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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중국2010.09.07 06:04

[신경진의 서핑차이나] 한국・북한・중국이 함께하는 ‘그랜드 만주 디자인’ 필요하다 [JOINS_디지털뉴스센터]

입력시각 : 2010-09-06 오전 10:11:35

#1. "구제달로, 회복중화(驅除韃虜 恢復中華)"
1905년 손문이 결성한 중국혁명동맹회의 구호다. '타타르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는 뜻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우는 기본 동력이 됐다.



#2.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힘써 중국을 회복하는 애국주의가 천지에 빛났다. 중국과 북한의 동지들이 어깨를 걸고 전투를 벌이니, 국제주의가 해와 달과 같이 드높았다. 목숨을 걸고 적을 죽이니 희생도 두렵지 않았다. 혁명 영웅주의 기상이 산하에 장엄하도다! 항일 연합 영웅들이여 영원하라, 항일 연합 정신이여 영원하라!(驅除倭虜, 力挽神州, 愛國主義光耀天地; 中朝同志, 幷肩作戰, 國際主義情高日月; 殊死殺敵, 不畏犧牲, 革命英雄主義氣壯河山! 抗聯英烈千古, 抗聯精神永存!)"

지난달 29일 새벽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도착한 김정일 일행이 묵었던 태양도에 위치한 ‘동북항일연군기념원(東北抗日聯軍紀念園)’에 조성된 폭 20여미터 높이 3미터 정도의 대형 부조물 앞부분에 새겨진 문구의 한 부분이다.

목요일이었던 26일 김정일 방중 소식에 급작스레 현장으로 투입된 뒤, 선양→창춘→지린→창춘→옌지→선양을 거쳐 30일 낮 하얼빈에 도착했다. 전날 0시부터 30일 오전 8시까지 32시간 하얼빈에 머문 김정일 일행의 행방을 뒤쫓으며 태양도에서 김정일이 다녀갔다는 항일 기념 공원에 들어섰다. 2005년 새롭게 조성됐다는 기념 부조물에서 ‘중조동지, 병견작전(中朝同志, 幷肩作戰)’이란 문구에 시선이 멈췄다. 김정일 일행을 뒤쫓아 만주벌판을 헤매면서 곳곳에서 조선족 교포, 한국 교민, 북한 주민들이 동북 3성에서 중국 현지인들과 치열하게 경쟁, 협력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특히 김정일이 이번 방중 과정에서 순례한 혁명 성지에서 피를 뿌린 선열들은 중국인과 북한인들만이 아니었다. 항일 투쟁 당시에는 한민족인 조선족 교포, 북한 주민, 한국 국민의 구분이 전혀 없었다. 한민족이 중국인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함께 싸워 끝내 광복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 선열들의 피의 대가를 중국과 북한이 ‘독점’하려는 것이 이번 김정일 방중의 노림수다. 그렇다면 중국에 그 많은 투자를 하고, 경제 협력을 하고있는 한국은 동북3성에서 선조들이 뿌린 피에 대한 ‘지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반성이 앞섰다.

중국은 현재 동북지구의 중후장대한 노후 공업지대를 새로운 친환경 공업지대로 탈바꿈 시키고자 적극 노력하고 있다. 한중관계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던 동북공정도 동북지역 리노베이션 계획으로 추진됐던 것이다. 즉, 한족, 조선족, 만주족, 몽고족이 뒤섞여 있고, 러시아, 몽고, 북한, 일본과 인접한 중국 동북3성 지역 즉 만주의 안정이 중국의 변경 관리와 차기 경제 성장엔진 개발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만주는 농업과 공업, 자원의 보고다. 만주벌판의 경제적 재도약을 노리는 중국 중앙정부의 정책 과제에 한국이 적극 협조해야 한다. 만주에서 살고있는 한국교민, 조선족교포, 북한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잘살아야 한다. “조선족이 중국 56개 민족가운데 돈버는데는 1등이예요” 옌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를 몰던 한족 기사의 말이다. 만주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동북 3성을 꼭 방문하면 어떨까? 만주에서 한국과 중국, 북한이 협력하며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 삼자에게 모두 유익한 그랜드 디자인에 합의한다면 통일을 비롯한 남북문제는 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얼빈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만주벌판을 내려다 보며 든 생각이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심층체계/상상력2010.08.02 16:31

[신경진의 서핑차이나] 북학파 홍대용의 중국역사 삐딱하게 보기 [JOINS_디지털뉴스센터]

