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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중국2010.03.22 02:20

중국인…그들은 누구인가 김광억 교수, 중국인의 일상세계 분석 2010년 03월 08일(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석학 인문강좌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찾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빌딩이 계속 들어서는 도시, 거리를 가득 메운 유동인구, 낙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농촌과 농민의 모습 등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사전에 충분한 정보를 갖고 중국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중국인의 일상생활로 이루어진 현실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인의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관광루트를 돌다보면,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중국은 매우 편파적이고 피상적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인류학자인 서울대 김광억 교수는 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를 통해 그동안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현안 위주의 접근 방식을 지적했다.

▲ 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그동안 눈앞에 정치적 문제나 경제적 진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학자들이 현안 위주의 접근(연구)이 중국의 역사·문화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연구풍조를 낳았다는 것.

정부 정책과 법, 각종 통계수치, 제도와 조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지역 혹은 지방사회의 역사적 깊이와 문화적 전통의 중요성,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중국인)에 대한 관찰을 소홀히 해왔다고 말했다.

마치 제도와 정책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사회, 지역이나 민족 경계를 넘어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심어주었다며, 중국의 중요성에 비추어 이제 중국을 정치·경제적 접근과 함께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결합한 새로운 방법론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본 중국인의 일상세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역사에 대한 상상이 판단의 근거

현대 중국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행위나 국가 운명에 대해 논할 때 자신도 모르게 역사라는 기억의 세계를 언급하고 있다. 기억은 그 가장 가까운 시간에서 거슬러 올라가게 마련이라 가까운 과거의 경험이 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천안문 사태, 문화대혁명, 모택동 시절의 많은 혁명 운동, 그 이전 장개석과 손문에 의한 민국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 청·명·송나라 시대,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성당시대와 진한시대에 대한 상상의 기억을 곧잘 끄집어낸다는 것.

흥미롭게도 중국인들은 원나라와 금나라에 대한 기억은 별로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점은 기억의 선택권, 혹은 선택 능력, 혹은 기억의 주체성에 관련된 문제다.)

▲ 김광억 서울대 교수(인류학) 
중국인들은 자신의 지역을 먼 과거의 장소·지역·공간의 정치학적인 맥락에서 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산동지방을 노(魯)나라라고 하고, 교동지방을 제(齊)나라라고 한다. 산서지방을 진(晉)나라로, 절강성을 월(越)나라, 강소성을 오(吳)나라라고 부른다.

고대 역사에 편입되지 않은 동북지방은 각각 길림(吉), 요녕(遼), 흑룡강(黑), 서장(藏), 신강(彊), 청해(靑)이라 한다. 그리고 복잡한 역사로 인해 하나로 부르기 곤란한 경우에는 지방의 이름을 따서 사천(川), 절강(浙), 귀주(貴), 운남(雲), 녕하(寧), 내몽고(蒙), 감숙(甘), 천진(津), 북경(京), 중경(重) 등으로 표시한다.

중국인의 일상세계에서 수천 년의 시간이 응축돼 현재의 지방을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중국인이 옛 연고를 따져서 부르는 지방의 이름은 현재 행정구역제도에 의해 경계가 정해진 지역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한 중국인의 의식은 “역사를 만드는 것은 권력자지만 그 역사를 품고 사는 자는 백성이다”란 까뷔의 언급, “기억을 통제하는 것은 곧 인민을 통제하는 것이다”란 푸코의 언급으로 모아진다.

때문에 최근 부상하는 문제들로서 세대 간의 정치적 갈등이나 문화적 긴장은 대부분의 경우 기억의 주도권을 두고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그들만의 세계와 역사적 기억을 갖고 있어서 국가, 그리고 권력 엘리트와 부단한 긴장과 경쟁, 그리고 갈등과 타협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형 다큐멘터리 통해 역사의식 고취

때로는 자신의 역사의식을 위해 엘리트, 그리고 국가와 공모를 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중국사회에 번지고 있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혹은 중화주의 열기는 이런 대중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이를 문화상품으로 조직하려는 정치적 기술이 공모해 빚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정부가 소위 인민의 다양한 성향과 세력을 국가적 통제 하에 둘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중 언론매체, 그중에서도 특히 TV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매체는 대중을 상대로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념을 교육하고 전파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 영화 '영웅'의 한 장면 
90년대부터 시작해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초대형 역사영화와 TV 사극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의 과거와 미래를 조명하는 대형 TV 다큐멘터리와 혁명의 기억을 새롭게 하는 대형 문화 프로그램이 기획됐다.

