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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한 숙종, 깨방정 숙종... 숙종의 진짜 모습은?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동이>, 열한 번째 이야기
10.05.10 16:21 ㅣ최종 업데이트 10.05.10 16:21 김종성 (qqqkim2000)

4월 26일 제11부 때부터 전국 시청률 20%대(TNmS 집계 기준)를 돌파한 MBC 드라마 <동이>가 주는 색다른 재미 중 하나는 '숙종의 이미지 변신'이다.

 

종래 사극에 나온 숙종과 달리 <동이> 속의 '깨방정 숙종'은 밝고 경쾌한 이미지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따금씩 장난스러운 말투와 표정을 구사하는 숙종(지진희 분)은 궁녀들에게 손을 흔드는가 하면 동이(한효주 분)에게 등을 밟히기도 하는 등, 파격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MBC 드라마 <동이>에서 숙종역을 맡은 배우 지진희.
ⓒ MBC
숙종

어쩌면, 드라마 <동이>의 '숙종 이미지 바꾸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파격적으로 전개돼도 무방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기존의 숙종 이미지는, 엄밀히 말하면, 사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숙종의 이미지는 '궁중의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유약한 지아비'의 이미지다. 사실, 이런 이미지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악하고 시기심 많은 첩인 교씨에게 눈이 멀어 지혜로운 조강지처인 사씨를 내쫓았다가 나중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소설 속 유한림(유연수)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숙종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어 우리의 인식 속에 전해져 왔다. 

 

당연한 언급이지만,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다. 당시의 사실관계를 일정 정도 반영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만중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게다가 김만중(1637~1692년)은 46년간에 걸친 숙종(재위 1674~1720년)의 치세 중에서 그 절반도 안 되는 18년밖에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숙종이란 군주를 전체적으로 통찰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런 김만중이 남긴 소설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한 숙종

 

그렇다면 숙종의 올바른 이미지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사료에 드러난 객관적 상황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숙종이 과연 여인천하에 휘둘렸는가?'하는 문제에만 국한하여 숙종의 이미지를 탐색해보기로 하자.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이용했는지를 판단하고자 할 때 가장 과학적인 방법 중 하나는, 양쪽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어느 쪽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 최종적으로 생존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A가 "나는 B를 이용했다"고 주장할지라도 두 사람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B의 목적이 달성되었거나 혹은  B가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면, A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자부하든 간에 둘 중 상대방을 이용한 쪽은 B라고 해석하는 게 가장 객관적인 접근법이 될 것이다.

 

그럼, 숙종과 여인들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어느 쪽일까? 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어느 쪽일까?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1623년) 이후 51년간 조선의 여당은 기본적으로 서인 당파였다. 인조·효종·현종 시기에 서인이 만년 여당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숙종 즉위년인 1674년에 발생한 제2차 예송논쟁을 통해 남인 당파가 집권에 성공한 이후로 숙종 연간(1674~1720년)에는 집권여당이 수시로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1680년에는 경신대출척(경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부활했다가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남인정권이 기사회생하고, 1694년에는 갑술옥사로 서인정권이 되살아났다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면서 소론정권이 나타나고, 1710년에는 경인환국으로 노·소론 균형 국면이 조성되었다가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정권이 성립했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일종의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격한 대결의 와중에 어느 일당이 권력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한쪽이 너무 커지기 전에 다른 쪽에 힘을 실어주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당파에 대한 숙종의 태도'와 '처첩에 대한 숙종의 태도' 사이에 고도의 상호 연관성이 존재했다는 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서인 출신의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 것은 서인이 재집권(1680년)에 성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만약 남인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면, 인현왕후가 인경왕후의 뒤를 이어 1681년에 중전 자리를 차지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인 출신의 새로운 중전은 서인 정권의 부활과 함께 출현했던 것이다.

 

'챔피언' 장옥정의 자리를 불안하게 만든 숙종

 

  
숙종시대 여인천하의 세 주역. 왼쪽부터 최숙빈(한효주 분), 장희빈(이소연 분), 인현왕후(박하선 분).
ⓒ MBC
숙종

인현왕후가 중전이고 서인이 여당이던 시기에, 숙종은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옥정(장희빈)의 위상을 계속 높여주었다. 장옥정은 1686년에 종4품 숙원에 책봉되고 1688년에 정2품 소의로 승진한 데 이어 1689년 초에 정1품 빈으로 승격되었다. 서인과 인현왕후가 너무 세지지 못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숙종 쪽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1689년에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서인정권이 붕괴하면서 장옥정과 남인의 세상이 도래했지만, 숙종은 이번에는 장희빈에 맞설 대항마를 서서히 육성했다. <동이>의 주인공인 최 숙빈(숙빈 최씨)이 바로 그 대항마였다. 장옥정이 중전 자리에 있었던 시기에, 최 숙빈은 궁녀에서 후궁으로 뛰어올랐다.

