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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세미나/2010.03.21 19:32
<안중근순국 100년> 순국까지 일관된 기개

"집행순간까지 매우 침착하고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태도는 매우 침착하고 안색과 언어에 이르기까지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침착하고 떳떳하게 죽음에 이르렀다."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인 1910년 3월26일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할 때 통역 소노키 스에요시가 사형집행 순간에 대해 외무성과 통감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26일의 하얼빈 의거 이후 5개월간 옥중생활을 하면서 재판과정에서 한 진술과 집필한 원고를 통해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에 대한 의지를 표출하고 짧지만 불꽃 같았던 삶을 마감했다.

  

안중근 의사 재판이 열린 법정


◇ 재판에서 일제 침략상 밝혀
안 의사는 의거 후 하얼빈 영사관에 구금됐다가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점령한 중국 뤼순에 있던 감옥에 갇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그의 재판을 어느 나라에서 할지를 두고 고민하다 국제 여론의 관심을 피하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 장소를 뤼순으로 정했다.

   1909년 11월3일 감옥에 갇힌 안 의사는 미조부치 검찰관과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사카이 경시로부터 강도 높은 신문을 받았다. 이후 열린 공판에서 안 의사는 자신이 한국 의병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인데 일본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최후진술을 통해 일본의 한국침략 실상과 이토의 죄상을 밝혔다. 첫 공판이 열린 지 일주일만인 1910년 2월14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마나베 재판장은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 다음날 발행된 대한매일신보 2월15일자는 안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도 태연자약했으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 판결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서 미소를 머금었다고 전했다.

  
동생들과 면회하는 안중근 의사


◇ 자서전, '동양평화론' 집필
안 의사는 옥중에서 아무런 자료 없이 사형 집행을 앞둔 절박한 상황에서 혹한을 이겨가며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그는 자서전을 완성했으나 '동양평화론'은 끝내 마치지 못했다. '동양평화론' 완성을 위해 사형집행 연기를 청했으나 당국이 이를 묵살했기 때문이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많은 연구자로부터 선구적인 제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한ㆍ중ㆍ일 삼국이 동양 평화회의체를 구성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하며 공동 군대를 창설하는 등 세 나라가 협력하는 공동체를 결성할 것을 제시했다.

   이러한 지역 협력방안은 20세기 후반 동북아에서 논의되는 다자간 지역협력체 구상의 맹아적 요소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또 원고 외에도 많은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을 썼다. 유묵은 200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제까지 밝혀진 것은 57점이다.

   이 가운데 안중근의사기념관 등 국내 각처에 소장된 유묵 25점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물로 일괄 지정된 상태다.

   안 의사는 높은 기개와 강한 애국심,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이룩하려는 염원, 돈독한 신앙심 등을 유묵에 담았다.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 당당한 마지막 모습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날인 1910년 3월25일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만났다. 어머니, 두 동생, 뮈텔 주교 등에게 쓴 유서 같은 편지 6통을 동생들에게 전하고 아내가 지은 한복 바지와 저고리를 전달받았다.

   또 면회온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서는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에는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해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그의 통역인 소노키 스에요시는 사형 집행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소노키의 기록에 따르면 사형은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감옥 안의 사형장에서 집행됐다. 안 의사는 유언을 남길 것인지 묻자 자신의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일본 관리들도 이러한 뜻을 이해하고 합심해 동양평화를 위해 힘쓸 것을 바란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아내가 고향에서 보낸 흰색 저고리와 흑색 바지를 입은 안중근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상태에서 2분여간 기도를 한 뒤 교수대에 올라 태연하게 형을 받았다. 10시4분께였다.

   소노키는 오후 1시에 감옥의 장지에 시신을 매장했다고 썼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kimyg@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뉴스/세미나/2010.03.21 19:28

<안중근순국 100년> 뤼순 국제항일열사기념관

연합뉴스 | 입력 2010.03.21 10:47

 

(뤼순=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죄아닌 죄'로 먼 이국땅의 차디찬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스러져간 지 한 세기가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묘역이 없다.

사진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지난해 10월 오전 중국 뤼순 국제항일열사기념관을 찾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등 항일 독립운동가단체 협의회 회원들이 안 의사의 흉상 앞에서 묵념을 하는 모습. 광복회 등이 예산을 지원, 건립해 최근 관람객들에게 공개된 이 기념관은 안 의사를 중심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 등 우리 독립운동가 11명에 관한 유물과 사료들을 전시, 소개하고 있어 안중근 기념관으로 불리고 있다. 2010.3.21 < < 연합뉴스 DB > >

kan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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