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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개방성은 프라이버시의 적이 아니다
by 비전 디자이너 | 2010. 10. 22
(1) 소셜웹

인터넷은 개방적이다. 누구도 인터넷 전체를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인터넷은 태어날 때부터 공유지대(commons)였고, 그런 만큼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공유하고, 함께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지금껏 인터넷 역사는 그 ‘소통의 자유’가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인간이 그 공간을 얼마나 멋지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의 연속이었다.

허나 이같은 네트워크 ‘개방성’을 통한 소통의 발전은 우리의 ‘상식’이 아니라 ‘예외’에 가깝다. 전화, TV, 영화처럼 우리가 접하는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대다수의 네트워크는, 적어도 현재는, ‘개방성’과 ‘이용자 참여’가 아니라 ‘중앙 관리’와 ‘통제’에 의해서 관리된다. 예컨대 전화, TV, 영화 등 다른 네트워크에서 이용자가 할 일은 ‘소비’외에는 거의 없다. 중앙에서 공급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소비해주는 일이 그 네트워크를 위해 이용자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인터넷은 그와 반대였다. 개발 초기에는 황무지처럼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네트워크. 이걸로 뭘 할 수 있을 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 개발의 뒤를 봐주던 국방부에서도 실현 가능성에 회의를 느꼈던 인터넷을 오늘날 스마트 혁명의 주역으로, 모든 네트워크를 통합하는 네트워크 중의 네트워크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이용자’다.

인터넷의 전신인 알파넷(ARPAnet)이 등장한 건 1969년이다. 그보다 4년 전인 1965년에 MIT는 컴퓨터들끼리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메일박스 시스템(mailbox system)을 가지고 있었다. 인터넷 실체가 가시화되기 전에 소통 기능이 먼저 구현됐다는 점은 처음부터 이용자들간 ‘소셜’함이 네트워크 발전의 기축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1990년 유럽분자물리학연구소(CERN) 연구원 팀 버너스 리가 월드와이드웹(WWW)을 개발해 공개했을 때, 그 웹에 기반해 1995년 지오시티와 트라이포드에 기초한 홈페이지 작성이 유행했다. 1997년에는 그 흐름을 ‘웹로그’ 혹은 우리에게 더 친숙한 이름인 ‘블로그’가 대체한다. 연구자 중심의 인터넷이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웹으로, 다시 그 웹이 전자도서관에서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광장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이 흐름을 만든 것은 언제나 ‘이용자의 상호 협력’, 요즘 말로 ‘소셜함’이 있었다. 21세기초 오라일리 미디어의 팀 오라일리가 유행시킨 ‘웹 2.0′ 마케팅 트렌드와 최근 유행한다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소셜 미디어 대세를 굳이 언급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런 네트워크 개방성이 언제나 긍정적 효과만 거두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 네트워크의 개방성이란, 인터넷은 참여하는 사람들 성격에 따라 발전 방향도 바뀐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1988년 미국 전역의 컴퓨터 6천대가 오작동을 보였는데, 원인은 바이러스나 복제 코드의 일종인 ‘당대 최초의 웜’ 때문이었다. 웜을 퍼뜨린 주인공인 22살 코넬대 재학생 모리스는 단순히 인터넷 규모를 알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로 이런 일을 했다. 그 뒤 모리스는 관련 사건에 대한 심의 결과로 사회봉사 처분을 받았고, 현재  MIT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바이러스, 스파이웨어, 악성코드 등을 만든 사람들이 모리스처럼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이는 뭘 뜻하는가. 더이상 인터넷이 ‘개방적’이기는 하지만  ’안전’하지 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최근 연이은 인터넷의 무단 개인 신상정보 공개 등의 프라이버시 침해 사례들을 보자. 개방적이나 안전하지만은 않은 인터넷상의 유해한 참여가 네트워크 뿐 아니라 이용자에게도 ‘직접적’으로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유튜브처럼 전염성이 강한 콘텐츠 공유 사이트의 발달, 그리고 스마트폰 등 휴대용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인해 가속화되고 있다.

