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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중국2010.10.25 19:37

[유상철의 차이니즈 리더십] 중국 차기 1인자 ‘시진핑’ [중앙일보]

오늘의 시진핑을 만든 건 쩡칭훙이다

입력시각 : 2010-10-23 오전 12:15:00





‘십년하동 십년하서(十年河東 十年河西).’ 황허(黃河)의 물이 10년은 동쪽으로 흘렀다가 또 다른 10년은 서쪽으로 흐른다는 말이다. 세상 일이란 게 어느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걸 일깨워준다. 시진핑(習近平·57)이 18일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올랐다. 13억 중국의 1인자가 되기 위한 3개의 포스트 중 당(정치국 상무위원, 서열 6위)과 국가(부주석)에 이어 군에서도 마지막으로 후계자 준비를 마쳤다. 시진핑의 등장은 후진타오(胡錦濤) 정권과는 다른 세력의 부상을 의미한다. 후 주석의 권력 기반이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이었다면 시는 태자당(太子黨·중국 고위 관료 자제 그룹)이다. 후 주석이 분배를 외치고 있다면 시는 분배와 함께 성장 또한 외칠 것이다. 시는 후의 전임자였던 장쩌민(江澤民)과 맥이 닿아 있다. 10년을 주기로 지도자가 변하면서 중국의 흐름에 다시 변화가 일 전망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3년 전 후진타오에게 밀려난 쩡, 치밀한 기획으로 ‘킹 메이커’ 역할




시진핑

시진핑의 오늘을 기획·제조한 주역은 바로 장쩌민의 오른팔로 불리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 부주석이다. 쩡은 후진타오 집권 1기(2002.11~2007.10)에 후진타오-원자바오(溫家寶) 등과 함께 트로이카를 형성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2007년 10월 개최된 제17차 당 대회에서 탈락한다. 67세 이상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수 없다는 연령 규정이 도입되면서 밀려났다. 연령 규정이란 사실상 명분일 뿐 타협과 갈등, 암투가 난무하는 복잡한 권력 게임에서 패배한 것이다. 후로서는 자신을 압박하던 장쩌민 세력의 대표 주자를 제거한 셈이었다. 당 서열 5위이자 국가 부주석이었던 쩡은 부단히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노렸다. 성사될 경우 후의 유고 시 언제든 1인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고 후진타오 집권 2기에 합류치 못하게 됐다.

 쩡은 퇴진에 앞서 후진타오 10년 이후의 강산을 되찾아 올 인물을 물색했다. 평소 선대부터 집안 간 왕래가 있던 시진핑이 부각됐다. 둘은 1970년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함께 근무한 적도 있었다. 쩡은 부총리 위추리(余秋里)의 비서로, 시는 국방부장 겅뱌오(耿<98C8>)의 비서로서였다. 장쩌민 집권 초기 양상쿤(楊尙昆)-양바이빙(楊白<51B0>) 형제의 군부세력인 양가장(楊家將)을 깨고, 또 베이징(北京)파의 천시퉁(陳希同) 세력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낸 게 쩡칭훙 아니었던가.

 쩡은 시진핑을 차기 지도자로 옹립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2007년 6월 베이징의 중앙당교(中央黨校)에서는 최고위 간부 400여 명이 참석한 당원지도간부회의(黨員指導幹部會議)가 개최됐다. 차기 정치국 위원으로 누가 좋은가에 대한 추천 투표가 진행됐다. 그 결과 상하이 당서기이던 시진핑이 1위를 차지했다. 쩡의 치밀한 계획이 작용한 결과였다.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하는 건 우리가 당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표준이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 시진핑을 강력하게 밀면서 쩡칭훙이 했던 말이다. 순식간에 후진타오에 의해 1인자로 양성되던 리커창(李克强)이 시진핑에게 추월당하는 순간이었다. 쩡은 자신이 중국의 최고 집단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물러나면서 시진핑, 허궈창(賀國强·서열 8위) 당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저우융캉(周永康·서열 9위) 당중앙정법위원회 서기 등 세 명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시진핑, 중국 각 파벌이 받아들이기에 가장 무난하다는 평가

