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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10.08 광고, 노랑머리 한우와 아이폰4 (2)
  2. 2010.09.30 남자의 자격 합창단
  3. 2010.09.24 작은 것들의 소중함
  4. 2010.09.17 추석을 추억함
  5. 2010.08.06 병어 이야기 (12)

광고, 노랑머리 한우와 아이폰4
충청논단
2010년 10월 07일 (목) 충청타임즈 webmaster@cctimes.kr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인기 절정의 가수 이효리의 한우 광고가 느닷없이(?) 국정감사의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4일 농림수산식품부에 대한 국회의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소속 김성수 의원은 "(한우 광고 모델인 이효리가)노랑머리 염색을 하고 나와 수입 쇠고기를 광고하는 것 같다"고 주장한 뒤 모델을 즉각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김 의원은 이어 "한우 광고 모델은 수입쇠고기와 차별화를 보여줘야 하는데 표절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는 이효리가 이런 효과를 낼지 의문점"이라는 지적도 했다.

국정감사장에서의 느닷없는 국회의원 지적의 이면에는 숨겨진 문화코드가 적지 않다. 거기엔 한우의 우월성이거나, 흑발의 순혈민족주의에서 기인하는 노랑머리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우선 작용한 듯하다.

게다가 지적재산권시대에 표절시비라니, 이 역시 시대상황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도 했을 터.

그러니 옳다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생각 역시 마땅치 않다.

다만 영상으로 전달되는 광고에는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지의 중첩이 부지불식간에

소비자를 자극한다는 점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일안 렌즈 반사식 디지털 카메라(DSLR)는 하이브리드

신기술을 적용해 크기와 무게를 줄임으로써 편리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1위 업체 캐논은 자사 제품의 약점인 '무게'를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하는 이들을 아름답게 담아주는 감동의 무게에 비하면 무겁지 않습니다."라는 광고

내레이션을 통해 감성을 자극한다. 이 내레이션의 배경화면은 연약한 여성이 강아지와 클림트의

두꺼운 화집을 품에 안았다가 이어 어린이를 번쩍 들어 올린다.

그 영상의 내레이션은 "이들을 안을 때 우리는 무겁다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니까요."라는

내용이다.

출시 이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한 애플의 '아이폰4' 광고는 '말'을 통한 메시지

 전달이 전혀 없다.

재즈 음악이 배경으로 흐르면서 집들이인지, 추석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나는 이 광고를 처음 본

 때가 추석 즈음이어서 추석 상차림으로 각인됐다) 음식상차림을 '아이폰4'를 통해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도움을 받는 모녀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이 시집간 딸과 친정엄마라는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점은 굳이 '말'로써 설명하지 않아도 광고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다.

'말'이라는 직접적이고도 정확한 메시지 전달의 수단을 통하지 않고 오로지 영상으로만 설득하는

'아이폰4'의 감성 광고는 생일인데도 출장을 가 있는 가장과 영상을 통해 "아빠, 생일 축하해."라는

의사를 말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수화를 통해 영상으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이 등장하는 '아이폰4'의 광고 시리즈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얼마나 훈훈한 감동으로 젖게 하는가.

물론 노랑머리 이효리와 한우 광고가 지극히 국내만을 시장의 한계로 고집하는 데다 1차 산업의

생산물이며, DSLR카메라와 아이폰4가 첨단 기술의 제품이라는 태생적 차이는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상품들은 우선 수입쇠고기의 위협에서 국내시장에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한우의)강박관념이 있거나, 이미 자국내 시장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글로벌 시장을 공략할 수

밖에 없는 첨단제품의 철저한 기술적 자부심이 숨어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국정감사장에서조차 노랑머리와 한우, 그리고 표절시비에 운운하며 안으로의 경계심만

 곧추세우고 있을 때, 아이폰과 디지털카메라는 사랑과 말이 필요 없는 영상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국경을 넘나들며 자꾸만 우리를 세뇌하고 있다.