예컨대 2005년 지하철에 자기 애완견 배설물을 치우지 않아 누리꾼 입담이 됐던 ‘개똥녀’, 2006년 교내 스튜디오에서 골프 볼 리트리버를 들고 스타워즈 제다이 기사처럼 휘두르는 모습이 유튜브에 공개되는 바람에 ‘스타워즈 키드’라 불리며 뜻하지 않은 유명세를 탔던 캐나다의 한 고등학생, 같은 해 홍콩에서 버스에서 한 청년과 말다툼을 벌이던 모습이 인터넷에 퍼져 ‘버스 엉클’이란 악명이 붙었던 한 중년 남성. 이들 모두 보편화된 디지털 휴대기기의 사용과 동영상 콘텐츠 공유 사이트란 확산 경로를 통해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같은 흐름에서, 인터넷의 개방성이 인터넷을 통한 사회 문제의 원인이라 보고, 그 개방성을 인터넷에 접근하는 단말(end-point) 차원에서 제한하는 것으로 방지책을 마련한 것이 국내에 2007년에 도입된 ‘제한적 본인확인제’ 혹은 더 알려진 이름으로는 ‘인터넷 실명제’다. 쉽게 생각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가 학생의 교복에 명찰을 붙임으로써 두발 규제 등을 시행했던 것처럼, 인터넷상에서 본인 신원이 밝혀지면, 인터넷상의 각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행위들을 자제시킬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 발상은 근본적으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가 문제가 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표현의 자유가 이 ‘아무도 소유하지도 통제하지도 않는다’는 상식적이지 않은 발상에 기초해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며 발전해온 지난 약 40년간의 인터넷 역사의 근간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발상이 그 정신과 정면 대치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즉, 헌법상 기본권 침해 차원에서 뿐 아니라 인터넷 산업 발전과 그 인터넷에 기초한 사회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반발이 심한 것이다.

제한적 본인확인제에 의해 해당 서비스 이용 목적으로 치명적 개인 정보를 노출해야 하는 이용자나, 그 이용자들의 막대한 개인정보를 관리해야 하는 인터넷 서비스 업체(ISP) 차원에서도 져야 할 부담이 크다. 따라서 정책이 야기하는 부작용 측면에서나 그 정책으로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 측면에서도 제한적 본인확인제는 부정적이다.

그렇다고 인터넷이 ‘완벽한 시스템’이며 따라서 ‘방치가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인터넷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시스템이었고, 그동안 혁신이 지속돼 왔던 것도 사실상 그 불완전한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뤄져 왔다는 걸 뜻한다.

예컨대 인터넷의 기적 중 하나이며 2001년 시작돼 이제는 대중적 지지를 갖고 있는 전자백과 위키피디아는 어떤가. 늘 정확성 문제가 논란이 돼 왔다.

2006년 5월25일,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언론인인 존 싸이젠쌀러(John Seigenthaler, Sr)는 위키피디아에 기록된 자신의 이력에 ‘케네디 암살에 관계했다’는 불확실한 정보를 확인하고 분함을 느껴 ‘USA 투데이’ 등 유력 신문을 통해서 위키피디아의 정확성 문제를 공격한 바 있다. 이것은 위키피디아가, 인터넷이 ‘실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그러나 실수를 하는 것은 기존 언론도 마찬가지고, 인터넷 여론이, 위키피디아가 이를 수정하는 사례도 있다. 2004년 9월8일 미국 CBS 방송이 부시 대통령의 공군 복무 시절에 대한 방송을 내보냈을 때, 부시가 1973년 8월에 다른 병사들보다 더 잘 대우해달라는 청원서를 낸 적이 있다는 대목이 포함돼 있어다. CBS는 그 ‘청원서’가 관련 분야 전문가에 의해서 ‘인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송이 나간 지 19분 뒤, 4명의 블로거가 그 청원서에 대한 실시간 분석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반론은 해당 청원서에 사용된 문서 양식 등이 1973년의 전기 타자기로는 만들기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뒤 청원서가 위조라는 또 다른 주장이 다른 전문가 집단에 의해서 제기됐고, 결국 이 CBS 방송 사건은 독립 리뷰 패널에 의한 234쪽에 이르는 보고서에 의해 최종 판정이 나게 된다.