시진핑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서열 6위, 라이벌 리커창은 7위로 입성했다. 이제 예선전이 끝나고 본선에 해당할 후계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은 두 사람의 경쟁 관계를 비유하는 우스개 이야기 한 토막. 시진핑과 리커창이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그러자 시가 신발끈을 고쳐 맸다. 이를 보고 리가 비웃었다. 신발끈을 조인다고 호랑이보다 빠를 수 있겠는가라고. 시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호랑이보다 빠르진 못해도 당신보다는 빠를 것이라고. 리청(李成)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손턴차이나센터 연구주임이 소개한 내용이다.

 시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뒤 쩡칭훙이 차지하고 있던 요직을 두루 물려받았다. 홍콩·마카오 담당소조 조장에 이어 중국 엘리트 배출의 요람인 중앙당교 교장이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8년 3월 국가 부주석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리커창보다 빨리 뛰기 위해 노력했다.

 주위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쩡칭훙이 강조했듯이 중국의 각 파벌이 지도자로 받아들이기에 가장 무난한 인물이라는 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창의적이지 않을지 몰라도 침착하고 중후해 안정감이 있으며, 재능이 뛰어나지 않을지 몰라도 나름대로 패기가 있다는 것이다. 또 급진적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보수적이지도 않아 중국의 다양한 계파를 두루 감쌀 수 있다는 장점이 돋보였다. 특히 부총리를 지낸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의 후광은 넓고도 깊었다. 태자당만이 시를 지지하는 게 아니었다. 원로인 장쩌민, 차오스(喬石) 전 전국인민대표대회(국회 격) 상무위원장은 물론 심지어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 모두가 시중쉰을 존경하고 또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에겐 또 평민의 냄새가 난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중국에 “재상은 주부(州部·지방)에서 시작해야 하고, 맹장은 병졸에서 발탁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시는 문혁 당시 산시(陝西)성 농촌에서 “기절할 만큼 고된 노동”을 했다. 7년간이나. 이때 “누가 민중인지, 그리고 무엇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인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허베이(河北)성과 푸젠(福建)성에서는 기층 간부로 19년 동안 실무 경험을 쌓았다. 시는 또 차세대 리더 후보군 중 유일하게 군복을 입었던 인물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은 1989년 천안문 사태 뒤 장쩌민을 후계자로 키우면서 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5일 일하는 동안 4일은 군 지도부와 함께 보낸다”고. 군의 지지 없이 권력 장악은 없다는 얘기다. 중앙군사위 판공실 비서로 3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한 경험은 그에게 큰 자산이었다.

 그럼에도 1인자 후보가 장악해야 할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지난해 가을 열린 제17차 중국공산당 4차 전체회의(4中全會)에서 예상을 뒤엎고 부주석에 오르지 못했다. 쩡칭훙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외부에선 시가 후계자 경쟁에서 밀리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잇따랐다. 홍콩 언론을 통해 시가 스스로 부주석 자리를 고사했다는 변명을 흘렸지만 외부의 추측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올해 5중전회에서도 시가 군사위 부주석에 오르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가 돌았다. 9월에 북한에서 김정은이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됐는데 한 달 후 시가 군사위 부주석이 되면 중국이 북한을 따라 하는 것 같아 모양새가 우습지 않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차세대 후계 체제 확립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대세론 속에 시는 18일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오름으로써 사실상 2012년 가을의 제18차 당 대회에서의 1인자 자리를 예약했다.

