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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21 이순신과 원균의 결정적 차이 지형·조류·날씨 등을 이용한 지략에 큰 차이
마켓 생태계/지식2011.04.21 04:42

이순신과 원균의 결정적 차이 지형·조류·날씨 등을 이용한 지략에 큰 차이 2011년 04월 21일(목)

기후와 전쟁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수군의 대표적 장수는 이순신과 원균이었다. 둘의 용맹은 비슷했지만 날씨를 전쟁에 이용하는 지략에 차이가 있었다. 별 아닌 듯한 이 차이가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1592년 7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수군을 대파한다. 한산도 대첩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이 지형과 조류, 날씨 등을 전술과 전략에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불리한 상황에서는 결코 전투를 벌이지 않았고, 무모한 싸움은 더더욱 싫어했다고 한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7월 6일 90척의 배를 거느리고 여수를 출발해 7일 통영의 당포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현지 주민을 통해 일본군의 도착시간과 규모, 이 지역의 지형과 조류, 날씨 등을 파악한 후 전투에 대비했다.

넓은 바다로 일본 수군 유인

▲ 충남 아산에 있는 현충사. 

이날 와카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의 수군 73척은 진해의 웅천에서 출발해 오후에 견내량(통영시 용남면)에 도착했다. 견내량은 고성반도와 거제도 사이의 좁은 수로 지역이다. 조류가 빠르고 암초가 많아 공격하는 쪽이 상당히 불리한 곳이다. 이러한 사실을 파악한 이순신은 일본의 수군을 유인해 넓은 바다에서 싸우기로 결정한다.

7월 8일 아침 일찍 이순신은 5~6척의 배로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는 왜군을 기습 공격한 후 도망친다. 일본 수군은 이들을 잡기 위해 전 해군력을 동원해 추격한다. 이들이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에 이순신은 학익진(학이 날개를 펼치듯이 적을 좌우로 포위하면서 공격을 가하는 전법)을 펼치며 함포로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59척의 군함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자 이순신은 일본 수군을 더 이상 쫓지 말라고 명령한다. 강한 바람이 전투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음날인 7월 9일 구키 요시다카가 이끄는 40척의 일본 전함이 부산포를 출발해 안골포(진해시 웅천면)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바람이 강하게 불자 공격하지 않고 온천량에 정박했다.

새벽 조선군의 기습적 공격

▲ 이순신 장군 영정. 

“조선군은 날씨가 나쁘면 전투를 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니 오늘 밤은 푹 쉬도록.”

일본장군의 예상과는 달리 10일 새벽 조선군은 기습적인 공격을 가했다. 전혀 대비가 돼 있지 않았던 일본수군은 조선군의 화포에 궤멸되고 말았다. 적장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은 날씨와 조류와 지형을 철저히 이용했다. 우리는 화력에서 진 것이 아니라 그의 전략과 전술에 진 것이다.”

이순신은 한산도와 안골포 전투에서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그해 9월 1일 부산포를 기습 공격했다. 일본 해군력이 집결해 있던 부산포 해전에서 이순신은 470여 척에 이르는 일본전함을 격침했다. 한산도·안골포·부산포 해전에서의 승리로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다. 당연히 일본 해군은 해로를 통한 보급품 수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에게 철저히 패한 일본은 이순신이 모함으로 해군지휘권을 박탈당하자 다시 조선해협으로 진출했다. 일본은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수군을 강화해 600척의 대 선단으로 부산에 상륙했다. 당시 조선수군의 지휘관은 원균이었다. 일본군은 조선수군과의 직접적인 접전을 피하고 부산 앞 바다에서 소규모의 선단으로 공격한 후 도망치는 ‘히트앤드런’ 작전을 구사했다.

한국 해군 역사상 가장 처참한 패배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본수군의 공격에 지쳐 있던 조선수군은 심한 풍랑이 겹치자 완전히 녹아웃(knockout) 됐다. 원균은 무모하게도 지친 부하들을 이끌고 부산포로 돌진했고, 부산포 앞 좁은 수로에서 조선수군을 기다리던 일본군은 한꺼번에 대 선단으로 공격했다. 이순신이 없는 조선수군은 그들에게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 해군의 집중공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조선수군은 가덕도로, 또 거제도로 후퇴했다. 그러나 거제도에서도 왜군의 기습으로 수백 명이 전사하자 급기야는 칠천량까지 쫓겨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두운 밤, 원균은 아예 보초조차 세우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 시각 물샐틈없이 칠천량을 포위한 일본군은 새벽 화공을 앞세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함선 100척에 거북선 5척 등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선단으로 구성됐다던 조선 함대는 일본수군의 집중포화를 맞아 지리멸렬하면서 겨우 12척만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5000년 해군 역사상 유일한 패배를 불러온 장본인인 원균도 이곳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순신의 한산도, 안골포에서의 승리의 대첩과 정반대의 상황이 원균에 의해 벌어진 것이다. 물론 다른 요소도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과 원균의 가장 큰 차이는 적에 대한 정보 파악 능력, 지형과 날씨를 전투에 활용하는 능력이었다. 이 차이가 한쪽에서는 일본 해군의 비참한 패배를, 다른 쪽에서는 한국 해군역사상 가장 처참한 패배를 가져온 것이다.

▲ 거북선 전단도. 

제공: 국방일보 |

글: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저작권자 2011.04.21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