위키피디아도 그렇다. 1768년에 발행이 시작된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 비교해보자. 2005년 네이처의 과학 분야 신뢰성 시험 조사를 근거로 했을 때 위키피디아에서는 162개, 브리태니커에서는 123개의 오해 소지가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큰 차이가 없는 결과다. ‘실시간 업데이트’와 ‘무료’라는 장점을 더한다면 이것은 위키피디아의 승리다. 위의 존 싸이젠쌀러 사건에서도 위키피디아는 싸이젠쌀러의 불평이 등장함과 동시에 관련 정보를 수정했다. 만약 이것이 브리태니커의 사례였다면 다음 개정판이 나오기까지 기다렸어야 했을 것이다.

이 위키피디아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인터넷이 ‘불완전한 시스템’일 수 있으나, 그것이 ‘이용자’의 ‘긍정적 참여’에 의해서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앞서 주장했던 것처럼, 이 이용자 참여는 인터넷 혁신의 핵심이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 본 히펠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혁신의 민주화’가 ‘인터넷의 위대함의 근본’이다. 이는 우리가 인터넷 프라이버시 등 인터넷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서 뭘 고민해야 할 지 알려준다. 어떻게 하면 이용자 참여에 의한 인터넷 발전의 역사를 인터넷 개방성의 맹점,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다.

수술 도구는 정해졌다. 그것은 ‘이용자의 긍정적 참여’다. 수술을 하려면 먼저 환부를 정확하게 도려내야 한다. 그러니 인터넷 프라이버시가 ‘개방성의 어떤 측면’에서 불거지는지 먼저 살펴볼 일이다. 깊숙이 들어가보면, 그것은 사실 ‘익명성’이라기보다는 그에서 파생한 ‘다중 정체성’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터넷은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단말의 신원을 밝힐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TCP/IP라는 통신 프로토콜을 통해 정보가 소통되기 때문에 자신의 인터넷 프로토콜(IP)이 밝혀질 위험은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네트워크상 위치가 어디인가’를 말하는 것이지 실제 ‘내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인터넷 개방성이 가지는 ‘익명성의 위험’의 전말이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이 익명성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을 통한 ‘다중 정체성’에서 온다. 한 예로, 다수 이용자 참여로 작동하는 온라인게임의 효시인 머드(MUD)게임 사례를 살펴보자. MIT에서 기술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그에 접하는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를 하는 쉐리 터클(Sherry Turkle)은 1996년 ‘와이어드’ 기고문에서 머드게임이 주는 자유, 익명성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된 인간의 폭력성’을 끌어내기도 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실제로 터클이 관련 연구 수행을 위해 행한 수많은 인터뷰 중에서, 인터뷰 응답자 중 한 명인 21살 대학생은 머드 게임상에서 강간 행위의 위해성에 대해서도 아무 거리낌없이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그 행위가 이뤄지는 장소가 ‘사이버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대학생 생각에 사이버 공간은 ‘현실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 위해성’이 나타날 수 없고, 따라서 현실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일도 사이버 공간에서는 원한다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익명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그 표현의 대가와 책임이 부재하다고 판단하는 상황이 그를 폭력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감안할 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러한 인식이 나타나는 원인은 복잡하다. 여기에는 ‘자기 표현의 다양한 가능성’과 ‘그 가능성에 의한 책임이 부재’한 상황에 대한 의식의 교묘한 조합이 숨겨져 있다.

이는 그 동안 인간 사회의 안정성을 지켜온 토대 중 하나인 ‘정체성’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정체성(identity)이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은 동질성(sameness)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동안 우리는 정체성을 여러 다른 사회적 공간에서 활약하는 한 인간의 다양한, 그러나 동질한 성격으로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허나 위 사례에서처럼 사이버 공간에서는 댓글상에서, 채팅상에서, 게임상에서 한 인간이 현격히 다른 자기 인격의 요소를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19세기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이 쓴 <지킬과 하이드>(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의 현대판 재현 같다. 오프라인에서는 철저히 신사 지킬인 사람이 온라인에서는 몬스터 하이드일 수 있고, 온라인의 한 공간에서는 지킬인 사람이, 다른 한 공간에서는 하이드일 수 있다.