“시, 분배보다 성장 강조할 것 … 동부 연안의 발전 지역 중시”

18일 폐막된 5중전회에서는 제12차 5개년 계획(2011~2015년)에 대한 건의서가 채택됐다.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수출 중심에서 내수 중심으로, 고에너지 소비에서 저에너지 소비로, 국가의 부(富) 증대에서 민간의 부를 늘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포용성 성장으로 사회정의 실현과 분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성장보다는 분배를 강조해 온 후진타오 정권의 일관된 계획이다. 그러나 시가 등장하면 분배도 분배지만 성장을 보다 강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리청 박사는 “시는 태자당과 동부 연안 발전 지역의 이익을 중시할 것”이라고 말한다. 장쩌민과 정책적 맥이 닿아 있어 발전을 더 추구하면서 자연히 외자 기업과의 관계도 후진타오 정권에 비해 더 개선될 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총리 자리를 맡을 것으로 알려졌던 리커창의 입지가 최근 많이 흔들리면서 역시 태자당 출신의 왕치산(王岐山) 부총리가 총리에 오르면 이 같은 기조는 더욱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근 원자바오 총리가 강조하는 정치개혁과 관련해서는 서방이 기대하는 다당제 등의 정치체제 개혁이 아니라 공산당 내의 민주화를 추구할 것으로 관측된다. 시의 등장 이후 남북한 관계 기조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입장에서는 남북한 모두 중국에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 등거리 외교를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2008년 6월 국가 부주석이 된 지 3개월 만에 첫 해외 방문지로 북한을 선택했다. 장쩌민 역시 당 총서기가 된 후의 첫 방문국이 북한이었다. 한편 시의 등장에 일본은 긴장하고 있다. 일본은 리커창 부총리의 동북 지역 발전 계획을 지지하면서 그동안 리에게 공을 들여온 데다 시가 대일 강경책을 구사했던 장쩌민과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은 시의 등장에 기대가 많다. 시가 미국에 적지 않은 친구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중국의 제5세대 집단지도부의 리더로서 시는 이변이 없는 한 2012년 가을부터 1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할 것이다. 그의 임기 말인 2021년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다. 2021년 7월 1일의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저 아시아의 대국으로서 만족하는 중국일까, 아니면 미국을 능가할 기세로 욱일승천하는 중국일까. 시진핑의 어깨에 큰 짐이 지어졌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글로컬 /중국2010.09.13 22:33

[유상철의 차이니즈 리더십] 장쩌민의 타협의 리더십 [중앙일보]

이상 - 현실 어긋날 때
이념 - 실천 충돌할 때
장쩌민은 ‘타협’ 택했다

입력시각 : 2010-09-11 오전 12:02:00

1989년 5월 63세의 상하이 당서기 장쩌민(江澤民)은 덩샤오핑(鄧小平)한테 1인자 자리를 통보받는다. 하지만 명색이 당 총서기였지 권력의 정상에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부는 리펑(李鵬) 총리가 꾸려가고 있었고, 양상쿤(楊尙昆)-양바이빙(楊白氷) 형제가 장악한 군은 멋대로 행동했다. ‘제2의 화궈펑(華國鋒)’이란 수군거림이 들렸다. 자오쯔양(趙紫陽)의 실각으로 생긴 공백을 잠시 메울 허수아비로 여겨졌다. 그러나 장은 무려 13년이나 권좌를 지켰다. 중국을 세계로 발돋움시킨 제3세대 리더라는 찬사도 들었다. 장쩌민은 과연 어떤 리더십을 발휘한 것일까.

