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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 /영화 2010.09.17 03:01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2]
글 : 정한석 | 2010.09.16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는 시작과 중간과 끝

<키스왕>
<폭설후>

반문이 충분히 예상된다. 겨우 이것뿐인가,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이건 단순히 네 토막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묻는다면 앞의 이야기를 좀 느슨하게 들은 것일 수 있다. <옥희의 영화>는 옴니버스 구조를 띠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옴니버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내용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주문을 외울 날’에서 남진구는 영화감독이라더니 ‘키스왕’에서는 영화과 학생이라 하고 ‘키스왕’에서 송 선생은 정교수인 것 같았는데 ‘폭설 후’에서는 시간강사라 하고, 그러면서도 앞의 남진구와 뒤의 진구는 전부 이선균이, 앞의 송 선생과 뒤의 송 선생은 문성근이 연기한다고 하고, 그렇다고 각장이 같은 인물의 현재와 과거로 나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이거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다, 이게 뭐냐, 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문제제기가 맞다.

<옥희의 영화>를 보고 나면 내가 무엇을 본 것인지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알아차린 다음에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립을 보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그들은 누구인가. 결국 그 누구도 아니며 아무도 아니라는 느낌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들을 규정할 수 없다는 느낌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오는 감흥은 말로 다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이라는 동일한 배우가 (남)진구, (정)옥희, 송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주문을 외울 날’에서 ‘옥희의 영화’까지 네 차례나 연기하는데 장마다 그들이 사실 전부 다른 존재들인 것 같다가도 다 이어놓고 보면 또 무언가 연관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여간에 애매하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에서 일인이역 또는 그런 착각을 주는 이미지를 본 적은 있으나 이건 뭔가 이상해도 훨씬 더 이상하다.

이때 두 가지를 환기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1장, 2장하는 식으로 차례대로 나누는 대신 각장의 소제목을 차례대로 표기했는데 그건 홍상수의 방식이기도 하다. <옥희의 영화>를 본 날, 문득 영화사의 오래된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 프랑스 감독 장 뤽 고다르가 전통적 이야기 기법(기승전결)을 벗어난 영화를 만들어 이목을 끌고 있던 초창기에 유명한 선배 감독 조르주 프랑주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도 고다르씨, 당신도 당신이 만드는 영화에 처음과 중간과 끝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다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 순서를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조르주 프랑주의 질문은 옳은데 고다르의 대답은 더 옳다. 고다르와 홍상수는 서로 다른 예술가이지만 배열의 자기 순서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것 같다. 유심히 본다면 <옥희의 영화>에 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홍상수가 이 영화를 <옥희의 영화>라니까 따라서 <옥희의 영화>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홍상수는 마지막에 놓은 ‘옥희의 영화’라는 소제목을 지금 이 영화의 전체 제목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부터 시작이다, 라고 말하는 대신에 끝난 부분이 전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정도가 되면 어디가 시작이고 중간이고 끝인지 말하는 건 의미가 없다.

<하하하>의 한 토막을 환기하는 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하하하>에서 시인 정호(김강우)가 성옥(문소리)에게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이대며 이게 뭘로 보이냐고 성질을 냈을 때 성옥이 꽃이라고 하자 정호는 꽃이 아니라며 뭐냐고 다시 묻는다. 성옥은 그때 현명하게도 다른 대답을 찾는다. “이름도 아니고 예쁜 색깔도 있고 모양도 있고 자기가 살려고 하는 그런 것도 보이고 그런데 꽃의 마음은 안 보이네요. 내가 사랑하는 거지요. 꽃을”이라고 한다. 꽃이라는 ‘존재’를 보는 정호와 성옥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정호는 이 사물이 무엇으로 규정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고 성옥은 아예 인식을 통째로 바꾸어서 이 사물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아닌가로 대답하고 있다. 성옥식으로 <옥희의 영화>를 보는 게 좋겠다. <하하하>의 이순신(김영호)은 더 간명하게 물었다. 그는 나뭇잎을 흔들며 문경(김상경)에게 묻지 않았던가. 넌 이게 뭘로 보이니. 문경이 나뭇잎이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나뭇잎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뭔지 아는 건 또 중요한 게 아니라고도 했다. 홍상수는 지금 우리 눈앞에 대고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을 흔들며, <옥희의 영화>를 흔들며 이렇게 묻고 있다. 여러분 <옥희의 영화>가 뭘로 보이시나요. 역시나 우린 몰라도 괜찮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원래 모르는 거다. 그냥 다르게 좀 느끼고, 그리고 감사하면 그게 끝이다”(<하하하>의 이순신”, 아니 “원래 이 세상에 중요한 것들 중에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건 없다”(‘폭설 후’의 문성근).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홍상수, 門을 제작하는 사람