그러니 어쩌랴. 감성은 인류가 공통으로 자극받는 통로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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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남자의 자격 합창단
충청논단
2010년 09월 30일 (목) 충청타임즈 webmaster@cctimes.kr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합창은 종교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비교적 정설이 되고 있다.

그런 합창이 문화와 심미적 관점에서 노래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쯤으로

음악 역사가들은 판단한다.

최근 한 TV오락프로그램에서 방송된 '남자의 자격 합창단'이 놀라운 감동을 주면서 이 합창단의

지휘자 박칼린의 명성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개그맨과 가수, 연기자 등의 남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오락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은 남자,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101가지를 표방하며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전달한다.

남자는 그동안 남성적인 것, 가장, 사회적 지도계층 등의 다분히 말초적인 것들에 상징적 의미의

초점이 맞춰져 왔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강함의 이면에는 남자라는 이름으로 참아야 하고 견뎌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을 감출 수밖에 없는 것들이 적지 않으며, 그로 인해 차마 말하지 못하는 고단함 역시 숨길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은 오디션의 형식으로 단원을 선발하면서 물론 기본적인 음악적 재능을 확보하고

있는 단원들을 선발하는 과정을 거치기는 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초짜인 32명의 단원이 모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낸 것은 그동안 방송된 두 달간의 연습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단원 개개인의 감춰진

사연과 어우러지면서 시청자들의 감동과 그 감동에서 이어지는 눈물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박칼린이라는 지휘자의 뛰어난 지도력은 한국계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출생 이력이 더해지면서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남자의 자격- 남자, 그리고 하모니'는 남자 연예인 6명이 다른 합창단원과 조화를 이루어 내며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성격의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이다.

그런 단순한 오락프로그램에서 현대에 사는 우리가 새삼 감동을 받는 까닭은 메마른 감성에

자극을 받는 신선함에서 비롯된다.

소프라노와 알토의 여성 음역과 베이스와 테너의 남성 음역이 조화를 이루어낸 남자의 자격 합창단의

 하모니는 혼자서만 살아가는 세상은 여럿보다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각 개개인의 특성을 서로 도드라지게 드러내지 않고 화합하며, 결코 자신만의 능력만을 과시하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가운데 화합을 이끌어 내는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우며, 또 그 하모니는 우리를

얼마나 감동이게 하는가.

그리고 그런 아름다움과 감동을 가능하게 한 박칼린의 선곡 'Nella Fantasia'와 '애니메이션 메들리'는 초짜 합창단의 힘겨운 하모니를 더욱 빛나게 하는 탁월한 기초가 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치열하기만한 경쟁의 회오리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다.

그런 생존의 경쟁에서 이 시대의 남자들은 늘 힘겨워하면서 지친 어깨를 덜어줄 돌파구 마련조차

쉽지 않은 현실과 늘 맞닥뜨리면서 피곤을 누적시켜 가고 있다.

아파도 쉽사리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 외롭거나 슬퍼도 결코 그런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이 시대 남자와 가장의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나 남성 음역과 여성 음역이 조화를 이루는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보라. 거기에는 남성성만이,

그리고 여성성만이 튀어나오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감싸안음으로써 우리를 감동이게 하니,

세상 남자들이여 결코 자신만이 힘들고 자신들만이 무거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한탄하지는 말 일이다.

지금 내 귓가에는 소프라노 솔로의 'Nella Fantasia'가 그리고 남성 테너 이중주 애니메이션

'배추도사 무도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배추가 금값인 배추와 그 원인에 대한 공방이 다시 씁쓸해지면서 사는 것에 대한 현실의

무게가 합창의 감동을 몰아내고 있다

충청타임즈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작은 것들의 소중함
충청논단
2010년 09월 23일 (목) 충청타임즈 webmaster@cctimes.kr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아바타'와 '토이스토리3' 등 3D영화가 영화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현재

극장가에서 한창 상영 중인 애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의 신선함이 경탄스럽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는 영국의 동화작가 메리노튼의 어린이 소설 'The Borrowers'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기획과 각본을 맡고 신인 감독 요네바야시 히로마사가 연출한 애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는 판타지 애니메이션의 장르에 속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판타지 계열의 애니메이션들과는 달리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나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캐릭터 등의 영웅적인 묘사 대신 작은 인간이 인간세계에 '빌려' 살아가는 모험적

일상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상큼하다.