5·4운동의 맥을 이어 80년대 초에 ‘하상(河傷)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그것은 (대륙에 닫혀 있는) 늙고 느린 황색의 거대한 강, 즉 황하(黃河)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문화대혁명 이후 개혁개방의 이념적 배경을 지지하는 것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대중적 담론은 이를 중국의 찬란한 오천 년 문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서구 제국주의와 지적 식민주의의 앞잡이라는 비판이 지배적이었다.

주목할 점은 90년대 후반부터 개혁개방의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영상들이다. 이 영상들은 이 긍정적인 결과가 서구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혜택이 아니라, 중국에 내재한 중국문명의 위대함이 발동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2006년에 방영된 ‘대국굴기(大國崛紀)’란 제하의 TV 연속 다큐멘터리는 지난 세기에 세계 열강이어TEjs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러시아, 일본 등 9개 나라의 흥망성쇄를 분석하고, 중국의 흥망성쇄를 비교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공산당의 영도 아래 지난 사회주의 혁명으로 다져진 기반 위에서 위대한 대국, 중국의 부흥이 임박했음을 감동적으로 전파하면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초대형 교양물로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 교재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냈다.

이 교양물은 부국강병에서 강병부국으로 그 선후가 바뀌어야 한다는 군사대국으로서의 중국의 부상을 주장하는 여론 조성의 각종 토론회를 낳았으며, 세계질서를 문명의 중화세계와 야만의 서구열강의 이분법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여름궁’으로 불리던 ‘원명원(圓明園)의 폐허는 “이전 봉건체제의 부패와 무능이 사치를 일삼음으로써 백성과 유리되고, 마침내는 서구 열강에 중국이 패배하는” 수치의 역사를 낳은 증거물로 거론됐다. 또한 모택동에 의한 공산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을 확인시키는 증거가 됐다.

‘부흥(復興)’이란 주제의 대형 전시 프로젝트 교양물에는 지난 50년간 공산당과 해방군의 영도에 의해 중국 인민이 어떤 고난을 헤쳐 나와 대국 중국의 부흥을 눈앞에 두게 됐는지에 대해 현대사가 감동적으로 극화돼 있다.

비슷한 시기 ‘홍색기억(紅色記憶)'과 ’나의 장정(長征)‘이란 문화 활동이 연중행사로 진행됐으며, 이 행사들은 TV를 통해 전국에 되풀이 방영됐다.

진시황의 천하통일 과업은 성스러운 일

장예모 감독의 영화 ‘영웅(英雄)’은 천안문 사태로 위축된 국내 분위기를 일신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과 그 과정에서 패망한 나라의 검객이 진시황에게 복수하기 위해 찾아온다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진시황의 그 유명한 한 마디 말 ‘천하(天下)’로 요약된다.

즉 진시황이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천하를 통일하는 성스러운 일을 했으며, 진시황의 향후 관심 역시 ‘천하’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이 말은 자객을 진시황 앞에서 굴복하게 하고, 장렬한 죽음을 받아드리도록 한다. 이 영화는 곧 천안문 사태로 표현된 젊은 지식인의 불만과 공산당에 의해 이룩한 통일천하의 대업을 교차해 보여주고 있다.

김 교수는 이런 영상들이 일련의 애국심과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과거 대제국으로서의 영광된 역사가 오늘날 다시 실현되고 있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대중국이라는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 인민 정서와 감정을 하나를 묶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지금 중국 상황에 대해 두 가지 미래 예측이 나오고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예측으로서 비록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민주화는 필연적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거대한 규모의 인구, 복합적인 민족구성체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식 통치체제, 혹은 정치체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지금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혁명 프로그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에서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확산이 사회주의 체제를 종식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중국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면 경제 토대가 되는 토지를 비롯한 많은 기간 자원이 여전히 전민소유라는 이름의 국유재산으로 돼 있으며, 개인은 호구제도에 의해, 지역과 직업 기회에 있어 이전의 제도에 묶여 있다는 것.