느껴야 할 것은 <옥희의 영화>에서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아무것도 아닌 중요한 무언가라는 점이다. <옥희의 영화>가 어떤 잊지 못할 오롯한 느낌을 일으키고 있다면 그건 규정할 수 없는 그 활동성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명사형으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다가도 동사형으로 접근하고자 할 때 무언가 훅 하고 느낌상 다가올 때가 많은데, 앞서 초현실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실은 그의 영화는 활동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초활동적이라고 불러야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우린 홍상수 영화의 그 활동이 얼마나 첩첩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에 관한 활동의 모형을 한 가지만 말했으면 싶다. 나는 ‘도형인’ 홍상수의 영화에 관하여 기하학적으로 느끼는 것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갖고 있다(“비평적으로 말하자면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는 대수학이라기보다는 기하학의 구도를 가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정성일). 하지만 그의 기하학이 유클리드적인 기하학에만 관여되는가에 대해서는 다르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인물들 사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말하자면 유클리드적인 방식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정성일).

<옥희의 영화>에 관한 한 홍상수의 기하학은 유클리드적이지 않고 프랙탈(Fractal)적인 것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아마 당신도) 과학적 개념에 유능하진 않으니 프랙탈이라는 용어를 더 섬세하게 말하고 치밀하게 쓰기보다 자연의 활동하는 모형에 대한 일단의 인상으로서 받아들여 말하고 싶다(그러므로 그림3 참조). 가령 삼각형 안의 중첩된 삼각형들, 눈꽃송이, 난류, 동양회화의 어떤 붓놀림, 그러니까 닮은꼴 도형이나 이미지가 끝없이 연쇄를 만드는 것인데, 이때 프랙탈한 것의 성질로서 중요한 건 이 유사한 도형이나 이미지들이 접고 펴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무한정으로 자기를 새로 조직하고 자기 발생적인 비정형적 활동이 된다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어렵다. 그럼, 우린 홍상수식으로 이해하면 된다.‘첩첩심상’(疊疊心象). 이선균들, 정유미들, 문성근들은 말하자면 겹치고 펴지며 전개되는 프랙탈적인 삼각형과 사각형과 원이라는 첩첩심상에 해당할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그런 점에서 프랙탈한 초활동성 또는 첩첩심상의 어떤 핵심적 모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림3>프랙탈 이미지

자칫 딱딱한 개념설명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고 자세히 풀어내자면 별도의 장이 필요하고 또 그럴 능력에도 못 미치니 우린 이쯤에서 본래 궤도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다만, 이 낯선 용어를 꺼낸 데 절실한 이유가 있음은 말하고 싶다. 홍상수의 영화가 프랙탈적인 초활동성을 지녔다면, 이때 그의 영화가 다름 아니라 영화의 생태라는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직감하고 만들어지고 있음은 말해두고 싶다. 영화의 생태라니,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겠지만, 말 그대로 생태, ‘생물이 살아가는 모양이나 상태’다. 프랙탈은 이론적 의미보다는 유기체가 살아가는 새로운 무한 환경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말할 때 더 가치가 있는 것 같은데, ‘주문을 외울 날’에서 남진구는 자기 영화의 지평을 “살아 있는 무언가와 닮은 영화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홍상수 영화와 공유되는 바가 있다. 살아 있는 무언가와 닮은 영화를 유기체적인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옥희의 영화>는 형식 자체가 그 유기체적 자기 조직성으로 전망을 모색할 뿐 아니라, 이상하게도 지금과 같은 영화 생태계(‘주문을 외울 날’의 송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돈, 돈, 돈 하며 썩어 빠진” 영화 생태계)에서 유기체로서의 영화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순결에 가까운 자기 모험적 정신이 극한에까지 서려 있는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가 윤리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라면 실로 이 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옥희의 영화>에 밴 저 뜻모를 쓸쓸함과 고독함은 그러니까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필시 이런 영화 생태계 안에서 그의 영화적 생존과도 관련이 깊어 보인다. 물론 이것이 이 글의 요점은 될 수 없겠으나 주의 깊게 생각해볼 만한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지금은 <옥희의 영화>의 어떤 구체적 활동에 관한 부분으로 돌아가야겠다.