장쩌민이 처음 중난하이(中南海)에 입성했을 때 그에겐 ‘화분’이란 별명이 붙었다. 주중 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릴리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움직일 줄은 모른다”는 뜻으로 설명했다. ‘장식용’이라는 말이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덩샤오핑이 사망하면 장쩌민은 리펑의 먹이가 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이런 예측이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당시 장쩌민은 1인자가 될 야심도, 또 준비도 전혀 돼 있지 않았다. 왕다오한(汪道涵)의 눈에 들어 상하이 당서기까지 되긴 했지만, 부총리 인선에서 이미 두 차례나 물먹은 터였다. 그가 눈독을 들인 자리는 모교인 상하이교통대학(上海交通大學)이었다. 교수가 되기 위해선 저서는 없더라도 번역서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장은 모스크바 유학 시절 알게 된 스승의 책을 번역해 출판하는 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하지만 당 총서기 자리는 그의 마지막 승부욕을 일깨웠다. 무엇보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베이징 정국에서 살아남는 게 먼저였다. 자신의 국정철학을 펼치는 건 그 다음이었다. 생존을 위해 장이 선택한 건 ‘타협’이었다. 바로 이 ‘타협의 리더십’은 장의 13년 중국 지배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장은 우선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가진 원로들의 마음을 사야 했다. 한데 문제는 개혁의 속도를 둘러싸고 원로들 진영이 갈려 있다는 점이었다. 1인자 덩샤오핑이 과감한 개혁을 주장하는 반면, 천윈(陳雲)은 ‘새(시장조절)는 새장(계획경제) 안에서만 날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은 두 원로그룹 사이를 오갔다. 천안문 사태 직후 보수파의 목소리가 높을 때는 천윈의 편에,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가 발표돼 개혁파가 힘을 받을 때는 재빨리 덩의 편에 섰다. 그런 장에게 바람 따라 나부끼는 ‘풍향계’라는 야유가 나왔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이 어긋나고 이념과 실천이 충돌할 때 지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장은 타협이라고 봤다. 그래서 보수세력이 고개를 들 때엔 노선을 말하고 정치를 이야기했으며, 개혁세력이 부풀어 오를 땐 경제를 논하며 개혁을 설파했다. 타협만이 당의 분열을 막고 자신의 지위를 지킬 수 있는 비방(秘方)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그가 당 총서기로 전격 발탁된 배경 또한 그의 탁월한 타협 능력이 인정받은 결과였다. 86년 상하이 학생운동을 그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전문을 원문으로 암송하는 것으로 무마시켰다. 89년 천안문 사태 때는 직접 메가폰을 들고 농성 중인 학생들을 설득해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상하이 시위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시위대와 진압군 양쪽을 오가며 타협을 이끌어낸 그의 리더십은 사실 어느 한쪽도 속 시원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극단의 충돌만큼은 피하게 했던 것이다.

베이징에 올라온 장쩌민으로선 동료들과의 타협 또한 절실했다. 말이 동료지 어제까지 상사였던 이가 대부분이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자인 리펑 총리는 장의 자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치안과 기율을 담당하는 차오스(喬石)의 경우 상하이 지하공작 시절부터 장의 2년 선배이기도 했다. 그래서 장은 주요한 연설의 경우 그 내용을 미리 동료들에게 돌려 의견을 구하는 절충의 방법을 택했다. 또 군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방에서 거울을 보며 군인처럼 절도 있는 걸음걸이를 연습했다. 복장에서도 타협의 철학을 구현했다. 그는 부대 시찰 시 군복 티가 나는 황록색의 인민복을 입었다. 군 출신이 아니기에 군복을 입는 건 주제 넘게 비칠 수 있었고, 그렇다고 양복을 입는 건 분위기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왼쪽)과 장쩌민.[중앙포토]
장쩌민의 타협의 리더십이 가장 빛을 발한 건 92년 14차 당 대회와 97년 15차 당 대회에서였다. 78년 개혁・개방 정책 채택 이후 늘 부딪쳐 왔던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갈등을 타협의 리더십으로 극복하며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을 잇는 제3세대의 진정한 리더로 부상했다. 그의 전임자들인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 모두 보혁(保革) 갈등 속에서 퇴장해야 하지 않았던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중국의 리더로서 중요한 건 정책이나 노선의 변화를 반드시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합리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장은 14차 당 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사회주의를 골간으로 유지하되 경제운용엔 자본주의 요소 도입)’를 제창했다. 보수파를 달래기 위한 사회주의와 개혁파의 손을 들어주는 시장경제 간의 타협인 것이다. 또 97년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중국의 사회주의는 초급단계에 처해 있어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해선 자본주의 요소 도입이 필요하다는 논리, 당시 국유기업 개혁을 위해 자본주의 요소인 주식제 도입이 필요했다)을 역설했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사실 실각한 자오쯔양의 낡은 외투에서 꺼내온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나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등은 서방엔 모순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장쩌민에겐 상호 보완적인 것이었다.

