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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2010.03.23 06:14

[창간 10년]아이뉴스24의 DNA는 변치 않을 터
이재권 논설실장 jaylee@inews24.com
# 각인

2000년 3월20일. 10년 전의 그날 오후는 나른했다.

봄 기운이 완연했다. 전날은 비가 내려 꽤 쌀쌀했었다. 그날은 기온이 크게 올라 훈기가 돌았다. 더 이상 꽃샘추위는 없을 것임을 예감케 했다.

그날 오후가 더 나른했던 것은 전날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이다. 매체 창간이 어디 보통 일인가. 더구나 생소하고 실험적인 인터넷매체다. 전에 아무도 안가 본 길을 가는 것이었다. 마땅히 참고할 것도 없었다. 흉내 낼 것도 없었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바다에 내던져진 꼴. 창간 준비기는 '암실에서 바늘 찾기'였다. 그 3개월을 숨가쁘게 달려왔다. 거의 매일 자정을 넘겨 퇴근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순전히 금요일의 연장이었다. 지친 창간 멤버들은 고통을 느낄 감각도 무뎌졌다. 2월28일 창간시험 판을 'www.inews24.com'에서 오픈한 후 쌓아놓은 기사가 모두 500개. 3월20일 창간에 맞춰 한꺼번에 올린 기획기사가 40여 개. 기자 10명을 포함, 20명 남짓한 아이뉴스24의 전 멤버들은 그렇게 혼신의 힘을 쏟아냈다. 그날 오후가 나른했던 건 기력이 소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른한 오후의 정적이 깨졌다. 대형 사건의 급보가 올라와서다. 슬금슬금 소문이 나돌던 골드뱅크 경영권 분쟁이 이날 터졌다. 골드뱅크는 1997년 '인터넷광고 보면 돈 준다'는 '클릭&보상' 마케팅을 국내 처음 선보이며 등장했다. 당시 골드뱅크는 '센세이션'이었다. 1998년 10월엔 시초가격 800원으로 코스닥시장에 진입했다. 이후 16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면서 주가가 폭등했다. 1999년 5월에는 3만700원까지 올랐다. 골드뱅크는 '닷컴 열풍'의 진원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골드뱅크가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것. 국내 인터넷 업계 최초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사례가 될 판이었다.

즉각 편집국엔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오후 3시19분 첫 기사 '골드뱅크 김진호 퇴진 위기'가 송고됐다. 데스킹을 거쳐 뉴스가 독자들에게 전달되는데 5분도 안걸렸다. 인터넷매체 특유의 순발력이다. '경영권 분쟁 골드뱅크, 주가는 강세', '경영권 분쟁 골드뱅크 어떻게 될까', '김상우 ICG 사장은 누구인가', '이지오스는 어떤 회사인가', '삼성가 맏손녀 이미경은?', 'ICG는 어떤 회사인가', '유신종사장 일문일답', '김진호 일문일답', '골드뱅크 파문 종합', "'제일제당이 배후?" 소문증폭', '골드뱅크 경영권다툼 기자회견 현장', '투데이포커스 - 24일 벤처주총대란'…그날 오후 아이뉴스24가 숨돌릴 틈 없이 취재, 보도한 골드뱅크 관련 뉴스들이다.

전날 벌어진 사건을 아침 조간신문을 통해 접했던 독자들은 놀라워 했다. 시간대 별 상황 전개와 사건의 배경, 전망 등을 실시간 현장중계 식으로 보도하는 새로운 매체를 접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새로울 게 없지만, 당시엔 혁신이었다.

'인터넷신문의 태동'이라는 언론의 새로운 지평선이 그렇게 열렸다. 언론에도 '문법'이 있다면 그 문법이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보도에 '통념'이 있다면 그 통념도 깨지는 사건이었다.

독자들은 열광했다. "난 inews24를 통해 남들보다 빨리 뉴스를 접한다. 난 inews24를 통해 남들보다 깊은 정보를 얻는다. 나는 기다리지 않는다. 절대로 궁금한 채로 하루 밤을 새지 않는다. inews24는 대다수 '인터넷 가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당시 인터넷업계 리더 중 하나이던 노상범 홍익인터넷대표(현 홍익세상 대표)가 "아이뉴스24에 중독됐다"며 내뱉은 고백이다.

아이뉴스24는 창간 날에 터진 대형 사건을 '기회'로 만들어냈다. 창간하자마자 첫날 인터넷신문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더 이상 선명할 수 없는 '각인'이었다.

# 괴력

한국에서 통신사업자 선정은 '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1992년엔 제2 이동통신사업자 선정 파문이 정권까지 흔든 바 있었다. SK가 1994년 한국이동통신, 1999년 신세기통신을 인수할 때도 정부와 재계는 큰 홍역을 치렀었다.