애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의 상상력은 어쩌면 의외일 정도로 단순하다. 10cm에 불과한 14살

작은 소녀 아리에티는 시골 외딴 집 마루 밑에서 용감한 아버지와 겁이 많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각설탕 한 조각이면 오랜 기간 설탕 걱정이 없고, 월계수 잎 한 장이면 한 겨울 마실 차를 해결할 수

있는 작은 공간에서 모든 것을 정상적인 인간에게 빌려 쓰며 생활하는 이들의 삶은 소박하지만

위험천만하다.

늘 정상적인(?) 인간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생활이지만 호기심과 용기로 가득 찬 소녀

아리에티의 모험은 마루 밑을 떠나 넓고 큰 인간세계로의 도전을 통해 판타지적 요소를

구성한다.

그리고 심장에 생긴 병으로 휴식과 요양을 위해 찾아 온 정상적 인간 소년 쇼우에게 마루 밑

소인의 세계가 발각되면서 맞게 되는 위기와 이를 극복하는, 아니 노출을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과정이 줄거리의 전부이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와 그의 지브리 스튜디오는 컴퓨터 그래픽이 지배하고

입체감으로 무장해 관객의 코앞까지 쳐들어와 현란하게 능력을 과시하는 디지털 세계를 여전히

 거부하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고집한다.

그 과정에서 정상적인 인간세계와 한없이 줄어드는 마루 밑 작은 사람들의 세계가 교차되는 장면은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아련함이 있다.

섬세한 붓질이 느껴지는 2D애니메이션으로 다루는 마루 밑 세계는 그리하여 아날로그 같은 추억에

빠져들게 하면서 정상적인 인간과 마루 밑 작은 인간들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거나 들춰냄의 대상이

 아니라 결국 인간의 본성에 늘 함께 자리하면서 서로를 은밀하게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애증의

관계를 심도 있게 은유한다.

마루 밑 세계의 열네 살 작은 소녀 아리에티는 왜 굳이 정상인간 중에서도 심장이 약한 소년 쇼우에게

그 존재가 확인되는가.

그리고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단지 지극히 작다는 사실하나만으로 늘 불안해 하면서,

 결국 "위험은 멀리 할수록 좋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이라는 작은 인간세계의 말은 정상적인

현대인의 낯설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사는 일과 끝없는 소유욕에 늘 휩싸여 있으면서 마루 밑 세계를 반드시 들춰내고야 말겠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또 어떤가. 모든 것은 빌려 쓰는 것이라는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마루 밑 작은 사람들의 세계는 그런 물질적인 욕망은 인간의 내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루에티! 너는 내 심장의 일부분과 같아. 잊지 않을 거야. 영원히…."라고 말하고 마는 심장이

아픈 소년 쇼우의 고백은 어쩌면 현란함과 욕망의 정상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피안의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고향의 작은 설렘에서 쫓겨나 치열한 삶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은 다시 가슴 깊숙이 감추고 말 테지

충청타임즈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추석을 추억함
충청논단
2010년 09월 16일 (목) 충청타임즈 webmaster@cctimes.kr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아버지는 항상 분주하셨다.

시장통 한복판에서 늘 추석을 맞아야 했던 내 어린 시절. 명절대목이라는 특수로 넘쳐났던 사람들과, 늦은 밤이 돼서야 파시(波市)가 되는 바람에 쉴 대로 쉬어버린 목청만큼이나 지친 몸은 자꾸만 허방다리를 놓고 말았다.