 

인현왕후 대 장희빈의 대결구도로 전개되던 여인천하에 최 숙빈이라는 다크호스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전혀 의외의 인물을 등장시켜 여인천하를 복잡하게 만드는 한편 '챔피언' 장옥정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든 인물은 바로 숙종이었던 것이다.

 

1694년에는 인현왕후와 서인정권이 함께 복귀했고 이때 정계에서는 남인정권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장희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세 여인이 궐 내에서 공존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장희빈의 아들인 이윤(훗날 경종)이 무사히 왕위를 잇도록 하기 위한 숙종의 배려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한 인현왕후의 힘이 너무 커지지 않게 하는 것에 기여했다.

 

이런 조치는 결과적으로 서인과 인현왕후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종식된 1701년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당쟁과 여인천하가 상호 맞물려 돌아간 위의 과정을 보노라면, 숙종이 결코 여인천하에 휘둘린 유약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 여인이 '때때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숙종이 성취한 목적에 비할 것이 못 된다. 숙종은 처첩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 '매번' 당쟁의 균형을 조절하는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는가?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끝난 1701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숙종 27년(1701) 음력 8월 14일에 여인천하의 한 축인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최 숙빈은 "인현왕후 생전에 장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귀띔하여 장 희빈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물론 장 희빈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명분으로 음력 10월 8일에 장 희빈에게 자진(自盡)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여인천하의 세 주역 중 2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 숙빈이 여인천하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여인천하 안에서의 승리'에 불과했다. 인현왕후·장 희빈의 잇따른 죽음으로 최 숙빈에게도 중전을 노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장 희빈이 죽기 전날인 음력 10월 7일에 숙종이 "앞으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한다"는 왕명을 내림에 따라 최 숙빈이 혹시라도 품었을지 모르는 '왕후의 꿈'은 순식하게 허망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중전은 못 되더라도 최 숙빈이 그대로 대궐에 남아 있었더라면, 내명부는 최 숙빈의 '독재' 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을 경계해서였는지 숙종은 1702년에 내명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새로운 중전인 인원왕후를 맞아들인 데에 이어 세 명의 후궁을 승진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새로운 내명부는 인원왕후 밑에 김 영빈(영빈 김씨), 박 명빈(명빈 박씨), 유 소의(소의 유씨) 등이 포진하는 구도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 숙빈은 궐을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최 숙빈은 1701~1704년 사이에 숙종 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현왕후·장 희빈·최 숙빈 구도를 끝내고 인원왕후 중심의 새로운 내명부 체제를 만드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여인천하 종결서 드러난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가 종결을 향해 치닫던 1701년에 숙종이 취한 태도를 보노라면, 여인들의 파워가 자신의 파워를 능가하지 못하도록 항상 고심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인현왕후가 죽자 장 희빈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최 숙빈에게도 궐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숙종의 모습에서, 우리는 내명부의 그 어떤 여인도 절대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 했던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만약 숙종이 처첩들에게 휘둘리는 신세였다면, 여인천하가 종결되기 전에 그의 권력이 먼저 종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도리어 숙종은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런 숙종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숙종'이 아닌 '여인천하를 이용하는 숙종'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인천하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숙종의 모습.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는 <사씨남정기>가 만들어낸 숙종의 이미지가 역사적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겉으로는 남에게 휘둘리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영악한 군주'의 모습. 그것이 숙종의 진짜 이미지가 아닐까. 드라마 <동이>에서는 '깨방정 숙종'을 내세워 숙종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 각인된 숙종의 이미지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파격적으로 탈바꿈되어야 할지 모른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보스 장희빈'과 '행동대원 동이', '정치 감찰'에 맞짱?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동이>, 일곱 번째 이야기
10.04.26 12:48 ㅣ최종 업데이트 10.04.26 13:36 김종성 (qqqkim2000)

  
장옥정(장희빈, 이소연 분)과 동이(최숙빈, 한효주 분). MBC 드라마 <동이>.
ⓒ MBC
장희빈

요즘 MBC 드라마 <동이>에서 두 여인의 '훈훈한 의리'가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보스'인 장옥정(장희빈, 이소연 분)과 '행동대원' 동이(한효주 분)의 진한 의리가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에게까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드라마 속의 두 여인은 '친구' 아니 '조폭' 이상의 우정을 연출하고 있다.

