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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생태계/지식2010.07.09 08:51

수의 최대 권력자는 제로(0) 제로의 DNA를 찾아서(5) 2010년 07월 09일(금)

철학과 함께 출발한 수학은 다른 과학과 동떨어진 채 홀로서기만을 고집하는 은둔의 과학이 아니다. 인류의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했다. 최근 컴퓨터 연산법칙인 알고리즘(algorism)은 아라비아 계산법에서 나온 수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 속에서 제로의 역할은 막대하다. 21세기의 화두는 창의성이다. 모방만으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기초과학의 산실인 고등과학원(KIAS)과 공동으로 제로의 기원과 역사 등 이에 얽힌 미스터리를 이야기로 풀어보는 ‘제로의 DNA를 찾아서’를 기획했다. [편집자 註]

오늘은 제로처럼 ‘없다’는 뜻을 가진 무(無)를 해부해 보기로 하자. 무가 적어도 상형문자에서 출발한 한자라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무라는 글자는 무엇을 형상화해서 만들어진 글자일까?

예를 들어 우리는 ‘날’을 뜻하는 일(日)이 해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며 월(月) 또한 달의 모습에서 나왔다는 것 정도는 다 알고 있다. 여기에서 조금 더 진보해서 우(雨)가 비 내리는 모습에서, 그리고 마음 심(心)이 사람의 심장의 모습을 따서 만들어낸 글자라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한자가 뜻 글자로 일종의 상형문자가 진보한 것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형상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글자가 모습을 따서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 더 이상의 이야기는 전문가에 맡기고 제로의 비밀을 캐기 위한 첫 관문으로 들어가보자. 무(無)를 해부해보는 작업이다.

無의 기원은 무당이 춤추는 모습

<한자의 재발견>을 쓴 이재황 고전문화연구가에 따르면 무(無)라는 글자는 원래 무당이 양손에 무구(巫具)를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그의 지적대로 지금의 무(無)의 모자(母字)로 가장 오래된 글자꼴인 갑골문자(은나라 때 거북 껍데기 등에 새겨 점친 것)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가운데 사람이 팔을 벌리고 있고 그 팔에 무엇인가 걸려 있는 모습이다. 지금의 무(無)는 참으로 짜임새도 있고 잘 생겼다. 그러나 갑골문자 무를 보면 엉성하기 짝이 없다.

갑골문자에서 조금 더 진화한 것이 오른쪽에서 보는 무의 모습이다. 여전히 그림인지 글자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지만 글자에서 균형과 조화를 느낄 수가 있다. 진나라 시대의 글꼴로 오늘날 전서체와 비슷하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왜 없다는 뜻의 무(無)라는 글자가 하필이면 무당이 무구를 들고 춤을 추는 모습에서 나왔는가?” 하고 말이다. 무와 무당의 춤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재황 연구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한자가 일종의 상형문자로 뜻 글자라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지만 사실은 소리글자가 더 많습니다. 60여 개 정도의 기본적인 글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소리글자라고 할 수 있죠.

처음에는 몇 십 개에 불과한 한자가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결합하고, 그리고 음을 표기하기 위해 뜻과는 거리가 먼 글자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제 한자는 뜻글자라기보다 소리글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음 대목이다. “그러나 무(無)는 기본적인 글자에 속하기 때문에 그 속에 의미가 있습니다. 무당이 무구를 쥐고 춤을 춘다는 차원에서 무(無)는 춤출 무(舞)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고대 일부 문헌에서 서로를 대신해서 쓰이기도 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면 “무(無)의 기원에서는 지금의 없다라는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다고 볼 수 있죠. 그러나 어떻게 보면 관계를 유추해 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의 무당의 역할을 생각해보고, 또한 없다는 의미를 깊게 생각해 본다면 말입니다.