<옥희의 영화>의 구체적 활동이라면 그건 통과하는 것이다. ‘통과한다’, <옥희의 영화>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인상이 이것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통과하며 어떻게 통과한다는 말인가. 무수히 많은 문이 있고 그 문들을 통과한다. 그럼 어떤 문들인가. <생활의 발견>의 내용을 빌리자면 회전문(<생활의 발견>의 영어 제목)들이다. <옥희의 영화>에서 통과하는 활동은 회전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문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기필코 비유에 속할 수 없다. 그건 문이지 입구나 출구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문은 실외로 나가는 출구나 실내로 들어오는 입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문을 열면 또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또 문이 있는 통로의 막에 해당한다. 제자리를 돌게 하는 문, 그러나 돌아와 같은 자리에서 다시 열면 결과가 달라지는 문, 그런 회전문이자 차이의 문이다. 홍상수는 “아차산이 왜 아차산인 줄 아나”라고 묻더니 “아름다운 차이가 있는 산이라서 아차산이다. 하하하” 했다. 아니 뭐 이런 썰렁한 농담이 다 있나 싶지만 사실이다. 아차산도 회전문이다. 그러고 보니 별안간 시 한줄이 떠오른다. “당신은 文을 제작하는 사람./나는 門을 제작하는 사람”(이민하의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중에서 ‘문제작’).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건 그 반대인 것 같다. <옥희의 영화>를 보니 더 확연하다. 당신은 門을 제작하는 사람. 나는 文을 제작하는 사람. 홍상수의 영화는 늘 “문제작”이다.

첫 번째 회전문은 전작 <첩첩산중>이다. <옥희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관계는 스승(문성근)과 애제자(이선균), 그 사이에 애제자이면서 여인(정유미)이라는 식의 유사 관계의 꼴로 전작 <첩첩산중>을 한번 통과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소설계가 아닌 영화계라는 점이다. 두 번째 회전문은 소문이다. <극장전>에서 배우 최영실에 대한 소문은 끝내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여기서는 아예 떠도는 소문들 중 밝혀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송 선생은 돈을 받거나 안 받았을 것이고, 남 진구는 과거에 연애를 했거나 안 했을 것이다. 그게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소문이 회전문이 되어 서사를 통과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 장소도 회전문이 된다. 문자 그대로의 문이 있다. ‘주문을 외울 날’ 첫신에서 남진구가 아내와 함께 출근하는 파란 대문 집이 있는데, ‘키스왕’마지막 신에서는 옥희가 진구에게 메리크리스마스라고 말하는 집이 그 집 문 앞이다. 두 장면은 같은 곳에서 촬영됐다(이 영화는 각장이 이어질 때마다 매번 파란색 대문이 있다!). 네 번째는 배우의 육체 자체가 회전문이 되는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이선균이라는, 정유미라는, 문성근이라는 배우의 육체를 문으로 놓고, (남)진구, (정)옥희, 송 선생이라는 인물들이 통과, 회전해 나간다. 도형으로 상상하자면 원(이선균) 하나를 두고 삼각형(진구1)이 통과하여 원-삼각형(진구2)이 되고, 다시 사각형이 통과하여 원-삼각-사각형(진구3)이 되고, 다시 별(진구4)이 통과하여, 원-삼각-사각-별(진구4)이 되는 그런 것이다. 물론 이중에서도 여인(옥희)이라는 존재는 더 결정적인 회전문이 된다.

여기서 문제는 좀더 복잡할 수도 있는데, 가령 배우가 서로를 통과할 때가 그렇다. 가령 도형으로 칠 때, 이선균이라는 도형과 문성근이라는 도형이 서로를 통과할 때다. 그런 예는 많겠지만, 한 가지만 들어보자. ‘키스왕’에서 옥희의 친구는 “근데 그 나이 많은 남자는 누구니?” 하고 옥희의 연애 상대를 묻는데, 그때 친구가 의미상으로 가리키는 건 ‘키스왕’에서의 송 선생이다. 하지만 우린 동시에 그와 유사한 과거 소문으로 괴로워하던 ‘주문을 외울 날’에서의 남진구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남진구를 연기했던 이선균은 그런 대화가 오가는 그 시각에 옥희의 집 앞에 지금 앉아 있는 또 다른 진구도 연기한다. 옥희의 친구가 의미상 송 선생을 가리킬 때 우린 문성근의 육체를 떠올리지만, 의미상으로 진구도 환기되기 때문에, 떠올려진 문성근의 육체를 이선균이라는 육체가 또 통과한다. 이런 상황들을 거치면서 네개의 장의 인물들은 누가 누구라 규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 ‘옥희의 영화’다. <옥희의 영화>를 단순히 1인4역의 각각 별도의 네 이야기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홍상수는 미리 주어진 정보와 인상을 전제로 존재와 배우의 육체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뇌의 활동을, 무언가 동시 다발적 비논리의 질서로 묶어내고 있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에 주목하라

그런데 <옥희의 영화>에서 새롭게 주목할 만한 회전문이 하나 더 있다면 그건 다음과 같은 문이다. 사물이나 육체가 아니라 목소리, 회전음(回轉音)이라고 부를 만한,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옥희의 영화>에서 가장 많이 가장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사용된 것은 <극장전>의 상원(이기우)이 처음인데 <옥희의 영화>는 지금까지의 영화 중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가장 많이 쓰인 영화다. 물론 <옥희의 영화>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쓰임은 때에 따라 다르다. 심리를 설명할 때가 있고, 단순하게 시간 경과를 알릴 때가 있고, 눈앞의 이미지의 사실과 거기에 덧입혀진 목소리의 사실을 서로 불일치시켜 기이한 운율을 일으킬 때(‘옥희의 영화’에서 정자 앞의 장면)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건 앞신에서 퇴장한 인물이 시간을 생략한 채 바로 뒤의 신에서 등장할 때다. 대개는 그 사이에 짧은 인서트가 하나 있거나 아예 숏과 숏으로 붙는다. 이때 앞과 뒤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다.