지난 2000년 3세대 이동통신 IMT-2000 사업자 선정 역시 매우 큰 이슈였다. IMT-2000 사업은 '황금알' 격이었다. IMT-2000 사업자 선정은 본질적으로 '이권'일 수 밖에 없었다. SK, KT, LG, 하나로통신, 온세통신 등 통신회사들만의 경합 무대가 아니었다. 280만개 중소기업까지 나섰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사업권을 따겠다"며 뛰어든 것. 판이 훌쩍 커져버렸다. 게다가 사업자 수를 몇 개로 할 것인지, 동기냐 비동기식이냐의 표준문제, 주파수 경매제 시행 여부, 컨소시엄의 국민주 공모 허용 여부 등 갖가지 이슈들이 난마처럼 얽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비와 잡음이 커져갔다. 그렇다보니 정치권도 IMT-2000 사업자 선정의 향배를 주목하고 있었다.

정보통신부는 6월13일 공청회를 열고 IMT-2000정책방안을 발표하기로 했다. 당연히 업계는 이에 온통 이목을 집중했다. 그러나 정통부는 IMT-2000정책방안 자료를 사전에 배포하지 않기로 했다. 공청회 당일에야 자료를 주고 의견을 접수하겠다는 것. 공청회에서 정부 발표나 듣고 가라는 셈이다. 업계에서는 불만이 비등했다.

아이뉴스24는 공청회에 앞서 6월7일 'IMT-2000정책방안' 자료를 입수했다. 문서 파일이 아니라 종이에 인쇄된 자료였다. 아이뉴스24는 고심 끝에 결정했다. 이해주체들에게 충분한 사전검토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보도할 가치가 크다고 판단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기자들을 죄다 불러들였다. 자료가 인쇄본이기 때문에 여러 명에게 나눠주고 일일이 워드 입력을 하게 했다. 일부에게는 내용 요약기사를 쓰게 했다. 일부에게는 분석기사 작성을 지시했다. 오후 1시39분 'IMT-2000사업자 3개 유력, 주파수 경매제 포기할 듯' 제목의 첫 뉴스를 띄웠다. 업계의 손가락들은 아이뉴스24 홈페이지를 광속으로 클릭했다. 하지만 이는 맛보기에 불과했다. 200자 원고지로 100장이 넘는 분량의 IMT-2000 정책방안 원문을 그대로 올렸다. 20여개의 도표도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어 삽입했다. 자료 원문이 송두리째 독자들에게 전해진 것. 더 나아가 '집중 분석, IMT-2000 정책방안', 'IMT-2000 정부안 모습 드러내던 날', 'IMT-2000 정책방안 업계 반응'을 잇따라 올렸다.

자료 공개를 안한 정통부는 KO 펀치를 맞았다. 업계는 경악했다. 초특급 이슈의 특종도 그렇거니와, 상상을 초월한 보도 방식에 혀를 내둘렀다.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날것을 무제한으로' 보도하는 새 전형을 창출했다.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무장한 아이뉴스24 기자들은 이처럼 '괴력'을 발휘했다. 아이뉴스24는 매체 파워를 그렇게 키워갔다.

◆ 아이뉴스24의 10년, 도전과 생존의 역사

10년 전인 2000년, 아이뉴스24를 비롯한 인터넷신문들이 거사를 도모했을 때 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커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쉽게 말하면 '벤처언론'이었다. 벤처는 성공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큰 법. 성공의 환상을 품었으나, 실패할 예감도 지울 수 없었다. 단지, 인터넷이 창출한 새로운 공간이 '멋진 신세계'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그들을 움직였다. 신천지로 떠나야 한다면 남들보다 먼저 배를 띄운다는 선택과 결단이었다.

탐험이 실패하면 잊혀진다. 성공하면 '개척자', '선구자'로 기록된다.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언론지형과 독자의 신문 읽기 패턴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아이뉴스24 등이 고난과 역경을 딛고 신문시장을 변화시킨 결과다. 지난 10년 사이에 한국 신문시장에는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주체세력이 바로 아이뉴스24 등 인터넷신문 1세대인 셈이다.