정치 지도자와 행정관리는 신지식인의 자질을 갖췄고, 서구적 분위기를 익숙하게 연출하고 있지만, 그들은 공산당의 인력 배양의 제도적 장치 안에서 허용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0.03.08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마켓 생태계/지식2010.03.02 03:10

‘행복한 삶’ 과연 가능한가 김형효 교수, 자연적 본능의 회복 강조

2010년 03월 02일(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석학 인문강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모두가 행복한 삶을 추구해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행복한 삶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논증을 계속해왔다. 과연 인간에게 행복한 삶이 가능한 것인가…….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4명의 토론자들과 함께 지난 4회에 걸쳐 진행된 그의 ‘존재와 소유’ 강의에 대해 종합토론회를 가졌다.

▲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종합토론 방식으로 진행된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이날 종합토론에서 김형효 교수는 “존재와 소유를 두 개의 별개의 것으로 보려는 인간의 오랜 습성”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했다.

존재와 소유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가짐의 이중적 태도와 직결된다는 것. “같은 돈이라도 남들 앞에서 과시용으로 생각하면 소유가 된다. 반면 그 돈을 사용해 자기 존재의 힘을 극대화하고자 한다면 그 돈은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며 존재와 소유를 마음의 이중적 태도로 보아줄 것으로 주문했다.

행복은 존재 능력의 극대화로부터...

김 교수는 또 (그동안 인간이) 인간중심적 윤리사상과 종교사상 때문에 자연적 본능을 많이 오해해왔고, 동물적 본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폄하해왔지만, 자연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좋은 본능, 나쁜 본능 등의 분류는 인간중심적인 교육이 가져다 준 망상에 불과하다. 자연세계는 인간사회처럼 도덕이 필요 없다”며 그의 ‘존재와 소유’ 철학을 전개해나갔다.

이날 종합토론은 박찬국 서울대 교수,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승구 세명대학교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석한 가운데 정해창 한국한중앙연구원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다음은 이날 토론 중에 있었던 일문일답 내용.

▲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가.

“자기 존재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삶이다.”

(김 교수는 이전 강의에서 존재인가 또는 소유인가의 결정은 인신(人身)이 자연적 상태에 놓여 진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상태에 놓여 진 것인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했다.)

▲ 소유가 없이 존재만으로 인간의 기본적 생활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가.

▲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존재와 소유를 두 개의 별개의 것으로 보려는 인간의 오랜 습성이 문제다. 존재와 소유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가짐의 이중적 태도와 직결된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돈을 무조건 소유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같은 돈이라도 남들 앞에서 과시용으로 생각하면 소유가 된다. 반면 그 돈을 사용해 자기 존재의 힘을 극대화하고자 한다면 그 돈은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

▲ 자연적 본능을 말씀하셨는데, 본능 중에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자연적 본능이란 좋은 자연적 본능을 회복시킨다는 의미인가.

“우리는 그동안 인간중심적 윤리사상과 종교사상 때문에 자연적 본능을 많이 오해해왔고, 동물적 본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폄하해왔다. 그러나 자연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다. 좋은 본능, 나쁜 본능 등의 분류는 인간중심적인 교육이 가져다 준 망상에 불과하다.”

자연세계는 인간사회처럼 도덕이 필요 없어

▲ 그러면 본능적 삶에 비도덕적 위험성은 없다는 의미인가.

“그것 역시 자연적 본능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한 인간중심주의 망상의 의거한 것이다. 자연세계는 인간사회처럼 도덕이 필요 없다.”

▲ 우주심으로서의 본능과 인간의 사회적 지능이 다 함께 공유하는 것이 이익이라 하셨는데, 오늘날 기업이 시장에서 추구하는 이익 개념과 동일한 것인가.

▲ 질문하고 있는 서울대 박찬국 교수 
“이익은 존재론적 실상이지, 공상이나 망상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도덕주의 탓으로 이익을 오직 이기적인 것으로만 여기고, 도덕주의자들이 이익 대신에 의리 또는 정의라는 개념을 가르쳐왔다.