한가위를 코앞에 둔 채 휘영청 밝은 큰 달의 빛은 차라리 서러웠던 것이 내 어릴 적 추석의 기억이다.

그리고 잔뜩 모자란 잠 때문에 천근만근 같았던 눈꺼풀이, 그리고 잠투정을 들쳐 깨우는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가 야속하기만 했던 추석날 새벽.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조리 이끌고 새벽기차를 탔다.

막내이던 아버지는 고향인 지금의 충주시 주덕읍으로 동이 트는 것과 거의 동시에 큰집으로 내달려

가시곤 했다.

부대종이에 둘둘 말아 싼 쇠고기덩어리를 내 손에 들려주시며 놓치지 말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시던 아버지의 뜻을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엿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아버지는 추석 대목장을 돕느라 밤 늦도록 파김치가 되어버린 어린 자식 5남매를 추석이면

 왜 어김없이 모조리 이끌고 하염없이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는지 그때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새벽 첫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어찌 피난민 행렬처럼 길게 늘어서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지혜는 그때 내겐 아직 없었다.

그땐 그랬다. 삼대가 모여 함께 차례를 지내면서 큰 방 맨 끄트머리에서 사촌형들의 엉덩이에 대고

 절하느라 키득거리다가 어른들의 서늘한 눈초리에 몸을 움찔하던 기억.

그 시절 추석에는 차례를 마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어김없이 또 하나의 통과의례가 있었다.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던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 이어지면 소학교라도 마쳐 요즘 말로 가방끈이

그나마 길었던 아버지의 훈계 또는 징치가 있었고, 회초리라도 들리는 날에는 앞문으로 뒷문으로

달아나던 사촌형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추석은 그랬다. 수고에 감사하고 잘잘못을 가려 새롭게 반성하는 계기였으며, 서로 용서와 화합을

통해 거듭나는 시간이었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망각뿐인 용서'를 경계하고 카뮈는 용서를 위한

 철저한 기억을 주문한다.

그런 용서와 화합, 그리고 길고도 길었던 한여름의 수고를 솔잎 내음 그윽한 송편을 한 입 베어 물며

 위로했던 일. 마을 뒷동산에 오르면 금방이라도 손이 닿을 것 같은 둥근 달을 보며, 그리고 아직

풍성한 가을 들녘을 보며 다시 희망을 채우는 일은 아무래도 추석이기에 가능한 넉넉함이 아니었을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아버지를 여의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추석에 차례를 지내기 위해 아버지의

고향을 가지 않는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현대인들이 농촌의 풋풋함과 훈훈함으로 기억되는 추석의 넉넉함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역시 분주한 일상 가운데 하나로 그저 습관적인 귀향길에 나서고 만다.

성냥갑 같은 사각 틀의 아파트에 갇혀 살며, 또 그 아파트를 내 집으로 만들겠다는 투지를 불태우며

아등바등 사는 사이 추석은 이미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대가족과 농경사회라는 생존 수단이 공업과 지식정보서비스 산업의 시대로 완전히 뒤바뀐 지금,

우리는 어쩌면 내 부모형제보다 직장상사나 거래처에 더 목을 매고 살아야 하는 서글픈 처지가 아닌가.

게다가 물가는 어찌나 천정부지로 올랐는지... 벌이가 변변치 않은 내 눈치를 살피며 아내는 자꾸만

제수용품 흥정을 들었다 놓았다 한숨인데, 상인의 눈초리는 사납기만 하고...

어쩌랴. 이번 추석은 그런 저런 가난함 마음으로 두루두루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서, 나 역시

어린 덧?을 깨우느라 추석날 새벽잠을 설치면서 추억으로만 침잠할 수밖에

충청타임즈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병어 이야기
충청논단
2010년 08월 06일 (금) 충청타임즈 webmaster@cctimes.kr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병어는 몇 안 되는 여름철 생선이다.