- 인정투쟁

아이뉴스24는 창간 이후 험난한 인정투쟁을 벌여야 했다. 새로운 상품을 내놓았으니 신문업계와 뉴스 공급자, 뉴스 소비자에게서 인정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이뉴스24에 합류한 기자들은 기존 오프라인 신문에서 IT전문기자로 명성을 날렸었다. 하지만 그들이 갈아탄 아이뉴스24가 딛고 선 것은 맨땅이었다. 법적으로도 인터넷신문은 언론사로 인정되지 않았다. 기존 오프라인 매체들은 보이지 않게, 때론 노골적으로 견제했다. 인터넷신문에 보도자료를 제공하지 말도록 정부기관이나 기업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기자단 가입은 번번이 거부당했다. 인터넷신문 기자들은 기자실에 들어가려다 오프라인매체 기자들로부터 "나가라"는 소리를 듣고 쫓겨나기도 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독자의 신뢰와 평가를 얻는 데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뉴스 경쟁력이다. 아이뉴스24는 특종 발굴에 전력을 다했다. 정부가 6.15 남북 정상회담 발표를 하기 하루 전 아이뉴스24는 이미 <정부 남북정보통신 협력 추진>을 톱뉴스로 올렸다. 그만큼 아이뉴스24 기자들의 취재력은 발군이었다. 뉴스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기자들에게 '팩트(fact) 지상주의'를 강조했다. 확인되지 않은 기사는 내보내지 않았다. '뎁스(depth)'와 '쏘 홧(so what)'을 귀가 따갑도록 강조했다. 심층 기사를 만들고, 다른 신문들의 기사와는 차별화된 기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기를 1년여. 아이뉴스24는 2001년 4월 정보통신부 기자단에 정식으로 가입하게 된다. 정부 부처 기자단이 인터넷신문을 인정한 첫 사례다. 일단 '동업자들'이 아이뉴스24를 정식 언론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뉴스24가 창간 이후 신속하고 정확하고 공정하고 품격 높은 정론을 펼쳐 온 노력의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다른 정부 부처 기자단들도 인터넷신문에 문호를 개방했다. 정부 부처 기자단 가입은 인터넷신문이 신문-방송과 대등한 언론의 지위를 공인받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아이뉴스24는 2002년 9월엔 한국기자협회로부터 회원사로 정식으로 인정받아 또 한번 위상을 확고히 했다.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2002년 초엔 인터넷 신문의 정체성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대선후보 토론회를 인터넷신문에도 허용하느냐가 쟁점이었다. 선관위는 "인터넷신문은 언론이 아니다"는 해석을 내렸다. 인터넷신문사들이 문제 제기에 나섰다. 논쟁은 국회로까지 확장됐다. 결국 여당인 민주당은 정간법 개정 방침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언론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 역시 "인터넷신문도 언론"이라고 발표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2005년 1월1일 인터넷신문의 지위를 법적으로 공인한 '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 보장에 관한 법률(신문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아이뉴스24는 척박한 환경에서 치열한 노력을 통해 자신이, 또 인터넷신문 전반이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데 밑거름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 혁신

아이뉴스24는 '혁신'에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플랫폼만 인터넷으로 바뀌어서야 기존 종이신문들의 온라인 판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었다. 언론의 기본 이념과 뉴스의 본질은 유지하되, 형식과 내용은 기존 매체와 크게 달라야 했다. '21세기형 종합 미디어'를 표방하며 인터넷신문을 창간한 이상, '인터넷스러움', '디지털스러움'을 최대한 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아이뉴스24는 독자가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언론사가 바로 피드백하는 양방향성을 구현했다. 아이뉴스24 홈페이지에서는 'IMT-2000 기술 표준 논쟁', '다음 온라인 우표제 실시' 등 이슈를 놓고 전문가들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아이뉴스24 홈페이지는 여론을 형성하는 주체이자 마당이었다. 기사를 출고한 지 불과 5분만에 독자들로부터 e메일이 날아오기도 했다. 기자가 놓친 부분에 대한 추가 취재를 요구하는 독자도 있었다. 독자들이 직접 기사를 만드는 '사이버기자'도 운용했다. 네티즌이 던져준 많은 정보들이 기자의 손을 통해 고급 기사로 탈바꿈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때론 기자의 짧은 식견을 꾸짖는 독자들도 있었다. '속시원한 기사'라는 격려의 메시지도 끊이지 않았다.

뉴스의 형식과 내용에서도 과감한 변화를 꾀했다. 공청회·토론회·국정감사 등 뉴스 현장에서 나온 발언을 남김없이 전하는 '현장중계'는 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기존 매체는 핵심내용만 짧게 압축해서 보도하는 게 관행이었다. 아이뉴스24는 그런 관행을 파괴했다. 주목도가 높은 사안의 경우 현장에 기자 2~3명을 보냈다. 기자들은 발언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해서 뉴스로 내보냈다. 독자들은 현장성을 극대화한 보도방식에 환호했다. 경쟁매체의 기자들이 아이뉴스24의 '현장중계'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는 일도 벌어졌다.

종전 기사체로 금기시되던 구어체를 과감하게 구사하기도 했다. 뉴스에 담아내지 못한 뒷얘기를 전하는 '뉴스인뉴스'에는 존댓말을 썼다. '뉴스인뉴스'를 읽는 독자는 마치 아랫사람에게서 '그게 사실은 이랬답니다'는 보고를 받는 기분을 맛봤다. '연구소 같은 미디어'를 표방한 아이뉴스24는 '투데이 포커스'나 '데일리 업종분석' 등 심층분석 코너도 만들었다.

