섬유인 나일론을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그 이듬해 나일론 스타킹으로 첫 제품을 선보였다.

당시 실크 스타킹 한 켤레에 66센트였던 점에 비추어 나일론 스타킹 가격은 한 켤레 1.15~1.35달러에 이를 만큼 매우 비쌌다. 그러나 실크 스타킹과 비교해 내구성, 착용감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았다. 1939년에만 6천400만 켤레의 스타킹이 팔려 나갔다.

나일론 선풍은 세계로 이어졌다. 질긴데다 물에 젖어도 손상이 거의 없고,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우며, 탄력성이 뛰어난 이 신기한 섬유에 대해 세계 각국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은 달랐다.

이승기 박사 1961년 북한서 ‘비날론’ 생산

당시 일본의 주력 수출산업은 견사공업이었다. 나일론의 출현으로 주력산업이 큰 위협을 받게 됐다. 일본 정부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폴리비닐알콜(PVA)을 섬유 원료로 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9년 일본 다카트기 화학연구소는 새로운 합성섬유인 ‘합성 1호’로 명명된 ‘비날론’을 개발했다.

▲ 1963년 8월 경북 구미에서 있은 한국나이론 원사공장 준공식.  ⓒ코오롱 그룹

무연탄과 석회석을 원료로 해서 만든 폴리비닐알콜계 합성섬유인 ‘비날론’은 나일론에 비해 다소 거친 것이 흠이지만, 질기고 열과 화학약품에 강한 장점을 지니고 있어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면직물을 대체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비날론’을 개발한 사람이 조선인 이승기였다.

이 업적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승기는 교토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해방 후에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북한 김일성의 제의로 월북, 흥남화학공장 비날론 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1961년 북한 정부는 흥남에 연간 2만 톤이 넘는 ‘비날론’을 생산할 수 있는 거대한 ‘2.8 비날론 공장’을 건립한다. 당시 북한 정부로서는 비날론의 성과가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중국과 소련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자립노선을 채택한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심각한 의류난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첨단 섬유를 개발했다는 것은 자립노선의 성공을 상징하는 매우 큰 사건이었다. 이승기 박사는 ‘공화국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북한 최고 과학자로 등극한다. 그러나 남한의 과학기술을 훨씬 뛰어 넘었다는 북한의 자부심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남한에서 ‘비날론’이 아닌 ‘나일론’ 개발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자서전에 따르면 국산 나일론 개발은 코오롱의 창업주인 고 이원만 회장으로부터 비롯됐다.

이동찬 회장 국내 최초 나일론 원사공장 준공

1951년 일본인과 합작해 삼경물산이란 무역회사를 설립, 운영하고 있었던 그는 1952년 나일론 선풍이 불고 있던 일본에서 ‘꿈의 섬유’로 불리는 나일론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이 회장은 한국에서도 나일론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당시 언론에 게재된 한국나이론 원사공장 전경.  ⓒ코오롱그룹
그리고 1953년 나일론을 한국에 들여오자 예상대로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사업이 커지면서 1954년 12월 삼경물산 서울사무소를 설립한다. 그리고 사무소 대표로 아들인 이동찬 현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을 임명했다.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 회장 부자는 나일론 원사를 가공해 부드럽게 한 스트레치 나일론을 직접 생산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리고 1956년 이원만 회장의 고향인 대구지역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동구 신천동 일대에 농림학교 터가 있었는데 매물로 나와 있었다.

이곳에서 부지를 매입한 이 회장 부자는 1957년 4월 한국나일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11월 나일론 공장을 건립한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58년 10월 국내 최초의 나일론 공장인 대구공장을 완공했다.

공장시설을 첫 가동할 당시 양질의 나이론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매끄러워야할 나일론 가닥이 기계 사이에 엉겨 붙어버렸다. 원인은 기계에 있었다. 일본인들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던 이탈리아산 기계를 사들인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이 회장 부자는 공장을 포기하지 않고, 삼경물산에서 얻은 수익으로 버티면서 문제점을 파악해 나갔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59년 1월 스트레치 나일론사를 생산하는 데에 성공한다.

1963년에는 일본 도레이 사로부터 나일론 제조기술을 이전받는다. 당시 도레이사 마에다 회장은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는 한국 상황에서 이 회장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한국에 나일론 기술을 이전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1963년 8월 나일론 원사공장이 준공됐다. 이에 대해 “국가와 기업 모두에 역사적인 순간이었다”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회고하고 있다. 준공식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할 정도로 국가적인 관심사였다.

연간 300만 달러 수출, 품귀사태 이어져

1964년 1월1일 마침내 한국나일론 원사 공장이 가동을 시작했다. 생산된 원사는 ‘나일론6’, 상품명은 ‘코오롱(KOLON)’이었다. 이어 국산 나일론으로 만든 싼 가격의 가공제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은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오래가는’ 화학섬유 나일론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 당시 언론들은 나일론을 생산하는 한국나이론이 인기가 치솟아 입사경쟁률이 16대 1에 달했다고 보도했다.(코오롱 그룹 제공) 
코오롱사로 만든 양말을 생산하는 업체가 100개가 넘었다. 이들 업체가 생산한 양말은 연간 2천만 켤레가 훨씬 넘었는데 이는 코오롱 전체 생산량의 40%가 넘는 것이었다.

수출 주문도 이어졌다. 연간 3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했다.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 생산량이 부족해지자 동양나이론, 한일나이론 등 경쟁업체들이 있따라 등장하기 시작했다.

코오롱의 전신인 한국나일론의 나일론 생산은 한국 섬유개발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나일론 기술을 확보한 한국은 60년대 말 마침내 당시 또 다른 ‘꿈의 섬유’로 불리던 폴리에스터 섬유 생산에 성공한다.

반면 북한은 세계 섬유업계 흐름을 무시한 채 ‘비날론’ 생산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었다. 북한이 품질 면에서 뒤지는 ‘비날론’에 집착했던 것은 ‘비날론’의 주 원료가 되는 석회석과 무연탄이 북한에 매우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섬유산업의 도약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북한은 비날론을 사용하는 세계 유일한 국가로 남아 낙후된 섬유산업을 감내해야 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1.01.31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