이것은, 즉, 익명성 자체가 아니라 익명성에서 배태된 ‘다중 정체성’이란 문제가 그 동안 ‘정체성’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안정성’ 기능을 약화시킴으로써 사이버 공간의 ‘안정성’을 저해시키는 각종 이슈들이 탄생했다는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에 대한 해법도 익명성 자체를 배제시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다중 정체성을 ‘하나로 통합’함을 통해서, 즉 사이버 공간의 정체성 기능의 회복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실제로 1인 미디어 뉴스 공동체인 블로터닷넷(Bloter.net) 경우 그같은 다중 정체성을 통합시키는 접근법에 의한 ‘인터넷 자정 작용’의 효과를 보고 있다.

지난 2010년 4월 블로터닷넷은 그간 운영하던 댓글 게시판을 자체 폐기했다. 제한적 본인확인제 혹은 인터넷 실명제에 의해 정보통신망법 시행령에 근거하면 하루 평균 방문자가 10만명이 넘는 웹사이트 게시판은 본인확인을 의무화하고 있는데, 2010년 2월부터 블로터닷넷이 그 적용 대상으로 지정이 된 것이다. 그러나 블로터닷넷은 위와 같은 이유로 인터넷 실명제의 정당성과 실효성 모두에 회의를 느끼고, 실명제 대신에 자기 살을 도려내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블로터닷넷이 도입한 것은 국내 스타트업 회사인 시지온이 개발한 소셜댓글 서비스 ‘라이브리’(LiveRe)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자신이 가입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접속해 덧글을 다는 이 서비스는 해당  서비스들이 본인확인을 의무화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익명성 해체’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중 정체성의 맹점’은 보완하고 있다. 그것은 SNS가 온라인에서 한 공간과 다른 공간에서의 활동을 연결시켜주고 동시에 SNS를 통해 기존 오프라인 인맥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 혹은 온라인 인맥이 오프라인 인맥으로 확장된 경우가 많아 다중 정체성의 통합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다중 정체성 문제를 해결한 덕분에, 제한적 본인확인제를 대체한 소셜 댓글의 ‘사회적 본인 확인제’를 통해 블로터닷넷 이용자들의 참여가 ‘상호 긍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2010년 7월에 이 소셜 댓글을 도입한 이후, 2010년 10월, 약 3개월 동안, 외부 필진 중 한 명인 내가 느끼기에도 소셜 댓글에 의한 ‘자정 작용의 효과’는 놀랍다. 악플과 근거 없는 비방, 인격에 대한 공격 등은 눈에 띄게 줄었다.

사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셜’ 혹은 ‘이용자 참여’에 의해서 그 순기능을 유지시켜온 인터넷 발전의 역사를 다시 확인해주는 것 뿐이다. 답은 ‘무리한 정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코드(code)의 개발과 그에 기초한 온라인 문화의 성숙이다.  그 희망의 근거는 이미 고무적이다.

그러므로 인터넷 개방성은, 그를 통한 이용자 참여는, 프라이버시의 적이 아니다. 법령으로 해석해 접근하기에는 애매하고 경제적으로 접근하면 부담이 너무 큰, 이 인터넷 혁신성과 안정성 간의 조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책은 이것이다.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용자 참여, 그들의 소셜함에 의지하자.

블로터닷넷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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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의 대화 법칙
by 비전 디자이너 | 2010. 07. 21

(1) 소셜웹

소셜 미디어는 유용한가?

스마트폰이 유행이다. 연말에는 스마트폰이 500만대란다. 아이폰 4G와 갤럭시S를 모르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모르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시사를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는 필수다. 박근혜 의원님까지 트위터를 하기 시작했다. 경영을 하든, 정치를 하든, 트위터나 소셜 미디어는 이제 선택과 취향이 아닌, 필요와 전략의 문제가 됐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같은 유행과 필수의 흐름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전제는 소셜 미디어는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유용할까? 아니 유용해야 할까? 애시당초, 그 유용하다는 말이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1973년. 이제는 추억으로 기억해야 할 해에, 독일 아동 문학가 미카엘 엔데가 <모모>라는 책을 썼다. 한 마을의 외곽 고대 극장에 모모라는 출신 성분도 애매한 여자아이가 산다. 실상은 거지이지만, 이 아이를 위해 기꺼이 마을 사람들이 돕고 돌보는 것은 이 아이의 ‘듣는 능력’ 때문이다. 이 아이가 듣고 있으면 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기꺼이 하게 되고, 그 ‘소통’을 위해서 사람들은 이 아이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마을에 회색남들이 몰려온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 정원에 있는 시간의 꽃을 노리고 있다. 좀 더 경제적이고 윤택한 삶을 말하며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 말에 농락당한 마을 사람들은 예전의 정신적 풍요 대신에 물질적 편리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열심히 못 사는 삶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놓치고 잃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돌아갈 길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모는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이 시간 사냥꾼 회색남들을 대적하여 싸우기 시작한다. 이 모모를 호라 박사와 그의 거북이 카시오페아가 돕는다. 그들의 덕분으로 출중한 듣기에 탁월한 느림까지 갖춘 모모에게 근면하고 화려한 회색남들은 처절히 무너지고, 마을은 다시 예전의 평화와 행복을 찾는다.