그러나 의리나 정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해석이 다르고, 사람마다 해석이 제 각각이다. 그래서 의리와 정의 때문에 시비가 생기고 전쟁이 일어난다. 존재론적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이기배타(利己排他)적인 소유론적 이익을 자리이타(自利利他)적인 이익으로 바꾸는 것이다. 기업을 너무 도덕주의적 개념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 원시반본(原始返本)에 대해 원시적 본능, 불성과 신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부연 설명을 부탁한다.

“원시반본은 인간이 복잡한 지능적 사회생활을 하기 이전의 자연적 마음을 말한다. 루소는 모든 악이 사회생활에서 시작됐다고 했는데, 그 말은 참으로 철학적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 원효대사의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과 유학의 중용(中庸)은 언뜻 비슷해 보인다.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유교의 중용은 양극단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쓰는 논리다. 불교의 중도사샹은 이중긍정으로 유교의 중용과 유사한 데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이중성에 집착하여 그 가운데만 매달리는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비선비악(非善非惡)처럼 이중부정의 태도를 취한다.”

미래 각광받을 철학은 해체철학과 동양 노장학

▲ 철학과 종교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종교는 신앙을 중시하는 사상이 아니라 최고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말한다. 철학은 다만 그런 종교의 가르침이 참일 수 있는가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을 말한다.”

▲ 현재 서양철학의 한계성과 동양철학의 유용성을 간단히 설명해 달라.

“서양 철학의 한계성은 사회적 지능의 한계성과 같다. 그동안 인류는 문명사회가 전통적 자연과 다른 길을 밟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특히 서양철학은 그 길에 박차를 가해왔다. 사회적 지능 대신에 자연적 본능의 길을 인간이 회복해야 한다면, 서양의 해체철학과 동양의 불교, 노장학이 새로운 미래 철학으로 각광받을 것이다.”

▲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의 철학 사조는 어떤 것이 되겠는가.

“포트스 모더니즘은 매우 오래 갈 것이다. 그 이후는 예측할 수 없다.”

▲ 대학입시가 현재 과잉경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김 교수의 ‘존재와 소유’ 철학을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지금처럼 소유의 증대를 위한 방편이 돼서는 안 된다. 대학공부가 남들을 지배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힘을 극대화하는 방편이 돼야 한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0.03.02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2010.03.02 02:54

지금의 대학은 ‘소유론적 욕망의 전당’ 아리스토텔레스 지성적 진리관의 영향으로...

2010년 02월 08일(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석학 인문강좌 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지금의 대학을 소유론 적인 욕망의 전당, 지성(Intellect, Intelligence)의 전당, 의식의 전당 등으로 정의했다.

한마디로 지식의 세계를 소유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라는 것. 이런 현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이 철학의 아버지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아버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말한 이상세계의 이데아를 현실세계로 끌어 내렸다. 이데아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된 것이다.

▲ 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은 주관적 생각이나 논리, 즉 ‘지성’(지능, Intellect)과 객관적 실재의 본질인 ‘사물’을 일치시키는데 있다.

여기서 지성이란 인간이 지각한 것을 정리해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혹은 사고의 능력을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이 지성(지능)이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사물을 정확히 파악했을 때 그것을 진리로 보았다.

개념의 등급을 규명하는 것이 학문

그리고 이 진리탐구 과정 속에서 개념이 산출된다. 그 결과 (서양철학에 있어) 세상은 개념들의 집합이 된다. 명석하고(clear), 판명한(distinct) 개념의 집합이다. 이 수많은 개념들은 최상위 개념서부터 최하위 개념에 이르기까지 위계질서로 분류된다. 서양 언어에 존재론적인 명사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의 존재자, 천사의 존재자, 인간의 존재자, 식물의 존재자, 미생물의 존재자, 광물의 존재자 등등. 그리고 이 존재자들의 등급의 규명하는 것이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념과 개념을 결합 또는 분리시키면 판단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참된 판단이 진리이며, 이러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학문이 된다고 보았다.)

▲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서양 철학은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에 기반을 두고 관념론과 실재론, 합리론과 경험론 등으로 발전시켜왔다. 관념론자들은 바깥의 실재가 의식의 관념에 복종하고 있다고 본 반면합리론자들은 바깥의 실상이 의식의 합리적(혹은 수학적) 요구에 복종하고 있다고 보았다.