입력시각 : 2010-08-02 오전 9:26:28

홍대용(洪大容, 1731~1783). 후기실학파(後期實學派)의 선구자다. 1765년 34세때 숙부를 따라 청나라를 다녀왔다. 3개월간 베이징에 머물면서 청나라 학자들과 학문, 역사, 풍속 등에 대해 토론하고 귀국 후에도 지속적으로 교우했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인식하던 당시 유학자들을 비판하고 청과 서양의 문물 도입을 주장, 북학파의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문집 『담헌서(湛軒書)』를 남겼다. 특히 중국의 안과 중국의 밖을 가르는 경계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에서 가상인물 허자(虛子)와 실옹(實翁) 두 사람의 대화를 기록한 『의산문답(毉山問答)』에서는 기존의 화이관(華夷觀)을 타파하고 중화와 오랑캐가 모두 하나라는 ‘화이일야(華夷一也)’ 이론을 내세웠다. 즉 중국의 역사 서술 관점을 교묘하게 거꾸로 뒤틀어 홍대용식의 민족주의 논리를 계발한 것이다. 다음은 그 구체 내용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글을 통해 우리 조상들의 중국 공부가 나름대로의 ‘관점’이 있었음을 확인하기 바란다. 국내 차이나 워처(China watcher)들에게 한국적 ‘관점’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좋은 자료임에 틀림없다.