외교에서도 타협의 리더십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99년 5월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군이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오폭(誤爆)했다. 나토군이 발사한 9만 발의 폭탄과 미사일 중 엉뚱한 곳에 떨어진 건 불과 7발이었는데 이 중 5발이 중국대사관에 떨어져 3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낸 것이다. 들끓는 중국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특히 시위대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학생들이 가두행진에 나설 때 일반 시민이 가세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고, 시위 자체를 불허하면 약골 정부로 십자포화를 맞을 게 뻔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장은 베이징의 미국대사관으로 항의하러 가는 학생 시위대에 버스를 제공하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학생들을 버스에 태워 미국대사관 앞에 내려놓으면 시위를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어 시위 효과와 통제 효과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을 상대로 하는 이 같은 장의 전략은 ‘투이불파(鬪而不破)’의 타협에 다름 아니다. 싸우되 그 관계를 완전히 깨뜨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장은 2002년 11월 당 총서기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이양할 때도 타협을 선택했다. 덩샤오핑에 의해 낙점된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넘겨주기는 했지만 자신의 상하이방(上海幇) 인맥을 다섯 명이나 정치국 상무위원에 밀어넣은 것이다. 후진타오가 이끄는 4세대 집단지도부의 정치국 상무위원은 모두 9명으로 구성돼 중대 사안에 대해 표결할 경우 이기게 되는 형국이다.

장쩌민은 강력한 카리스마형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의 비극 이후 중국이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사회적 긴장은 고조됐으며 국제적으로는 고립된 시기에 이룬 그의 업적은 다른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j칵테일 >> ‘3다(三多) 주석’

베이징 외교가에선 한때 장쩌민을 ‘3다(三多) 주석’으로 일컫기도 했다. 말이 많은 수다쟁이고, 영어를 많이 하며, 노래도 많이 한다는 것이다. 각국 외국 정상과의 만남에서 장쩌민이 한 곡 뽑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먼저 한 곡을 멋지게 뽑은 장은 그다지 노래를 잘하지 못하는 김 대통령에게도 기어이 노래를 부르게 했을 정도다. 장은 왜 노래하는 것일까. 자신이 황제가 아닌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그는 또 외빈을 만날 때 미국과 일본에서 온 손님만큼은 자신이 직접 만나야 된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있다. 미국 사람은 자신이 영어를 잘하기 때문이고, 일본 사람은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칼럼, 인터뷰/명사2010.08.23 15:05

[유상철의 차이니즈 리더십] 후진타오의 ‘그룹 스터디’, 장쩌민파 KO 시키다 [중앙일보]

입력시각 : 2010-08-21 오전 12:05:00

‘Who’s Hu(후가 누군가)?’

2002년 미국의 ‘위클리 월드’가 후진타오(Hu Jintao, 胡錦濤・사진)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며 썼던 표현이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설다’는 그런 인식이 깔려 있다. 한편으론 ‘후가 뭐 그리 대단한 인물인가’ 하는 냉소도 느껴진다. 후진타오가 그해 가을 총서기에 올라 중국의 1인자가 된 지 8년. 이젠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알쏭달쏭하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그의 언어, 그의 행동 어디를 봐도 튀는 구석이라곤 없다. 그의 리더십은 강렬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대중적 인기는 오히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더 높다. 후 주석은 바른 말만 하는 교과서에 가깝다. 무미건조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그가 이끄는 ‘13억의 중국호(中國號)’는 똘똘 뭉쳐 승승장구 중이다. 특히 총서기 취임 당시 그를 위협하던 최대 정적(政敵)인 상하이방(上海幇)이란 말은 이제 그 용어조차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는 어떤 마법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유상철 기자