아이뉴스24는 그 날 나온 뉴스들을 추려서 e메일로 전하는 뉴스레터를 국내 언론사중 처음으로 시도했다. 독자들은 아이뉴스24 홈페이지에 들어오지 않아도 e메일로 날아온 'CEO리포트', '뉴스다이제스트', '스팟뉴스'를 보고 뉴스의 흐름을 쫓아갈 수 있게 됐다. 뉴스레터는 이후 '다운로드 다이제스트', '칼럼 다이제스트', '시큐리티포커스', '모바일다이제스트', 조이다이제스트', '비즈플라자', '이슈포커스' 등으로 확대되면서 아이뉴스24의 뉴스전송 채널로 자리잡았다.

인터뷰 대상이 다음 번 인터뷰 대상을 추천하는 '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는 CEO들 사이에서 큰 화젯거리였다. '한국의 부자들', '배려'의 저자 한상복씨가 2000년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아이뉴스24에 28회에 걸쳐 연재한 색다른 형식의 칼럼 '사업과 사기'는 폭발적인 반응을 몰고 왔다. 당시 벤처 열풍의 음지를 조명한 '사업과 사기'는 벤처사기꾼의 행태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충격과 경종을 동시에 울려줬다.

아이뉴스24는 2001년 9월 17일 뉴스 유료화에도 나섰다. 이 역시 국내 최초의 시도였다. '투데이포커스', '뉴스인뉴스', '이슈진단', '데일리업종분석' 등 그동안 아이뉴스24가 자랑해 왔던 주요 뉴스 카테고리를 묶어 '프리미엄 뉴스 섹션'을 오픈한 것. 아이뉴스24의 유료화는 신문사로서는 신기원을 연 것이었다. 수익구조 부재로 고민하는 닷컴 기업에 큰 용기를 줬다. 이전까지 '인터넷은 무료'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게임이나 성인물을 제외하고 닷컴 기업이 유료화를 단행하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아이뉴스24는 '양질의 뉴스 콘텐츠는 반드시 유료화해야 한다'는 당위론에 따라 과감하게 유료화 정책을 밀고 나갔다. 아이뉴스24 유료화는 큰 논란을 불러왔다. 하지만 선도적인 매체의 유료화는 네티즌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창간 이후 끊임없이 혁신을 시도한 결과는 성적으로 나타났다. 아이뉴스24는 서비스 개시 2개월 만에 한국의 100대 사이트에 선정(월간조선)됐다. 3개월 후에는 미국의 알렉사닷컴(Alexa Internet) 집계 결과 '1인당 한달 평균 방문시간 75분'이라는 놀라운 기록도 세웠다. 2000년 10월 월간중앙이 IT 업계 CEO를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많은 CEO가 국내 최고의 사이트로 아이뉴스24를 선택했다. CEO들은 아이뉴스24의 뉴스에 대해 "빠르면서도 깊이와 현장감을 갖춘 정보"라고 극찬했다. 아이뉴스24는 창간 이후 매우 짧은 시간 내에 IT 분야 최고의 오피니언 리더 지위를 확보했고, 그 위상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살아남기, 그리고 희망

2000년 3월10일 미국의 나스닥 지수는 사상 최고치인 5048.62로 거래를 마쳤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급락했다. 급락세는 2002년 10월 1114.11로 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한국의 증권시장에서 2000년 4월17일은 지금도 '검은 월요일(black monday)'로 회자된다. 그날 단 하루 만에 한국의 코스닥에서는 8조원이 증발했다. 195.87이던 코스닥 지수가 이날 22.33포인트 폭락했다. 하락률이 무려 11.40%에 달했다. 전주 금요일(4월14일) 나스닥이 폭락한 영향을 직격탄으로 받은 결과였다. 코스닥은 2000년 4월을 기점으로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닷컴의 '거품'은 그렇게 빠졌다. 아이뉴스24 탄생 전후의 주식시장 상황이다. 아이뉴스24는 세계가 닷컴에 열광할 때 창간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아이뉴스24가 창간하자마자 닷컴은 드라마틱하게 추락했다. 닷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급속히 악화했다. IT벤처들은 하나하나 스러져갔다. 아이뉴스24는 미디어로서는 급속히 성장했지만, 경영사정은 갈수록 나빠져갔다. 수익 창출의 수단이 광고 외에는 변변한 게 없던 시절이다.