기주(冀州)는 지방이 천리로 중국이라 일컬었다.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하매 바람과 물이 혼후(混厚 넉넉함)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비치매 춥고 더움이 알맞고, 물과 산이 영기(靈氣)를 모으매 선량한 사람을 탄생시켰다. 대개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ㆍ요순(堯舜)이 일어나서 초가집에 살면서 자신부터 검소한 덕을 닦아 백성의 재산을 마련해 주었으며, 공손하고 겸양한 모습으로 밝은 덕을 몸소 실천하여 백성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문명한 교육이 차고 넘쳐서 천하가 화락하였다. 이것이 중국에서 이른바, 성인의 정치요 가장 잘다스려진 시대였다.
(중략) 하후(夏后, 우(禹)임금 이름은 문명(文命), 씨(氏)는 하후(夏后))가 천자(天子)의 위(位)를 아들에게 전하게 되자 백성이 비로소 제집 이익만 꾀하게 되었고, 탕무(湯武)가 임금을 내쫓고 죽이자 백성이 비로소 위를 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몇몇 임금의 허물은 아니다. 잘 다스려진 끝에 쇠하고 어지럽게 됨은 시대와 형세의 자연인 것이다.
하(夏) 나라가 충(忠)을 숭상하고, 상(商) 나라가 질(質)을 숭상했으나 당우(唐虞, 도당씨(陶唐氏) 요(堯)와 유우씨(有虞氏) 순(舜)을 아울러 이르는 말)에 비하면 이미 꾸민 것이었고, 성주(成周)의 제도는 오로지 화려하고 사치함만 숭상하여 소왕(昭王, 주 나라 제5대의 임금)과 목왕(穆王, 주 소왕의 아들)부터는 임금의 기강이 이미 떨어져 정사가 제후(諸侯)에게 있었고, 한갓 헛 이름만 안고 윗자리에 기생(寄生)하였으니, 유왕(幽王)ㆍ여왕(厲王)이 천하를 망치기 전에 주(周) 나라는 이미 없어졌던 것이다.
영대(靈臺, 주 문왕이 도성 안에 쌓은 축대. 즉 지금의 공원과 같음)는 놀이를 위해 아름답게 만든 것이고, 구정(九鼎, 하후씨가 구주(九州)에 금을 거두어 만들었다는 솥. 이것이 천자의 보물로 전해졌음)을 보배로 여겨 갈무리한 것이었다. 옥로(玉輅, 주옥으로 꾸민 천자가 타는 수레)와 주면(朱冕, 붉은색 관)은 복식(服飾)을 사치하게 한 것이고, 구빈(九嬪)과 어첩(御妾)은 예쁜 여색을 뺏아들인 것이었다. 이리하여 낙읍(洛邑)과 호경(鎬京)에 토목 공사가 번다하였으니, 저 진시황(秦始皇)이나 한 무제(漢武帝)도 이것을 본받았다 하겠다.
또 미자(微子)와 기자(箕子)를 버리고 무경(武庚, 중국 상(商)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의 아들)을 세워서 은(殷) 나라 도(道)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주 나라의 속 마음을 어찌 숨길 수 있겠느냐? 성왕(成王)이 즉위(卽位)함으로부터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형제간에 다투었던 바, 주공(周公)이 3년 동안이나 동쪽으로 정벌하는데 창과 도끼가 다 부서지고 여덟 번이나 매방(妹邦)에 고시(誥示)하였으나 미련한 백성이 대항하고 따르지 않았으니, 주 나라가 은 나라를 대신함에 천하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어찌 없었다 할 수 있겠느냐? 공자(孔子)가 순(舜)의 덕을 칭찬함에는 ‘성인(聖人)이라’ 했으나 무왕(武王)에 대해서는 ‘천하의 좋은 이름을 잃지 않았다.’ 했고, 태백(泰伯)의 덕을 칭찬함에는 ‘지극하다.’ 했으나 무왕을 말함에는 ‘다 착하지는 못했다.’ 하였으니, 공자의 뜻을 크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주 나라 이후로 왕도(王道)가 날로 없어지고 패도(覇道)가 횡행하여 거짓 인(仁)한 자가 황제(帝)로 되고 병력(兵力)이 강한 자가 왕(王)이 되었으며, 지략(智略)을 쓰는 자가 귀하게 되고 아첨을 잘한 자가 영화롭게 되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림에는 괴임과 녹으로 꾀이고 신하가 임금 섬김엔 권모(權謀)를 미끼로 하였다. 이리하여 얼굴을 반쯤 알아도 마음이 맞게 되고 남모르는 식견으로 걱정을 예방하는 바, 상하가 서로 다투어 사욕만 꾀하였다. 아아! 슬프구나. 천하가 번잡하게 됨은 이욕을 품고 서로 대한 때문이었다.
(중략) 어떤 자는 말하기를 ‘나무와 돌의 재앙은 유소씨(有巢氏, 상고 시대의 집짓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친 자)에게서 비롯했고 짐승의 재화는 포희씨(包羲氏, 복희씨(伏羲氏)의 별칭)에게서 시작되었으며, 흉년의 걱정은 수인씨(燧人氏, 불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에서 유래되었고 교묘한 지혜와 화려한 풍습은 창힐(蒼頡, 옛날 새의 발자취를 보고 처음으로 문자(文字)를 만들어 냈다는 자)에게서 근본하였다. 봉액(縫掖, 선비가 입는 도포(道袍)의 별칭)의 위용이 좌임(左袵, 옷깃이 왼쪽으로 덮이게 한다는 오랑캐의 별칭)의 편리함만 못하고 읍양(揖讓)의 허례가 막배(膜拜) 참다움만 못하며, 문장(文章)의 빈말[空言]이 말타고 활쏘는 실용만 못하고 따뜻하게 입고 더운밥 먹으면서 몸 약한 것이 저 추운 장막에서 우유 먹고 몸 강건한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이는 혹 지나친 의론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이 떨치지 못한 까닭이 여기서 싹트게 되었다.
혼돈(混沌, 혼돈은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기 전의 상태를 뜻하므로 큰 순박함이 이미 사라졌다는 뜻으로 도가에서 하는 말)이 뚫어지매 대박(大樸)이 흩어졌고 문치(文治)가 승해지매 무력(武力)이 쇠했으며, 처사(處士)가 제멋대로 의논하매 주(周) 나라 도(道)가 날로 쭈그러졌다. 진시황(秦始皇)이 서적을 불사르매 한(漢) 나라 왕업이 조금 편케 되었고 석거(石渠)에서 분쟁이 생기매 신망(新莾, 신은 국명 왕은 왕망)이 왕위(王位)를 찬탈했으며, 정현(鄭玄, 동한(東漢)의 학자. 자는 강성(康成))과 마융(馬融, 자는 계장(季長). 동한(東漢)의 학자)이 경서를 연역(演繹)하매 삼국(三國)이 분렬 되었으며 진씨(晋氏)가 청담(淸談)을 일삼으매, 신주(神州 중국)가 망하였다.
육조(六朝, 중국의 여섯 나라, 곧 오(吳)ㆍ동진(東晋)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이다)는 강좌(江左)에 부속되었고 오호(五胡)는 완락(宛洛, 宛(완)은 남양, 洛(락)은 낙양. 하남(河南)의 고도(古都))을 처부셨으며, 탁발(拓跋)은 북조(北朝)에서 위(位)를 바르고 서량(西凉)은 당(唐) 나라에 통합되었다. 요(遼)와 금(金)은 서로 주인 노릇하다가 송막(松漠)에서 합쳐졌고, 주씨(朱氏)가 왕통을 잃으매 천하는 오랑캐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남풍(南風 천자의 덕)이 떨치지 못하고 오랑캐[胡]의 운수가 날로 자라남은 곧 인사(人事)의 감응이기도 하지만 천신(天時)의 필연이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짓되 중국은 안으로, 사이(四夷)는 밖으로 하였습니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이 이와 같이 엄격하거늘 지금 부자는 ‘인사의 감응이요 천시의 필연이다’고 하니, 옳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今夫子歸之於人事之感召。天時之必然。無乃不可乎。)”
“하늘이 내고 땅이 길러주는,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모두 이 사람이며, 여럿에 뛰어나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자는 모두 이 임금이며, 문을 거듭 만들고 해자를 깊이 파서 강토를 조심하여 지키는 것은 다 같은 국가요, 장보(章甫, 유생이 쓰는 관(冠)으로, ‘유생’을 달리 이르는 말)이건 위모(委貌, 주 나라의 갓 이름)건 문신(文身, 문신(文身)은 오랑캐의 별칭임)이건 조제(雕題, 미개한 민족의 별칭)건 간에 다 같은 자기들의 습속인 것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각각 제 나라 사람을 친하고 제 임금을 높이며 제 나라를 지키고 제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나 오랑캐가 한가지다.
대저 천지의 변함에 따라 인물이 많아지고 인물이 많아짐에 따라 물아(物我 주체와 객체)가 나타나고 물아가 나타남에 따라 안과 밖이 구분된다. 장부[五臟六腑]와 지절(肢節)은 한 몸뚱이의 안과 바깥이요, 사체(四體)와 처자(妻子)는 한 집안의 안과 바깥이며, 형제와 종당(宗黨)은 한 문중의 안과 바깥이요, 이웃 마을과 넷 변두리는 한 나라의 안과 바깥이며, 법이 같은 제후국(諸侯國)과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는 먼 나라는 천지의 안과 바깥인 것이다. 대저 자기의 것이 아닌데 취하는 것을 도(盜)라 하고, 죄가 아닌데 죽이는 것을 적(賊)이라 하며, 사이(四夷)로서 중국을 침노하는 것을 구(寇)라 하고, 중국으로서 사이(四夷)를 번거롭게 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그러나 서로 구(寇)하고 서로 적(賊)하는 것은 그 뜻이 한 가지다.
공자는 주 나라 사람이다. 왕실(王室)이 날로 낮아지고 제후들은 쇠약해지자 오(吳) 나라와 초(楚) 나라가 중국을 어지럽혀 도둑질하고 해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춘추(春秋)란 주 나라 역사책인 바, 안과 바깥에 대해서 엄격히 한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느냐?
그러나 가령 공자가 바다에 떠서 구이(九夷)로 들어와 살았다면 중국법을 써서 구이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주 나라 도(道)를 역외(域外)에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즉 안과 밖이라는 구별과 높이고 물리치는 의리가 그대로 중국 밖의 역외 춘추(域外春秋)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성인(聖人)된 까닭이다.”


