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오해'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5.06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오해 (6)
마켓 생태계/지식2011.05.06 05:58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오해

과학에 대한 인문학의 채찍은 정당한가?

2011년 05월 06일(금)

> 기획 > 연재 > 과학지식인 열전

목록 | 글자크기 + - | 스크랩 인쇄 메일보내기

 

과학에 대한 인문학의 가장 심각한 오해는 ‘인문학의 윤리적 우월성’이라는 전제로

부터 나온다. 인문학이 과학에 비해 윤리적으로 우월하다는 전제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적도 없고, 검증할 수도 없는 신념이다. 이러한 신념은 아주 단순한 근거,

즉 인문학이 윤리학을 다룬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진화윤리학과 같은 최근의 윤리학적 쟁점을 꺼낼 필요도 없다.

즉, 진화윤리학을 비롯한 최근의 윤리학적 성과들이 윤리학의 전통적 주제들을

과학과 조율시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윤리학은 인문학만의 주제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윤리적 근거가 도출되는 영역이 인문학만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러한 신념은 손쉽게 반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지 윤리학을

다룬다는 이유로 모든 차원에서 인문학의 과학에 대한 윤리적 간섭이 정당화되는

것이라면, 종교의 과학에 대한 간섭도 정당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 역시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윤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하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일상생활 대부분의 윤리적 근거가 도출되는 소박한 상식이 과학에 대한

내용적 간섭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제공하는

비상식적 결론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진화론을 교과서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인문학자들조차, 인문학의 과학에 대한 간섭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분자생물학의 환원주의적 접근법에 대한 어떤 인문학자들의 간섭이

 창조과학자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지에 대한 ‘인문학적’ 반성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이중잣대 속에서 환원론은 ‘나쁜’ 과학이 되고, 전일론은 ‘좋은’ 과학이 된다.

그리고 ‘전일론’이 좋은 이유는 그것의 토대가 ‘인문학적 상상력’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된다. 따라서 ‘철학으로 과학’할 때 과학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며, ‘인문학적 상상력’이 과학에 절실하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되풀이 된다.

심지어 과학에 동양적 사유가 필요하다는 엉뚱한 주장까지 등장한다1.

▲ 스티브 잡스의 강연에서 일반적으로 ‘인문학’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실은 인문학이 아니다. 잡스가 실제로 사용한 단어는 인문학(Humanities)이 아니라,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였다. 


아이폰과 인문학적 상상력

과학에 대한 인문학의 학문적 간섭은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된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구호는 인문학의 위기와 함께 등장했다.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인문학적 상상력을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선전이 과학에 대한

인문학의 윤리적 간섭의 형태로 나타날 때, 특히 과학에 대한 인문학의 학문적

간섭의 형태로 나타날 때 그러한 주장은 근거를 잃는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과학을 제어하려는 시도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오늘날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과학과 기술은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힘이 증대하면 할수록 사람과 인간다운 삶에 관한 성찰은 더욱

 더 요구된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때로는 기존의 과학과 기술에 제동을 걸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저항은 거꾸로 새로운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우리가 21세기의 공동우물을 발명하고자 한다면 위험한 인문학적 상상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2

이 글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은 과학의 전통 속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전제하에 주장되고 있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과학적 상상력에는 결여된 어떤 것이며,

더욱 인간적인 어떤 것이며, 따라서 과학은 이러한 상상력에 의해 통제되거나 보충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합당한가.

최근 애플사의 성공을 두고 인문학적 상상력에 정당성을 부과하려는 인문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패드의 성공에 대해 스티브

잡스가 했다는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3.

“우리가 아이패드를 만든 건 애플이 늘 기술과 인문학의 갈림길에서 고민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사람들은 기술을 따라잡으려 애썼지만 사실은 반대로 기술이

사람을 찾아와야 합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강연에서 ‘인문학’으로 번역된 단어는 실은 인문학이 아니다.