한 가지, 홍상수 영화에서 화면 밖 사람의 목소리는 어떤 사람의 퇴장이나 재등장에서 중요한 정서를 담당할 때가 있다. ‘화면 밖 사람의 목소리’라고 말한 이유는 그게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일 수도 있고 비디제시스 사운드(서사 공간 바깥의 사운드)로서 사람의 목소리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후자의 경우는 대개 전화 음성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육체보다 전화 음성으로 먼저 등장하는 춘천의 선배 성우를 생각하자. 화면 바깥의 음성이 그렇게 있을 때 거기엔 인간관계의 새 출발 또는 종식과 재정리라는 문제가 끼어 있다. 말하자면 화면 바깥의 목소리가 일종의 서로 다른 계를 잇는, 관계의 접속지대 혹은 통과지대라고 할 만한 것을 마련하는 데 꾸준히 이용되어왔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이후에 홍상수 영화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마치 우리가 필름 룩과 디지털 룩이 좀 다르다고 말하는 것처럼 필름 보이스와 디지털 보이스가 다소 다르다. 후자는 확실히 화면 전체를 뒤덮는 그러나 덤덤하고 편평한 목소리로 들려온다. 물론 그것은 분명 기술적인 상황 때문이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주는 정서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하하하>에서 몇몇 필자가 이 영화에서 죽음을 본 것에 대해, 실은 나는 온전히 영화에 의존하여 말하자면 흑백의 스틸 사진 때문이 아니라 그 위로 입혀진, 아니 화면을 뒤덮은 마치 다른 ‘계’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목소리의 편평한 느낌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허공에서 들리는 무심하고 흔들림 없는 독백.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있는데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미지의 시제, 시간성을 한순간에 흔드는 건 이미지가 아니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일 수도 있고, <옥희의 영화>에 그와 같은 감탄할 만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옥희의 영화>의 ‘옥희의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그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활동에 대해서 아직은 이 장면의 감흥을 고백할 뿐 어떤 장면이라 설명해서는 안될 것 같다(<옥희의 영화>의 기이한 포스터는 이 장면의 감흥에서 제작됐다). 마치 <극장전>의 후반부에서 감독 이형수의 존재가 밝혀졌던 놀라움에 버금간다는 것만 말해두자. 다만 그때의 장면이 무서움을 가져왔다면 지금 이 장면은 쓸쓸함 그리고 그 쓸쓸함 너머의 감정으로 가득하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갑자기 한 쇼트안에서 시간의 블랙홀을 만든 다음 어떤 인물의 퇴장과 재등장을 일순간에 이루는데, 이 비밀은 앞으로 제출될 평문들이 밝혀주기를 기대하고 나는 단지 이때 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새로운 회전문이자 회전음이며 우주의 선인 것처럼 느껴졌다, 고 감탄할 뿐이다.

<옥희의 영화>가 영화다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자신의 작품세계를 풍성하게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현재를 지탱하기 위해서 기필코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짙게 준다. 전작 <하하하>가 녹음이 짙게 우거진 풍성한 숲이었다면 <옥희의 영화>는 처연한 겨울 눈밭 한가운데 정중하게 서 있는 잘생긴 겨울나무 한 그루다. 음악적으로 <하하하>가 아름다운 협주곡이라면 <옥희의 영화>는 강렬한 독주곡이다. <하하하>가 풍요로운 마음의 영화라면 <옥희의 영화>는 간절한 뇌의 영화다. <하하하>가 타자를 향해 고개를 드는 영화라면 <옥희의 영화>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영화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더 솔직한 나의 감정을 말하며 이 고백을 마치고 싶어진다.