게다가 내게는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을 새삼 간절하게 하는 추억의 먹을거리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전국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청주 육거리 시장통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은 상설시장으로 변모했지만 내 어릴 적 시장은 육거리라는 이름 대신에 석교동, 혹은 남주동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 같은 상설시장보다는 5일장이 더 인기가 있어 장꾼들도 대부분 장날에 맞춰 시장을 찾았고, 때문에 장날에는 무척 많은 사람들로 붐볐던 시장통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장날을 맞아 펼쳐지는 국밥집은 물론이거니와, 커다란 항아리

에 담아 지게에 지고 다니며 사람들을 유혹했던 초콜릿 색 자장면의 냄새는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입에

침을 고이게 한다.

아버지는 병어를 무척 좋아하셨다. 안팎으로 궁핍했던 시절, 맛난 것이 생기면 자식들 입을 우선했던

당연한 내리사랑에도 병어는 항상 예외였다.

온통 육지로 둘러싸여 바다구경은 좀처럼 할 수 없었던 지리적 환경에서 생선이 식탁에 오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런 생선을 날것인 채로 먹을 수 있는 여름 입맛의 호사는 병어가 아니면 좀처럼 누릴 수 없는

기회였으니, 자식들 입이 우선되는 윤리적 가치관조차 그 유혹을 이기기 쉽지 않으셨을 테지.

반짝이는 은색으로 통통한 모양의 몸체를 지닌 병어는 우리나라 서남해안에서 많이 잡힌다.

신선한 상태로의 운송수단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바다를 떠나 내륙도인 청주의 장날에 맞춰

눈부신 자태를 뽐내던 병어.

파장이 된 후 그 아름다운 병어를 뼈째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 드시면서 고단한 하루를 삭이시던 아버지

의 모습과 그중 몇 점을 얻어먹으면서 여름철 별미를 만끽했던 기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난 6월 병어축제를 기획했던 전라남도 신안군이 병어가 잡히지 않아 울상을 짓고 있다는 소식에 이어

최근 한 일간지가 2050년이 되면 우리 식탁에서 생선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경고성 보도를 했다.

과학 전문지 네이처를 인용한 이 신문의 보도는 1950년대 이후 지구 바다의 식물성 플랑크톤이 40%나

감소했으며, 이런 추세라면 2050년쯤이면 인류의 식탁에서 생선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식물성 플랑크톤의 감소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해수면의 온도가 상승하면서 해수의 뒤섞임 현상이

둔화됨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해수의 뒤섞임 현상은 심해의 풍부한 무기질 성분을 해수면 가까이

끌어 올려 식물성 플랑크톤의 광합성 활동에 필요한 무기질 영양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 왔다는 설명

이다.

결국 인간이 주범이라는 얘기인데, '시네마천국'이라는 고전적 영화에서 주인공 살바토레를 연기한

프랑스의 배우 겸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자끄 페랭(Jacques Perrin)의 영화 '오션스(Oceans)'를 보면

차라리 인간이 혐오스러울 정도다.

고급 상어지느러미요리를 위해 살아 있는 바다 속 생명체를 잡아 등과 꼬리지느러미만을 잘라 낸 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바다로 버리는 인간의 먹을거리에 대한 탐욕의 끝은 어디까지

인가.

※ 사족: '오션스(Ocences)' 한국 개봉판의 치기는 또 어떤가. 빵꾸똥꾸가 난무하는 가운데 인간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전달하기 위해 다큐영화를 감독하고 각본을 쓰며 프랑스판 내레이션까지 맡았던

거장 자끄 페랭의 노력을 무색하게 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거 아니라도 폭염에 진저리를 치게 되는 요즘, 바다 속 청량한 화면이 치기어린 한국말 내레이션으로

 짜증이 배가되는데.

모처럼 식탁에 오른 병어찜 한 점에 사람의 본질까지 떠올리며 생각이 많아진 것이 혹시 더위를 먹은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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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