잡스가 실제로 사용한 단어는 인문학(Humanities)이 아니라,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였다. 간단히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리버럴 아츠가 의미하는 바가 인문학이

아니라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교양과목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서양의 중세시대

학제로부터 기원된 리버럴 아츠란 ‘배우는 이들의 이성적 사고와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일반적 지식을 포괄하는 학제’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업적 혹은 기술적인 학제’와는 차별되는 것이다. 중세시대 이후로 리버럴

아츠의 개념은 점차 확장되고 변화되어 왔지만, 현대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리버럴

아츠는 ‘문학, 언어, 철학, 역사, 수학, 과학’ 등을 통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애플의 성공이 ‘인문학적 상상력’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잡스가 ‘기술과 리버럴 아츠의 교차점’에서 고민해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애플이

당장의 실용적인 기술이 아니라,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초적인 고민을 해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거기서 배워야 하는 것은 전문성과 실용성만을 요구하는 협소한

 교육체계에서 벗어나 당장에는 이익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풍부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기초적인 교육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교훈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인문학자들의 대안이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나타나는

것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이러한 주장이 인문학을 협소하게 해석하는 오류와

더불어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황폐화된 교육을 또다시 정당화하는 오류로

귀결된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4.

나아가 학문을 도구적으로만 재단하는 현대사회의 위기 속에서, 인문학의 위기와

이공계 위기가 동전의 앞 뒷면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인문학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죄를 덮어씌우려 하거나, 또는 인문학을 윤리적 우월성

으로 포장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5. 과학에 대비되는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없으며, 따라서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력은

그저 상상력일 뿐이다.

끌로드 베르나르와 과학의 자율성

▲ 생리학자 끌로드 베르나르는 실험의학을 과학으로 정립하기 위해 인문학을 거부한 것으로만 알려져 왔다. 

과학엔 과학의 전통이 있다. 그 전통은

 깨어지고 잊혀져 가고 있지만, 과학엔

분명 그러한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

속에서 과학은 인문학을 무조건 거부해

온 것도 아니며, 연구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 속에서 심각한 고민을

해왔다. 끌로드 베르나르는 실험의학을

과학으로 정립하기 위해 인문학을

거부한 것으로만 알려져 왔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는 자연에 직면하여, 실험의학에 따르면서,

완비돼가는 탐구방법의 도움으로, 자연에 질문을 해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경우에 있어서의 최선의 철학체계는, 전혀 철학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6.”

베르나르가 철학과 역사학을 거부한 배경은 복잡하다. 실험의학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 넘어야 했던 여러 장벽들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베르나르는 실험의학이

사회와 맺는 관계보다는 실험의학이 과학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문적 방법론에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철학과 역사학이 거부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베르나르는 철학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철학이 주는 교훈까지

거부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실험학자로서는 철학체계를 피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철학적

정신까지도 배척할 수는 없다7.”

이러한 베르나르의 고민 속에는 과학과 철학이 서로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녹아 있다. 적어도 학문의 내용에 있어, 과학과 철학은 서로 대화하되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소박한 상식이 베르나르의 사유 속에 녹아 있다. 바로 그 점이 베르나르가

역사학과 철학을 그토록 완강하게 거부했던 역사적 맥락의 한 축이다.

“따라서 철학도 과학도 체계적이어서는 안 된다. 서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악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자의 분리는 인지의 발달에 해가 될 뿐이다..... 그런데

만일 철학이 이 형제적 악수에 만족하지 않고, 과학 내의 문제에까지 간섭해서,

이것이 활동하는 데 있어서 독단적으로 지도하려 한다면, 그때는 이미 일치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8.”