왜 이 모모의 이야기를 할까? 그것은 모모와 우리가 경험해온 ‘미디어’ 소위 ‘매스 미디어’를 비교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매스 미디어는 모모와 얼마나 다른가? 모모는 듣고 있지만, 매스 미디어는 말한다. 매스 미디어는 우리가 말한 것을 듣고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을 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언론학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그 자체로 대화의 법칙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했다. 그가 이 미디어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 자체가 내부에 콘텐츠를 가지고 있지만, 밤을 낮으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켰다는 의미에서, 전구다. 그러나 그 전구는 일방적이다. 그 빛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햇빛처럼 생명을 자라게는 못한다.

그것은 분명 낮이지만, 그렇게 태어난 낮이, 문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더 나은 행복을 가져다 주었을까. 따라서 무언가를 얻었을 때는 반드시 다른 또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의미에서 매스 미디어가 우리에게 가져간 것은 모모였다. 우리에게 말하는 큰 목소리(Big Voice)를 얻게 된 대신에, 우리를 통제하는 거대 미디어(Big Brother)를 얻게 된 대신에,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법을, 소통의 법칙을 상실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통한다는 것, 말한다는 것은 언어학자 촘스키가 말한다는 것이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 요소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했을 때 우리의 ‘인간다움’의 중심적인 성격을 잃어버려왔던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뜬다는 것은, 트위터, 페이스북, 그리고 국내외에 출몰하는 포스퀘어, 아임 등 각종 온오프믹스의 사람들과 사람들을 서로 엮어주는 새로운 방식의 서비스의 등장은, 그 것은 단적으로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미치도록 외로웠는가, 소통을 그리워했는 가를 보여준다. 더 효율적인 삶, 경제적인 삶에 납득을 해오면서도, 그러면서도 놓치고 온 소통의 가치와 나눔의 행복이 소셜 미디어가 회복시킨 우리 삶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스마트폰의 점화로 촉진된 소셜 미디어의 진화가 굳이, 꼭 유용해야 하나? 경제적이어야 하나? 물론 그것은 돈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 소셜 미디어의 장기 생존을 위해서 중요한 이슈다. 그러나 모모의 곁에서는 수 백 수 천 가지의 이야기를 지어냈으면서도 회색남들에게 영혼을 판 후에는 전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조합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던 모모의 친구 지지처럼 진정한 장기 생존은 소셜 미디어의 진정성(authenticity)과 자발적 창조성(generativity)가 지켜져야 가능한 문제다.

소통의 가치를 상실한 소셜 미디어는 더 이상 ‘소셜’이란 말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것은 소셜의 가면을 쓴 커머셜 미디어일 뿐이다.

비록 닷컴의 버블에 휩쓸려 가긴 했지만, 1999년 인터넷에 공표됐다가 2000년에 출간된 <클루트레인 선언>이라는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서를 본딴 책은 시장(market)은 원래 시장’터’(marketplace)였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인터넷이 붐을 이루는 것은 원래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 만들어진 경제의 뿌리로, 그곳으로 인간이 돌아가려는 회귀 본능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구촌에 일고 있는 IT라는 플랫폼을 통한 새로운 미디어의 탄생, 그리고 그 미디어를 통한 인간과 인간의 대화의 시작과 상호 작용의 극적 확대는 사람들이 그 동안 너무나 서로와 이야기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나눔정신(sharism)이 동서냉전이 끝난, 21세기, 소셜 웹 시대의 시대정신이라는 것이다.