 

동이가 '임신촉진제'를 민간 약방에서 구해 장옥정 처소에 몰래 반입한 직후에, 하필이면 중궁전(중전의 처소, 인현왕후전)의 탕약에서 독성 성분이 검출되어 궐이 발칵 뒤집힌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을 연상시키는 사건이다. 

 

설상가상으로, 동이가 약재를 구입한 그 약방의 의원마저 시체로 발견된다. 그 약재에 위험성분이 없으며 또 그 약재와 중궁전의 탕약이 무관함을 증언해줄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장옥정 측은 꼼짝없이 살인미수의 누명을 덮어쓰게 되었다.

 

이제, 온 대궐의 관심은 내명부 감찰부에 체포된 동이의 진술 한마디에 집중되었다. 정치적 중립성을 이미 상실한 감찰부는 "그 약재를 장옥정 처소에 갖다 주었다"는 동이의 진술만 확보하면, '그 약재가 유해한지 여부'와 '그 약재가 중궁전에 들어갔는지 여부'를 조사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장옥정에게 혐의를 덮어씌울 계획이었다.

 

설령 동이가 그 약재를 장옥정 측에 전달하지 않았더라도, 동이가 그렇게 했다고 진술만 하면 감찰부는 장옥정을 중전 살인미수범으로 몰아붙일 심산이었다. 감찰부는 전형적인 '정치 검찰'이었다.

 

'조폭' 이상의 의리를 보여준 장희빈과 동이

 

하지만, 감찰부의 불순한 의도는 두 여인 사이의 끈끈한 의리 때문에 결국 좌절되고 만다.

 

동이가 묵비권을 행사하며 감찰부가 원하는 그 한마디를 결코 실토하지 않는 가운데, 느닷없이 장옥정이 "저 아이는 돌려보내고 나를 조사하라"며 감찰부에 자진 출두했다. 동이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픈 의지가 장옥정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천것'에 불과한 자신을 위해 스스로 감찰부 조사실에 들어간 '보스'의 의리에 보답하고자, 동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포도청 시신 보관실로 잠입해 죽은 의원의 사체에서 무죄의 증거를 채취해내는 대담성을 발휘한다.

 

검찰은 물증을 확보해서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할 책임을 부담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정치 검찰'은 도리어 피고인에게 무죄의 증거를 요구한다. 여느 경우 같았으면 장옥정과 동이도 감찰부가 깔아놓은 덫에 빠졌겠지만, 두 여인의 의리가 원동력이 되어 결국 동이가 무죄의 증거를 찾아내는 성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천민 출신의 궁녀에서 정1품 후궁으로 수직상승하고 영조라는 걸출한 임금을 길러낸 최숙빈(숙빈 최씨, '동이'는 실명 아님)의 일대기를 묘사하고 있는 드라마 <동이>는, 위와 같이 최숙빈의 정치적 성장에 도움을 준 핵심요소로서 최 숙빈과 장 희빈 사이의 '조폭 이상의 의리'를 설정했다.

 

'서민 출신'이라는 두 여인의 공통점 때문에, 드라마 속의 그런 설정이 꽤 그럴싸하게 보인다. 어찌 생각하면, 그런 설정이 있어야만 훗날 발생할 두 여인의 정면충돌이 보다 더 드라마틱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이> 홈페이지의 '기획의도' 코너에서 천명된 바와 같이, 이 드라마의 기본취지는 '가장 밑'에서 '가장 위'로 올라간 한 여인의 성공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 숙빈의 생을 움직인 원동력이라든가 그의 정치적 성장을 일궈낸 핵심요소와 관련하여서는, 어느 정도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100%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드라마가 될 경우, 시청자들은 최 숙빈의 삶으로부터 아무 교훈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문록>으로 본 동이와 장 희빈 실제 관계

 

  
이문정의 <수문록>.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수문록

 

그렇다면, 장 희빈과의 관계가 최 숙빈의 삶에서 차지한 위치는 어떠했을까? 두 여인의 실제 관계는 어떠했을까?