아이뉴스24의 10년이 화려함과 영광의 시절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아이뉴스24는 '디지털시대 미디어 혁명의 기수'를 외쳤다. 정직하고 올바른 언론의 모델을 제시하자는 열망을 불태웠다. 그러나 꿈과 사명감만으로 언론기업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장과 발전을 소망했지만, 기업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난세에는 살아남는 게 미덕. 아이뉴스24는 처절한 생존모드에 들어갔다. 뉴스만 잘 만들면 될 줄 알았던 순진함에서 벗어나야 했다. 비즈니스에도 눈을 떠야 했다.

2001년 4월 아이뉴스24는 정부로부터 벤처기업 지정을 받는다. 사업으로 기업 가치를 높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2001년 9월 '망할 각오'를 하고 콘텐츠 유료화 카드를 던진다. 2002년 4월엔 모바일 전문잡지 '엠톡'을 창간, 오프라인 무대에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터를 닦는다. 2003년엔 DVD 정보지 '디비디언(DVDIAN)'을 창간하고, 온라인 지식 커뮤니티 '아이비즈넷(www.i-biznet.com)'을 인수해 온라인-오프라인 사업기반을 확장한다. 2004년엔 '대한민국 모바일연감' 발간을 시작하고, 인터넷 스포츠·연예신문 조이뉴스24(www.joynews24.com)를 창간한다. 2005년엔 일본의 이통사인 NTT도코모·KDDI·보다폰 등에 IT 및 한류 콘텐츠를 수출하는 쾌거를 올린다. 또 대규모 컨퍼런스를 개최를 정례화하면서 사업 측면의 기반도 확보해 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뉴스24는 수익 창출의 기반을 갖춰가면서 창간 때 꿈인 '21세기형 종합미디어'의 면모를 하나하나 실현해 왔다.

◆ 아이뉴스24, 앞으로 10년도 처음처럼

"통계상 기업이 5년 동안 생존할 확률이 10%다. 10년 됐다면, 5년이 지나 살아남은 기업 중에서 다시 10%에 든 것이다. 아이뉴스24는 2000년 생긴 기업 100개 중 거의 혼자 살아남은 셈이다. 앞으로도 5년을 더 생존해 창간 15주년을 무사히 맞을 확률은 다시 10%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안철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좌교수의 말이다.

"남보다 앞서나가는 기업들의 경쟁 상대는 자기 자신"이라고 안철수 교수는 덧붙인다.

덕담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무시무시한 경고다. 자만하지 말고, 초심을 잃지 말라는 충고다.

아이뉴스24가 존속한 10년 동안 정권은 두 번 바뀌었다. 그러는 사이에 인터넷신문은 '총아(寵兒)'에서 '미운 오리새끼'로 취급되는 시절을 견디고 있다. '한국의 국격'을 높였던 IT산업은 이제 뒷전에 밀리고 있다. 아이뉴스24는 닷컴의 몰락을 거쳐 금융위기까지 관통했다. 외부 환경이 극에서 극으로 격심하게 변화한 10년을 버틴 셈이다. 안철수 교수의 말대로 살아남았다는 게 기적 같이 보이기도 한다.

지금도 미디어 환경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2003년 무렵부터 네이버·다음 등 포털은 뉴스 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엄청난 사용자가 있는 포털은 뉴스 시장을 유통 중심 구도로 탈바꿈 시키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뉴스 생산자보다 뉴스 유통자가 뉴스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이변이 벌어지고 있다. '포털에 떠 있지 않은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게다가 블로거들이 정보를 전파하고 사회적 의제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인 트위터가 뉴스를 전송하고 구독하는 채널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인터넷신문은 10년 전 최첨단 뉴미디어로 각광받았으나, 지금은 종이신문처럼 '올드미디어'로 위상이 격하된 게 냉엄한 현실이다.

더구나 미디어 융합이란 거대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신문과 방송이 함께 가고, 방송과 통신이 융합되는 시대다. 스마트폰·태블릿PC 등 새로운 미디어는 뉴스 유통을 모바일 세계로 확장시키면서 포털 이상의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조선·중앙일보 등 국내 일간지들도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다. 이들은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강화하고, 새로운 플랫폼으로 스마트폰 등 뉴 미디어를 적극 받아들이고 나섰다.



아이뉴스24는 앞으로 또 다른 10년을 향해 새롭게 변신할 것을 다짐해본다. 지난 10년의 역경을 거치는 동안 아이뉴스24를 응원하고 지켜준 독자들께 갖춰야 할 예의라는 생각에서다. 앞으로 10년은 지난 10년보다 더 거센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씩씩하게 헤쳐나갈 것이다. 10년을 생존한 기업의 저력은 쉬 얻어진 게 아니라는 자부심이 그 밑천이다. 그러나 변화를 추구해도 변치 않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창간 때부터 견지해 온 '착한 언론', '친구 같은 언론'이라는 아이뉴스24의 원형질, 아이뉴스24의 DNA다.