실재론자들은 의식이 바깥 실재의 고유성에 복종하고 있다고 본 반면, 경험론자들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경험의 말을 의식이 듣고 있다고 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관념론과 합리론은 의식이 대상에게 (능동적으로) 명령하고 있는 반면, 실재론과 경험론에서는 의식의 대상에 의해 (수동적으로) 지배당한다고 보았는데, 의식과 대상 간에 강조점이 다를 뿐 지성이 곧 사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신학과 인간학에서 물론으로...

이 같은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체계는 인간의 존재자적 실체의 성격을 엄격히 구분해왔다. 100%, 90%, 80%, 70% … 50% … 등등. 여기서 100% 미만의 존재자들은 결핍의 존재자로서 (온전성의 결여인) 악의 존재방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100%의 존재자는 곧 선이며, 악의 존재방식과의 대립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원죄의식은 칸트가 ‘근본 악’의 개념을 도입한 결과다.

▲ 하이데거 (Heidegger, Martin) 
칸트는 신에 대한 존재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신은 내면적·도덕적 양심의 법에 귀속되는 것이지, 지식의 영역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신을 지식세계로부터 추방한 것이다.

칸티즘(Kantism)은 중세기의 신중심주의로부터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로 서양철학을 전환시킨 계기가 됐다. 근대 철학이 신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중세처럼 현실적인 역할을 긍정한 것이 아니라, 마치 상왕(上王)과 비슷한 위치로 밀어냈다.

김형효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신중심주의와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유사함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신학에 이어 새로 등장한 인학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이 문제점은 프로이드가 이성적 명령에 의해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괴물적인 힘, 즉 무의식을 증명함으로서 불거졌다. 이어 융은 구약의 욥기(Job)를 인용, 신은 심술궂은 악마성을 구비하고 있으며, 악마성과 대칭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대극적(對極的) 무의식을 주장했다.

구조주의 정신과 의사인 라캉은 신의 가장 무서운 적은 무의식이 인간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며, 신학과 인학이 무의식의 증상으로 분쇄됐다고 주장했다. 신학과 인학이 거세되고 물학(物學)이 등장한 것이다.

본능은 동·식물의 존재론적인 욕망

무의식의 등장과 함께 등장한 물학은 철학에서 구조주의 등장과 함께 인류학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적 사유(토템적 사유), 라캉의 “그것이 말한다(Ça parle)”. 하이데거의 ”그것이 사유한다(Es denkt)”란 주장에 이른다.

▲ 라캉 (Lacan, Jacques Marie Emile) 
김 교수는 라캉이 말하는 “그것이 말한다”의 의미는 “내가 말한다는 것이 하나의 표피적 거짓말이고, 진실은 불교적 의미의 업감(業感)이 말한다와 대단히 유사하다”고 말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그것이 사유한다”의 의미는 서산대사가 말한 “아시거(我是渠)”처럼 “본능이 사유한다”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본능이란 동·식물의 존재론적인 욕망으로, 동·식물이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대극성을 통해 두 가지의 차이를 동시적으로 식별하고,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싯탈타 태자가 보리스나무 아래서 샛별을 보고, 문득 우주의 철리(哲理)를 깨달았다는 설화도 이 본능의 기호적 사유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듯 하다는 것. 또한 노자가 말한 ‘포일적(泡一的) 사유’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김형효 교수는 인간의 지능을 분별력과 분석력, 전문화가 가능한 능력, 과학지식의 탐구영역 등으로 정리했다. 반면 인간의 본능을 포일적 직관력, 본질, 열린 능력, 도(道)의 입문 능력, 인간의 본질, 불성즉신성(佛性卽神性)으로 정리했다.

특히 존재론적 도(道)에는 ‘내 것’이 없다고 말했다. 존재론의 도는 인간의 의식이 생각하는 견해가 아니고, 이미 있어왔던 진리이며, 하이데거의 Gewesenheit(having-been-ness), 즉 무위적(無爲的) 도와 통하며, 도덕윤리적 당위(當爲)의 도와 과학기술적 유위적(有爲的) 도와 다르다고 말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0.02.08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