 

장 희빈의 아들인 경종의 치세를 주로 정리한 기록물 중에 이문정(1656~1726년)의 <수문록>이란 책이 있다. 일종의 정치평론서인 이 책에는, 최 숙빈과 장 희빈이 어떤 인연으로 맺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담겨 있다.

 

이 일화는 두 여인의 남편인 숙종 임금의 낮잠으로부터 시작한다. 음력 기준으로 숙종 19년(1693) 연초의 이야기다.

 

"선대왕(先大王)이 베개에 기대어 조는 사이에, 홀연히 꿈에서 신룡(神龍)이 땅속에서 나오고자 하되 나오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머리 뿔을 드러내고는, 울며 선대왕에게 말하기를 '전하, 속히 저를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여기서 '선대왕'은 숙종을 가리킨다. 숙종 사후에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숙종의 꿈에 나온 '신룡'은 태아를, '땅속'은 여인의 몸을 상징한다.

신룡이 땅속에 갇혀 울부짖는 꿈에 놀란 숙종은 얼른 눈을 떴다. 누군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아이가 뱃속에서 위급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라는 직감이 숙종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땅속'은 장옥정이었다. 당시 장옥정이 중전 자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두 차례나 아들을 낳은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장옥정의 둘째 아들은 생후 10일 만에 사망했고, 당시에는 장남인 세자 이윤(훗날의 경종)만 생존해 있었다.

 

'옥정이 세 번째 아들을 낳았나?'라는 궁금증이 생긴 숙종은 중궁전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는 다른 여인의 몸속에 자기 아들이 생겼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왜 숙빈은 큰 독 안에 결박돼 있었을까

 

중궁전에 도착해서 장옥정의 모습을 뜯어봤지만, 그에게서는 임신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숙종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담장 밑에 있는 큰 독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독이 엎어진 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저 독은 어째서 거꾸로 세워두었느냐?"

"빈 독은 본래 거꾸로 세워둡니다."

 

중전 장옥정이 그렇게 대답했지만, 숙종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환관에게 독을 똑바로 세워보라고 지시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이 벌어졌다고 <수문록>은 전하고 있다.

 

"그 속에서 결박당한 여인이 나타났다. 선대왕이 크게 놀라 살펴보니, 얼마 전 밤에 가까이 했던 나인(궁녀)이었다."

 

독 안에 결박돼 있던 여인은 다름 아닌 궁녀 최씨(훗날의 최숙빈)였다. 임신의 주인공은 장옥정이 아니라 최씨였던 것이다.

 

얼마 전에 한밤중에 우연히 만난 숙종과 궁녀 최씨가 급속히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최씨의 배가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숙종은 궁녀 최씨가 임신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의 몸에 태기가 있다는 첩보를 누구보다 빨리 입수한 쪽은 장옥정이었다. 그래서 장옥정이 문제의 궁녀를 불러다놓고 체벌을 가하던 중에 숙종이 갑자기 들이닥쳤던 것이다. 체벌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최씨의 아이는 '땅속'에 영원히 갇혀버렸을 것이다. 아버지인 숙종의 꿈에 나타나 "살려달라!"고 애원한 신룡은 바로 그 아이였던 셈이다.

 

최 숙빈 성공의 원동력은 장 희빈에 대한 원한

 

  
드라마 <동이>.
ⓒ MBC
동이

 

이 일화가 최숙빈과 장희빈의 첫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그러하다. '인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악연'이라고 표현해야 더 정확하다.

 

<수문록>에 담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최 숙빈과 장 희빈은 처음부터 악연으로 뭉친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첫 단추부터 원한으로 맺어진 사람들이었다.

 

특히 최 숙빈의 입장에서, 장 희빈이란 여인은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원수였다. 자신의 아이를 죽이려 한 장 희빈에게 최 숙빈이 어떤 마음을 품었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런 악연이 계기가 되어 그들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치열한 싸움을 전개한다. 이때 생긴 원한이 계기가 되어, 훗날 최 숙빈은 장 희빈이 사약을 받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최 숙빈은 비약적인 신분상승의 주인공이 된다. 

 

처음부터 악연으로 똘똘 뭉친 두 여인의 실제 관계를 살펴보면, 끈끈한 의리로 뭉쳐진 드라마 <동이> 속 두 여인의 관계가 역사적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실제의 두 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물고 뜯는 관계였던 것이다.