글 속에는 종교, 철학, 사상, 문화 등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없다’라는 것을 춤추는 무당과 연결시키는 일은 당연히 가능하겠지요? 철학적으로는 아주 상반되는 의미의 ‘있다(有)’와 ‘없다(無)’ 둘을 못 연결 시킬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로를 상징하는 무(無)가 한자문화권에서 춤추는 무당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자 새로운 발견이다. 어떻게 제로가 춤추는 무당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 사고의 지평을 넓혀보자. 그리고 상상력과 호기심도 총동원해보자.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에 조금은 설득력 있는 답변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제로는 영원의 상징?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그만 더 낮았다면 세계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수학자 파스칼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결코 문학적인 수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파스칼이 셰익스피어처럼 역사 속의 최고 미인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낭만과 로맨스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여자의 아름다움과 자존심을 상징하는 클레오파트라의 코와 세계정치의 변화를 하나의 수학적 도식이나 공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아마도 그는 이미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날갯짓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려는 오늘날 나비효과를 마음 속에 그렸는지도 모른다. 200년 앞서서 말이다.

요는 적어도 ‘과거의 역사적인 내용을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연결시키는 일’은 창의적인 시도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무리가 따른다고 해도 말이다.

이런 결론을 내려보면 어떨까? 무당(shaman)은 신의 대리인이다. 그가 무구를 갖고 춤을 출 때 그는 신과 대화한다. 신은 불생불멸의 영원을 상징한다.

제로는 엄청난 권력자

그렇다면 앞서 밝힌대로 제로의 무(無)가 영원으로 이어졌듯이, 옛날 한자를 만들어낸 청동기를 넘어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이와 같은 비슷한 개념이 살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당을 너무 높게 평가한다고 지적할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4천년, 5천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당은 전혀 지금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제로는 단순히 그저 ‘없다(nothing)’이다. 그러나 수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 제로가 탄생하기까지에는 숱한 세월과 과정이 필요했다. 고고학적 발견처럼 제로의 DNA를 찾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로는 수학에서 중요한 족보 가운데 하나다. 수에는 세가지가 있다. 양수(positive number), 음수(negative number), 그리고 제로다.

숱하게 많은 양수들과 음수들을 가운데에 홀로 우뚝 서서 수들을 저울질하고, 조정하고 통제하는 것이 제로다. 얼마나 대단한 파워를 가진 수인가? 엄청난 권력자가 바로 제로다. (계속)

김형근 편집위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0.07.09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마켓 생태계/지식2010.06.16 03:06

‘無’에서 무한의 과학으로 제로의 DNA를 찾아서(4) 2010년 06월 16일(수)

철학과 함께 출발한 수학은 다른 과학과 동떨어진 채 홀로서기만을 고집하는 은둔의 과학이 아니다. 인류의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했다. 최근 컴퓨터 연산법칙인 알고리즘(algorism)은 아라비아 계산법에서 나온 수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 속에 제로의 역할은 막대하다. 21세기의 화두는 창의성이다. 모방만으로는 경쟁력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기초과학의 산실인 고등과학원(KIAS)과 공동으로 제로의 기원과 역사 등 이에 얽힌 미스터리를 이야기로 풀어보는 ‘제로의 DNA를 찾아서’를 기획했다. [편집자 註]

“무(無)라, 무(無)라, 모든 게 무(無)라…….”

1966년 10월15일, 평생 ‘無’자 하나를 화두로 삼고 정진해 왔던 선승 효봉(曉峰)이 굴리는 염주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그는 앉은 채로 세상을 떴다. 불교 용어로는 좌탈입망(座脫立亡)이라 한다.

왜 갑자기 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불교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판사라는 직위를 헌신짝처럼 걷어차고 유유히 흐르는 구름의 길을 걸었던 운수행각(雲水行脚)의 수도승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無와 제로의 관계는?

요점은 그가 평생 화두로 삼고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없다’는 뜻의 무(無)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역시 ‘없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제로(0)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다.

그러면 출가해서 이승을 떠날 때까지 효봉의 마음 속에서 늘 함께했던 무(無)는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세상만사가 모두 덧없다는 ‘허무의 무’를 생각했을까? 아니면 비슷한 내용으로 ‘인생무상의 무’를 생각한 것일까?

또 아니면 원래 우주는 나고 죽는 것이 없고, 더함(plus)도 덜함(minus)도 없는 무 그 자체였다는 아주 어려운 철학적 사변을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효봉의 경우만이 아니다. ‘無’자는 옛날부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는 불제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화두다. 그러면 ‘無’자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제로의 속성을 잘 알 수 있을까?

우주를 가리키는 허공은 10의 마이너스 20승

고등과학원 초대원장을 지낸 김정욱 명예교수가 지난해 고등과학원을 찾은 청소년들에게 <동양의 십진법>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는 강의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 쓰고 있는 말 중, 수와 관련된 단어들 속에 담겨 있는 수학적 의미를  풀어내 커다란 갈채를 받았다.