과학이 발전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이다. 베르나르는

실험의학의 과학적 기초를 다지기 위해 이러한 조건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과학자들은 이러한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현대사회의 과학자들은 과학이 정치와 경제에 예속되어가면서 이러한 자율성과

독립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에 더해 인문학자들은, 모든 것이 경제논리로만

평가되는 현대사회의 귀결로 나타난 기초학문의 위기라는 공통된 배경을 무시하고,

과학자들에게 인문학적 윤리의식을 강조하는 자충수를 두고 있다. 이에 대해

베르나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사 과학자가 철학자에게 유익하고, 동시에 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유익하다

하더라도, 과학자는 그 자신에 대하여 자유이며, 주인공이다. 나 혼자의 생각으로는,

과학자는 철학자가 없더라도 자기의 발견, 학설, 과학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대해 신용을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면, "과학에 있어서 최대의 발견을 한

사람은 베이컨을 가장 몰랐던 사람들이다. 이에 반하여 베이컨의 책을 읽고, 이것을

묵상한 사람들은 -베이컨 자신도 그랬지만- 아무런 성공을 하지 못했다"고 조세프

드 매틀이 말한 것처럼, 이를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베이컨과 같은 철학자, 혹은 또 근대의 철학자가 과학적 연구에 대하여 과학자가

지켜야 할 훈칙을 일반적 체계로 만들어내려 했을 때, 과학을 먼 발치로 보고만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확실히 매력이 풍부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저서는 이미 다 되어버린 과학자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다. 또 앞으로 과학의 연구에

 몸을 맡기려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물의 그릇된 단순화에 의하여 그들을

미혹하게 할 뿐이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수많은 막연한 훈계, 또는 실제로 응용할

수 없는 훈계를 정신에 짊어지게 함으로써,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다9.”

과학이라는 학문 내부에 대한 인문학의 간섭은 전혀 인본주의적이지 못하다. 특히

과학의 전통이 소실된 사회에서 이러한 인문학의 간섭은 무의미하다. 과학의

전통이 소실된 사회에선, 과학도 인문학도 경제논리에 종속되어갈 수 밖에 없으며,

두 학문 모두 위기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인문학은 인문학

다울 수 없고, 과학은 과학다울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이 과학답게,

인문학이 인문학답게 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과학다운 과학이 없다.

한국사회의 과학은 그 전통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현대사회의 과학은 그 전통을

잊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의 과학에 대한 학문적 간섭은 회초리가 아닌

채찍이다.

1. 다음의 두 저술이 이러한 견해를 대표한다. "최종덕,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휴머니스트, 2010.", "최종덕/김시천 엮음, ‘철학으로 과학하라’, 웅진, 2008."

2. 이진우, ‘[노벨동산] “인문학적 상상력”은 위험하다’, 포항공대신문. 2010.09.22.

3.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애플의 성공과 인문학을 결부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를 찾아볼 수 있다. 인문학의 위기와 맞물리면서 이러한 시도는 인문학자 내부의 반발에도 불과하고 대중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러한 인문학 내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한 시도가 과학에 대한 몰이해로 연결되는 지점만을 다룰 것이다.

4. 심심하면 터져 나오는 인문학의 위기 담론에 대한 따끔한 일침은 다음의 글을 참고할 것. 고종석, ‘[고종석 칼럼] 인문학의 위기?’, 한국일보, 2006.09.27.

5. 김윤수, ‘동전의 앞 뒷면 - 이공계 기피와 인문학의 위기’, 과학재단소식지, 2003.

6. 끌로드 베르나르, 유석진 옮김, ‘실험의학방법론’, 대광문화사, 1997. 272쪽.

7. 끌로드 베르나르, 유석진 옮김, ‘실험의학방법론’, 대광문화사, 1997. 272쪽.

8. 끌로드 베르나르, 유석진 옮김, ‘실험의학방법론’, 대광문화사, 1997. 275쪽.

9. 끌로드 베르나르, 유석진 옮김, ‘실험의학방법론’, 대광문화사, 1997. 276-277쪽.

김우재 UCSF 박사후연구원

저작권자 2011.05.06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