후진타오 리더십의 원천으로 일부에선 겸손함을 꼽는다. 신중함을 드는 사람도 있다. 글쎄다. 나는 ‘학습’을 꼽고 싶다. 중국의 정치학자 샤오궁취안(蕭公權)은 공자의 치술(治術)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돌보아 주는 것(養), 둘째는 가르치는 것(敎), 셋째는 다스리는 것(治)이다. 후진타오는 이 중 교육에 올인하고 있다. 백성을 이끌기 위해서는 리더의 솔선수범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단기적 방편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계획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기 위해선 교육이 첫째라는 것이다. 흔히 선정(善政)보다는 선교(善敎)가 낫다고 한다. 선정은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선교는 마음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리더십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던 2002년 11월, 그가 이제 막 13억의 1인자인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올랐을 때를 보자. 당시 그를 둘러싼 권력 구조는 한마디로 사면초가(四面楚歌) 형세였다.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 9명(표 참조)의 구성 자체가 그의 외로운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아홉 중 다섯 명이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가 이끄는 상하이방 출신이었다. 상하이방은 서열 5위를 중심으로 정확하게 대칭적인 구도를 형성했다. 즉 서열 5위에 장쩌민의 오른팔로 불리던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위쪽으로 2위엔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국회격) 상임위원장인 우방궈(吳邦國), 4위에 자칭린(賈慶林) 전국정치협상회의(政協) 주석이 포진했다. 아래로는 6위에 황쥐(黃菊) 부총리, 8위에 선전・언론 담당의 리창춘(李長春)이 받쳐주는 모양새를 취했다. 후진타오 입장에선 한 발 삐끗했다가는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만큼 라이벌 세력의 짜임새는 강했다.

한편 서열 3위인 원자바오는 무색무취로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다. 또 서열 9위인 뤄간(羅幹)은 퇴임한 리펑(李鵬) 전 총리가 자신의 지분을 행사해 추천한 인물이다. 그나마 후진타오와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인사는 7위의 우관정(吳官正) 중앙기율검사위 주임 정도에 불과했다. 정치국 상무위원 구성이 왜 이렇게 1인자 후진타오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처럼 이뤄진 것일까. 중국의 권력 판도라는 게 전임자가 짜 준 모양새를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볼 때 후진타오 입장에서는 무얼 도모하고자 해도 뜻대로 될 수 없는 형국이었다. 자, 이 같은 절대 열세의 난국을 후진타오는 어떻게 타개하고자 한 것일까. 정책의 입안과 실행에 있어 어떻게 라이벌 세력의 협조를 이끌어내려 했을까. 후진타오는 그 해답을 학습에서 찾았다. 무슨 학습인가.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전원이 참여하는 ‘정치국 집단학습(政治局 集體學習)’을 그가 이끄는 4세대 리더십의 진원지로 선택한 것이다.

중국 지도부의 집단학습 전통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시중쉰(習仲勳, 시진핑 현 중국 국가부주석의 아버지)과 완리(萬里) 등이 시작했다. 이후 장쩌민 집권 13년간 1년에 한 차례 정도 간헐적으로 열렸다. 후진타오는 그러나 총서기에 오르자마자 이 정치국 집단학습을 정례화했다. 2002년 12월 26일 마오쩌둥(毛澤東) 탄생 109주년 되는 날에 ‘헌법을 배우자(學習憲法)’를 첫 주제로 선택했다. 인치(人治)의 대명사가 태어난 날 법치(法治) 공부에 나서며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후진타오가 처음 정치국 집단학습을 개최할 때만 해도 세간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집권 1기(2002년 11월~20007년 10월) 5년 동안 정치국 집단학습은 무려 44회나 개최됐다. 집권 2기인 2007년 10월부터 지난 7월까지는 22회가 더 열려 무려 66회를 기록 중이다. 후는 이 집단학습을 반대파를 설득하고 제4세대 집단지도체제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장(場)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석 달에 두 번 열리는 정치국 집단학습의 주제는 철저하게 치국(治國)과 관련된 것이다. 러시아로 ‘석유 외교’를 펼치러 갈 때는 ‘국제 에너지 형세’를 공부하고, 동북공정으로 한・중 관계가 껄끄러울 때는 ‘중국민족관계사’를 공부하는 식이다. 당 중앙정책연구실과 당 중앙판공청, 관련 부처 등이 현안을 중심으로 협의해 결정하지만 주제 선택에서 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게 특징이다. 후진타오로서는 티나지 않게 어젠다 선점에 나서는 것이다.