1984년, 애플이 조지 오웰이 경고한 빅 브라더로서의 IBM을 격파하는 것을 상징한 <1984> 광고물을 화려하게 선보이며 맥킨토시를 시중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약 20여년 후. 우리는 한 때 MS의 독점 체제에 무너졌던 그 애플이 부활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온라인과 오프라인, 미디어와 IT를 하나로 융합하는 선두에 선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디지털이 어느 곳에나 있는 사회, 스마트폰과 증강현실, 소셜 미디어가 삶의 일부가 되고 있는 시대, 그럼에도 그 ‘소셜’이 여전히 꿈이고, 이상이고, 열정에 불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법칙이고, 원리이고, 추종해야 할 변화로 수용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소셜 미디어를 주목하고 있을 때는 그 놓쳤던, 잃었던 ‘소셜’함을 보고 있는 것인가.

소셜 미디어는 유용한가. 아니, 유용해야만 하나.

그 것을 묻고 싶다.

블로터닷넷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칼럼, 인터뷰2010.04.22 17:00

스마트폰은 문제가 아니다

  비전 디자이너 2010. 04. 22 (0) Social IT |

또 다시 대세론이다.

2000년대초의 닷컴붐, 그리고 그 버블이 꺼지고 난 뒤에 부활한 IT가 들고 나온 마케팅 슬로건 웹 2.0, 그리고 이제 대세는 스마트폰이다.

그리고 그 대세론의 실체는 한 마디로 이것이다. ‘이번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

실체를 앞서와 같이 정의한다는 것이, 스마트폰이 버블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의 ‘스마트폰’이라는 정의 자체가 모호한 상황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스마트폰=아이폰’인가? 어떤 기술적인 스펙을 갖췄을 때 우리는 스마트폰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어떤 사회적, 문화적 기준으로 우리는 스마트폰을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스마트폰을 정의하는 기준 자체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현재의 스마트폰은 필요 이상의 ‘과도한 기대’를 낳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정도 이상의 위험성에 대한 신중함의 근거는 있다. 하버드 대학의 기네스 로고프와 메릴랜드 대학의 카르멘 라인하트는 8세기에 걸친 과거 금융시장의 버블이 형성되고 붕괴한 원인을 분석했다. 그들이 밝힌 버블의 배후는 사람들의 ‘몰림, 쏠림’, 그리고 그에 따른 ‘오만과 편견’이었다. 이번엔 다를 것이라 믿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믿었던 것은 무엇일까. 냉철한 ‘실체’였을까. 아니면 그들의 믿음 ‘그 자체’였을까.

교훈은 반복된다. 지금과 같이 시장과 사회의 열기가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철한 균형 감각의 회복이 필요한 시기다.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이 월가에서 멀리 떨어진 오마하로 가서 세기의 거부가 되었 듯이, 크게 되고 싶으면 길게 보기 위해, 남들이 하는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갖출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중요하다. 대경제학자 케인즈가 말한 그 비이성적 열기, ‘야성적 충동(the animal spirit)을 피해야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자.

2003년 5월.

당시 미국 IT계는 떠들썩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한 편의 논문 때문이었다. 몇 장 되지도 않는 그 논문은 제목부터 도발적이었다.

‘IT는 문제가 아니다’(IT Doesnt’ Matter). 저자는 니콜라스 카. 그는 말했다. IT는 전세기 ‘전기’, ‘철로’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그 자체로서 ‘경쟁 우위’(competitive advantage)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에 왔다고. 그 이유는 새로운 제품, 기기, 서비스가 등장해도 순식간에 그 것은 사회 전체로 확산이 되기 때문이다. 익히 아는 ‘무어의 법칙’(Moore’s Law) 등에 의해서 IT는 시간이 지날 수록 성능과 가격이 반비례하는 경향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IT 기술은 나온 지 얼마 안 되서, 곧, 소유하는 것이 경쟁력을 의미하는 ‘독점적 기술’(proprietary technology)에서 그렇지 못한 ‘인프라적 기술’(infrastructure technology)로 변신하다.