IT 명사들의 아이뉴스에 대한 코멘트

고현진 LG텔레콤 부사장 "때로는 재미있는 기사로 때로는 심층분석 특집으로 기업 현장, 소비자 반응, 세계 시장 추세 등을 알려주는 아이뉴스24는 어려움을 뚫고 IT 혁명을 이끌어 왔던 사람들에게 언제나 옆에 있는 좋은 친구였다."

김신배 SK C&C 부회장 "IT 전문 온라인 매체의 신기원을 열어온 아이뉴스24는 창간 이후 정보통신산업 발전의 역사를 실시간으로 지켜온 든든한 후원자이자 역사의 충실한 기록자였다."

박석봉 전 SK 커뮤니케이션즈 부사장 "단지 또 하나의 미디어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뉴미디어."

신재철 전 LG CNS 사장 "아이뉴스24의 지난 세월은 無에서 有로 변신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아이뉴스24가 이루어온 족적은 '놀람' 그 자체다."

안철수 KAIST 석좌교수 "아침에 일어나면 인터넷 접속부터 한다. 아이뉴스24는 일어나서 제일 먼저 체크한다. 출근한 뒤로는 두 시간에 한 번씩은 들어갈 정도."

유재성 전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대표 "아이뉴스24가 변화를 거듭해 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볼 수 있음은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현장을 뛰는 기자들의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사실에 대한 추구다. 특히 우리나라 IT산업의 핵심 소식들을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전달 수단으로 확장함으로써 IT산업의 영역과 파급효과를 늘려나갔다는 측면에서 아이뉴스24가 지니는 의미와 상징성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승일 전 야후코리아 대표 "가장 이른 시간에 기자실을 찾는, 그리고 가장 늦은 시간에 기자실을 떠나는 아이뉴스24의 기자들을 보며 적어도 아이뉴스24가 다짐하고 계획했던 것들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이룰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본다."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전 대표 "가끔은 아이뉴스24의 날카로운 비판에 서운할 때도 있지만 아마도 가장 좋은 친구는 잘못하는 점을 기탄없이 지적해주고 잘 하는 점을 칭찬해주는 친구일 것이다. 아이뉴스24가 저희 회사를 포함한 많은 기업들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 "아이뉴스24가 아날로그 시대의 잉크가 아닌, 디지털 시대의 신호로서 세상의 올바른 눈과 귀가 되는 정보 매체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허진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장 "아이뉴스24는 신속성과 다양성을 지향하는 신개념의 온라인 뉴스서비스의 성공 가능성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우리나라 언론의 새 지평을 여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해왔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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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3월 19일 오전 09:42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콘텐츠/클라우드2010.02.01 16:48

"삼성-LG '잡스 오빠' 한테 배워야 해요"
[IT 10년 모바일 혁명 ①] '웹 0세대' 고윤환 대표 제2 창업기
10.02.01 12:18 ㅣ최종 업데이트 10.02.01 12:18 김시연 (staright)

2000년 닷컴 열풍 속에 IT 벤처 창업 붐이 인 지 10년. 아이폰 열풍에 힘입어 '모바일'이 새로운 기회로 떠오르고 있다. 과연 '모바일 혁명'이 그동안 침체에 빠진 IT 벤처 창업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직접 현장을 찾아가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첫 순서로 PC통신에서 출발해 웹 시대를 거쳐 모바일 웹 시대를 열고 있는 '청년 창업자' 고윤환 캘커타커뮤니케이션 대표를 만났다. <편집자말>

 

  
고윤환 캘커타커뮤니케이션 대표는 아이폰부터 아이북, 맥북 에어까지 없는 게 없는 '애플 마니아'다.
ⓒ 김시연
고윤환

평일 낮인데도 손님 발길이 뜸한 서울 송파구 문정동 가든파이브 공구상가에 유달리 활기찬 곳이 있다. "이제 나도 사장이다!"란 구호 아래 20~30대 예비창업자 수백 명이 꿈을 키우고 있는 '강남청년창업센터'다. 이들에게 오롯이 주어진 공간은 넷이 나눠 쓰기도 빠듯한 공동 사무실뿐이지만 열띤 분위기만큼은 구글이나 애플 본사 안 부럽다.

 

모바일 웹 솔루션 업체인 캘커타커뮤니케이션 고윤환(37) 대표는 이곳에서도 눈에 띈다. IT(정보통신) 분야에서 보기 드문 여성 창업자여서만은 아니다. 1994년 LG데이콤 천리안(LG텔레콤에 통합)을 시작으로 IT업계에 15년 넘게 몸담은 만만찮은 경력에다 창업 첫해 억대 자금을 끌어 모은 남다른 수완까지 갖춘 탓이다.