예를 들어 작은 수로 찰나(刹那)라는 단어가 있다. 또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애매모호하다는 말 중에 모호(模糊)라는 단어가 있다. 하늘, 또는 우주를 가리켜 허공(虛空)이라고 하기도 한다. 모두가 수에서 유래된 단어들이다.

▲ 고등과학원 초대원장을 지낸 김정욱 물리학부 명예교수 
김 교수에 따르면 찰나는 10의 마이너스 18승이다. 모호와 허공은 각각 10의 마이너스 13승과 마이너스 20승이다.

찰나와 모호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거대한 하늘을 뜻하는 허공이 아주 작은 수 10의 마이너스 20이 되는 걸까? 아마 허공은 하늘의 개념보다 먼지나 티끌이 없는 깨끗함을 상징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김 교수는 허공보다 더 작은 수로 청정(淸淨)을 소개했다. 청정은 10의 마이너스 21승이다.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미세한 먼지, 더러움이란 있을 수 있다는 말로 이해가 간다.

무량수는 10의 128승

그렇다면 청정보다 더한, 그야말로 먼지 제로의 단어는 무엇일까? 청정을 좀더 강조하는 청정무구(淸淨無垢)? 아마 그러한 인간세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단어는 없다.

<동양의 십진법> 이야기를 조금만 더 계속하자. 김 교수는 강의에서 다시 큰 수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열거했다. 인도 갠지스 강의 수 많은 모래알을 뜻하는 항하사(恒河沙)는 10의 56승이다.

재미 있는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다.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한 이치라는 말로, 미스터리를 뜻하는 이 단어는 10의 80승, 또는 10의 120승이다. 엄청나게 큰 수다. 이 정도면 천문학적 수치의 개념을 넘어 영원한 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수가 있다. 바로 무량수(無量數)다. 이 수는 10의 88승, 또는 10의 128승이다.

물론 아라비아 수의 탄생지이자 대수학이 발달했던 인도의 불교에서는 이보다 더 큰 수들이 무수히 많다.

일상생활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지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불가량(不可量),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불가설(不可說)도 있다.

그런데 한번 곰곰이 따져보자. 아주 긴 시간을 뜻하는 겁(劫)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 영겁(永劫)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또 수십억 광년이라는 시간과 수백억 광년, 그리고 수천억 광년이라는 시간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마음과 상상력 속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광활한 우주를 상대로 할 때도 당연히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제로다.

한량 없는 크기의 무량수는 결국 제로?

▲ 제로 속에는 인간의 무한한 상력과 호기심, 그리고 철학적 사변이 녹아 있다. 또한 창의성이 숨어 있다. 
무량수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우리가 쓰는 한자에서 부정(negative)의 의미를 가진 ‘아니다’라는 불(不)이나, 없다라는 의미의 무(無)가 접두사로 붙으면 금새 부정에서 반전해 엄청난 긍정(positive)으로 바뀌기도 한다. 바로 한자의 묘미이다.

무량수의 무량(無量)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의미라는 데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고의 지평을 더 넓혀보자. 약간 엉뚱한 해석과 함께 말이다.

무량을 무설탕, 무식, 무지, 무해, 무소식, 무소유……. 이런 말과 비교하면 무량은 양이 없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무량수란 양이 없는 수다. 크기가 없는 수라는 의미다.

그렇게 본다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인 무량수는 아무 것도 없는 수가 돼버린다. 다시 말해서 무량수는 우리가 그 DNA를 해부해보려는 제로와 일치해버린다. 사족을 다시 달자면 무한은 바로 제로가 돼버리고 제로는 다시 무한이 돼버린다.

비약이 너무 심하게 느껴지거나,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잡힐 듯 말 듯한 신기루와 같은 제로를 해부하는 여행을 떠나려면 이 정도의 논리비약, 엉뚱한 상상력은 당연히 무장해야 될 필수도구라고 생각된다. 

새로운 사고와 함께 상상의 지평을 넓혀야만 제로사냥에서 성공할 수가 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성이다. (계속)

감수: 허석문 고등과학원 수학부 박사 |

김형근 편집위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0.06.16 ⓒ ScienceTimes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