집단학습은 후진타오의 개회 선언으로 시작돼 보통 두 명의 강사가 연단에 오른다. 강의 후엔 질의응답 형식의 열띤 토론이 이어진다. 마무리는 당연히 후진타오의 몫이다. 즉 중국의 진로와 현안 처리를 둘러싸고 전문가의 의견을 먼저 들은 다음 집단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후진타오의 정교한 어젠다 선점, 이어지는 전문가의 강의, 그리고 어젠다에 대한 지도부의 가차 없는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마치 물 흐르듯 전개되는 모양새다.

마오쩌둥과 같은 카리스마형 지도자가 아닌 후진타오로선 바로 이런 정치국 집단학습을 통해 당 중앙의 의견을 일치시키고, 수적으로 우세인 라이벌 세력과의 이견을 줄이며, 사상을 통일해 중국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 지도부가 정책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왜 큰 실수를 범하지 않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학습을 통한 후진타오의 리더십은 일찌감치 형성된 것이다. 80년대 중반 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로 재직할 때 그가 교육을 강조하면서 간부 연수를 매우 중시했던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전문가를 초청해 특강을 열고, 구이저우성 간부들을 발전된 타 지역으로 보내 그곳의 경험을 학습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86년 구이저우성에는 간부연수양성센터가 242개로 늘어나기도 했다. 중국 최고 학부인 칭화(淸華)대를 나온 후진타오 자신이 구이저우 대학 전자계산기학과에 등록해 청강생으로 다니는 열성을 보였을 정도다. 이 같은 후진타오의 학습 리더십을 잘 모방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후의 파벌로 분류되는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당서기다. 후진타오 주석의 권력 기반인 공청단 출신인 그는 올해 초 탈산학습(脫産學習)을 주장하고 나섰다. 탈산학습이란 산업현장에서 잠시 벗어나 공부만 하라는 것이다. 왕양은 광둥성의 모든 처장급 이상 관리들은 올해부터 ‘하던 일을 멈추고 닷새 동안은 무조건 공부만 해야 한다’고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후진타오는 중국공산당의 최고 학부이자 ‘중국 리더십 사관학교’로 불리는 중앙당교(中央黨校) 교장을 93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10년 역임했다. 고급 간부가 되기 위해선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인 중앙당교에서 후진타오가 엄청난 인맥을 쌓았음은 물론이다. 장쩌민 시절의 정치학습 운동인 3강 운동(講正氣, 講政治, 講學習)의 주도자 역시 후진타오였다. 각종 학습 조직을 통해 거미줄처럼 엮인 끈끈한 ‘학맥(學脈)’이 후진타오 리더십의 진원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적들조차 사심(私心)이 작용하지 않는 학우(學友)의 관계로 끌어들이는 리더십이다. “학습하지 않으면, 학습을 견지하지 않으면, 열심히 학습하지 않으면, 반드시 낙오할 것이다(不學習, 不堅持學習, 不刻苦學習, 勢必會落伍).” 후진타오가 던지는 ‘학습의 리더십’의 말이다.





j 칵테일 >> 미남자(美男子)

‘미남자(美男子)’. 한평생 후진타오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1982년 말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선 공청단 1인자로 왕자오궈(王兆國), 2인자로 후진타오를 선출했다. 그러자 곧바로 ‘왕자오궈는 목청이 크고, 후진타오는 인물이 미남’이란 평가가 나왔다. 하나 후진타오의 겉이 봄바람처럼 부드럽다고 해서 속도 그럴까. 오산이다.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다. 서방 언론은 그런 그를 가리켜 ‘벨벳 장갑을 낀 철권(鐵拳)’이라고 부른다. 중국 역대 어느 지도자 못지않게 강경한 공산주의자란 것이다. 하긴, 47세이던 89년 초 철모를 쓰고 직접 티베트 시위 진압에 나섰던 그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