 

"10년 만에 온 IT 격변기, 다시 파도 타야죠"

 

"여기서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KAIST, 서울대 출신은 물론이고 삼성전자 출신까지 놀랄 만한 경력을 가진 분들이 많거든요. 요즘 다시 창업 붐이 이는 건 실업률이 높아진 탓도 있지만 10년 전 닷컴 골드러시 때처럼 모바일 제너레이션(세대)을 큰 기회로 여기는 것 같아요."

 

전화 모뎀으로 PC통신 하던 시절 IT업계에 발을 들여놨으니 '웹 1세대'를 넘어 '웹 0세대'라고 자신을 소개한 고윤환 대표는 자칭 '모바일 웹 전도사'이기도 하다. 

 

"아는 교수님이 '네 인생 마지막 IT 격변기일 수도 있으니 이 파도를 다시 타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모바일 웹 사업 아이템을 지인들에게 얘기했다 공격받고 반론을 펴다보니 직접 창업 기회까지 잡게 됐네요."

 

지난해 2월 중소기업청 예비기술창업자 지원으로 출발한 고 대표에게 지금 주어진 건 책상 두 개가 들어갈 공간이 전부지만 그 뒤엔 든든한 '백'이 있다. '탄력 근무' 형태로 번갈아 출퇴근하는 경영지원 담당, 개발자 등 월급 주는 직원만 6명이고 수시로 자문해주는 회계사, 법무사, 변리사까지 두고 있다.

 

모교인 경희대 창업보육센터에 있는 연구소와 강남 파트너 회사들을 오가느라 한창 정신없을 고 대표지만 요즘 발목이 잡혔다. 지난 연말 길에서 미끄러져 발을 다치는 바람에 3개월 동안 거동이 힘들게 된 것. 문정동 사무실을 찾은 지난 1월 28일에도 휠체어에 탄 채 손님을 맞고 있었다.   

 

"아이패드 때문에 킨들 산 사람들 속 좀 쓰릴 걸요"

 

마침 이날 새벽 애플에서 태블릿PC '아이패드'를 처음 선보였다. 고 대표가 쓰는 아이북 모니터에선 애플 CEO 스티브 잡스의 아이패드 시연 동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잡스 오빠, 정말 멋지지 않아요? 절 위해 딱 499달러에 내주시고…."

 

아이북 뿐 아니라 아이팟 터치, 아이폰, 맥북 에어까지 이미 책상 위엔 '사과' 로고들이 가득했다. 고 대표는 '잡스 오빠'가 서류 봉투에서 얇은 맥북 에어를 꺼내는 모습에 반해 2008년 국내 출시 전에 샀을 정도로 '애플 마니아'다.

 

고 대표가 지금 하는 일도 애플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아이폰 때문에 관심이 커진 '사용자 경험(UX)' 기반 모바일 웹 디자이너인 고 대표는 요즘 한창 애플 앱스토어에 올릴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까지 몸담았던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DMI) 무료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서비스 '심파일'을 모바일 웹으로 구현한 '모바일 심파일' 사업의 일부다.    

    

"아이패드는 가격 대비 효과적으로 균형을 맞춘 것 같아요. 아마존 킨들 사신 분들 속 좀 쓰렸을 걸요. '큰 아이팟'이라고도 하지만 사용자 패턴에서 태블릿 수요는 분명 있었어요. 다양한 콘텐츠가 없었을 뿐이었죠. 카메라, 메모리카드가 빠진 건 원가 때문이겠지만 다음 모델에 반드시 들어갈 거예요. 개인적으로 제가 만드는 플랫폼이 아이패드에도 그대로 들어갈 수 있어 더 좋아요. 모바일 웹 표준에 충실하게 만들었고 크기 변경도 가능하기 때문에 지원하는 플랫폼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죠."

 

"PC통신 시절 갑-을 관계, 이젠 안 통해요"

 

  
고윤환 캘커타커뮤니케이션 대표
ⓒ 김시연
고윤환

1991년부터 PC통신을 즐기다 1994년 아예 천리안에 들어가 IT업계에 발을 들인 고 대표는 지난 10여 년 IT 산업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도중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당시 유행하던 소호(소자본) 창업을 했다 쓴맛을 본 뒤 다시 LG인터넷에 들어가 채널아이, 심마니, 심파일 등 다양한 사업에 참여했다.

 

"1997년 회사를 그만두고 CP(콘텐츠 제공) 사업을 3년 정도 했어요. 그때는 20대 중반이라 아직 세상 모를 때였죠. 결국 다시 경영학과에 편입해 2년 공부하고 2006년 대학원에서 e비즈니스모델을 전공했어요. 다시 기초로 돌아가 기술과 마케팅, 지식과 삶의 경험을 정리한 거죠.  