 

<동이>는 어차피 픽션이므로, 역사서나 논문처럼 사료에 완전히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픽션일지라도 실존 인물을 다룬 픽션에서는 그 인물과 관련된 핵심부분에서만큼은 사료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최 숙빈의 출세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 중 하나는 장 희빈과의 악연이었다. 이런 악연이 원동력이 되어 최숙빈은 '걸어서 하늘까지' 출세한 성공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 숙빈과 장 희빈의 끈끈한 의리'라고 하는 <동이>의 설정으로는 최 숙빈의 성공요인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장 희빈에 대한 원한이 최 숙빈의 성공을 만들어낸 원동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인 키포인트를 잘못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 <동이>는 '절반의 실패'를 안고 출발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동이>, 여섯 번째 이야기
10.04.20 16:54 ㅣ최종 업데이트 10.04.20 22:01 김종성 (qqqkim2000)

  
MBC 드라마 <동이>.
ⓒ MBC
동이

죄인의 딸임을 숨기려고 '최동이(한효주 분)' 대신 '천동이'라는 가명으로 장악원 노비 생활을 하고 있는 동이. 어쩌다 요행히 장 상궁(장옥정·장희빈, 이소연 분)과 끈이 닿는가 싶더니, 요즘 동이에게는 계속해서 시련의 연속뿐이다.

 

장옥정 모친의 지시로 민간 약방에서 약재를 구해 장옥정 처소에 몰래 반입한 동이. 하필 그 약방의 의원이 피살되는 바람에, 동이는 처음에는 참고인 신분으로 포도청에 끌려갔다가 나중에는 피의자 신분으로 내명부 감찰부에 체포돼 한바탕 고초를 겪는다.

 

이런 가운데, 동이의 실체를 추적하는 한 남자가 있다. 1980년대 KBS 인기 드라마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에서 헐크인 데이비드 배너 박사의 실체를 추적하는 신문기자 잭 맥기처럼, 동이의 실체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인물은 포도청 종사관 서용기(정진영 분). 지금 눈앞에 있는 천동이가 혹 죄인의 딸인 최동이 아닐까 하고 그는 끊임없이 동이의 뒤를 캐고 있다.

 

이상은 19일에 방영된 MBC 드라마 <동이>(매주 월화 오후 10시 방송) 9부의 주요 내용이다.

 

드라마 속 서용기가 궁금해 하는 동이, 아니 최 숙빈(숙빈 최씨)의 실체. 그 실체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했을 한 인물이 있다. 그것도, 그냥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뼈저리게'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했을 한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최 숙빈의 아들인 영조 임금이다. 천민 출신으로서 숙종의 후궁이 되어 왕자인 자신을 낳은 어머니의 실체에 대해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뼈저리게 생각하고 더 뼈저리게 고민했을 것이다. 

 

영조는 어머니 때문에 콤플렉스 느꼈을까

 

  
51세 당시의 영조.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영조

잘 알려졌듯이,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평생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았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오해처럼 최숙빈이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 숙빈은 적어도 공노비 출신으로서 하급 궁녀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여인이다.

 

조선에서 가장 높은 지존이 조선에서 가장 낮은 노비 출신을 어머니로 두었으니, 그가 그 때문에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물론 천민 출신의 어머니를 그 누구보다도 애절하게 사랑했겠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그로 인해 자신이 곤란해질 때마다 영조는 분하고 답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영조는 어머니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라고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만약 구체적인 자료를 놓고 살펴본다면, 우리는 영조가 그런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한층 더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는 역대 조선 왕모(王母)들의 신분 혹은 지위에 관한 기록이다. 영조 때까지의 역대 왕모들의 신분·지위를 살펴보면, 영조가 최 숙빈의 신분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영조는 자기 이전 역대 국왕의 왕모들과 자기 어머니를 비교해본 다음에 그런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영조 때까지의 역대 왕모들을 비교해보면, 영조의 어머니가 여러 가지 '종목'에서 단연 '꼴찌 다관왕'이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여기서는 그중 2가지 종목만 살펴보기로 하자.

 

광해군·경종 어머니와 같은 처지였던 최 숙빈

 

먼저, 후궁 책봉 당시의 신분.