정성일은 홍상수와의 기념비적인 대담에서 <옥희의 영화>에 관하여 “맹세코 장담할 수 있는데 <옥희의 영화>는 너무 슬퍼서 보고 나면 누구라도 눈물을 닦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감정을 이해할 것 같다. 다만 나는 내가 느낀 다른 감정도 고백하고 싶다. <하하하>가 행복을 지향하지만 행복의 영화가 아니라 행복 직전의 영화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옥희의 영화>는 내게 슬픔의 영화가 아니라 슬픔 너머의 영화인 것 같다. <하하하>가 행복을 기다리며 애쓰는 사람들의 영화인 것처럼 <옥희의 영화>는 슬픔에 지지 않고 잘 참는 사람들의 영화인 것 같다. 슬픈 것인가. 아니 감당할 수 없이 차오르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는 그저 활동적 감동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홍상수 영화의 감정을 만드는 실체다. 무엇이 차오르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되풀이하자면 하여간 차오름이라는 그 활동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감동적인 것이다. 그것에 관하여 나는 지금까지 관람차와 다다를, 홍상수 영화의 아무것도 아닌 것과 <옥희의 영화>의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 활동과 통과함을, 혹은 회전문들을 놓고 돌고 돌며 경험하길 원한 것이다.

순수하겠다고 이를 물고 마음으로만 버티면 질 수밖에 없다. 그 순수는 통하지 않는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남진구가 학생에게 호통을 칠 때 한 말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 그는 인위 없이는 순수를 전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이 홍상수의 것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옥희의 영화>가 마음만, 순수만,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영화가 결코 아닌 것으로 그걸 확인할 수 있다. 인위에 대한 필요를 인정하고 그러나 거의 요체라고 해야 할 만큼 그것을 압축하여, 뇌의 동력을 모조리 다 활동하게 하여, 지탱하면서도 진전함으로써 우리에게 일으키는 깊은 감정적 동요가 <옥희의 영화>에 있다. 홍상수 영화의 날이 갈수록 더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일단의 감정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의 반응으로서의 활동으로 영화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나는 <옥희의 영화>가 슬픔에 반응하는 영화라고 느낀다. 슬픔이 아닌 그에 대한 반응이라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애상에도 쓰러지지 않는 격조라고 생각한다. 격조라고 말하고 나니 기품이라고도 말하고 싶어진다. 어, 이런 감정인가, 그럼 영화로 만들면 어떻게 되지, 하는 그런 반응. 그 반응을 더 선명하게 이름 짓지는 못하겠으나 그 행위는 용감하다. 용감함, 마침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슬픔에 반응하는 위풍당당함이다. 그 모든 소란스러움을 뒤로한 채로 빠르지 않지만 기품있게 활동하는 행위. 음악이 <위풍당당 행진곡>이어서가 아니라 이 영화의 리듬과 이 음악의 리듬이 동류의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길고도 긴 고백은 여기가 끝이다. 영화 속 겨울나무는 아주 잘생겼고 <옥희의 영화>는 신비롭다. 아니, 나는 언젠가 어딘가에서 영화란 신비다, 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그러니 <옥희의 영화>가 얼마나 신비한 영화인가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니, <옥희의 영화>가 영화다.

홍상수의 첩첩심상(疊疊心象) <옥희의 영화> 1/4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1] 2/4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2] 3/4
[홍상수]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 서로 기댄 세 개의 막대기처럼 4/4
글 : 정한석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홍상수]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 서로 기댄 세 개의 막대기처럼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 2010.09.16

홍상수 감독, 13회차 촬영으로 완성된 <옥희의 영화>를 말하다

-지난해 여름 <하하하>를 찍고 얼마 여유를 두지 않고 단 4명의 스탭과 함께 13회차 촬영으로 <옥희의 영화>를 만들었다. 원래 가벼운 행장으로 영화를 찍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이번은 특수한 경우로 보인다.
=<하하하>의 마무리도 끝나지 않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기 중간이었다. 몸은 많이 피곤했고 투자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약속된 배우도 없었다. 보통 같으면 전혀 영화를 찍을 형편이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장편이냐 단편이냐는 둘째치고 완성 못해도 좋으니 뭔가 찍고 싶더라. 이렇게 모든 조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를 찍으면 무엇이 나올지 보려는 마음이 있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이후로는 훨씬 자유로워질 거라는 생각을 한 건가.
=어떤 상황이 되어도 찍을 수 있다는 자기 확인의 의미도 물론 있었지만 그건 부수적이고, 모든 조건이 적대적일 때 내 안에서 뭐가 나올지 궁금한 마음이 제일 컸다.

-배우와 스탭에게 완성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했나. (웃음)
=그런 말은 안 했지. (웃음) 거짓말 한 건 아니고 밀고 나갈 의지는 있었으니까. 준비가 없어도 너무 없으니 도중에 막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이선균씨에겐 미안하지만 일주일에 이틀만 시간을 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고맙게도 영화에 대해 아무 정보없이 허락해주었다.