우 임금이 고대 성왕이 아니라 세습왕조를 시작한 임금에 불과하고, 탕(湯) 임금과 무(武) 임금은 윗사람에게 대항하여 역성 혁명을 성취한 최초의 임금이었으며, 사실과 달리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도리어 한(漢) 나라의 행복을 열어 줬고, 전한(前漢) 시대의 치열한 경학 논쟁이 도리어 전한의 멸망을 초래하였다고 홍대용은 실 노인의 입을 빌어 주장한다.
이에 허 선생은 공자가 중국은 안으로, 오랑캐[四夷]를 밖으로 여긴 춘추를 근거로 논박을 시도한다. 홍대용은 다시 실 노인을 내세워 공자를 주 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공자가 중국화되는 순간 ‘중화와 오랑캐’도 주 나라 시대에 중국에서의 ‘중화와 오랑캐’ 관념으로 상대화된다. 이어서 공자가 조선에 와서 중화 문명을 전파했다면 어떻게 됐을까하며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글을 마무리짓는다.
그 사이에 홍대용은 “사이(四夷)로서 중국을 침노하는 것을 구(寇)라 하고, 중국으로서 사이(四夷)를 번거롭게 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그러나 서로 구(寇)하고 서로 적(賊)하는 것은 그 뜻이 한 가지다”라고 해석한다.
최근 한미 군사훈련 ‘불굴의 의지’가 동해에서 중국 해군의 해상 실전 훈련이 서해에서 펼쳐졌다. 한미’동맹’과 한중전략적’동반자’관계도 삐딱하게 뒤틀어보자. 불변처럼 보이는 진리도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 상대화되기 마련이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