 

영조 즉위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후궁 출신의 역대 왕모로는 제10대 연산군의 어머니인 제헌왕후 윤씨(폐비 윤씨), 제11대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 제12대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 제15대 광해군의 어머니인 김 공빈(공빈 김씨), 제20대 경종의 어머니인 장 희빈(희빈 장씨), 제21대 영조의 어머니인 최 숙빈을 들 수 있다.

 

제6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 역시 후궁과 다름없는 '세자의 첩' 출신이므로, 넓게 보면 그도 후궁의 범주에 포함된다. 현덕왕후까지 합하면, 후궁 출신 왕모는 모두 7명이다.

 

이들의 후궁 책봉 당시의 신분을 가르는 기준은 간택 여부다. 간택을 통해 후궁이 되는 것과 궁녀에서 곧바로 후궁이 되는 것은 서로 크게 다른 일이었다. 왜냐하면, 간택을 통해 후궁이 되었다는 것은 양반가문의 여식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7명 중에서 광해군·경종·영조의 어머니는 간택을 거치지 않고 궁녀에서 곧바로 후궁이 된 여인들이다. '궁녀는 중앙관청 소속의 공노비 중에서 선발한다'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었으므로, 궁녀에서 곧바로 후궁이 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사회 최하층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후궁 책봉 당시의 신분을 기준으로 하면, 영조의 어머니가 광해군·경종의 어머니와 같은 처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광해군·경종과 함께 이 종목에서 '공동 최하위'를 기록한 셈이다.

 

왕후 못 된 이는 하동부대부인과 최 숙빈 뿐

 

다음으로, 왕후 책봉 여부.

 

영조 즉위 시점까지, 왕후로서 생을 마친 여인은 제2대 정종 및 제3대 태종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와 제4대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를 포함해서 모두 11명이었다.

 

한편, 본래 왕후가 아니었지만 나중에 왕후에 추존된 여인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와 제9대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와 제16대 인조의 어머니인 인원왕후 구씨다.

 

이제, 왕후도 추존 왕후도 아닌 상태에서 생을 마감한 여인은 네 명이다. 제14대 선조의 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광해군의 어머니인 김 공빈, 경종의 어머니인 장 희빈, 영조의 어머니인 최 숙빈.

 

그럼, 이 네 명이 공동 최하위일까? 그렇지는 않다.

 

위에서 김 공빈과 장 희빈은 나머지 두 여인과 구별돼야 한다. 김 공빈은 광해군 즉위 이후 왕후로 추존되었다가 인조 쿠데타(인조반정)로 인해 후궁으로 격하된 여인이다. 장희빈은 숙종 때에 왕후에 올랐다가 정1품 희빈으로 도로 내려온 여인이다. 이들은 한때나마 추존 왕후 혹은 왕후였다는 점에서 하동부대부인이나 최 숙빈과는 처지가 달랐다.

 

따라서 단 한 번도 어떤 형태로든 왕후가 되지 못한 여인은 선조의 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과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 둘뿐이다. 선조와 영조는 이 종목에서 '공동 최하위'를 기록한 셈이다. 이번에도 영조는 '공동 최하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광해군사친추숭도감의궤>. 광해군의 어머니인 김공빈을 왕후로 추존한 일에 관한 기록.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김공빈

위와 같이 영조의 어머니는 '후궁 책봉 당시의 신분'과 '왕후 책봉 여부'라는 측면에서 '꼴찌 2관왕'을 기록했다. 만약 다른 종목까지 추가할 경우, 최 숙빈의 '꼴찌 왕관'은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영조는 자기 이전의 역대 국왕들과 비교할 때에 어느 모로 보나 가장 미천한 어머니를 둔 임금이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가장 미천한 왕모를 두었다는 점에서 영조는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인물이다. 

 

천동이가 혹시 최동이가 아닐까 하며 그의 실체를 바싹 추적하는 드라마 속의 서용기보다도 더욱 더 적극적으로 최 숙빈의 실체를 추적했을 영조 임금.

 

사춘기 시절의 영조 이금은 여기에 소개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종목을 놓고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면서 자기 어머니의 위상을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우리 어머니는 얼굴이 괜찮고 머리가 영리하며 성격이 원만하다는 몇 가지 외에는 정말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분이었구나'하고 한탄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콤플렉스를 안고 왕위에 오른 영조가 귀족세력인 노론 집권당의 틈바구니 속에서 얼마나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Posted by 전충헌 전충헌