-4편으로 구성된 <옥희의 영화>의 작명법은 수록 단편 중 한편의 제목을 전체 제목으로 삼는 단편소설집의 그것 같다. 초기에는 이 영화의 가제가 <사친>(思親)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사친’(思親)은 이 영화와는 관계가 없고, 다만 내가 영화를 찍는 어떤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허구적인 사고의 틀에서 자유로워지는 제일 적극적인 방법이 내게 가까운 것들을 갖고 생각하는 거라고 믿는다. 나나 생활, 주변의 작은 일들을 통해 바라볼 때 ‘틀’의 허구성이 보이지 않나. <옥희의 영화>는 깊이 생각해 정한 제목은 아니고 그저 다른 제목이 내키지 않았다. 각편의 제목은 첫신 찍는 아침에 정해지기도 하고 당일 촬영분 편집을 하면서 떠오르기도 했다.

이선균에서 시작해 정유미, 문성근까지

-<옥희의 영화>를 구성하는 네 단락은 독립된 단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옴니버스의 에피소드도 아니다. 뭐라 부르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나. ‘편’? ‘부’?
=‘부’는 너무 한 덩어리로 전체가 모이는 느낌이고, ‘편’이 좋겠다. 어느 정도 독립성도 느껴지고.

-<옥희의 영화>를 보고나면 2-3-4-1편 또는 1-2-3-4편 순서로 찍은 것 같지만 실은 1-2-4-3 순서로 찍었다. 1편을 찍은 뒤 2편 그리고 4편의 필요성을 느낀 과정과 최종적으로 3편이 있어야 완결된다고 판단한 경로를 순서대로 설명해달라.
=우선 이선균씨와 하기로 정하고 촬영 이틀 전에 영화의 대강을 두세장에 썼다. 좌충우돌하는 한 남자의 겨울날 하루의 이야기 정도의 틀을 생각했다. 찍으면서 그 장면들이 늘어지면 영화 한편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편집해보니 27분 정도밖에 안됐다. 뭘 더하라는 뜻 같았다. 여기 정유미씨가 더해지면서 <첩첩산중>의 구도를 소진시켜보자는 생각이 떠올라 1편에 나와준 문성근씨를 다시 섭외했다. 그것이 2편 ‘키스왕’이 됐다. 2편의 중간쯤까지 갔을 때 장편까지 가볼까 생각이 들었다. 1, 2편에서 문성근씨가 연기하는 송 교수가 완전히 다르고 2편에서 옥희(정유미)와 송의 관계가 암시되니까 그것을 더 풀어줘야 할 것 같아 4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몇분부터 장편으로 간주되냐고 주변에 물어보니 80분이라고 하더라. 1, 2, 4편을 편집하니 80분이 안됐다. 그래도 긴 중편으로 남긴 채 더 건드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꼭 중편이나 장편이 돼야 한다는 압박은 어느 쪽도 없었다. 많은 돈을 들이지도 않았고 배우들도 양해해줄 터였다. 그런데 마침 103년 만의 폭설이 내렸고 3편이 바로 떠올랐다. 아침에 일어나 3편 대본을 쓰다가 송 교수가 나와야 한다는 판단이 들어 문성근씨에게 전화를 했다. 안 받더라. 연락을 기다리며 계속 썼다. 40분 뒤 전화가 왔고 나와달라고 해서 그날 오후에 바로 3편을 찍었다. (웃음) 1편이 6회차, 2편이 4회차를 찍었고 3편이 하루에, 4편은 2회차 촬영했다.

-각편이 시작할 때마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과 함께 출연자 크레딧을 꼬박꼬박 넣었다. 일부러 마디를 노출시킨 거다. 이렇게 중간에 경계를 그어도 하나의 장편으로 설 수 있는지 보겠다는 의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마디마다 넉넉하게 쉬고 싶었다. 죽은 시간이 될까봐 걱정도 했고, 제스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각편이 다른 영화임을 표시하고 하나의 영화가 시작되는 형식을 약식으로라도 주고 싶었다. 배우들의 이름도 반복해 보여주고 싶었다. 세 주연배우의 크레딧 순서는 각편에서의 비중에 따라 편마다 다르게 배치했다. 학교 연구실 테이블에 출연진 이름을 쓴 A4 용지를 놓고 <위풍당당 행진곡>을 틀어놓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소형 디지털카메라를 움직여 내가 찍었다.

-유독 4편의 크레딧만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의 이름을 한번 비춘 다음 다시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 이름을 반복해 보여주던데.
=편집하고 보니 장편이 되기에 약간 시간이 모자라서 그랬다. (좌중 웃음)

-각편의 시작과 끝에 두 가지 편곡의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썼다. <극장전>의 <라데츠키 행진곡>이나 <밤과낮>의 <베토벤 교향곡 7번>처럼 전형적인 곡을 가져다 쓴 경우다. 황량하고 일상적인 영화의 앞에서 “당신이 볼 이 모습이 진짜 장엄한 거다”라고 선언하는 기분도 든다.
=<옥희의 영화>를 만드는 초기에 그 음악에 꽂혔다. 원래 좋아하던 곡을 오랜만에 들었는데 더욱 좋았다. 이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듣고 있던 음악이고 그 곡이 내게 준 만족감과 쾌감이 있으니 영화(를 만드는 나의 상태)와 이 음악은 당연히 연결돼 있다고 본다.