 

콘텐츠로 돈 버는 CP는 전체의 4%에 불과해요. 최소한 인건비는 보장돼야 하는데 앱스토어처럼 개발자 대 유통업자 7대 3 배분은 드물어요. 아주 나쁜 관행이죠. 애플이 이런 관행을 시원하게 깬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CP가 이통사에 입점하려면 사전 접촉 과정만 3개월이에요. 옥션이나 G마켓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거죠."

 

고 대표는 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 '1인 창조기업인' 선정에 이어 서울지식센터 해외 특허권 지원을 받기도 했다. 고 대표가 해외 특허를 낸 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갈 '모바일 ASP(애플리케이션 서비스 제공자) 솔루션'이다. 이에 바탕을 둔 '모바일 심파일'은 현재 이통사와 앱스토어에 묶여 있는 무료 소프트웨어 유통 경로를 개방해서 사용자들이 정보 공유를 통해 나눠 쓸 수 있게 돕는 서비스다.

 

"저는 모바일 웹을 많은 사람들이 기획하길 바라고 모바일 웹 전도사가 되고 싶어요. 요즘 클라우딩 컴퓨팅(응용 프로그램은 자체 데스크톱이 아닌 외부 데이터센터에 두고 공유하는 기술)이 유행인데 앞으로 클라우딩 창업을 계속할 거예요. 창업자들끼리 서로 협력하면 그만큼 기회가 많이 생겨요. PC통신 시절 같으면 갑과 을 관계겠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와 러닝메이트가 돼야 하는데 갑-을 자체가 말이 안 되죠."

 

한국에서 아이폰-아이패드가 나올 수 없는 까닭

 

닌텐도나 애플에서 혁신적인 제품을 선보일 때마다 삼성, LG 같은 한국 기업들은 왜 그런 걸 못 만드느냐는 비판이 쏟아진다. IT 업계에선 한국은 하드웨어는 되는데 소프트웨어는 안 된다는 자조 섞인 얘기도 들린다. 고윤환 대표는 그 원인을 '사람'에서 찾는다. 

 

"어차피 사람이 만드는 건 똑같아요. 문제는 어디가 더 인간적이냐죠. 기술은 훔쳐도 사람 마음은 훔쳐가지 못하잖아요. 아이패드만 봐도 애플 CEO가 나와서 깔끔하게 가격 공개하잖아요. 몇몇 기능이 빠진 것은 499달러에 맞는 최상의 가치를 만든 거라고 봐요. 고객을 먼저 생각해 제품과 서비스가 나온 거죠. 삼성은 어떻죠? TV 신제품 내놓고 가격은 마트에 가서 물어봐라, 그런 식 아닌가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3D 지식노동자'로 전락하는 사회 분위기 역시 좋은 소프트웨어를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이날도 한 IT벤처기업 이사로 있는 개발자가 고 대표를 찾았는데, 월급이 두 자릿수라고 해 '88만 원 세대'냐고 농담 삼아 물었더니 '66만 원 이사'라고 하더란다.

 

"너무 비참해요. 자금 1억을 주무르는데 왜 내 지갑에 들어오는 돈은 없을까. 억대 연봉요? 지난 한 해 집행한 돈이 억대란 얘기지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은 없어요. 원고료나 강사료, 자문료 등 부수입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거죠."

 

열악한 수입 구조는 IT 인력을 떠나게 만든다. 특히 여성 인력 유출도 심각한 문제다. 캘커타 직원 6명 가운데 2명이 여성인데 뛰어난 실력을 갖고도 자녀 양육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 복귀한 경우다.

 

"결혼과 자녀 양육으로 여성 고급인력들을 썩히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바라는 건 높은 연봉이 아니라 일자리거든요. 지난 IT 10년 결과가 이런 거예요. 밤새 소프트웨어 만들다가 지쳐 업종을 바꾸거나 아예 일을 그만두고 경력을 썩히는 거죠."

 

'IT 벤처인의 하루'라는 애초 계획은 어느새 3시간짜리 전격 인터뷰가 돼 버렸다. 취재를 마친 기자에게 사무실에서 먹던 거라며 군것질거리를 쥐어주면서 덧붙인 말은 떠나는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10년 전 일본에 갔을 때 아키아바라에서 아이들이 쇼핑카트에 소프트웨어를 과자처럼 주워 담는 걸 보고 충격 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외산까진 아니어도 국산 소프트웨어만큼은 꼭 정품 사서 써요. 지난 10년 소프트웨어가 붕괴하고 대부분 SI(시스템 구축)로 넘어간 것도 이런 차이 때문이죠. 이제야 다시 시작하려니 버블도 생기는 거예요."

 

  
고윤환 대표에게 주어진 공간은 책상 2개가 들어갈 공간이 전부지만 그 뒤엔 든든한 후원자들이 버티고 있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