같은 운명은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더 성능 좋은 스마트폰이, 더 싼 가격에 보급이 될 것이다. 그렇게 스마트폰이, 시장이 커진다는 이야기는, 다시 ‘IT는 문제가 아니다’고 말한 니콜라스 카의 논리에 따르면 스마트폰 역시 독점적 기술에서 인프라적 기술로 변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즉, 스마트폰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카도 ‘IT는 문제가 아니다’는 주장을 발표했을 때 그와 비슷한 오해를 받았다. 그리고 한 동안 그는 MS, HP 등 당시 미국 IT계의 거두들이 그의 주장에 반발하는 바람에 중세로 말하면 ‘이교도’, 조선시대로 말하면 ‘사문난적’의 취급을 받았다.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점적 기술에서 인프라적 기술로, 혁신의 확산(the diffusion of innovation)에 의해서 스마트폰이 혁신의 기수에서 모두의 아이템으로 변화했을 때, 스마트폰의 ‘경쟁 우위’는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즉, 기술이나 기기 자체를 소유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이 경쟁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스마트’(smart)가 아니라 ‘스마터’(smarter)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답은 인간이다. 현재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스마트폰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그 동안 닫혀있던 한국 IT의 철옹성을 깨부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극도로 잠재되어 있던 사회와 IT가 융합되어 새로 이루는 세계, ‘소셜 웹’에 대한 한국민의 갈망과 욕구가 그 난공불락의 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은, 다시 피터 드러커가 이야기한 경영의 기본이다. 그에 따르면 경영은 상업 행위가 아니다. 물건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를 창조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도전이자, 예술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요즘 극도의 인기를 달리고 있는 스마트폰도, 트위터도, 아니 그 무엇도 궁극적인 대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IT는 역사의 종말을 맞이한 것인가? 모바일 컴퓨팅과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에 몰입투자하는 것이 답일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역사의 반복되는 교훈을 통해서 통찰할 수 있는 답은 그 같은 인식과 접근은 버블의 발생과 붕괴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앞서 말한 소비자를 창조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기존 산업의 구도를 전복시키는 혁명가들은 늘 먼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봤던 것은 인간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감각이며, 잠재된 수요, 욕구, 그리고 그것을 통해 창출할 수 있는 시장에 대한 통찰이다. 스마트폰과 트위터의 열풍에 휩싸여서는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지금은, 그래서, 이 붐에서, 열기에서 떠나야 할 때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이보 전진하기 위한 지혜를 갖춰야 할 때다. 생각해보자. 애플은 IT 업계의 초창기 기업이고, 구글 또한 90년대 기업이다. 애플이 스마트폰을 팔아서, 구글이 애드센스를 시작해서 위대한 기업이된 것은 아니다. 그 시작은 그들이 멀리 보고 높이 나는 법을 익혔다는 것이다. 기술의 차가 아니라 인식의 차를 생각해보자. 당기 순이익의 차가 아니라, 그들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 지를 생각해보자.

그렇게 볼 때, 스마트폰이 문제가 아니다. 그 것은 또 하나의 인프라가 될 뿐이다. 그 다음 우리는 어떠한 새로운 목표점을 바라봐야 할 것인가, 아니 창조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더욱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IT인 ‘소셜 웹’, 나아가 다음 사회를 함께 만들어 나갈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과제다. 기술이 독점적 기술에서 인프라적 기술로 넘어간다는 뜻은, 사실, 그 다음 장은 기술 혁신을 넘어선 사회적 혁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기와 철로가 인프라가 됐을 때, 그 때 우리는 방송과 통신 산업의 발전, 교통과 운송 산업의 성장을 목격했다.

앞으로 더 큰 승부처가 남아 있다. 거기서 생각해보자. 스마트폰이 문제가 아닌 곳에서, 다음의 더 큰 전장을 미리 내다보고 우리 한국 IT가 21세기에 글로벌 무대에서 강호들과 진검 승부를 할 수 있는 우리만의, 진정한 ‘경쟁 우위’를 지금부터 준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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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디자이너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 2007년부터 2008년까지 고려대를 비롯한 국내 대학에 MIT Open Course Ware(공개강의운동)를 런칭하는 프로젝트에 서비스 기획과 관련해 참여. 현재는 공익NGO '세계화와 빈곤문제 공공인식 프로젝트'(http://globalizationandpoverty.org/)에서 영문번역 프로젝트 디렉터를 거쳐 온라인 아카이브 구축 작업을 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웹과 사회가 융합되는 미래의 가능성과 문제점, 비전을 그린 '소셜 웹이다: 리눅스의 신화와 위키피디아의 전설을 넘어서'가 있다. visiondesigner21@gmail.com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