구조, 그리고 리듬의 조율, 간결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차이와 반복으로 구성된 세계를 매번 달리 설계한 구조를 통해 드러내왔다. <옥희의 영화> 설계의 핵심은 인물들의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우들은 자신의 인물을 동일인이라고 여기고 연기했나.
=인물의 내면, 각편의 관계를 설명한 적은 없다. 나도 마지막으로 ‘폭설후’를 쓸 즈음에야 구조를 알았다. 배우들도 추측은 했겠지만 어떤 영화인지 몰랐을 거다. 내가 해준 거라고는 2편과 3편에서 문성근씨의 옷차림을 조금 다르게 주문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연출이었다. 대사를 보고 “동일인이 아닐 수 있겠다” 짐작했을 수는 있지만. 대사 톤이 잘못됐다면 개입했겠지만 그런 경우가 없었다.

-1편 ‘주문을 외울 날’부터 영화를 따라가기로 하자. 영화를 여는 첫 대사가 무려 “떼다보목지질케나봉바”다. (웃음) 그리고 이어 아내가 남편을 엉뚱한 남자의 이름으로 잘못 부른다. 1편의 도입부를 찍을 무렵엔 이 영화가 인물의 동일성을 회의하는 이야기가 될 거라는 계획도 서 있지 않았을 텐데 절묘하게 영화 전체와 어울리는 대사다.
=(웃음) 남진구(이선균)는 자기 주문을 만들어놓고 사는 남자고 아마 하루를 잘 지내보자는 뜻으로 그걸 왼 거다. 이름을 잘못 부르는 대사는 계산하고 쓴 건 아닌데, 한 영화를 만드는 동안 정해진 대상과 계절과 조건이 있으니 내가 무엇을 떠올리든 그 원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뒤에 찍는 내용이 이미 찍어놓은 것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전에도 먼저 찍은 것이 우연히 뒤쪽 내용과 맞아떨어지곤 했다.

-1편에서 영화과 강사인 진구는 “인위를 통해 진심을 전해야 해”라고 가르친다. 홍상수식으로 말하자면 인위는 ‘구조’인가.
=구조, 그리고 리듬의 조율, 간결화 등등 타인에게 진심을 전하기 위해 의존해야 하는 인위적 틀이 오만 가지 있다. 중간에 틀이 있어야 진심이 전달되지 100% 날것으로 그냥 말하면 도리어 타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진부함에 질려 귀를 막을 수도 있고 장광설에 질리거나 엄격하지 못한 자기 연민이 꼴보기 싫어 도망쳐버릴 수도 있다.

-2편 ‘키스왕’의 도입부는 명백히 1편이 <극장전>의 전반부처럼 영화 속의 영화였는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준다. 그러나 끝까지 확증은 제공되지 않는다.이처럼 네편의 상호 관계를 암시하는 동시에 지워버리는 괴상한 ‘고리’들이 있다. 예컨대 1편의 진구의 집이 2편에서 옥희의 집인데, 진구는 옥희의 집을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1, 2편과 3편에서 송 교수는 같은 인물 같은데 다른 지위와 성격을 가진 교수이기도 하다. 즉 이 영화는 네 단편 사이에 복잡한 관계를 만든다기보다 어떤 관계도 불가능하도록 피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는 인상이다.
=<옥희의 영화>를 구성하는 네편의 관계를 깔끔히 정리할 수는 없을 거다. 토막인 동시에 독립적이다. 다만 세 인물의 관계가 주는 정서는 일관되게 간다. 내 전작들은 관객에 의해 구조적으로 다시 꿰맞추어지는 영화들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반발이 있었고 그게 주는 쾌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서만 일관되고 관계는 비논리적으로 겹쳐지게 하면 인물들이 확장되는 느낌이랄까. A라는 사람이 B 같기도 하고, 충분히 구체적인 인물이지만 고유한 단일 정체성은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 보인다. 세 사람 모두가 섞여서 만든 뿌연 그림이 인간들 전체로 확장되는 것 같은. 그럼으로써 한 인물의 일면은 구체적인데 영화 전체를 의식하며 그를 바라보면 옆에 있는 인물과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나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1인다역이다. 보통 영화에서 1인다역이라면 한 배우가 변신해 전혀 다른 인물을 표현하는 연기인데 <옥희의 영화>는 그냥 한 인물을 연기해도 그것이 다른 상황과 앙상블 안에 있으면 다른 인간으로 보임을 거꾸로 증명한다. ‘키스왕’의 ‘교수-그와 사귀는 여자 제자-제자의 남자친구’라는 구도는 <첩첩산중>과 같고 배우도 동일하다.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의 조합에서 어떤 기운을 보나.
=서로 기댄 세개의 막대기 같다. A의 머리는 B의 등에 기대고 B의 머리는 또 C의 어깨에 기대고 하는 식으로 편하게 있는 기운이 포착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옥희의 영화>가 <첩첩산중>의 미래라든지 백그라운드 스토리인 건 아니다. 정서도 진구와 옥희의 분위기는 <첩첩산중>의 그것보다 건조하다.

-2편에서 벤치에 놓인 우유팩을 보며 진구가 그것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를 알면 우주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김승우)가 언급했던, 모든 우연을 연결하는 선을 연상시킨다.
=젊은 친구의 사고유희다. 극소한 부분도 거기에 위치함으로써 그를 중심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의 위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수많은 관념틀과 전체를 쳐다보는 데에 지친 젊은이가 선(禪)을 하듯 눈앞의 작은 것만 제대로 보면 연결된 모든 걸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3편 ‘폭설 후’는 휴강한 교실에서 진구와 옥희와 송 교수가 일문일답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대로 답이 안된 채로 다음 질문으로 계속 넘어가는 이 장면은 낙지를 토하는 장면과 함께 초현실적인 느낌을 불어넣는다.
=지난겨울 103년 만의 폭설이 왔고 촬영날 아침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폭설 후’라는 제목을 정했다. 텅 빈 교실에서 선생이 학생들이 오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다음엔 셋이서 뭘 할 것인가. 교수가 학교를 그만둘 마음이니 개인적이거든 근본적인 거든 잘 안 물어봤던 질문을 뭐든 맘대로 물어보라고 할 것 같았다. 그러고는 겨울 골목에서 혼자 걷다 상투적인 뭔가를 토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4편 ‘옥희의 영화’에서는 송 교수와 진구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이든 남자’, ‘젊은 남자’로 지칭한다.
=일단 옥희가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려고 이 영화를 찍었다는 전제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사람으로서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억지로 가짜 이름을 짓는 것보다 거짓말을 안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 그렇게 부름으로써 개인의 정체성이 세 인물 테두리 바깥으로도 퍼지고 섞이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옥희의 영화> 포스터는 옥희와 진구의 흑백사진 귀퉁이에 홍 감독이 펜으로 그린 송 교수의 얼굴이 들어간 디자인이다.
=4편을 아차산에서 촬영하는데 한 어른이 지나가다 배우들 사진을 한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새로 산 카메라로 풍경을 찍어보려고 산행을 왔는데, 자제분이 좋아하는 이선균씨를 알아보고 만났다는 증거를 남기려고 사진을 찍으신 거다. 그런데 이분이 알고보니 내가 일하는 건대에서 정년퇴임한 교수님이셨다. 나중에 연구실로 배우들과 나를 위해 뽑은 사진 세장을 갖고 오셨다. 내 몫의 사진을 벽에 붙여두고 물끄러미 보다가 장난치듯 무심코 거기 빠진 문성근씨를 그려놓고 ‘옥희의 영화’라고 썼는데 그것이 포스터가 됐다. (웃음)

절감(節減), 절감(切感)

-4편 말미에는 감독인 옥희의 내레이션이 있다. “배우 해주실 분은 최대한 원래 모델이 된 분과 비슷한 인상의 분을 선택했습니다. 그 비슷함이란 한계 때문에 제가 원래 보고 싶었던 붙여놓은 두 그림의 효과를 절감시킬 것 같습니다.” 이것은 둘로 이해된다. 비슷해봤자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효과가 절감(節減)됐다는, 즉 영화매체의 한계에 관한 말 같기도 한 반면, 동일하지는 않고 비슷하기 때문에 형상화의 효과를 절감(切感)할 수 있었다는 표현 같기도 하다.
=실제로도 두 번째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나 역시 이상한 어감 때문에 그렇게 쓴 면도 있다. 어쨌든 옥희가 의도한 건 첫 번째다. 영화를 통해 두 그림을 나란히 붙여놓음으로써 자신이 기억하는 것 이상을 보고 깨닫고 싶었는데, 즉물적 느낌이란 진짜를 붙여놓아야만 알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부족했다는 뜻이다. 이 내레이션으로 인해 세 인물은 갑자기 다 배우가 되어버린다.

-다음 영화는 전북 부안에서 찍는다고 들었다.
=겨울에 찍을 듯하다. 원래 <옥희의 영화>를 만들면서 다음 영화는 반팔 입고 8월에 찍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옥희의 영화>가 9월에 개봉하면서 어려워졌다. 막상 올 8월이 너무 덥고 비도 많이 와 잘됐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홍상수의 첩첩심상(疊疊心象) <옥희의 영화> 1/4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1] 2/4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2] 3/4
[홍상수]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 서로 기댄 세 개의 막대기처럼 4/4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